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1장—교회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에베소
 밧모 섬으로부터 첫 번째 정류소는 당시의 가장 중요한 항구 중 하나였던 에베소이다. 뱃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도 그 도시의 불빛을 볼 수 있었다. 에베소가 첫 번째 촛대인 첫번째 교회를 대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니엘이 그의 첫 번째 왕국 바벨론에 대한 도입부 에서 그랬던 것처럼14 요한은 그가 쓴 일련의 편지들을 에덴동산에 대한 암시로 시작한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44.1)
 에베소는 참으로 첫 사랑이다. 그리스어로 그 이름은 “바람직한”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열정은 아직 살아 있고 기억은 생생하다(계 2:5). 그 교회는 사도들의 교회였고(2절), 이교 신앙으로부터 온 첫 회심자들의 교회이다. 전에 이교도였던 사람들은 그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5절). 바울도 비슷하게 로마의 이교도들에게 경고하였다(롬 11:18). 유명한 디아나 여신, 곧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행 19:28)의 처소였던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요구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에베소인들은 그들이 믿었던 미신으로 유명하였으며, 부적(符籍)을 만드는 산업으로 이름나 있었다. 에베소의 범죄 발생률은 극에 달하여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철학자 헤라클리투스가 그것 때문에 너무 울어서 후에 “우는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종합해서 볼 때 에베소는 초창기의 교회이다.

  (44.2)
 그러나 그 교회는 한편으로는 영적인 근원에 박혀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파멸의 길을 가고 있었다. “별을 붙잡고” 있는 분의 긴장된 걸음걸이는 벌써 그 상황의 위태로움을 암시해 준다. 베드로도 궁지에 몰린 사탄의 근심스러운 행동을 묘사하는 데에 동일한 동사(페리파테이[peripatei])를 사용한다.15 에베소의 문제는 그 교회의 불이 꺼져서 다시 켜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4절).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5절). 이 “처음 행위”트슈바(teshuvah), 즉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적 요청을 암시한다. 그러한 권면에 짝을 지어 사자(使者)가 경고한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첫 교회의 순수함도 그것이 그 빛을 상실하지 않도록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교회를 세우셨다는 사실조차도 그 교회의 미래 행위의 책임을 면제해 줄 수는 없다. 교회는 비틀거리기 쉽다. 그것은 심지어 넘어지고 촛대를 떨어뜨려 불빛을 꺼뜨릴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실수와 실패의 염려는 항상 존재한다. 우리는 교회와 하나님을 동일시할 수 없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교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 안에 있다 해도 구원이 없을 수도 있다.” (44.3)
 하지만 편지는 계속 우려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는 어느 정도 영적인 순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교회는 “니골라당의 행위”(6절)를 미워한다. 하나님도 그렇게 여기시기 때문에 그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45.1)
 최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는 죄악은 니골라당의 운명을 상기시킨다. 초기 교회의 전승은 그들을 사도행전 6장 5절에 나오는 니골라를 따르는 제자들로 여겼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간에, 초기 교부들에 의하면 니골라당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잘 알려진 자들이었다.16 은혜와 율법에 관한 바울의 새로운 입장을 왜곡함으로써, 그들은 토라의 모든 원칙들을 거부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은 토라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하여 악행에 빠져들었다. (45.2)
 그들은 그 사상의 기초를 당대의 영지주의적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이원론적인 개념에 두었다.17 그들은 인간의 육체와 더불어, 사실상 물질적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기본적으로 물질적이고 악한 것으로 여기고 경멸하였다. 한편, 영은 순수하고 선하고 거룩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육체를 의지에 따라 고문하거나 혹은 쾌락을 줄 수도 있었고, 그래도 영혼은 순결하게 지켜져 있었다. 이원론은 육체는 율법의 영역에 묶어서 거부하고, 한편으로 영혼은 은혜의 영역과 연결하여 떠받들게 한다. (45.3)
 첫째 편지의 예언적 증언에 의하면 최초의 배도의 씨앗들은 토라와 물리적 창조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편지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한 편으로, 그 결론은 먹는다는 물리적 행동, 따라서 창조를 인정한다.18 이것은 영적인 것에 대해서만 중요하게 여기고 물리적인 삶과 창조는 경시하던 이원론자들에 대한 응답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명나무”(에츠 하임[ets hasyim])는 토라를 높인다. 성경시대와19 후대의 유대인들의 전승에서도20 생명나무는 토라의 고전적인 상징이었다. 심지어 그것은 양피지로 된 토라 두루마리를 감아놓은 나무 봉(棒)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까지 하였다. (46.1)
 서머나
 우리의 두 번째 정류소는 에베소로부터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서머나이다. 놀랄 만큼 아름다운 상업도시로 알려진 그곳은 고대에는 드물게 광범위한 도시계획과, 후에는 재건을 경험하였다. 그리스인들이 그 도시를 기원전 1000년에 건설하였고, 그 후 기원전 600년에 리디아인들은 파괴하였다. 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 중 하나인 뤼시마코스(Lysimachus)가 그 도시를 재건하였다(기원전 200). 그 도시는 문자 그대로 폐허로부터 “부활”하였다. 그러므로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죽음과 부활의 주제들이 스며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편지를 보내는 이는 자신을 “죽었다 살아난 이”(8절)라고 소개한다. 편지의 수신자들은 죽음에 매여 있으나, 생명을 약속받았다(10, 11절). 서머나라는 이름 자체가 죽음의 향유인 “몰약”과 흔히 연관되어 왔다. (46.2)
 그 도시의 운명에 대한 암시 외에도, 서머나에 보내는 편지는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이 겪었던 박해를 상기하게 한다. 죽음의 위협에 더하여 서머나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난으로 인하여 애쓰고 있었다. 서머나의 그리스도교로는 후일 그리스도교계에 있던 주홍색 예복과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연상하기가 어렵다. 그 때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성공과 명성을 의미하지 않던 시대였다.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은 도시의 가난한 계층에서 왔고, 이교도인 대중의 적대감을 견뎌야 하였다.

  (46.3)
 서머나 교회는 박해받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로 의심하였다. 이교도들은 성찬예식에서 식인(食人) 행위를 연상하였고, 그 예식을 거행하는 동안에 그리스도인들이 피를 마시고 인육(人肉)을 먹는다고 믿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의 친교를 나누는 애찬(agape)을 방탕하고 난잡한 축제로 보았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로 몰렸다. 황제를 그들의 주(主)로 섬기는 충성의 맹세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을 의심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불로 세상이 끝날 것을 예언하였다고 고소하였고, 후에 네로 황제는 그러한 고발을 이용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시대에 역행하며 고립된 종교를 가진 것으로 여겨서 유대인과 동일시하고 경멸하였다. (47.1)
 유대인들의 형편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유대인은 안팎으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지 여부에 대한 내부의 분열로, 나중에 바울로 알려진 다소 사람 사울의 경우에서 보듯이 유대인 공동체는 찢어졌다.21 서머나에 보내는 편지는 그들의 비방을 책망하고,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9절)이라 부르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유대인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던진다. 유대인 신분에 대한 언급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아직 스스로 유대인이라 여기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동료 신자들이 그들 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맞게 살지 않는 것을 비난하고, 그들이 모이는 곳을 “사탄의 교회”라 고 부를 수도 있다. 서머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인 그들의 동포들보다는 유대인 공동체와 더 가까웠다. 그리스도교의 반(反) 셈족주의는 아직 불붙지 않았었다. 이교도들에게는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유대인 형제자매들에게는 의심을 받으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비참한 신세에 있었다. (47.2)
 순교자의 시대로 알려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치하에서 박해는 경계할 만한 정도까지 도달 하였다. 한 칙령(기원후 303)에서 황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해체하고, 교회들을 헐어 버리고, 그들의 책들은 불태워 버리라고 명령하였다.22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했다. 교회에서 숭배하는 성인(聖人)들의 상당수가 그 시대의 사람들이다. 나무에 묶여 100발의 화살을 맞은 성(聖) 세바스찬, 성스러운 음악의 수호 성인인 성 세실리아, 나무에 달려 화형을 당한 성 아그네스 등이 그 시대의 인물들이다. 박해의 마지막 파도는 311년까지 계속되었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세우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48.1)
 흥미롭게도 박해의 기간은 편지에 예언된 대로 총 10년간(예언을 계산하는 법에 따라 1일을 1년으로 볼 때) 지속되었다.23 그러나 그 언어는 상징적이다. 유대인들과 성경의 전통을 따르면 숫자 10은 시험과 시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다니엘에 나오는 열흘 동안의 시험을 기억한다(단 1:14, 15). 유대력(曆)에도 그러한 상징성이 들어 있다. 대속죄일, 즉 킵푸르(Kippur)로부터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 즉 나팔절 사이 열흘의 시험 기간 동안 유 대인들은 심판의 큰 날을 위하여 준비한다. 미쉬나도 동일한 말로써,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그리고 노아부터 아브라함까지 각각 10세대, 아브라함이 겪었던 열 가지 시련, 애굽의 열 재앙 등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숫자 10은 시련과 시험의 수라고 한다.24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시험(test)일 뿐이고, 거기에는 당연히 상급(賞給)이 내포되어 있다. 실패와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며, 소망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믿음의 순교자들을 위하여 승리의 면류관(stephanos)을 준비해 두셨다. (48.2)
 거기에는 역설이 스며들어 있다. 검투사의 칼에 정복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승리의 면류관”을 얻는다. 그들은 죽었으나, 생명의 면류관을 얻었다. 그 관(冠)은 자주 고대 그리스—로마 제왕들의 홀(笏)에 죽음에 대한 정복의 상징으로 새겨져 있었다.25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 사상에 있다가 나중에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도 스며들어 온 영혼불멸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그 다음 절은 더 구체적으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 할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계시록에서만 나타나는 표현이다.26 하지만 랍비들의 문헌이나 타르굼은 그러한 사상을 지지한다.27 이 모든 구절에서 “둘째 사망”이란 더 이상 부활의 소망이 없는 악인들의 최후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계시록의 한 구절(20:6)에서는 두 가지 부활을 언급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있으며, 곧 의인들의 부활이다. 둘째는 악인들의 부활이다. 첫째 부활에만 영생이라는 결과가 있다. 모든 사람이 첫째 사망을 당하지만, 둘째 사망은 악인들만 경험하게 될 것이다.28 (49.1)
 서머나의 순교자들에게 둘째 사망을 면제해 주는 것은 그들에게 영생으로 인도하는 참 부활을 보장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원론적인 억측을 부정하며,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은 단순히 영혼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살과 피를 포함하는 전인(全人)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49.2)
 버가모
 우리의 여행은 서머나로부터 북동쪽으로 45킬로미터 더 진행된다. 버가모 성읍이 그 웅장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환영한다. 산 위에 있는 도시, 그래서 그 이름은 “성채” 또는 “영광스러운 도시”를 뜻한다. 아시아의 주요 상업 도로에서는 약간 외곽에 위치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가모 성읍은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스트라본(Strabo, 기원전 63~21년경)은 그곳을 “뛰어난 도시”라고 불렀으며, 로마의 역사가 대(大) 플리니우스(Piiny the Elder, 기원후 23~79)는 그곳을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로 여겼다. 정치적 중심지면서 동시에 버가모는 문화와 종교의 허브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양피지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곳도 버가모였다. 200,000권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소장하고 있었던 버가모의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과 경쟁하였다. 그 도시는 또한 종교생활로도 유명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을 숭배하는 병원과 치료 신전이 전 세계로부터 수천의 순례자들을 끌어모았던 사실은 매우 다양한 화폐가 고고학적 유물로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49.3)
 버가모는 교회 역사의 세 번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 전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버가모의 교회는 엄청난 성공과 영광을 과시한다. 버가모의 그리스도인들은 존경받는 시민들이었다. 순교의 시대는 끝났다. 그 비참한 시절에 대한 언급은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가 운데 곧 사탄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계 2:13)라는 말에서 보듯이 이제 과거 시제로 나타난다. 그 시대는 번영과 안락함의 시대이다. (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