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군복무와 관직에 종사하여 국가 유지의 책임을 나눠 져야한다는 켈수스의 주장에 대해 영적 군대의 개념과 사제직의 특수성을 내세워 답변했다. (70.2)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황제에게 신령한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들의 권고에 순종하여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권고하나니 간구와 노고와 감사로 모든 사람을 위해, 특히 황제와 높은 지위의 사람을 위해하라’하였다. 황제를 지원함에 있어서 경건한 사람의 역할이 싸움터에서 적군을 살해하는 병사의 역할보다 더 효과적이다. . . 우리들에게 국가를 위해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우라는 사람들에게 상기시킬 사실이 있다. 당신들에게는 사제들이 있다. 그들은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그들의 손을 인간의 피로부터 지켜 깨끗이 하여야한다. 전쟁이 발발해도 사제들을 출정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칭찬 받을 관습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제와 종들로서 다른 사람들이 전투에 종사하는 동안에 의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자들과 의로운 황제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 일인가. 그리고 우리는 전쟁을 유발시키며 맹세의 파약을 유도하고 평화를 교란하는 모든 악마들을 우리의 기도로 무찌르고 있다. 또 우리는 사람들을 가르쳐 쾌락을 멸시하도록 하며 쾌락으로 인한 탈선을 예방하고 명상과 자기부정을 실천함으로써 공적 봉사의 몫을 수행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황제를 위해 우리보다 더 훌륭한 전투를 수행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황제가 요구한다해도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신앙의 군대를 조직해 싸울 뿐이다.”21
(70.3)
 이미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의「변증론」에서 황제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한다는 주장을 들은 터이므로 오리게네스의 이같은 주장이 우리에게 있어서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기원 3세기의 로마의 지식인들이 그리스도교의 만인사제론(萬人司祭論)을 얼마나 이해했을지는 의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변증론」에서 그리스도인이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군복무에도 참여하고 있는 사실을 강조했다. 테르툴리아누스의「변증론」은 제목 그대로 이교도들을 대상으로 한 호교적 논저이다. 오리게네스의「켈수스 반박론」도 같은 성격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단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하는 습관만을 강조할 뿐 “비록 황제가 요구한다해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 차이는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 사이의 시간의 거리가 가져온 변화인가? (71.1)
 하르낙(Harnack)은 이 변화를 필립 아랍스(Philip Arabs) 치하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정부에 대해 가졌던 감정과 테르툴리아누스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정부에 대해 가졌던 감정의 차이로 해석하려 하였다.22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인들이 군복무를 기피한다는 켈수스의 비난을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군복무의 기피를 기존 그리스도교회의 윤리와 관습으로서 재확인하고 있을 뿐 이를 새로운 윤리나 관습으로 내세우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71.2)
 또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기도를 통해서만 싸우는 로마 사제들의 특권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병사들은 단지 전쟁의 증후들과 더불어 싸우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파괴와 증오심의 장본인인 마귀, 곧 전쟁의 원인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영적 군대라는 것이다.23 오리게네스에게서 발견되는 새롭고도 중요한 현상은 그가 그리스도인의 평화주의적 기능을 로마의 사제집단의 성결 의무와 연관시킴으로써 평화의 개념이 성(聖)의 개념과 결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72.1)
 오리게네스의 주장에서 별도의 설명이 요구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오리게네스가 이른바 “정전론적 주장”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의로운 목적을 위해 싸우는 황제와 병사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다.24 그는 또 고대 이스라엘에게도 적군들에 대항하여 싸울 권리가 있었다고 하였다.25 뿐만 아니라 그는 펠로폰네소스의 도시 국가들과 아테네 사이에 일어난 전쟁들에서 처럼 아우구스투스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도처에서 사람들이 군복무를 강요받고 조국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전쟁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경우들”을 들고 있다.26 그는 또 “벌들과 개미들”에 관한 구절에서 주권자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치루는 “그들의 방식이 사람들에게 의로운 전쟁의 수행에 관한 교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27 오리게네스는 이 논저와 다른 저서들의 어느 곳에서도 정전론의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통하여 지원을 제공하는 전쟁은 마땅히 대의를 위한 전쟁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72.2)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전쟁 불참 입장과 전쟁 불가피성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는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앞뒤가 서로 모순되는 입장을 표명하였는가? 논자들은 그가 대체로 시종일관한 사상가이므로 그러한 모순을 그에게서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28 일부 논자들은 오리게네스가 일관되게 군복무를 반대한 것은 유혈거부의 평화주의적 관심 때문이 아니라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한다.29 그리고 켈수스 자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군복무를 요청하면서도 로마 군대의 종교의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군복무를 기피해야 하는 실질적인 장애 요소가 되고있음을 인식치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73.1)
 그러나 우리는 오리게네스가 의로운 전쟁의 개념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지 않고 비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30 또 이 사실과 함께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국가관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황제(Caesar)는 한편으로는 세상 마지막 왕국의 우두머리로서31 마귀의 세력에 속한 자이며(계시록 13장),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악을 복수하고 인간의 죄를 억제하는 칼의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이다(로마서 13장).32 복음서에서는 국가 존립의 필요성이 인정되었으나 국가 권력에 의한 하나님 주권의 침해는 금지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 해서 그 권력이나 기구(機構)의 모든 행위가 의롭고 정당하다는 보증은 없다는 것이다. (73.2)
 계시록 8장 2-7, 14-15절에는 짐승(로마권력)에게 모든 사람들을 박해하고 하나님의 성도들과 싸울 권세가 부여되었다고 말한다. 이 권세는 어떤 의미에서 교회를 단련시키고 순결케 하는 등의 선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용인한 것이었다. 에이레나이오스(Eirenaios)도 이점을 분명히 하여 악한 통치자도 선한 통치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세운 것이라 하였다.33 (74.1)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짐승이 선하거나 성도들에 대한 그 박해가 비난받지 말아야한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이 권력이 정부의 이름으로 질서를 유지하는 한 그것은 필요하고 의로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고 정의를 떠날 때는 악마에 속한 악한 권력이 되는 것이다. 군대와 전쟁의 문제도 이와 같은 이중적인 조명 아래서 인식되어야한다.34 하나님의 종인 의로운 통치자의 지도하에 행악자들과 불의한 침략자들을 징치(懲治)하는 군사력이라면 의롭고 정당한 것이지만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는 군대라면 마땅히 악마에게 속하는 것이다. (74.2)
 그러나 의로운 정부와 의로운 군대가 꼭 그리스도교의 정부, 그리스도교의 군대로 생각되어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해서 꼭 그리스도인이어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과 초기 교부들이 말하는 바 의로운 통치자들은 이교 통치자들이었다. 그들의 개종은 가능하지만 아직도 그들은 부분적으로 이교도이며 윤리의 원칙에 있어서도 아직 그리스도교 단계의 하위에 있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에게 그리스도교 윤리의 모델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그들의 처한 비그리스도교적 조건에 상응하는 상대적 의(義)이다. 정전론의 상대적 인정은 바로 이것을 뜻한다.35 (75.1)
 여기서 우리는 오리게네스의 이중윤리(二重倫理)의 개념을 발견한다. 그는 결혼문제를 언급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여자와 결혼할 것을 허락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완전하고 지고한 순결의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36이라 하였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교 윤리의 이중적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한 오리게네스의 이중윤리의 개념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경험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 왕국과 세상 왕국의 중복 현상에 기인한다. (75.2)
 그가 이사야를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교 평화사상을 강조할 때는 이미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실현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현실적으로 가이사가 존재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군사력에 의한 평화유지의 필요성을 인정할 때는 아직 세상 나라가 이 땅에 지체하고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땅의 나라 안에서 겨자씨처럼, 떡반죽의 누룩처럼 자라며 퍼지고 있으나 아직은 미완의 것으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75.3)
 이 기결과 미결 사이의 긴장이 오리게네스 전쟁관의 이중적 표현을 가능케 한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모세 율법적 윤리의 잠정적인 가치가 용인되고 있다고 하여 그리스도교의 비폭력적인 반전사상이 무의미해지거나 취소되고있는 것은 아니다. 오리게네스와 테르툴리아누스를 한결같지 못하다고 비난하거나 또는 용전론자(容戰論者)로 해석함으로써 앞뒤의 간격을 극복하려는 입장은 이점에 대한 고려가 미진한 데서 기인하는 것37 같다. (76.1)
 그런데 우리는 오리게네스의 이중윤리 개념의 발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리게네스의 이중윤리는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윤리와 의로운 이교도의 윤리를 서로 구분하는 개념이었으나 나중에는 앞서의 영적 병사의 개념과 함께 점차 세속적인 일반 그리스도인과 금욕적이며 수사(修士)적인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중세적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스도 병사의 개념이 그의 독특한 교회관에 기초하고 있음은 앞에서 이미 지적하였다. (76.2)
 이중윤리의 개념이 이처럼 그리스도교회 내부의 구분 개념으로 변하게 될 때 오리게네스의 텍스트는 변하게 된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황제가 요구한다 해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텍스트는 이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황제가 요구한다 해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로 고쳐 읽혀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영적 병사인 것이 아니라 오직 진정한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의 영적 병사인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이중윤리가 오리게네스가 미처 인식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미 하나의 현실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원 175년 이후 로마 군대 안에는 이미 그리스도교 병사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6.3)
 오리게네스의 평화주의적인 동기를 의심하는 논자들은 평화적 동기 대신에 로마 군대의 우상숭배야 말로 오리게네스가 그리스도인의 군복무를 반대해야 했던 진정한 이유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오리게네스가 로마 군대의 종교의식 때문에 군복무를 반대했다면 군복무 불참의 이유를 밝히는 글에서 로마 군대의 종교의식을 거론치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오리게네스의 문제의 글 속에 우상숭배가 직접 거론된 것은 국왕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께 불경하게 처신하는” 것을 언급한 단 한번의 경우가 있을 뿐인데 그나마도 그는 이것을 군복무를 반대하는 이유로 제시하지 않았다. (77.1)
 오리게네스는「켈수스 반박론」을 집필하기 훨씬 전에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군인들의 우상숭배 문제를 언급한 일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상숭배는 군인들의 죄이다. 군인들은 말하기를 ‘나는 강요받고 우상을 예배한다. 군대가 그것을 요구한다. 내가 만약 우상에게 제사를 바치지 않으면 그리고 내가 군대의 관습을 따라 흰옷을 입고 제향을 받들지 않으면 나의 생명이 위태로워진다’고 변명한다.” 그의 비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또 모든 군인들을 “도둑들”이라고까지 말했다.38 (77.2)
 이로 볼 때 오리게네스가 로마 군대 내의 우상숭배 현상과 군인들의 비도덕적인 생활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관심이 그의 유혈에 대한 관심을 의심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녹크(A. D. Nock)의 로마 군대의 종교력 연구에 의하면 제 3세기 로마 군대에는 충성의식의 우선주의와 종교적 자유의 우선주의가 공존했다. 군대는 사부제(四副帝)의 분할 통치가 시작되면서 각 병사에게 종교적 복종을 강요하기 이전까지는 종교 문제에 초연하였다.39 (77.3)
 다음으로 오리게네스의 평화론이 성경보다는 후기 신플라톤주의적 사상에 근거했다는 주장이 있다.40 그러나 물론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의 평화주의에 나타나는 몇몇 표현들을 후기 신플라톤주의나 후기 스토아주의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켈수스 반박론」을 편견없이 읽어본 독자라면 오리게네스의 반군사적 진술들이 더 직접적으로 산상수훈 같은 급진적인 복음주의에 의해 고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41 (7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