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두 증인)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는 요한계시록 11장 10절의 말씀은 너무나 슬프고도 어처구니 없게 성취되었다. (285.3)
 안개의 달 20일(11월 10일)에는 이성(理性)의 여신을 예표하는 조각 대신에 젊은 여성을 선택했다. 이 여인은 흰옷을 입고 그 위에 푸른 색의 망토를 걸쳤으며 넘실거리는 머리 위로는 혁명을 상징하는 빨강 색의 모자를 썼고, 수세기 동안 “우리의 숙녀”(노트르담) 곧 예수님의 어머님에게 기도를 올리던 프랑스 제일의 사원에 앉아 경배를 받았다. 참석한 군중을 대신하여 한 연사(演士)가 이 여인을 공손하게 포옹하자 환호하는 소리가 고딕 양식의 교회당 벽에 진동하였다. 프랑스의 여러 다른 도시들과 마을에서도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285.4)
 유서 깊은 도시 리용(Lyon)에서는 그 시장이 사망하자 그 흉상과 유골을 장엄한 의식으로 바깥 제단에 봉안하였다. 이때 십자가와 복음서를 꼬리에 매단 당나귀를 운구(運甁) 행렬에 사용했다. 유골 봉안 의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성찬에 쓰는 잔에 물을 따라 당나귀로 마시게 하였다. 그리고, 당나귀 꼬리에 매달았던 십자가와 복음서를 풀어서 불더미에 던졌다.39 (285.5)
 19세기의 프랑스 정치가였던 M.A.티에르(Thiers)는 말하기를, “과거나 현재의 예배 형식을 이해함 없이 그 종교를 변경시킨 한 국가가 연출해 놓은, 분별심도 진실성도 없는 이 광경을 목도할 때 우리는 메스꺼움 이외의 다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다”고 하였다.40 (285.6)
 프랑스 국민들이 인간의 이성을 신(神)으로 삼고 그 신의 이름으로 그때까지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의 그리스도교 형태인 가톨릭 신앙을 내던진 바로 그 시각에 그들의 이성의 능력을 사용하여, 현재 자행되는 만행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대량으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7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던 파리 시에서만도41 10만 명이 투옥되었다. 단두대에는 피가 흘러 넘쳤다.42 (285.7)
 지존자에 대한 숭배
 철학자들은 자연과 인간의 이성을 찬양했지만 여전히 한 신(神)이 우주를 창조했다(창조한 후에 제 힘으로 돌아가도록 방치해 두었다)고 믿고 있었다. 공포 정치의 장본인 로베스피에르는 한동안 주장하기를, 새 공화국은 단순히 인간 이성을 숭배할 것이 아니라 지존자(至尊者)와 영혼 불멸에 대한 신앙을 선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같은 새로운 혁명 종교를 지지하는 위대한 연설을 토했다. 지존자의 경배에 대한 그의 주장은 종교적인 것보다는 정치적인 색채를 띠었다. 그는 “사회 생활을 하는 인간” 에게는 그러한 신앙이 적합하다고 말했다. 그는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소크라테스, 키케로, 브루투스, 레오니다스 같은 희랍 및 로마 인들의 글을 인용했다. (285.8)
 그는 말하기를 “성직 자들에게 도덕을 기대한다는 것은 돌팔이 의사들에게 진정한 의술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계속해서 말하기를 “나는 그들(성직자들)이 고안해 놓은 종교만큼 무신론을 그렇게 근사하게 닮은 다른 것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들(성직자들)은 지존자를 턱없이 그릇 나타냄으로써 능력이 허락하는 한 지존자를 소멸시켜 왔던 것이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형상을 따라 신(神)을 창조해 왔다. 그들은 질투하고 변덕스럽고 탐욕적이며 잔인하고 달래기 어려운 신을 창조해 온 것”이라고 했다.43 (285.9)
 초록의 달 20일(1794년 6월 8일)에는 로베스피에르가 새로운 혁명 종교의 선지자 혹은 제사장, 또는 그의 원수들의 말을 빌면 교황의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 날은 가톨릭에서 오순절 기념 일요일로 지켜 오던 날이었다. 수많은 군중이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의식 행렬을 따랐다. (286.1)
 우리는 지금 카톨릭교적 전통이 개신교적 성경 이해로 바뀌어지는 어떤 종교 개혁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명목상으로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던 사회가 그에게 허락된 유일의 그리스도교 형태를 폐기시키고 그 대신에 새로운 이교 체제를 수립했을 때 발생한 격동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286.2)
 “로마 황제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 the Apostate) 이래로 국가가 비그리스도교화 정책을 의도적으로 추진했던 것은 유럽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44 (286.3)
 프랑스는 유럽 국가 중 고의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반대한 첫 기독교국이 된 것 외에도 첫째가 된 적이 있었다. 프랑스의 전신인 프랑크 족(族)은 서로마 제국을 침입한 게르만 민족 중 최초로 496년에 가톨릭주의의 그리스도교를 채택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교회의 장녀(長女)”로 칭송되었고 모슬렘 교도들은 흔히 가톨릭 교도들을 “프랑크 인들” 이라고 불렀다. 이런 민족이 근대 유럽 역사상 최초로 예수의 종교를 공식적으로 배척했던 것이다. (286.4)
 못된 교욱을 너무나 잘 가르친 결과
 국교(國敎)체제는 수세기에 걸쳐 프랑스 국민들에게 그들의 “이단자들”을 추방시키고 처형하고 금고시키라는 교육을 시켜 왔었다. 이제 그 국교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교회는 그 가혹한 교육을 너무나 철저하게 시켰다는 사실을 발견케 되었다. 프랑스 국민들이 교회 성직자들의 과오를 깨달은 지금, 과거 수세기에 걸쳐 배워 온 가혹한 처벌을 그들에게 가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에 프랑스 인들은 2,000~5,000 명의 성직자들을 처형시켰다. 어느 을씨년스러운 날에는 한 장소에서 833 명의 성직자를 한꺼번에 총살시켰다. (286.5)
 수세기에 걸쳐 이단자들에게 빈번히 사용한 처벌 방식은 갤리 선박(船舶)의 노예로 팔아 거대한 노를 젓게 하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알려진 유일의 그리스도교 형태를 배척하기로 작정한 격노한 프랑스 국민들은 850 명의 성직자들을 갤리 선박의 노예로 팔아 버렸다. (286.6)
 교회는 과거에 국왕을 교사하여 위그노 교도들을 추방케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3,000~4,000 명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를 떠나 달아나야 했다. 일부는 스페인으로, 일부는 중앙 이탈리아의 교황령(敎皇領)으로 도망했고, 다른 일부는 개신교 국가인 영국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리고 1798년 2월 15일에는 프랑스 군인들이 로마 시의 시스티네 성당(Sistine Chapel)에 난입하여 교황을 유형지로 압송하였으며 결국 교황은 그 곳에서 죽고 말았다(이 사건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13장을 연구할 때 더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286.7)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프랑스에 남기로 작정한 2만 명의 성직자들은 파리의 주교(主敎)를 따라 그들의 사제직(司祭職)을 사임함으로써 “천직을 버렸다.”45 (286.8)
 

프랑스 혁명군들은 신부들을 쇠사슬로 갤리선의 노젓는 장대에 묶었다.
(287.1)
 누가 더 나빴는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기는 하지만 2만 명의 사제들이 맹세로 언약한 그들의 사제직을 포기했다. 이렇게 되면 로베스피에르의 뼈아픈 비난은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사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들(성직자들)은 그(신)를 질투심이 많고 변덕스러우며 탐욕적이고 잔인하며 달랠 길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나는 그들이 창안해 놓은 종교만큼 무신론을 그렇게 근사하게 닮은 다른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그들은 지존자(至尊者)를 턱없이 그릇 나타냄으로써 그들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그(신)를 소멸시켰다.” (28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