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적 언약신학 제 10 장 바울 언약 신학의 완성: 로마서 9-11장
 바울은 이 신비한 관계를 미래의 관점에서 묘사한다. 그는 그것을 불확실한 미래로 연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자기 시대(세 번 “이제”라고 한다. 역자주, 개역 한글에는 두 번 나타난다)의 희망과 책임의 창으로 제시한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 로다”(롬 11:30-32). (175.2)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보이실 때마다 이방인에게로 확대하셨다. 그러나 또한 그는 이방인에게 긍휼을 보이실 때마다 이스라엘에게로 확대하셨다. 창조주의 보편적인 구속 계획을 묘사하면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구원의 놀라운 상호 의존성을 전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긍휼의 상호의존성에서 바울은 진정한 신정론 즉 그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깨닫는다. 로마서 11장에 대하여 다른 곳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175.3)
바울은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에 대한 놀라운 조망을 공개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이스라엘로부터 이방인에게 흘러들어서 “모든”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이 즐거워하는 그 같은 자비를 갈망하여 일어날 것이다. 바울의 관점에서는 이스라엘이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타락한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롬 11:11).14
(176.1)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이제 이스라엘의 겸손한 메시아를 통해 구원에 이끌림을 받는다. 라이트(N. T. Wright)는 로마서 11장을 인상 깊게 설명하였다. (176.2)
31절">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버림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았다. 그래서 세계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초청을 받았다 ∙∙∙ . 만일 이스라엘이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의 백성이라면 그 나라는 또한 새 삶을 향해 일어 날 수 있다. ∙∙∙ 모든 이들은 죽음과 부활의 길로 인해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돌아오게 되는 그 길이(31절) “긍휼”로 인한 것이다. 다른 말로, 시기어린 관찰과 경쟁의 과정에 의한 것이다 ∙∙∙ .이러한 과정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15
(176.3)
 “온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바울의 희망
 사도는 마침내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롬 11:26)라는 이 희망에 이른다. 바울은 이 언약의 희망을 확증하기 위해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약속을 인용한다(사 59:20; 27:9; 렘 31:34).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6),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롬 11:27). (176.4)
 이 언약의 약속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죄”“경건치 않음”에서 구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스라엘이 지금과 미래에 받게 될 것은 선지자들이 약속한 대로 새 언약의 영적 축복인 “용서,” 마음의 정결함, 그리고 성령의 선물이다. 이것들은 분명히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메시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는 복음의 축복이니 첫째는 유대인들에게요. 그 다음은 이방인들에게이다(행 2:38-39; 롬 1:16). (177.1)
 바울에게 “온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여전히 그들의 죄와 불신으로부터 건져내는 신앙적 구원이다. 바울은 이스라엘 땅에서의 국가적 재건이나 지상의 다윗 왕국이나 신정의 회복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죄로부터 벗어나는 “온 이스라엘”의 구원에만 집중하였다. 리더보스가 그것을 잘 성명하였다. “그의 심원한 논법의 주요 관점은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택으로서의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계속성에 관한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국가적 자연적 관점이 아니라 영적인 관점이다.”16 (177.2)
 그러면 바울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러 오는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를 어떻게 보았는가? “그리하여[kai houtôs,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6). 그러나 바울은 “그리하여”로 무엇을 의미하였는가? 바로 앞 문장이 여기에 대해 빛을 던져 준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 바울은 구원의 한 가지 길을 보고 있다. 그 길 안에서 이방인이 구원으로 나아오고 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 (177.3)
 아직도 불신으로 “완악한” 자연적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관점은 여전히 많은 충만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소망하고 확신하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이스라엘의 더러가 완악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말이나 심판이 아니다. (178.1)
 바울은 이미 이스라엘의 더러가 “완악해진 것”이 이방인을 위한 축복이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스라엘의 불신 때문에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롬 11:11)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는 여전히 불신의 이스라엘을 포함하고 있다.(11:12, 15, 31 참조). (178.2)
 그러면 바울이 자기 시대에 오직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 보존 되어 있을 때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은 자”라는 개념 자체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미래에도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였는가? 바울은 이스라엘과 교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그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그분 자신의 신실하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시다는 확실성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의 본질이다. 버카워가 이 더 큰 개념을 설명한다. (178.3)
바울은 이 변함없는 신실하심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단 한 마디도 쓸 수가 없다. 로마서 9-11장에 나타난 그의 전체 사상의 맥락은 이것으로 결정된다 ∙∙∙ . 바울은 이스라엘 불신의 난제에 관심을 기울인만큼 하나님의 실제적인 신실하심에 관심을 기울인다 ∙∙∙ .그를 사로잡은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롬 9:2)이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할 수 없다는 그의 확신을 위협할 수 없다.17
(178.4)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를 패러독스처럼 표현한다.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롬 11:28). 사도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후회함이 없는” 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신 7:7-9 참조). 그리고 그것을 현재는 불충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이스라엘에게 적용하였다. (178.5)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그의 헤아릴 수 없는 긍휼과 인내 속에 이 “완고한 백성”에게 나아가실 것인가? 이스라엘이 그들의 선택에 계속 불충하면 희망이 없는가? 바르트(Karl Barth)는 불신의 이스라엘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징조”가 된다고 하였다. “유대인들 속에서 우리 모두가 관여한 근본적인 반역, 불신, 그리고 불순종이 나타나 있다.”18 (179.1)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 사랑, 그리고 선택을 강조한다. 그는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롬 11:13-14)고 하였다. 리더보스는 로마서 11장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의 신비한 상호관계를 파악하였다. (179.2)
 처음에는 은혜의 시내가(불신의) 이스라엘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흘렀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신실한 이방인들로부터 불신의 아스라엘로 돌아와야만 한다. 이스라엘을 채우기 위해 이방인의 시기함이 와야만 한다(11절). 이방인을 향한 이방인에 의한 복음 선포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다(14절). 그리고 불신을 고집하지 않도록 그들을 움직일 것이다(22 절). 그리고 이방인에게 보여준 긍휼로 이제는 그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차례가 될 것이다(31절).19 (179.3)
 비록 사도가 이 상호관계를 언급하기 시작했지만, 이것이 보편적 차원에서 성취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요엘이 예언한 “나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라”(욜 2:28)는 예언의 좀 더 큰 성취로서 세계적인 스케일로 오순절이 극적으로 반복되리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이 늦은 비 성령이 오시면,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는”(계 18:1) 마지막 때에 관한 요한의 계시가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엘의 약속에 대한 화잇의 표상학적 적용에 동의하게 된다. “복음의 위대한 사업은 그 개막을 알린 하나님의 권능이 보다 작게 나타나는 것으로 마치지 않는다. 복음이 시작될 때 이른 비의 부으심으로 성취된 예언은 그것이 마칠 때 늦은 비로 다시 성취될 것이다.”20 (179.4)
 혹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함께 토라를 폐기하 셨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2세기의 마르시온(Marcion)의 견해이다. 그는 히브리 성경을 급수가 낮은 “조물주 신”21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하여 거절하였다. 히브리 성경을 부인하는 온건한 형태로 나타나긴 했지만 그런 신학이 반 셈족주의의 치명적인 씨를 뿌렸다. 라이트는 유대인 대학살 이후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대화에서 주장한 반대편의 극단적인 견해에 대해 우리를 환기시켜 준다.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