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장의 전반부를 구성하는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말씀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정말 율법이 죄는 살아나게 하고 우리를 죽이는 역할을 하는가? 생명에 이르게 해야 할 그 계명이 왜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가? (
7:10).
A. 전에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가 언제인가? 그래서 자아가 살아 있을 때는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 혹자는 바울이 율법을 알지 못했을 때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울이 제멋대로 살던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것을 감안하면 어릴 때부터 철저한 율법의 훈련을 받았을 테니 율법을 몰랐던 때가 있을 리 없다. 더욱이 자아가 살았다고 했으니 철이 들어 자의식(自意識)이 싹텄을 때가 분명한데 그때는 이미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율법을 훈련받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이 말은 율법을 지식적으로 몰랐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의 참 정신을 깨닫지 못하여 그 문자적 준수만을 중히 여기고 자신을 과신했던 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때 그는 자신만만 하여
“율법의 의로는 홈이 없” (
빌 3:6)다고 자랑했다. 자기처럼 살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정죄(定罪)하여 죽이려 했다. 자아가 펄펄 살아 있던 다메섹 이전의 시대였다.
B. 계명이 이르렀다는 말이 이제야 자명해진다. 계명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때이다. 즉 다메섹의 회심 이후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는 죄의 본질을 깨달았다. 메시야를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죄의 흉악함을 처절하게 느낀 것이다. 그때 죄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는지 마치 모든 죄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은 무서움과 아울러 자신의 비참 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는 죄짐에 눌려 죽게 된 자신을 발견하고 부르짖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
7:24).
C. 계명이 죄를 살아나게 했기 때문에 율법이 죄인가?
“그럴 수 없다” 라고 바울은 단호하게 말한다. 율법은 단지 죄를 죄로 느끼도록 깨닫게 해 주는 것이지 율법 자체가 죄와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율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는 율법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따라서 죽는 것도 율법이 죽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려는 율법과의 관계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고, 벗어나라는 것도 율법에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남이지 율법 자체로부터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언제나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고
“율법은 신령” 하다고 생각했다(
7:12, 14).
본문의 말씀은 바울의 회심의 경험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바울이 율법의 목적과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율법의 엄격한 준수로서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자만하였다. 그때 자아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의 목적과 의미를 깨닫자, 죄는 생생하게 드러나게 되고 그 죄의 비참함에 눌린 자아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라고 부르짖게 된다. 그것이 계명이 이르매 나는 죽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