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고대 바벨의 시대에서부터 그 사람들은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고 선전하였었다. 그때 이래로 이 동일한 야망은 바벨의 추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들은 연합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특권을 차지하려고 하며, 하늘과 “하나님의 문”(바벨)에 도달하려고 한다. 하지만 고대 바벨 이래로 처음으로 그들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얻는다. “온 천하”가 이제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려는 계획에 동참한다.

  (207.4)
 다니엘 또한 그러한 회합을 예언한다. 그 구약의 선지자에 의하면 마지막 싸움은 북방과 남방의 연합군들과 “영화롭고 거룩한 산”(단 11:45), 시온 산, 즉 하늘 예루살렘 사이에 벌어질 것이다.13 그리고 또한 “동쪽으로부터 소문이 이르러” 전투의 끝을 불러올 것이다(44절). (208.1)
 이것이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인데, 그 전쟁은 인간들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전쟁이 될 것이다. 이 마지막 전투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대항하는 우주적인 투쟁을 위하여 인류를 연합시킬 것이다. (208.2)
 계시록은 이 마지막 전투에 “아마겟돈” 이라는 히브리말 이름을 붙인다(계 16:16). “아마겟돈”“므깃돈의 산”을 뜻한다. 다니엘와 계시록에 나오는 두 예언적인 전쟁 사이에 서로 대응 되는 점들을 볼 때, 이 므깃돈의 산과 다니엘이 “영화롭고 거룩한 산”(단 11:45)이라고 부르는 산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는 암시를 받는다. (208.3)
 성경에 그 세 가지 주제(산, 므깃도, 예루살렘)가 결합되어 있는 유일한 구절은 스가랴서에 등장한다. 또한 “므깃도”라는 단어를 이렇게 특정한 형태(“—온”으로 끝남)로 쓰는 경우도 여기가 유일하다. 즉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돈]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슥 12:11)고 되어 있다.14 (208.4)
 이 구절에 “므깃도” 대신에 “므깃돈”이 사용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15 (208.5)
 1. 첫째는 시적(詩的)인 이유이다. “므깃도”“하다드 림몬”과 운율을 맞추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인데, 이는 성경에서 이름을 쓸 때 흔히 있는 일이다.16 (209.1)
 2. 둘째는 수사학적(修辭學的)인 이유이다. 과거의 역사를 가리키기 위하여 현재 쓰고 있는 “므깃도”보다 더 고어(古語)에 해당되는 “므깃돈”을 쓴 것이다.17   (209.2)
 계시록의 선지자는 거룩한 산(하르 [har])의 운명을 므깃돈 골자기의 그것과 연관시키기 위하여, 하르 므깃돈(Har Megiddon), 즉 므깃돈의 산이라는 합성어를 만들어낸다. 하르 므깃돈이라는 표현은 성질을 묘사하는 소유격(qualitative genitive)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그 기능은 성질을 나타내는 형용사와 유사하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거룩한 산”이라는 말을 히브리어의 형태 그대로 옮기면 “거룩함의 산”(단 11:45)이라는 모양이 된다. 마찬가지로 “공평한 추”라는 뜻의 히브리식 표현은 “공평함의 추”(레 19:36)가 된다. (209.3)
 게다가 계시록의 아마겟돈이라는 표현은 비슷한 소리를 이용한 언어유희를 써서 스가랴서의 구절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방법이다.18 (209.4)
하르 므깃돈
다드 림몬 므깃돈
(209.5)
 “므깃도의 산”(아마겟돈)이라는 표현이 이미 전쟁터를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산”이므로 이스르엘 골짜기와 그곳에서 일어났던 전투들, 즉 바락과 시스라의 전투(삿 5:19) 또는 예후 대 아하시야의 전투(왕하 9:27) 등에 적용할 수는 없다. 또한 그것을 갈멜 산에나, 또는 거기서 확대하여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왕상 18:20~40)을 의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없다. 갈멜산은 므깃도에서 12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209.6)
 선지자는 마음으로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을 생각하면서, 말로는 므깃도의 “산”(아마겟돈)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 전투의 장소는 이스르엘 평야가 아니라,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 바와 같이 “영화롭고 거룩한 산”(단 11:45)이다. 천하의 왕들, 즉 집결한 세력들에게는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209.7)
 우리는 여기서 현재 이스라엘 나라에 있는 예루살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계시록을 읽을 때는 “예루살렘”을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다니엘은 때때로 그 영화롭고 거룩한 산을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한다. 다니엘 2장에는 하늘의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거대한 산이(단 2:35, 44, 45) 땅의 나라들로 침입한다. 나아가 다니엘 11장 45절에서 말하는 “영화롭고 거룩한 산”은 분명히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210.1)
 예루살렘과 시온 산은 성경에서 희망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주제가 된다. 성경은 희망의 시온을 하늘 높은 곳에 두며(시 48:2; 참조 사 14:13), 그곳을 하나님의 처소라 부르고(시 78:68: 132:13), 그곳이 에덴동산과 닮았다고 서술한다(겔 47:1, 2; 욜 3:18; 슥 13:1; 계 22:1, 2). 신약에서처럼 구약에서도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갈 4:26), 기쁨과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이 되어 있다(히 12:22). (210.2)
 세상의 세력들이 정복하려고 하는 것은 이 상징적인 예루살렘이다. 고대 바벨의 건축자들처럼, 그들도 이 땅 위에서 하늘나라를 만들어 내기를 기대한다. 인간은 그 희망을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과 바꾸었고, 바벨의 신이 하늘의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210.3)
 그러한 정신 자세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하늘나라를 거부하기까지는 애굽의 바로가 그랬듯이 오랜 기간의 “강딱해지고, 완강해지고, 목이 뻣뻣하게 되는” 거절의 과정이 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태도를 가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며, 우리의 소망이 이 세상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점차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210.4)
 그러한 이유로 요한은 이제 그의 어조를 바꾼다. 예언은 이제 우리 각자에게 해당되는 교훈으로 변한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5). 그것은 눈에 보이는 바벨의 신에게 그들의 신뢰와 소망을 두려고 온 사람들을 위한 기별이다. 그러나 선지자의 기별은 무신론자이 거나 물질주의자인 사람들만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늘의 하나님과 연결된 마지막 고리이며, 말세의 교회인 “성도”의 공동체와도 관계가 있다. 지복(至福)의 선언에서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계 3:18)을 메아리치고 있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210.5)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희망의 복음전도자까지도 자신이 바벨 증후군(症候群)에 노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바벨에 감염된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제도, 즉 교회의 조직이 기별과 내용보다 앞서는 것을 볼 때이다. 그것은 또한 회심자들의 회심의 깊이 보다 그 수가 더 중요하게 여겨질 때, 또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미래 왕국을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보다 현재의 행복에 더 관심이 많아질 때 나타난다. (211.1)
 잠깐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편지를 암시하는 것은 마지막 때의 기별 전달자들이 열방의 거대한 연합의 유혹에 굴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언은 그들에게 직접 말한다. 이 충고에는 반어법(反語法)이 없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치 고급 의상을 입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자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 때의 신자들은 그들이 궁극적인 지식과 경건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고 생각하게 할 만한 강력한 유혹에 직면한다. 계시록이 주는 경고는 그들을 그 마비 상태에서 깨우려고 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대열에 서 있으면서 바벨의 신을 숭배하는 사람들보다 더 절망적인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느낌과 자신들이 진리를 가졌다는 기분 좋은 확신은 그들을 우상 숭배에 눈멀게 만든다. (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