성서적 언약신학 제 8 장 바울과 새언약
 모든 기독교 신학의 고전적인 주제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미 요한복음이 이 둘의 관계를 제시하였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요한은 같은 하나님의 이 두 계시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히 배타적인 대립으로 설정하기를 원하였는가? 교회 역사에서 이 문제에 대해 극단적인 입장은 있어 왔다. 율법과 은혜의 조화로운 상호성을 말하는 구절들은 무시하고, 한쪽 면만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 본문들을 골라서 사용하였다.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모세를 대체하였고, 그 결과 율법과 선지자는 더 이상 필요가 없으며, 이제 그리스도께서 가져 온 그 목적을 위한다고 가르치는가?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들을 위해 구원의 길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바꾸셨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한 삶의 지침으로서의 도덕법을 폐지하는가? (130.1)
 구약학의 존재를 의식하는 자들은 구약이 율법 준수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의 형식주의에 대해 책망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아이히로트(Eichrodt), 폰 라트(von Rad), 브라이트(Bright), 프리젠(Vriezen), 요츠(Jocz), 카이저(Kaiser), 페인(Payne), 하젤(Hasel) 등등의 대표적인 구약학자들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 ‘새 언약’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이 구약을 통해 설명되고, 예증되고, 경험된 것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신약은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나님이 수많은 옛 성도들을 그들의 신뢰하는 믿음과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한 것에 대해 칭찬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언약을 균형지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구약 둘 다 필수적이다. (130.2)
 성서학자들은 구약과 신약이란 용어를 성경을 가리키는 데 사용 하지 않으며, 사도적 권위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편의상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구별된 시기를 칭하기 위해 3세기의 교부인 터툴리안(Tertulian)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다.1 하나님의 언약을 그렇게 나눔으로써 두 성경의 본질에 대한 광범위한 오해가 퍼지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구약의 책들은 율법서이거나 혹은 그리스도에 이르는 “몽학 선생”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131.1)
 로퍼(David H. Roper)는 이 문제를 유려하게 표현하였다. “이 전체 문제의 핵심은 마치 신구약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구약과 율법에 대한 잘못된 평가이다. 율법과 은혜를 서로의 원칙을 반대하는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이다.”2 구약에 대한 이런 오해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과 은혜를 두 분리된 연속적인 기간 혹은 세대, 즉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오직 율법이 교회를 위해서는 오직 은혜가 있다고 구분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이러한 대립적 구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 “율법”이 지배하던 때와 십자가 이후 “은혜”가 지배하는 때로 그려 볼 수 있다. (131.2)
 
 그러나 고전적인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는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길을 나란히 달리는 하나님의 속성과 계시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바커(Kenneth L. Barker)와 같은 몇몇 세대주의 학자들마저도 “우리는 너무 많이 나누었다”고 하며, 구약과 신약에 대해 “잘못된 이분법”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한다.3 (132.1)
  (132.2)
 위에 두 그림은 상반되는 신학적 견해들에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슈들을 보여준다. 이제 바울 자신의 저술에서 “율법과 은혜”에 대한 그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132.3)
 율법과 은혜에 대한 바울의 신학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도덕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율법에 대한 그의 논쟁적 주장은 그의 바리새 인적 배경, 특히 이전에 그가 율법에 대해 가졌던 열정의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빌립보 사람들에게 자신이 “히브리인 중의 히 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5-6)라고 증언하였다. (132.4)
 영국의 신약학자 크랜필드(C. E. B. Cranfield)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빛을 던져 주었다. “바울 시대 헬라어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율법주의’에 해당하는 단어 군(群)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선명히 하는 작업에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다.”4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그가 “율법에서 난 의”(빌 3:9)를 찾고 있었다고 설명하고자 한다. 그는 율법의 의를 향한 자신의 바리새인적 열정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9절)를 받는 것을 예리하게 대조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주의적 의를 얻고자 했던 자신의 노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율법을 비난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의 바리새인으로서의 전통이 율법에 대한 근본적인 오용(misuse)에 기여를 했는가? (133.1)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바울은 율법에 대해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 진술을 하고 있다. 한 장 안에서 그는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롬 7:6)다고 하며, 동시에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14)고 하였다. 분명히 바울은 그가 이전에 율법에 매였던 것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율법이 그를 향해 죽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율법을 향해 죽었다고 고백한다. (133.2)
 그는 이 점에 대해 좀 더 언급한다. “그런즉 선한 것하나님의 율법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7:13). 여기서 우리는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는 바울의 분명한 선언을 접하게 된다. 진실로 자신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그 죄로 가득한 상태에 대해 일깨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죗 자아이다(롬 3:20). (133.3)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된 처지를 안식하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본다(약 1:23-24도 참조). 바울은 율법의 영적인 목적에 대해 분명하게 밝힌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목적은 우리가 그 계명을 범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의 기능이었다. 즉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함을 좀 더 온전하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134.1)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해 더 진전시킨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134.2)
 특별히 바울은 십계명의 도덕법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그는 열 번째 계명(롬 7:7)과 다른 몇 가지를(13:9)를 인용한다. 그러나 도덕법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는지 여부의 온도계로 사용 하는 것은 율법에 대한 심각한 오용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칭의를 위한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에 대한 필요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은 죄가 하나님의 법을 거절하는 것과 꼭 같다. (134.3)
 바울은 또한 “율법”이란 용어를 로마서 3:21에서처럼 모세의 토라라는 좀 더 넓은 개념에서 사용한다. 거기서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를 언급한다. 바울은 모세의(율법 전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하는 은혜의 복음을 위한 준비로 간주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고 하였다. 예루살렘 성경(Jerusalem Bible)은 이 구절을 “그러나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성취를 발견하여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134.4)
 신약학자 배드나스(Robert Badenas)는 그의 박사학위논문 그리스도: 율법의 마침(Christ: The End of the Law)5에서 바울이 로마서 10:4에서 노모스(nomos, 율법)란 단어를 토라 즉 성경이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구약을 그리스도에 의하여 폐기된 어떤 ‘오래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그 자체적으로 진실하고, 유효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6 간주하는 것이다. 바울은 구약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성취요. 절정이다.”7 (135.1)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바울의 믿음은 그에게 그리스도가 새로운 해석학의 열쇠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토라를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읽었다. 그는 더 이상 율법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수단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존경이 토라에 대한 그의 존경을 넘어섰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토라를 초월한다는 것이 바울이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그들은 그것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을 보지 않았다(10:4).”8 (135.2)
 로마서 10:4은 그리스도와 율법의 관계에 관한 바울 신학의 근본적인 이론 중의 하나라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9 바울은 그의 당대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을 오해하였다는 것을 그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 굴복치 않았기”(10:3)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토라의 목적은 처음부터 “믿음으로 얻는 의”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세의 책인 신명기를 인용한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신 30:14 인용). (1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