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곱 나팔 사건과 마지막 칠 재앙은 동일한 것인가?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도표를 통해 설명할 때 우리는 위의 두 사건 사이의 일부 유사성을 눈여겨 본 바 있다. 일부 독자들은 그같은 유사성에 영향을 받고 위의 두 사건을 동일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같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일곱 나팔과 일곱 재앙은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 최소한 다음의 네 가지 사항에 있어서 중대한 차이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259.1)
 (1) 재앙을 받는 지역의 범위:나팔의 경우에는 관련 지역의 상징적 “삼분의 일”이 재앙을 받고 있다(계 8:7~12). 그런데 일곱 재앙의 경우, 그같은 제한이 없다. (259.2)
 (2) 관련된 기간:나팔들과 관련된 기간들은 “다섯 달”, “마흔 두 달” 등 비교적 긴 기간들인데(계 9:5, 15; 11: 2, 11), 일곱 재앙은 “하루” 또는 “한 시간” 안에 쏟아지고 있다(계 18:8, 10). (259.3)
 (3) 성소와의 관계:나팔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성소 장면은 중보(仲保)의 봉사를 아직도 진행 중인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천사가 향을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 있다(계 8:2~5). 그런데 일곱 재앙을 소개하고 있는 장면에서는 성소가 이미 폐쇄되어 어느 누구도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게 되었다(계 15:5-8). (259.4)
 (4) 교차 대구(Chiasm)상의 위치: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설명한 도표에서 나팔 사건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교차 대구상 전반부에 속하는 역사적 서술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반면 칠 재앙 사건은 마지막 때의 종말론적 서술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259.5)
 이상과 같은 논거를 가지고 생각할 때 일곱 재앙은 지금보다도 더 미래에 속하는 사건이라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일곱 재앙은 인간의 집행 유예가 종료되는 직후의 짧은 기간에 발생할 것이며 곧 이어 주의 재림이 닥칠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인간의 집행 유예가 끝나면 더 이상 회개가 불가능해 질 것이다. (259.6)
 그런데 나팔들은 사도 요한의 시대 이래로 계속 울려온 바 되었다. 이 나팔들은, 아직도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을 때 우리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선포되어 온 사랑의 경고들이다.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 사랑의 경고 나팔들에 대해 적절히 응답한다면 마지막 일곱 재앙의 형벌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5, 16 장에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259.7)
 2. “년, 월, 일, 시”란 무엇인가?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영어 흠정역 성경의 여섯째 나팔에 관한 기사에서는 “년, 월, 일, 시”를 한꺼번에 가산할 성질의 것 즉 391년의 기간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남게 된다. 하나는 흠정역 번역이 옳바른 번역이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259.8)
 먼저 “시”의 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주지하는 바대로 한 시간은 하루의 이십 사 분의 일이다. 따라서 어떤 독자들은 문제의 “시”를 일년의 이십 사 분의 일 즘 15 일로 해석한다. 그렇게 되면 “년, 월, 일, 시”의 총합은 391년 15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밖에 또 하나의 매혹적인 해석이 있다. (259.9)
 요한계시록 14장 6, 7절에서는 한 천사가 “시간” 이란 용어를 최후의 심판을 뜻하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 이란 말로 사용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최종 심판의 기간이 최소한 1,000 년에 걸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391년은 나팔 심판의 하나에 관련된 것이므로 요한계시록 9장 15절에 나오는 “년, 월, 일, 시”“시”는 391년에 걸친 또 하나의 “심판의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260.1)
 그러면 근대 영어 번역 성경들에서는 문제의 구절이 어떻게 번역되었는가? 영어 개역 성경(R. S. V.)에서는 위의 구절이 “이 시, 이 날, 이 달, 이 해”(for the hour, the day, the month, and the year)로 번역되어 있다. 이 번역에서는 년, 월, 일, 시가 심판의 일정 기간이란 의미보다는 어떤 시점(時點)의 의미로 나타나 있다. 현대 영어 번역 성경(T.E.V)에는 한술 더 떠서 “바로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라고 번역되어 있다. 희랍어 원어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희랍어 원문에는 위의 구절이 평이하고 간명하게 “정해진 년, 월, 일, 시”(for the hour, and day, and month, and year)로, 즉 “시” 앞에만 정관사가 붙어 있는 형태로 기술되어 있다. 이와같이 희랍어 원문에는 “바로 이 시간” 또는 “바로 이 날” 또는 “바로 이 달” 이란 암시가 없다. 그리고 최초의 영어 번역 성경들이 현대 번역들보다 요한의 원 진술에 더 충실했다. 1525년의 틴데일 번역 성경에서는 “한 시 동안, 한 날 동안, 한 달 동안, 한 해 동안”(for an houre, for a daye, for a moneth, and for a yeare)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리고 “한 시, 한 날, 한 달, 그리고 한 해 동안”(for an houre, and a day, and a moneth, and a yeere)이라고 번역한 1611년의 흠정역 번역이 가장 가까운 번역이었다. (260.2)
 391년에 걸친 심판의 “시간”으로 생각하려는 성경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즉

 (1) 희랍어 원문에는 “시” 앞에만 정관사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시간 개념들과 구별하고 있다. 그리하여 “년, 월, 일”은 평상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할 지라도 “시”만은 “심판의 시간”을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신약 성경 시대에는 “그리고”(and)라는 단어가 설명적 보조어로 사용되는 것이 관례였다. 예컨데 고린도전서 15장 38절에서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신다. 그리고(여기서는 즉이라는 뜻인데 한글 성경에서는 앞의 문장과 연결하여 주시되로 되어 있다.)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260.3)
 위의 사실에 비추어 문제의 구절인 요한계시록 9장 15절을 번역한다면 “그 시간 동안 즉 년, 월, 일 동안”이라고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시”를 심판의 시간으로 해 석한다면 “심판의 시간 동안, 즉 391년 기간을 상징하는 년, 월, 일에 걸친 심판의 기간에” 라고 고쳐쓸 수 있을 것이다. (260.4)
 3. 391년 기간을 표시하는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가?
 하나님은 여섯째 나팔을 요한에게 보여 주실 때 391년 기간의 시작과 끝을 어느 때로 정하셨을까? (260.5)
 앞에서 우리는 비잔틴 제국이 멸망당한 1453년부터 성경상 가장 긴 예언인 2,300년 예언 기간의 끝인 1844년까지가 정확히 391년이 된다는 사실을 주목했었다. 그리고 1453년과 1844년 무렵에 일련의 중요한 사건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 그리고 1453년경에 오토만 투르크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에게 위협적인 강력한 세력으로 발전했으나 1840년 대 중반에 이르러40 서는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지원 없이는 명맥을 유지할 수 없으리만큼 쇠약해진 사실도 함께 지적한 바 있다. (260.6)
 391년 기간의 시작에 가까운 1451년에 정복왕 모하메드 2세로 호칭되는 한 술탄이 제위에 올랐다. (260.7)
 

정복왕 모하메드 2세(1451~1481)는 391년이 시작되는 해에 즉위했다. 슐레이만(1520~1556)은 카알 5세를 대적하였다. 마흐무드 2세(1808~1839)는 391년이 끝나는 해까지 통치하였고 압둘메시드 1세(1839~1861)는 391년이 끝나는 해에 통치하기 시작했다.
(2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