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진술들을 미루어 볼 때 루터는 안식일의 창조 기원을 거부하고 안식일을 모세 법의 하나로 약화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같은 결론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앞에서 인용한 대 교리문답에서 루터는 “그 날(안식일)은 자신을 위하여 어떤 성화(聖化)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식일 자체가 거룩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창조 때부터 그 날은 그 날의 창조주에 의하여 거룩하게 되었다”124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2장 3절의 주석에서도 루터는 “성경은 아담이 타락하기 훨씬 이전에 안식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므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일하시고 제칠일에 쉬셨을 때에 정해진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실은 도무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다”125라고 했다. (40.1)
 루터의 친구이며 후제자인 멜랑흐톤(Melanchton)도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1555년도 판(版) 신학요론(神學要論; Loci Commenes; 초판은 1521년에 나옴:역자)에서 멜랑흐톤은 아주 뚜렷하게 “아담때 부터 첫 시조(始祖)들은 그날〈안식일〉을 하나님께서 분부하신대로 일 손을 거두고 설교와 기도와 감사와 제사를 위한 날로 구별하여 지컸다”126고 주장했다. 멜랑흐톤은 안식일의 기능을 타락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타락 이전의 안식일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들 속에 “하나님의 쉼과 거처와 기쁨과 환희를 줄 수 있도록”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그리고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 부활할 때까지 무덤에서 쉴 것이며 하나님의 두번 째의 평화가 있을 것이라는 복스런 약속이 주어졌올 때 안식일이 재건되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안식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죽고 부활하는 날, 하나님이 다시 우리 속에 당신의 거처와 평화와 기쁨을 얻는 날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127 (40.2)
 이야말로 성경이 뜻하는 안식일의 의미에 대한 얼마나 심오한 통찰인가! 믿는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할 수 있도록 하는 날이 안식일인 것이다.128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당신의 거처와 평화와 기쁨”을 얻게하는 한 날이 안식일인 것이다.129 이 책은 바로 이와같은 안식일의 주제들의 연구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어떻게해서 루터와 멜랑흐톤은 한 쪽으로는 안식일을 창조의 법령으로 인식하면서 또 한 쪽으로는 그 날을 모세의 법의 하나로 간주해버릴 수가 있었는지를 의아히 여기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주요 원인은 그들이 자연법과 모세의 법, 또는 도덕적인 법과 의식법으로 나눈 아퀴나스의 분류 방식을 채택하여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40.3)
 루터가 “안식일에 대한 모세의 법들은 ∙∙∙ 자연법의 뒷바침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무효”라고 말했지만130 루터보다는 멜랑흐톤 쪽이 아퀴나스의 분류를 더 분명하게 내세웠다. 그러나 멜랑흐톤은 루터의 경솔한 진술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 아무 날도 지키지 않으려는 자들에 답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즉 “이 계명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한 부분은 언제나 교회에 필요한 보편적인 내용이며 다른 한 부분은 이스라엘의 정부와만 관련된 특정한 한 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특수한 내용이다. ∙∙∙ 이 계명의 보편적인 부분은 교회 예배의 유지라는 도덕적이며 자연적이며 항구적인 것에 속한 것이고 특수한 부분은 제칠일에 관한 것, 의식에 관한 것으로서 ∙∙∙ 이것은 우리들에게 구속력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첫째날인 일요일에 모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131 (40.4)
 이와같은 이론의 이면에 있는 논리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설교와 공공예배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일(週日)중의 어느 한 날이나 얼마의 시간을 따로 떼어놓는 원칙은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데 반하여 실지로 제칠일을 특별한 날로 삼는 일은 “오직 이스라엘의 정부에만” 관련되는 의식(儀式)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은 인간의 이성(자연법)에 의하여 발견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칠일을 의식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 만으로는 “설교와 공공예배의 업무”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얼마간의 시간을 따로 떼어 놓아야한다는 원칙도 발견해 낼수 없다는 것을 인식치 못한 행위이다.132 (41.1)
 사실에 있어서 뒤의 원칙은 네째 계명으로부터도 명쾌하게 끌어 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네째 계명에는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되어있을 뿐 그 날의 설교 예배에 참석하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출 20:10)”133 자연법에 기초된, 또는 자연법의 뒷바침을 받고 있는 십계명이라는 개념은(고전적인 윤리철학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철학의 한 조립품일 뿐이다.134 성경에 있어서 안식일과 또 십계명의 여타 계명들은 인간의 이성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에 뿌리를 둔 것이다. 인간 이성의 힘만으로도 십계명의 윤리적 가치들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가치들의 합리성들을 보여주는 것일 수는 있어도 그 가치들의 기원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41.2)
 안식일을 도덕적인 측면과 의식적인 측면 또는 자연적(창조)인 측면과 모세법적인 측면의 두 영역으로 나누는 루터교회의 방식은 두 개의 반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안식일의 가치 중 일부를 구제하려는, 정직하기는 하지만 부정당한 노력이라고 판단될 수 있다. 당시 안식일을 위협하는 한 세력은 어떤 날이든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는 급진적인 신앙지상주의자들(또는 도덕 폐기론자)이었고135 또 하나의 세력은 성일(聖日)들의 준수를 “구원에 필수적”136인 것으로 주장하는 가톨릭과 개혁파측의 계율주의 자들이었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이와같은 “가공스러운 논쟁”에 언급하면서 “이러한 오류들은 신앙의 의를 분명하게 가르치지 못하고 있던 시대에 교회로 들어왔다”고 설명한다.137 (41.3)
 루터는 계율주의와 신앙지상주의의 양 극단을 모두 피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와 같은 노선(路線)을 천명하기 위하여 신자들에게 “믿음의 의”를 이해시키고 경험케 해주는 제칠일 안식일의 가장 중요한 의미들과 기능들을 루터가 모세의 법이며 예식적인 법이라 하여 배척해버린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138 루터는 “휴식을 취하고 ∙∙∙ 예배에 출석하기 위하여 ∙∙∙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를”139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평신도들과 근로 계층을 위하여 교회가 제정한”140 한 날인 일요일을 안식일 대신으로 사용키로 작정했다. (41.4)
 자연법과 모세의 법 또 율법과 복음을 철저히 구분하는 루터의 분류 방식은 재세례파, 청교도 좌파, 퀘이커, 멘노파교도들, 루터파교도들 기타 근대의 여러 신앙 지상주의적 교파 등 급진주의적 교파들에 의하여 채택되어 극단적으로 발전되었다.141 이들이 일반적으로 내세우는 주장에 의하면 안식일은 창조의 법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현되었으며 폐지된 모세의 법이다. 따라서 기독교 시대에 살고 있는 신자들은 어느 날도 지켜야할 의무가 없게 된다. (41.5)
 가톨릭교. 16세기의 가톨릭 교회가 가지고 있던 안식일 관(觀)은 근본적으로 모세의 법과 자연법이라는 아퀴나스의 분류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 한 예를 우리는 소위 “로마 교회의 교리문답서”라고 하는 트렌트 종교회의의 교리문답서(1566)에서 본다. 그 책의 제3 부 제4 장은 안식일 계명과 그밖의 여타 계명들의 차이를 설명하여 말하기를 “십계명의 다른 계명들은 자연법에 속하며 항구적이며 불변의 것들이다. ∙∙∙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연법과 일치하며 그 자연법에 의하여 사람들은 그 계명들을 지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일과 관련된 안식일 계명은, 그날을 준수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정된 시간에 관한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확고 부동한 불변의 계명이 아니라 변화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또 이는 도덕률에 속하지 않은 예식적인 법이며 자연법의 원칙도 아니다. ∙∙∙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의 멍에로부터 해방을 얻었을 때부터 안식일을 지켰다.”142고 하였다. 결론은 “[일곱째 날인] 안식일 준수가 제거되어야 하는 시간은 다른 히브리 의식과 의식이 제거되어야 할 동일한 시간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에 폐지되었다.”143 (42.1)
 네째 계명에서 제칠일이란 세목(細目) 만을 모세의 법 또는 예식법으로 간주하는 주장의 불합리성은 벌써부터 들어나 있었다. 자연법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조상(彫像)에 대한 예배를 금지하고 있는 둘째 계명도 인간의 이성의 힘만으로는 옹호할 수 없는 계명이므로 마땅히 의식적(儀式的)인 율법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가톨릭은 자신들의 십계명에서 둘째 계명(출 20:3-6)을 삭제시켜 버렸을 것이다.144 그러나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십계명의 계명들을 받아 들이거나 배척하는 적법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가? (42.2)
 분명히 가톨릭 교회는 일요일 뿐만 아니라 다른 성일(聖日)들의 준수를 도입할 수 있는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이러한 입장을 택해왔다. 이와같은 주장들은 많은데 특히 16세기의 가톨릭 문헌들 가운데 많다.145 예를 들면 요한 엑크(Johann Eck:1486~1543)는 그와 저서 엔키리돈(Enchiridon)에서 몇몇 종교개혁자들을 겨냥하여 주장하기를 “만약 교회가 성경의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경시켜 일요일 준수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왜 교회가 다른 날들(성역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권한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가? ∙∙∙ 만약 당신들이 성일들을 생략하고 교회로부터 성경으로만 이목(耳目)을 돌리고저 한다면 당신들은 마땅히 세상 초부터 지켜내려온 안식일을 유대인들처럼 지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146라고 ∙∙∙ 하였다. (42.3)
 비록 성경의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경시킬 수 있다는 가툴릭교회의 권위를 옹호하고 있기는 하지만 엑크(Eck)가 “세상 초부터 지켜내려온”이라고 하여 안식일의 창조 기원을 여전히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것이다.147 이와같은 견해는 가톨릭의 공적 (公的) 성격이 좀더 강한 문서인 트렌트 종교회의의 교리문답서(1566)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교리문답서는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세상 창조의 일을 모두 끝내시고 그가 하시던 모든 일로부터 쉬셨기(창 2:2~3) 때문에 하나님에 의하여 출애굽기에서 그렇게 불려졌다.”148 (42.4)
 얼마후에 그 안식일은 “이 감탄할만한 세상의 창조에 대한 기념이며 표시로 선언되었다”고 설명하였다.149 이처럼 안식일을 창조의 제도이며 기념으로 솔직히 인정하는 이 입장은 같은 문서에서 “안식일의 종교적인 행사가 주일(主日)로 옮긴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하고싶어 한 것”150이라는 문구로 강조된 가톨릭 교회의 권리와 서로 대립된다.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이 미결의 모순은 개혁 교회의 전통 속에 다르면서도 유사한 형태로 재연되고 있다. (42.5)
 

루터는 율법주의와 신앙지상주의(도덕폐기론)의 양 극단을 피하기 위하여 애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노선 때문에 신자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해하고 경험케 해주는 안식일의 중요한 의미들과 기능들을 모세의 법이며 전례적인 율법이라하여 배척해버린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3.1)
 안식일 엄수주의자(Sabbatarians). 급진주의적인 개혁자들은 안식일에 대하여 두 개의 반대 주장을 추진시켰다. 앞에서 언급했던 한 집단은 구약과 신약을 구별하는 루터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나가 안식일의 준수이든 그 밖의 어떤 날의 준수이든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 임무가 완성되어 은혜의 시대로 대체(代替)된 모세의 한 제도에 불과하다고 하여 배척하였다. 그러나 또 하나의 보류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을 강조하는 칼빈의 논리를 지향한 나머지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를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를 가진 원칙으로 채택하여 장려하였다. 이 후자의 무리를 우리는 안식일 엄수주의자들 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명칭은 그들의 적들이 그들에 대하여 붙인 별명이다.151 (44.1)
 근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종교개혁 당시 특히 모라비아,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실레지아 등지에서 만만치 않은 안식일 엄수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152 실상, 가톨릭교회가 작성한 분파 집단의 목록 중 일부에서는 루터파와 칼빈파 다음에 안식일 엄수주의자들이 수록되어 있다.153 에라스므스(1466~1536)는 보헤미아에 있는 안식일엄수 집단을 언급하여 “근래에 와서 보헤미아인들 가운데 안식일을 섬기는 미신에 사로잡힌 안식일 엄수주의자들이라는 새로운 유대교도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154고 하였다. 루터 역시 모라비야와 오스트리아에 안식일 엄수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155 실제로 1538년에는 제칠일 안식일 준수를 성경을 가지고 논박하는 안식일 엄수주의자들에 대한 공개장(Brief wider die Sab bathers)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156 (44.2)
 전직 가톨릭 사제(司祭)로서 처음에는 루터교도로 활약하다가 나중에는 재세례파 목사로 활약한 오즈발트 글라이트(Oswald Glait)가 1527년 아니면 1528년에 모라비아와 실레지아와 보헤미아 일원에 거주하는 재세례파 신도들을 대상으로 하여 자신의 안식일 준수 사상을 성공적으로 전파시키기 시작하였다.157 그는 가톨릭 사제(司祭) 출신의 재세례파교도로서 학문이 있던 안드레아스 피서(Andreas Fisher)의 도움을 받았다. 글라이트는 안식일에 대한 한 소책자(Buchhenn Vom Sabbat—(1530년 경)라는 책자를 내었는데 현재는 전해지고 있지 않다. 글라이트의 이 책을 논박한 카스파르 슈벵크펠트(Caspar Schwenckfeld)의 글159을 미루어 보건데 글라이트는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을 강조하였으며 기독교 시대에도 십계명의 여전히 효력과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44.3)
 글라이트는 안식일 계명도 할례와 마찬가지로 예식적인 율법이라고 하는 비판자들의 주장을 배척하였다. 대신에 그는 “안식일이 창조 때부터 분부되어 지켜내려 왔다”고 주장했다.160 하나님께서는 “낙원에 살고있던 아담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161 명령하였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 세상이 남아있는 한은 지켜져야 할 희망의 영원한 표이며 창조의 기념이며 영원한 계약”162 이라고 하였다. 이같은 주장 때문에 글라이트는 추방되어 박해를 당하다가 결국에는 도나우(江)에 내던 지어 익사를 당해야했다(1546).163 (44.4)
 안식일 엄수 재세례파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였던 글라이트의 죽음도 안식일 교리의 전파를 중단시키지 못했다. 이 점은 종교개혁 시기에 폴란드, 화란, 독일, 프랑스, 헝가리, 러시아, 터어키, 핀랜드, 스웨덴 같은 유럽 국가에 제칠일 안식일 준수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164 17세기에 들어와서는 잉글랜드에서 이 무리들의 존재가 특히 주목을 끌었다. 이 점은 R. J. 바우캄(Bauckam)이 이미 지적했듯이 “청교도와 성공회의 대변인들이 인상적일 만큼 연속하여 제칠일을 공격하였다는 사실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다. 그들의 그와같은 노력은 17세기에 안식일의 교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으며 제칠일의 준수자들이 ∙∙∙ 청교도들과 성공회의 당국자들로부터 박해를 ∙∙∙ 받았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165 (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