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15편 성도들이 행진할 때 !
 이 세 가지 포괄적 기준은 다시 보다 세부적인 일곱 가지 규제법으로 풀이되는데, 모두 언약의 백성이 취하는 사회 윤리적 행위, 특별히 사람의 혀와 금전에 관하여 취급하고 있다. (172.1)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시 15:3~5)
(172.2)
 시의 중간에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존대”한다고 하는 유일한 종교적인 특성이 나타나 있다. 이는 시편 1편의 배경으로 되어 있었던 것처럼 의인과 악인간의 신앙적 구분을 말해 주는 것이다. (172.3)
 시편 15편“망령된 자”“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상반되게 다루고 있다. 망령된 자는 고의적으로 악의 길을 택함으로써 장막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제외된 사람을 말한다. 시편 1편에 보면,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하고 악인의 꾀를 좇거나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간단히 말해서 의로운 사람은 무례한 죄 가운데 빠지지 않는다는 말이다(시 26:4, 5 참조). 오히려 그 자신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무리 가운데 하나이므로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적 고찰(4절에 대한)은 이 시를 송두리째 완전한 도덕주의의 차원 그 이상으로 끌어올려 놓고 있다. 시편 15편의 필요 조건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미 경험했던 그 구원에 대하여 그들이 마땅이 보여야 할 반응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야훼를 경외함으로써 비롯되는 도의적 순종은 하나님을 그들의 은혜로운 구세주로 이해하는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만 가능하다. 이스라엘의 지혜서(智慧書)는 종종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인간이 도의적인 도리와 밀접하게 연관시켜서 표현한다. (172.4)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욥 28:28)
(173.1)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말씀하실 때, 욥을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계신 듯하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하나님께서 욥을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특별히 말씀하시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특성이 시편 15편 2절(“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에서는 성도들이 장막에 나아오는 필수 조건으로 보다 확실하게 반복되고 있다. (173.2)
 노아와 아브라함도 완전한 자로 묘사되었는데 그 설명이 아주 흥미롭다. (174.1)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174.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174.3)
 이들의 완전함은 매번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정직하게 행한다는(시 84:11), 또는 주의 율법을 준 행한다는(시 119:1) 것을 단순히 달리 표현한 말이다. 근본 요지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드러내신 그 뜻에 복종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다는 것이다. 장막 안에서 제사장이 행하는 중보의 봉사를 통하여 그는 새로운 죄 사함과 구원의 확신, 즉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을 행할 수 있는 새로운 성화의 능력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당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 여기 셨는데 그는 “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나를 좇으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만 행하였”다(왕상 14:8). 이는 다윗의 깊은 회개와 새로운 마음을 갖고자 하는 열망을 포함하는 것이었다(시 51:10, 11). 이와 같은 회개와 변화된 마음은 무례한 죄인의 특성이 아닌 성도의 특성이리라! 이를 위해 시온의 문들이 열려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시 51:17) 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행진 하여 들어가고 있음이여 ! (174.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당신이 처음 그들에게 나누어 주신 사랑과 정의, 자비와 충성 그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으신다. 예배자는 “그 마음에 진실”(시 15:2)만을 말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의문의 율법이나 음식물에 관한 규정을 추종하도록 요청하시기보다는 다만 언약의 도덕율과 조화되는 사회적 행실을 요구하셨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제사장들은 주로 율법의 외적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산상 수훈(마 5~7장)을 이미 예견하시면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간의 마음의 내적 진실성을 요구하셨다(시 51:6과 비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한 삶이란 하나님께 전적으로 솔직하게 헌신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왕상 8:58, 61). (175.1)
 우리는 시편 15편이 장막에 들어가는 필요 조건을 대체로 부정적인 용어로 구성하였음을 주지해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십계명 형태(출 20장)와 이에 흡사한 목록들(레 19; 겔 18: 6~9)을 상기시켜 준다. 이 부정적 표현에 의미가 없지는 않다. 우리는 율법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로의 우리의 접근을 방해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맺은 도덕적 명령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요구되고 착상된 구원의 명령인 것이다. (175.2)
 이스라엘의 종교 음악들은 진리를 말하고 거짓을 토해 내는 인간의 혀의 능력에 예리한 초점을 맞추고 있다(시 34:13과 비교). 신약에도 이와 같이 혀의 파장 효과를 인정하고 있다. 야고보는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을 굴레 씌우리라”고 기록하고 있다(약 3:2; 1:26과 비교). 시편 15편은 이웃을 참소 하거나 그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을 금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 맹세한 것이 비록 해로울지라도 지키는 자를 존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176.1)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요 1:47)다고 인정하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회개한 세리 삭개오를 영적 이스라엘로 여기셨다(눅 19:9). 성경 마지막 책은 어린 양을 모두 따라 나서게 될 허다한 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5). 거짓 교리의 오류로부터 씻음 받은 그들은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서 있을 것이다(계 14:1). 성도들이 행진하여 들어 가고 있음이여! (176.2)
 시편 15편은 금전의 사용에 관하여 두 가지 악을 금하고 있다. “변리”“폭리”(겔 18:18과 비교), 그리고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는 일이 그것이다(5절). 돈을 빌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가난하고 배고파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모세는 동료 이스라엘에게 이자 취하는 일을 금하였다(신 23:19). 그들 중 몇몇은 피고용 노예로 자신들을 팔아야만 했었다(출 22:25; 레 25:47~49). 이와 같은 경제 체제 사회에서 형제들로부터 이자를 금하는 것은 합리적이요 덕스러운 일이다. (176.3)
 무죄한 사람을 착취하기 위하여 뇌물 받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보호 조치이다(출 23: 8; 신 16:19).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정의가 넘칠 때만 영적 · 평화적 번영 사회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동행하며 자신들의 길보다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보충하고 계신다.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8:9). (177.1)
 시편 15편은 성도들에게 주는 제사장의 확신으로 끝 맺고 있다. (177.2)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시 15:5)
(177.3)
 이 약속은 이 시편 전체의 요약이요 절정이다. 혹자는 제사장의 이 복된 확신을 왜곡한 보증으로 그릇 생각할 위험이 있다. 이 보중은 무조건적인 약속이 아니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은 “나는 요동치 아니”(시 10:6)한다고 그 마음에 자만할 수도 있다. 다윗조차도 그가 번영할 때 이렇게 말할 정도로 기만을 당했었다.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시 30:6). 그러나 심각한 병고를 당할 때는 다시금 자신 안에 안정과 무사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177.4)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시 30:10)
(1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