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병거 제1장 참 예언과 거짓 예언 판별법
 예레미야의 예언의 핵심은 도덕적 회개에 있다(렘 18:7-10). 그러나 하나냐는 “여호와께 패역하는 말”(렘 28:16)을 전했으며 조건없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선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로 거짓을 믿게”(렘 28:15)하였다. (23.1)
 구약 신학자들 가운데는 하나냐를, 예언자 이사야를 ‘흉내낸 사람’(caricature)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 이유는 하나냐가 ‘그날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목에 매인 앗수르의 멍에를 벗길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사 10:27)을 앵무새처럼 반복했기 때문이다. 하나냐는 자신의 시대로부터 1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가 살던 시대에 문자 그대로 적용되어야만 한다고 결론지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이사야의 예언에 응답하지 않은 것으로 단정했다. 유대인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하나냐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23.2)
그렇지만 하나냐는 전혀 다른 역사(歷史)의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때가 명령하는 바를 행하지 못함으로 인한 죄가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언적인 구원의 각 기별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조건을 무시하면서 이사야의 기별에 담겨 있는 약속을 널리 유포시키기만 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부르심을 신실하게 수행한 이스라엘을 위해 주어진 확실한 약속을 어느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안전의 약속으로 바꾸었던 것이다.7)
(23.3)
 그러므로 하나냐는 참 선지자들과 같은, 거룩한 도성과 성전을 위해 간구하는 이스라엘을 위한 중재자가 아니었다(렘 27:18).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멸망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성전속에 거하시는 하나님 대신에 성전 그 자체를 신뢰하는 것을 깨버리기 위함이었다. 예루살렘이 느끼고 있던 거짓 안전감은 실제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히스기야 왕(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안전을 도모한)이 보여준 보장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때 히스기야 왕은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사 37:1). 그리고 이사야에게 아직도 살아 있는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청하였다(4절). 하나님은 그때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고 응답하셨다(35절). (24.1)
 그러나 히스기야 왕 이후의 왕들은 종교적으로 타락했다.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에 일어났다. 그들이 전항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메시지는 백성들로 하여금 잘못된 희망을 갖게 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완악한 성읍에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4.2)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6:14).
(24.3)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하며
또는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렘 23:17, 18).
(25.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렘 23:21).
(25.2)
 이스라엘의 자칭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참 예언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열정적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셨다. (25.3)
“ ∙∙∙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 ”(겔 13:10, 11)
(25.4)
“이와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다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 하리니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3:15, 16).
(25.5)
 모세는 처음부터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판별하는 결정 기준이 하나님께서 이전에 드러내 보여주신 뜻에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는가라는 점을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쳤다(신 13:1-5을 보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의 도전을 통해, 이스라엘이 진실된 충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시험하실 수도 있다(신 13:3). 모세오경(Torah)은 모든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모세가 실상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 신들을 믿도록 선동하던 거짓 선지자들을 주로 지적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표현하신 뜻인 언약의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에도 어긋나기 때문에 그것은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예고들에도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신 30:1-3). (25.6)
 느부갓네살이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한 다음, 하나님은 거짓된 평화의 이상들이 잘못된 보다 깊은 이유를 선지자를 통해 알려 주셨다. (26.1)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애 2:14)
(26.2)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
(애 4:13).
(26.3)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의 안녕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스겔은 엄중하게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고 있다. (26.4)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여호와가 말하지 아니하였어도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였으며 이 땅 백성은 강포하며 늑탈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며 우거한 자를 불법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22:28-31).
(26.5)
 자칭 선지자들은 거만하게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참 예언을 전하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미가는 그들의 예언자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고 불평했다(미 2:6; 암 7:16). 미가는 거짓 평화를 전하는 선지자들과는 정반대로 예언했다. (27.1)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미 3:12).
(27.2)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의 근본적 차이점은 무엇인가? 참 선지자는 언제나 어두운 앞날만 예언했고, 거짓 선지자들만이 평화와 번영을 예언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지자들도 분명히 임할 메시야의 왕국에 있는 평화를 선포함으로써 희망을 확실하게 약속하였다(미 4:1-5; 암 9:11-15; 렘 23:5, 6; 29:13, 14; 32:42; 겔 36:24-32; 37:24-28). (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