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시선은 이제 재림의 장면에서 두번째 장면인 하나님의 큰 잔치와, 성도들의 원수들이 멸망당하는 장면으로 이동된다(계 19:17~21). (484.1)
 요한은 한 천사가 혼자 “해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전에 언젠가 참된 어머니인 한 여인이 혼자 “해를(옷) 입고” 서 있는 것을 보았었다(계 12:1). 용이 이 여인과 그 아이를 공격하고 있었다(계 12:1~6). (484.2)
 천사가 “공중에 나는 모든 새들을 향하여” 소름끼치는 초청을 발했다. 목소리를 높여 외치기를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 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였다(계 19:9~18). (485.1)
 우리는 요한계시록 6장 15, 16절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사람들을 분류하는 장면을 읽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로부터 자기들을 숨겨 달라고 산과 바위들에게 아우성친다. 이사야 선지자도 그 같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숨어서” 그들의 은우상과 금우상을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있다(사 2:20, 21). 선지자 학개도 품삯이 소용없음을 마치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는 것”같다고 경고하였다(학 1:6). 재산 투자, 신용 카드, 진급, 흥청거리는 쾌락, 높은 지체 따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지 않은 겁에 질린 사람들에게 전혀 쓸모 없는 것이다. (485.2)
 해(태양)에 서 있는 천사는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들을 향해 “하나님의 큰 잔치”에 오라고 부른다. 이 초청을 듣는 독수리들과 그 밖에 썩은 고기를 잘 먹는 날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 14장 6~12절의 세 천사도 한때 “공중을” 날아갔다. 그들은 심판과 제칠일 안식일, 영원한 복음과 예수의 믿음에 대해 기별을 증거했다. 하나님의 큰 잔치에서 천사들에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그 천사들이 전하는 기별에 관심을 돌리지 않았던 과거의 일을 얼마나 후회할 것인가! (485.3)
 독수리들이나 세 천사와 마찬가지로 한 상징적인 독수리가 한때 “공중을” 날아갔다(계8: 13). 이 독수리는, 마지막 세 나팔이 처음의 네 나팔보다는 훨씬 더 그 재앙이 심하다고 경고하면서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요한은 일곱째 나팔의 특별한 “화(禍)”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는 일곱째 나팔 때, 단지 열국들이 분노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며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고,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할 때가 당도하리라는 사실만을 보았다(계 11:14~18). 이제 우리는 본 단원에 이르러 열국들의 분노가 아마겟돈 전쟁으로 절정을 이루며 하나님의 진노에는 마지막 일곱 재앙이 포함되며,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의 멸망에는 유황의 못[泉]과 하나님의 큰 잔치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485.4)
 아마겟돈 전쟁과 그 결과
 요한은 말하기를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계 19:19)켰다고 했다. 이것은 앞서 요한계시록 16장 14, 16절과, 17장 13, 14절에서 읽은바 있는 아마겟돈 전쟁이다. (485.5)
 아마겟돈 전쟁은 동서(東西)간의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항하여 사단과 인류가 벌이는 전쟁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형태로만,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전쟁이다. 이 전쟁은 짐승과 용과 거짓 선지자의 입으로부터 나온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들이 거짓 선전에 의해 조직화되는 전쟁이다. 그들의 거짓 선전은 기만적인 기적과 표적과 이적들을 통해 수행 된다. 추측컨데 이 기적들 가운데는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일까지 포함될 것이다. 또 분명히 예수님의 재림까지 모방할 것이다. 이것이 “불법의 사람”의 파루시아(Parousia)이다(살전 2:3). (485.6)
 사단의 기만적인 기별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 지킬 수도 없다, 지켜서도 안 된다”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단의 기만적인 기별은 강압적인 악한 수단으로 말미암아 강화될 것이다. (485.7)
  (486.1)
 사단의 지시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은 매매를 할 수가 없게 된다. 또 얼마 후에는 이들이 처형 목표가 될 것이다(계 13:11~17). 이 악한 일은 여섯째 재앙 때 절정을 이룰 것이다(아마겟돈 전쟁, 계 16:12~16). 이때 온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손, 즉 생각과 행동에 하나님의 성령의 인침을 받은 소수의 무리와, 이를 극도로 미워하는 대다수의 사람들로 양극화 된다. (487.1)
 아마겟돈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확하게 때를 맞추어 “동방에서 오는 왕들” 곧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이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도착한다(계 16: 12).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다.(계 17:14). 백마를 높이 타신 분이 자신의 피로 물든 옷을 입고 나타나시며 하늘의 군대들이 그를 수행한다. 그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원수들을 살륙하시고, 해(태양)에 서 있는 한 천사는 새들에게 하나님의 큰 잔치에 와서 원수의 시체들을 먹으라고 청한다. (487.2)
 다니엘 2장 34, 35, 44, 45절의 초자연적인 돌이 여기에 등장한다. 이 돌이 신상의 발을 쳐서 부숴뜨려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날려 보낸다. (487.3)
 거룩한 전사(戰士)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애굽의 군대들을 홍해에 수장시키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여호와는 용사”시라고 환호하였다(출 15:3). (487.4)
 그러나 진실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사 9:6). 그는 결코 전쟁을 선호하시지 않는다. 대쟁투를 시작한 것은 사단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487.5)
 수천 년 동안 예수님은 꿋꿋이 참으셨다. 예수님은 사단의 가장 악랄한 적대 활동들을 많이 제한하셨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사단은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완고한 고집대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도록 허용하셨다. 예수님에게는 그 긴 세월에 걸쳐 세상을 괴롭히는 불의와 기근과 전쟁과 전염병들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러나 그 분으로서는 반란 자체의 가면을 벗겨 그 감추어진 잔혹스러움을 백일하에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관찰에 의해 죄가 얼마나 끔찍스러우며 죄로 인해 빚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인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487.6)
 오늘날 이 세상 주민의 대다수는 수천 년 걸친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과 죽음, 마지막 때에 전파되고 있는 세 천사의 기별,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무리들의 성품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빛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456~458)—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하고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사단의 무도한 행위를 지지하고 사단과 연합하여 구주되신 하나님의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고 있다. 에덴에서 범죄했던 하와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뱀의 말, 즉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말을 더 신용하기로 작정했다. (487.7)
 그리하여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계 19:20, 21). (487.8)
 그 어떤 죄인도 살아 남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