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다윗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게 되었고, 다시 우리아를 권하여 집으로 가게 하였다. 우리아는 굽힐 줄을 몰랐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營寨)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留陣)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이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11절). (257.1)
 그리하여 다윗은 우리아를 다음날에도 붙들어 두었다. “다윗이 저를 불러서 저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13절) 하였다. 우리아는 그래도 양보를 하지 않았다. 그는 왕궁에서 온 밤을 지냈다. 피터 애크로이드(Peter Ackroyd)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아의 취함이 다윗의 각성보다 더 경건하다!”(Anderson, 152, Ackroyd로부터 인용). (257.2)
 그래서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쓴다. 그것은 우리아의 사형 영장이었으며, 우리아 자신이 전달하였다. 다윗의 범죄의 악마성은 더욱 명료해졌다: 요압은 공범이 되었고, 군대는 위태하게 되었고, 11:17에서처럼 다른 용사들도 우리아가 죽임을 당한 그 전투에서 함께 넘어졌다. (257.3)
 사자가 요압의 기별을 가져왔을 때, 다윗은 무분별한 반응을 함으로 자신을 더욱 깎아내렸다: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저를 담대케 하라 하니라”(25절). (257.4)
 이 장은 매우 단조롭게 끝난다: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6, 27절). (258.1)
 마지막 문장의 히브리어는 놀라운 풍자를 담고 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다윗이 한 일이 여호와의 보시기에 악하였다”(27절, 「새미국표준성경」). 이것은 다윗이 요압에게 보낸 말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것을 너의 눈에 악하게 보지 말라”(25절, 「새미국표준성경」 난외주). 그것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의 메아리처럼 들린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는다. 그들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는 마음을 보신다”(삼상 16:7, 「새개정표준역」). (258.2)
 사울과 요나단을 위한 애곡에서 다윗은 “어찌하여, 용사들이 넘어졌는고!”를 세 번이나 반복하였다(삼하 1:19, 25, 27). 그리고 지금 그것은 한번 더 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애곡의 첫 마디 곧 “오 이스라엘이여, 너의 영광이 산 위에서 살해되었도다”(1:19)가 또 사실이 되고 말았다. 만일 말을 약간 바꾼다면 더욱 예리한 내용이 될 것이다: “오 이스라엘이여, 네 영광이 지붕 위에서 살해되었도다.” (258.3)
 악몽에서 깨어남(12:1-31)
 11-12장은 다윗의 범죄에 관련된 시간의 길이를 어느 정도 일러주고 있다. 임신의 소식을 들을 때까지 몇 달이 지났을 것이다(11:5). 우리아의 죽음 후에 애곡의 기간이 지났다. 아마도 칠일간이었을 것이다(비교 창 50:10; 삼상 31:13). 그리고 밧세바가 그의 소유가 되었다. 분명히, 아이가 태어나서야 비로소 여호와께서 개입하시고 다윗을 미몽(迷夢)에서 깨우신 것 같다. (258.4)
 12장은 간단한 진술 즉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1절)로 시작된다. 나단은 바로 여행자를 위하여 가난한 집의 유일한 양을 빼앗은 부자의 이야기를 한다. 다윗은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소리치기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부자는 4배로 갚아야 한다고 했다(6절). (259.1)
 나단은 단도직입적으로 사실을 말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7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를 위하여 이루신 모든 것을 신속히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8절)고 말씀하셨다. (259.2)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나단은 다윗이 받을 이중적이 형벌을 선언하였다. 그것은 범죄에 걸맞은 선고였다. 첫째, 살인 때문에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10절). 둘째로, 간음 때문에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11, 12절). (259.3)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첫째 형벌은 우리아의 아내가 낳은 아이에게 죽음이 임함으로 실현되었고, 뒤이어 그의 아들들,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의 죽음으로 이어졌다—그 부자가 4배로 갚아야 할 것이라고 엉겁결에 대답한 것에 가깝게 이루어졌다. 한편, 탈무드의 해석은 아도니야 대신에 압살롬의 누이 다말(13:1)을 포함시킨다(Yoma 22). (259.4)
 다윗의 아내들의 공개적인 수치인 둘째 형벌은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방자한 행동에 의하여 성취된다: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부친의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니라”(16:22). (259.5)
 다윗의 고백은 단순하고, 즉각적이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12:13). (259.6)
 나단의 용서의 보증 역시 즉각적이었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13절). 나단은 덧붙이기를, 다윗이 여호와를 경멸하였기 때문에, 다윗의 범죄로 태어난 아기는 죽을 것이라고 하였다. (259.7)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하겠다. 첫째로, 다윗의 죄는 여호와의 헤세드(ḥesed)를 파하지 않았다. 언약은 여전히 건재했다. 둘째로, 언약의 보존은 범죄의 부머랭(boomerang) 효과를 감하지 못하였다. 여호와는 다윗의 형벌을 책임진 분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한 방법으로, 우리의 현대적 입장은 피가 자기 머리로 돌아간다는 고대의 명언을 확증하고 있다. 다윗의 본은 자기 자녀들에 대한 영향력을 무너뜨렸다. 여호와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다시, 다윗은 자기의 죄의 “자연적” 결과들을 거두었다. (260.1)
 그러나 구약이 죄와 그 무서운 자연적 결과 사이의 거의 피할 수 없는 관계를 확증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선하고” “순종적인” 사람과 여호와의 축복과의 관계를 깔끔하게 연결시키려는 우리의 시도들이 구약의 이야기들 속에서 잘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이 역설은 해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거의 같은 맥락에서, 신명기는 가슴을 졸이는 선택사항들을 제시한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입장은 그 민족의 크기나 선함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분의 자비와 사랑에 달려 있다(신 7:7, 8).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은 만일 백성들이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 이스라엘과의 “사랑의 언약을 지킬”(12절)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인간의 공로와 상관없이 구원할 자유를 보유하신다-그러나 죄를 보복해야 하는 그분의 책임 또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울, 매우 양호한 요나단, 꾀 많고 자기를 섬기는 다윗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고자 애쓰고 있는 것이다. 폴친의 말은 진리에서 멀지 않다: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의 공로나 죄는 일반적으로 그 구원과 상관이 없다”(David, 91).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고 말씀하시면서 같은 현상을 지적하셨다. (260.2)
 다윗에 관하여는, 온 역사의 신자들에게 그가 인기가 높은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그의 절제되지 못한 욕망 때문에 야기된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밧세바와 범죄한 후에 이룬 신속하고 정직한 회개는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고전적인 예가 되었다. 그리고 자주 있었던 보신적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건전한 정직성과, 개방성은 그의 생애 속에서 자주 드러난다. 예를 들자면, 아비가일이 그를 말려 피를 흘리지 못하게 할 때에 그는 숨김없이 얼마나 그가 음부 가까이 이르렀었는지를 인정하였고, 그녀를 보내서 간섭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양하였다(삼상 25:32-34). 자기의 부하들이 시글락에 속한 백성과 노략물을 성공적으로 회복한 후에 그들 사이에서 분쟁이 생기려는 찰나에, 다윗은 신속히, 그리고 분명하게 주요한 원칙을 제시하였다: 전쟁에 나간 사람들과 소유물을 지킨 사람들이 함께 나눌 것이다. 요컨대,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삼상 30:24). (260.3)
 나단이 왕궁을 떠난 후에 아이가 병들었다. 다윗은 즉시로 금식과 기도를 시작했는데, 자신의 신하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심하게 하였다. 그는 그에게 음식을 드리는 사람들의 노력을 꿋꿋이 거절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죽은 것을 알았을 때에, 그는 일상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의 신복들은 그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라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이가 죽은 후에도 왜 슬픔을 나타내지 않는가? 다윗은 단순히 그가 여호와의 심판이 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설명한다. 이제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삼하 12:22, 23). (2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