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제1부 폭풍우 제2장—기독교 지하드8)
 첫째는 땅에 영향을 미친다.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 땅에 떨어지며”(계 6:12, 13). 사람들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사이에 일어났던 자연 현상들을 기억한다. 리스본의 지진(1755년 11월 1일)은 그 도시 인구의 절반이나 되는 70,000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1780년에서 1880년까지는 비상(非常)한 흑암이 미국과 기타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1800년에서 1900년 사이에는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엄청난 유성우(流星雨)가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92.11)
 흥미롭게도 그 사건들은 다니엘이 예언한 환난의 때의 끝과 같은 기간에 일어났다. 그 기간은 예언의 시간표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교회에 의하여 압제받던 사람들이 풀려나는 시간이 었다. 우리는 세 때와 반 때의 끝에 와 있다(단 7:25).47 프랑스 혁명은 교회의 위협을 무력화하였다. 그러므로 우주의 징조들은 예언적인 이상의 빛에 비추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역사가 그 끝을 향하여 행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때(time of the end)로부터 시대의 끝(end of time)으로 옮겨가고 있다. (95.1)
 우리는 여섯째 인의 이상을 다섯째 인에 겹쳐 놓고 보아야 한다. 두 인은 같은 시대에 일어나며, 동일한 사건들을,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묘사한다. 다섯째 인에서 예언적 이상은 “어느 때까지?”라고 탄식하며 다니엘 8장의 압제당하는 자들의 소리에 합세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을 나타내었다. 이 장면은 우리를 19세기 중반으로 인도한다. 그 이상은 인간 역사 너머에 있는 장면을 언뜻 보여 주었다. 그것은 압제 당하는 자들이 흰 옷을 수여받는 은혜와 심판의 장면이었다. (95.2)
 마찬가지로 여섯째 인의 이상에서도 환난의 때(18~19세기)의 끝 너머로 압제자가 최후의 멸망을 당하는 장면을 내다보고 있다. 이러한 제2의 국면은 하늘에서 일어난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계 6:14). 그 사건은 온 땅을 다 포함한다. “각 산과 섬”(14절), “땅의 임금들 ∙∙∙ 장군들 ∙∙∙ 각 종과 자주자”(15절) 등, 그 언어가 벌써 총체성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히브리식 표현을 써가면서 그 사건의 우주적인 성격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진노가 총체적으로 땅을 침노한다. 우주의 운명은 그분의 손에 놓여 있다. 그분의 진노는 모든 사물과 각 사람을 망라한다. 여섯째 인은 “보좌에 앉으신 이”(16절)와 이 계시를 마무리하는 “누가 능히 서리요”(17절)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질문으로 종결된다. (95.3)
 그러나 바로 이 질문이 소망의 불꽃을 당긴다. 성경적 소망의 역설은,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시점에서 그것이 생긴다고 하는 점이다. 계시록은 나훔과 말라기 선지자가 신실한 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하여 사용했던 질문을 빌려온다.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훔 1:6, 7; 참조 말 3:2, 3). (95.4)
 간주곡:야곱의 생존자들
 파괴는 갑자기 멈추고 선지자의 눈은 “잘 견딘 자들”(참조 계 6:17)을 빠르게 확대시킨다. 이 생존자들은 그들을 거룩한 진노로부터 보호해 줄 표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문틀에 뿌린 피의 표로 구원을 받았던 사건(출 12:23)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르는 땅 사방의 바람이 “땅의 네 모퉁이,” 즉 땅 전체를 위협한다.48 (96.1)
 천사들에게 알리는 말의 교차대구적 구조(chiastic structure, ABA')는 그 생존자들이 누구인지 가르쳐 준다. 첫 번째 행동(A)는 땅, 바다, 나무를 보호한다(계 7:1). 둘째 행동(B)는 땅과 바다를 위협한다(2절). 그리고 셋째 행동(A')은 다시 땅, 바다와 나무들을 보호한다(3절). (96.2)
▶ A(7:1) ▶ B(7:2) ▶ A(7:3)
    보호     위협     보호
    땅, 바다, 나무들     땅, 바다     땅, 바다, 나무들
(96.3)
 교차대구의 중심은 바람으로부터 보호받은 자연의 요소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 그 명령은 지구 전체를 묘사하는 땅과 바다까지만 파괴하도록 분명히 제한한다.49 나무들은 그 재난의 유일한 생존자들이다. 본문은 구문법상으로 이미 그들의 예외적인 성격을 암시해 주었다. 다른 두 행동의 도입부인 첫 번째 행동에서 세 단어는 동일한 그리스어 전치사를 따라오지만 “나무”만은 “땅”“바다”와 격(格)이 다르다. “땅”“바다”가 소유격으로 된 것과 대조적으로 “나무”는 목적격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바람의 나무에 대한 관계가 땅이나 바다에 대한 관계와 다르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96.4)
 이러한 표현과 구문법상의 표시들은 “나무들”을 다른 요소들과 구분하여 별도로 다루도록 도와준다. 나무는 내구성을 상징한다. 그 뿌리는 땅 속으로 깊이 자라서 그들을 바람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성경에서 나무는 의인들을 상징하는 한편(시 1:3; 렘 17:8), 바람에 쉽게 날리는 지푸라기는 악인들을 대표한다(시 1:4; 욥 21:18). (97.1)
 우리는 천사가 나무들을 보호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보호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 나무/의인들이 그들의 능력이나 뿌리로써 구원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생존은 위로부터 내리는 선물이다. 동쪽으로부터 올라온 천사가 그들의 이마에 인(印)으로 표시를 한다. 동쪽은 생명과 빛을 가져오는 태양을 상징하는 방향이며, 에덴동산(창 2:8), 인간 구원자인 고레스 왕(사 41:2) 그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방향(겔 43:2)이다. (97.2)
 죽음을 초래하는 계시록의 다른 인들과는 달리 이것은 생명의 인이다(계 7:2). 다른 인들은 심판과 멸망을 예고했었다. 이것은 구원과 창조를 나타낸다. 다른 인들은 문서의 비밀 유지를 보장하기 위하여 친 것인데, 이것은 소유권을 나타내는 경우이다. (97.3)
 고대인들은 종종 자신의 상품(商品)에 그것이 누구의 소유인지 나타내기 위하여 인을 쳐서 표시하였다. 대개 인은 금속이나 보석(출 28:11; 에 8:8)에 그 주인의 이름이나 상징을 새긴 후 그것을 진흙이나 밀랍에 찍어 표시하였다. 본 구절에서는 이마에 인을 쳤다. 그것은 가인이 보호를 받기 위하여 이마에 표를 받았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창 4:15). 그러나 에스겔의 한 구절이 본 구절과 더 가깝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 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내가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겔 9:4~6). (97.4)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과 동시대의 사람들이 저지른 “가증한 일”(4절)에 대하여 반응하는 신실한 사람들이다. 그 앞 단락에서도 태양을 숭배하는 일을 언급할 때에 “가증한 일”(겔 8:16, 17)이라는 동일한 말을 사용한다. 그러면 이마의 표는 참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창조주를 경배하는 것을 상징한다. 여기 요한계시록 7장에서도 그 의미는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땅, 바다 그리고 나무들로 연속된 순서(참조 창 1:9~13)는 창조에 대한 암시를 강화해 준다. 인은 창조주를 믿는 사람들에게 표를 한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소유권을 고백하는 것은 그분을 우리의 창조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시편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시시므로 만물의 주인이신 것을 찬양한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시 24:1, 2).50 (98.1)
 하나님을 만물의 소유주로 인식하는 것은 그분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데 이르게 한다. 그분의 인은 전반적인 사고 방식을 암시한다.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빚 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그러한 주제는 성경 전체에 충만하다. 십일조는 이미 그분의 소유인 재물을 우리가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창 14:19)로 선포하며 십일조를 바칠 때 그를 인정한 멜기세덱도 이미 이해하고 있는 바였다. 레위기도 동일한 관계를 제시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토지는 그분의 소유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레 25:23)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인 것이다(레 27:30). (98.2)
 십계명의 중심 위치를 안식일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대개 그 자리는 고대 언약 문서에서 인을 찍는 자리였다. 안식일은 창조주와 그분의 작품을 찬양한다. 그것은 창조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인이다. 우리는 또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왕보다 창조주께 대한 의존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이 음식물을 선택한 데서 하나님의 인을 식별할 수 있다(다니엘 1장).52 (98.3)
 이마에 있는 인은 전인(全人)에 대한 하나님의 표이며, 우리가 그분에게 속하였다는 표시이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된다면 그 또한 어떤 의미에서 그분의 인이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하여 계시록은 창조의 하나님을 그들의 삶의 면면에서 고백하는 사람들을 지적한다. 안식일, 십일조, 음식물의 선택,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존중,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인의 존재를 보여줄 수 있지만, 그것을 마법적으로 생산해내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인은 그것이 나타내는 창조주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눈으로 볼 수 없으면서도 살아 있다. (99.1)
 그 인을 맞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영적인 실체를 이룬다. 그들의 수, 12 × 12로 된 144,000은 상징적이다. 12라는 숫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의 수이다(땅의 수 4 × 하나님의 수 3). 그것은 명백하게 언급되었듯이 이스라엘 12 지파의 수이기도 하다(계 7:4~8). 각 지파는 12,000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12에 곱한 1,000이라는 수는 무리를 상징할 뿐 아니라,53 지파를 상징한다. 히브리말의 엘레프(elef, 천)는 지파, 군중, 씨족, 군대를 의미하기도 한다.54 그리하여 12,000이라는 수는 지파 전체를 묘사한다. 하지만 요한의 시대에 누가 어느 지파에 속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성전의 파괴와 함께 대부분 소멸되었다. 그나마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은 유다, 베냐민 그리고 레위 지파에 속하였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언급된 이스라엘을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행진을 하는 군대처럼 리듬감 있게 들리는 규칙적인 목록은 완성과 완전의 인상을 더욱 강화해 준다. “무리”라고 번역 된 오클로스(ochlos)라는 단어는 “군대”를 의미하기도 한다.55 그리고 참으로, 9절10절은 승리한 군대를 묘사한다. 흰 옷과 종려가지는 군대의 승리를 경축하는 의례의 일부였다.56 본문의 문체, 언어 그리고 숫자의 상징성은 모두 온 이스라엘의 존재를 증언한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꿈꿨던 “온 이스라엘”(롬 11:26), 다섯째 인에서 언급된 구원 받은 사람의 “가득 찬” 수이다(계 6:11). 또한 그것은 다양한 문화와 국가에서 나온, 요한이 보는 흰 옷 입은 큰 무리(계 7:9; 참조 6:11), 압제로부터 생존한 사람들이다(계 7:14; 참조 6:9, 11). (99.2)
 다섯째 인의 완성되지 못한 무리와 144,000은 동일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모두 모여 있다. 역사의 망명자들, 그들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하늘에만 있었던, 땅에서는 항상 외국인으로 방황하던 사람들, 저 너머 나라의 시민들이 이제 그들이 상실했던 정체성과 그들의 뿌리와 그들의 동족, 그들의 이스라엘을 되찾고 연합하였다. 환난과 고통의 기억들을 나누면서, 이제 그들은 육체와 영혼, 전인(全人)으로 함께 모였다. 상한 심령으로부터 감정이 솟구쳐 올라와서 영광의 큰 함성, 승리의 함성이 되어 나온다(계 7:10).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