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 성경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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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로마서 7:14~25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인가?
성경절
 로마서 7:2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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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로마서 7:14~25에는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오히려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되는 사람의 처절한 부르짖음이 들려오고 있다. 이것이 만일 바울의 경험이라면 그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 즉 다메섹 이전의 경험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된 후의 경험인가 하는 것이 문제다.

 만일 이것이 그리스도인 이전의 경험이라면 로마서 5장부터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말하다가 갑자기 이 부분에서 비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말한다는 것이 문맥상 맞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토록 죄에 대하여 깊은 통찰력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이 부분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 해도 문제는 마찬가지이다. 7장8장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8장이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들의 경험이라면 7장도 같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보기 힘들며, 7장의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서 바울이 강조한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경험과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문제다.
해석
 A. 로마서 7장의 문맥과 구조

 먼저 로마서 7장의 구조를 살펴보자, 로마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전개된다.

 첫 번째 부분에서(1:1~3:20)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처지가 얼마나 절망적이며 불의한 것인가를 밝힌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3:21~8장) 그 비참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어떻게 값없이 구원을 받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세 번 째 부분은(9~11장) 왜 유대인이 이런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하는 이유와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웅대한 구원의 섭리를 적고 있다.

 네 번째 부분(12~16장)은 구원받은 사람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권면하고 있는 명령법 부분이다.

 로마서의 첫 번째 부분(1:1~3:20)에서 바울은 복음 없이 사는 죄인들의 처지가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낱낱이 밝힌다. 사람이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의를 떠나면 곧 영적인 불의에 빠지게 된다(1:18~25), 영적인 불의는 곧 육적인 불의를 가져오게 되며,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진노와 가차없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 (2:5, 6), 그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마찬가지이다(2:9, 10).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 의인은 없으며 한 명도 없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말과 유대인에게도 심판이 있다는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로마서의 두 번째 부분(3:21~8:39)은 로마서의 핵심이며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3:21)고 바울은 선포한다. 하나님의 의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3:22)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이다(3:24). 로마서 3:21~31에서 논리적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치를 설명한 바울은 이제 역사적 근거로서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든다(4:1~25).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그들의 조상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바울이 구약을 풀어 해석하는 로마서 4장은 유대인의 성경 해석법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미드라쉬(Midrash)이다.

 인간의 절망적인 죄와 거기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설파한 바울은 이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하나 하나 설명하기 시작한다. 니그렌(Nygren)의 분석에 의하면 1장부터 4장까지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 해석이고, 5장부터 8장까지는 “살리라” 에 대한 해석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은 다음의 네 가지를 들어 차례로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나 살리라(5장),

 둘째, 죄로부터 벗어나 살리라(6장),

 셋째,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살리라(7장).

 넷째, 사망으로부터 벗어나 살리라 (8장)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5장의 전반부(5:1~11)에는 화평을 누리고 즐거워한다는 말이 반복해서 나온다. 즐거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기 때문이다. 5장의 후반부는(5:12~21) 아담과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첫째 아담의 영역에서 마지막 아담, 즉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다. 로마서 6장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부분(1~14)은 죄에 대하여 죽어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권면이고,

 둘째 부분(15~23)은 죄의 종에서 벗어나 의의 종이되라는 말씀이다.

 죄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마음내키는 대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사람은 죄에서 해방되는 즉시 의의 종이 되어야 한다. 죄의 종이든지 의의 종이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그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고 그 마지막은 영생이 된다(6:22).

 로마서 7장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왜 그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신령한 율법에서 벗어나야 하는가? 그 좋은 것이 왜 우리를 얽어매는가? 바울에게 율법(nomos)과 복음 즉 하나님의 의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인가?

 바울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반영이기 때문에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7:12)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도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는 것이다(3:31). 그렇다면 율법에 대하여 죽고, 벗어나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바울이 율법 자체를 정죄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벗어나야 할 것은 율법과의 속박 관계이지 율법이 아니었다. 무효가 된 것은 율법과의 잘못된 관계이지 율법 자체가 아니었다. 우리가 벗어나야 할 것은 무효가 된 관계 속에서 구원을 받으려는 노력이지 율법 자체가 아니다.

 로마서 7:1~6에서는 남편으로 상징되는 율법이 죽었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여기서 죽은 것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과의 속박 관계이다. 사실 죽은 것은 우리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7:4). 7:7~14은 율법의 기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율법에 대하여 죽으라고 한다해서 율법이 죄는 아니다. 율법은 각종 죄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심히 죄되게 하는 좋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룩하고 선한 율법을 사용해서 우리를 속박하고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은 죄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의 경험을 회상한다. 그는 율법에 충성을 다했다. 그 결과 그에게 이른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이고 영적인 죽음이었다. 그는 율법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죄가 교묘히 율법까지도 이용하여 그를 죽인 것이다. 로마서 7:15~251)에는 죄된 인간의 처절한 투쟁이 나온다. 일인칭 단수인 “나”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으로 봐서 바울 자신의 영적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경험이냐 아니면 그 이후의 경험이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2) 웨슬리(John Wesley)와 영국의 학자들은 이 부분이 율법 아래 있는 비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루터(Luther)와 칼뱅 (Calvin)을 비롯한 유럽의 학자들은, 이 경험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말한다.3) 지속적인 무력과 영적 갈증은 그리스도인 경험의 필수적 요소라는 것이다. 열쇠는 7장의 경험과 8장의 경험이 과연 같은가 아니면 서로 다른가 하는 것이다.4)


 B.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경험(Pre| Christian Experience)이라는 주장

 오리게네스(Origen), 웨슬리(Wesley), 바이스(Johannes Weiss) 같은 영국 계통의 성경주 석가들(British expositors)이 이 학설을 따르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 이론을 정립시키기 위하여 가장 많이 노력한 사람은 아마도 큄멜 (W. G. Kümmel)일 것이다.5) 그들은 로마서 7:14~25은 바울이 회심하기 전, 즉 다메섹 이전의 경험이라고 주장하면서 로마서 7장8장과 날카롭게 비교한다. 그들은 8:1“그러므로 이 제”7장과는 다른 경험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다는 8:2의 승리의 외침에서 가장 잘 묘사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로마서 7장은 마지막 절(7:25) 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란 말이 나타나지 않는 반면에 8장은 연속해서 그리스도 예수가 언급되는 것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요한 웨슬리는 사도 바울과 비슷한 체험을 한 인물이다. 오랫동안의 그의 내면의 투쟁과 지속적인 실패, 그리고 어느 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확신과 평화의 경험은 두 사람이 비슷하다. 웨슬리는 로마서 7장이, 그가 참된 회심을 경험한 34세 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8장은 회심을 경험한 후의 희열과 확신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의 묘사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보았다. 웨슬리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2의 말씀을 두 경험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기점으로 삼았다. “죄와 사망의 법” 이란 정확히 7장에 나타나 있는 그 당혹스런 경험을 말하는 것이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것은 그런 연속적인 실패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주석가들의 글도 웨슬리의 논거를 반사하거나 보충하는 것들이 많다. 그들은 로마서 7장8장의 분위기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점진적인 그리스도인 경험의 발전이라고 보기에는 난점이 많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들은 8:1“그러므로 이제” 라는 말이 이전의 상태와는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7:25까지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7장“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경험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는 말하기를, 만일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 죄의 권세를 깨뜨려 주지 못하고 계속 이렇게 울부짖게 한다면 구속이나 거듭남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신랄하게 묻는다.6) 가비(A. E. Garvie)는 만일 7장의 경험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의 경험이라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죄를 이기는 데 율법보다도 무력한 것이라고 말한다.”7) 스튜어트(J. S. Stewart)도 말하기를 우리가 7장에서 보는 삶의 경험은 아직도 거듭남이 요청되는 삶의 모습이라고 했다.8) 다드(C. H. Dodd)는 이것은 다메섹에서 뒤돌아 본 바울의 이전 생애라고 했으며 불트만(R. Bultmann)도 토라(Torah, 율법) 밑에 있을 때의 삶에 대한 묘사라고 말했다.9)


 C. 그리스도인의 경험(Christian Experience) 이라는 주장

 로마서 7장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경험이라는 주장이 강력했기 때문에 영국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거기에 별다른 이의 없이 지내왔다. 그러나 그 학설도 몇 가지 설명하기 힘든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로마서 7장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는 주장도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루터(M. Luther), 칼뱅(Calvin) 등은 로마서 7장을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주장했으며 최근의 학자로는 로마서 연구로 유명한 니그렌(Nygren)이 이 학설의 대표자다. 유명한 그의 로마서 주석(Commentary On Romans)에 기록된 니그렌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0)

 (1) 로마서 7:1~13은 동사의 시제가 과거이다. 그러나 7:14~25에서는 동사의 현재형이 쓰여졌다. 따라서 이 부분은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 진행된 경험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2) 바울이 7:14~25에서 묘사한 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상태 를 묘사한 것과 다르다. 로마서 1:18~3:20에서 묘사된 그리스도 없는 인간들의 추악한 모습들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처절한 영적 싸움의 묘사와는 많이 다르다. 또 빌립보서 3:6을 비롯하여 바울이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의 그의 모습은 로마서 7장처럼 격렬한 내면의 투쟁을 나타내는 모습보다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교만하게 묘사되었다.

 (3) 로마서 5~8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5장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진노로 부터 벗어난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6장은 죄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고, 7장은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다. 8장은 사망으로부터 벗어나 사는 그리스 도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왜 갑 자기 이 부분만 그리스도 이전으로 돌아가겠는가? 그리스도인 경험의 연속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4) 로마서 7장의 이 지속적인 무력과 투쟁은 그리스도인 경험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지만 육체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그런 괴로운 부르짖음이 나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여기서 벗어 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 7 장의 경험과 8장의 경험은 같은 그리스도 인의 경험이라고 니그랜은 주장한다.


 D. 레슬리 미튼(Leslie Mitton)의 중도적 해석

 레슬리 미튼은 팽팽히 맞서는 반대되는 두 학설을 분석하고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해석을 내 놓았다.11) 우선 미튼은 니그렌의 학설을 반박한다.12)

 첫 번째는 헬라어의 현재형 문제이다. 니그렌은 헬라어 동사의 시제가 현재이기 때문에 이것은 현재 진행되는 사건 즉 그리스도인의 경험 이라고 설명했지만 미튼은 역시 헬라어 지식을 사용하여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헬라어 구문론(syntax)에서는 역사적 현재(historical present) 형이라는 것이 있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이지만 그것이 기자에게 현재 일어난 것처럼 생생할 때는 과거형 대신 현재형을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13)

 두 번째로,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 언급한 그리 스도를 알기 이전의 상태에 대한 묘사가 로마서 7장과는 차이가 나기 때문에 로마서 7장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미튼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로마서 1:18~3:20에 나타난 비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로마서 7장과 다르기 때문에 전자는 비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후자는 그 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주장한 니그렌의 말은 지나친 것이다. 로마서 1:18~3:20은 죄의 보편성과 그 현상에 대해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7장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즉 로마서 1장은 일반적인 죄의 추악성을 묘사한 것이요, 로마서 7장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가책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경험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 2:14, 15에서 율법 없는 이방인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로마서 7장과 비슷한 경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빌립보서 3:6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그의 상태에 대하여 당당하게 말한 것은 그의 사도직이 공격받았기 때문이다. 즉 사람 앞에서의 방어이다. 그러나 로마서 7장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에 두 장을 서로 비교하여 다른 경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14)

 니그렌의 세 번째 논점, 즉 로마서 5~8장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경험이기 때문에 7장만 비그리스도인의 경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미튼은 역시 반박한다. 예를 들면 7:14의 기사가 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즉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는 것은 회심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묘사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로마서 7장8장에서 육에 속한 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에 로마서 7:14의 경험은 비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 보아야 하며 로마서 5~8장 중에서 극히 일부분이라도 그리스도인 이전의 경험을 말한 것이 있다면 5~8장 전체를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15)

 니그렌의 네 번째 논점은 설득력이 있다고 미튼도 인정한다.16)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항상 고요하고 거룩한 상태로 살 수 있으며 도덕적인 투쟁에서 언제나 승리만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니그렌이 지적한 대로 로마서 8장의 드높은 승리의 노래 가운데서도 탄식과 기다림은 존재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8:23). 바울도 고백하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말했으며 오직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다(빌 3:12, 13), 그는 또한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 워”(고전 9:27)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좇아가 잡아야 할 더 높은 지경이 있고 어떤 충만한 영적 상태라 해도 떨어질 염려가 없는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미튼이 의심하는 것은 이러한 끊임없는 경계와 푯대를 향한 진지한 투쟁이 과연 로마서 7장의 무력하고 패배적인 부르짖음과 같은가 하는 것이다. 미튼은 아니라고 말한다. 7장은 푯대를 향해 가는 사람의 외침이 아니라 모든 노력을 다 해보았으나 실패하고 탈진한 사람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경험이 정말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적이고도 일상적인 경험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정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되어야 할 필수적인 투쟁인가?

 로마서 7장이 회심 전의 경험이냐 회심 후의 경험이냐 둘 중에 하나를 꼭 택한다면 전자에 더 호감이 간다고 미튼은 고백한다.17) 그러나 회심 전의 경험이라는 논거에도 허점이 많이 있기 때문에 미튼은 단점들을 보완하고 두 견해의 장점만을 가지고 제3의 의견을 내놓는다.

 미튼은 7장에 거듭해서 나타나는 “나” 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어 성경에는 7:7부터 “나” 라는 말이 29번이나 나온다.18) 끊임 없이 인간 자신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7장의 마지막은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는 말로 끝난다. 헬라어 구문을 보면 내 자신이라는 말에 최고의 강조가 실린 것을 알 수 있다. 헬라어에서는 섬기노라(douleuó)는 동사형만 가지고도 내가 섬긴다라는 뜻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 “나” 라는 대명사 에고(ego) 를 쓰게 되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 라는 강조의 의미가 있고 거기에다 강조 대명사 아우토스(autos)를 덧붙이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최고로 강조된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7장은 어떤 외부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기 죄에서 승리하려는 사람의 처절한 노력과 절망을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미튼은 주장한다. 반면에 로마서 8장39절가운데 단 한 번도 (ego)라는 헬라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은 “그리 스도인 되기 이전” 의 경험이나 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의 보편적 경험이기보다는 그들이 회심을 하기 이전이든지 이후든지 간에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선한 일을 성취하려는 수많은 진지한 사람들의 절망적 경험에 대한 묘사이며, 8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망을 벗어난 사람들의 승리의 외침이라고 결론을 내린다.19)

 그러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 즉 회심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로마서 7장에 나타난 것처럼 죄를 벗어나야 할 필요를 그렇게도 절실하게 느끼고 처절한 투쟁을 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는 여전히 강한 의문으로 남는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마음의 고통과 열망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합당치 못한 일을” (1:28)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설사 양심의 고통을 느낀다 해도 약간의 선행이나 도덕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보상했다고 스스로 합리화시키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것이 (ego)를 앞세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에고(ego)를 앞세운 그리스도인이 이렇게도 진지하고 깊은 영적 투쟁을 할 수 있느냐라는 문제인 것이다. (ego) 를 앞세우면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로마서 7장과 같은 고민이 없어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비로소 자신의 참된 모습과 죄의 흉악함을 올바로 인식하고 전율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 (7:14)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 과연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릴 수도 있는가? 그렇게 탄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바울도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 (딤전 1:15)고 고백하였다. 이 말을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헬라어 동사가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핸드릭슨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는 핵심을 말했다고 본다. 과연 죄를 미워하고(7:15), 선을 행하기를 원하고 (7:19, 20), 그의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7:22), 자기 죄악을 깊이 회개하고 그러면서도 자기의 죄된 모습에 전율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외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20)


 E. 비평과 종합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정적 단서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7장8장의 사건이 본질적 으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를 추적해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서 7장8장이 단절되어 있는지 접속사로 이어져 있는지를 살펴볼 필 요가 있다. 그리고 그 접속사를 찾아내면 접속사가 바울 서신에서 무슨 뜻으로 쓰였는지 탐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과 반대되는 것을 서술하려고 할 때는 그러나 이제(nuni de)라는 접속사를 쓴다. “그러나 이제” 에 해당하는 헬라어 누니 데(nuni de)는 바울 이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이나 국면을 말할 때 사용하던 전환사이다. 로마서 3:21이 그 좋은 예다. 3:20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데 율법의 무력을 설명해 온 바울은 로마서 3:21에서 지금과는 반대되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그러나 이제(nuni de)”라는 접속사를 쓴다. 그러나 이제(nuni de)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nuni de)는 로마서 6:22에서 또 다시 쓰이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죄의 종으로 살았을 때와는 달리 하나님의 종이되는 전혀 다른 국면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로마서 3:21과는 달리 로마서 8장은 그러므로 이제(ara nun)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제”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라 눈(ara nun)은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것과 반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진술한 사실에 의거하여 한 차원 더 높은 내용을 설명하려 할 때 바울이 사용한 접속사이다. 로마서에 바울은 9번의 아라 운(ara oun)을 썼는데21) 「개역한글판」에 는 그런즉(4번), 그러므로(3번), 이러므로(2번) 등으로 번역되어 주로 전절에 나오는 말을 좀 더 확대하거나 자세히 설명하는 데 쓰여졌다.

 로마서 5:18아라 운(ara oun)은 5:17에서 언급된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을 더욱 확대 설명한 것이고, 7:3아라 운(ara oun)은 7:2에서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다는 내용을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로마서 7:21도 역시, 7:20에서 내 속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한번 더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7장8장은 반대되거나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 아니다. 8장7장의 경험보다 한 단계 높은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8장의 승리의 외침은 이 죄악 세상에서 여전히 7장의 경험을 겪어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와 용서를 확신하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7장의 고통과 참회가 있기 때문에 8장의 구원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그가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투쟁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는 율법 속에서 안주하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빌 3:5, 6) 자라고 말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자 그는 십자가 밑에서 자기의 죄됨과 무가치함을 통절하게 깨달았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졌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그의 속에 있는 옛 사람(옛 가지)의 속성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로마서 7장의 처절한 경험을 하면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옛 사람이 죽어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으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고 말하였고 그것을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으로 단언하였다. 또한 그의 파란만장한 전도 활동을 마치고 그의 신앙이 성숙한 단계에 이른 말 년에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도 여전히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 (딤전 1:15)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7장8장은 둘 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본다. 7장은 십자가 밑에서 바라보는 참담한 자기 모습이며, 8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용서와 구원에 대한 감사와 승리의 노래인 것이다. 바울의 이런 생각은 로마서 8장의 후반부에 불멸의 승리의 외침으로 잘 나타나 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3, 34).


 미주

 1. Anders Nygren, Commentary on Roman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8), 284: 로마서 7:7~25의 해석은 신약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문제는 이미 1세기에 시작되어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 이 문제는 여러 학자가 언급한 바 있다. 더 많은 정 보를 얻기 위해서는 다음의 책이나 기사들을 참고하라. G. Bornkamm, “Sin, Law and Death: An Exegetical Study of Roman 7”. Early Christian Experience (New York: Harper & Row, 1969): 87 ~104: R. Bultmann, “Romans 7 and the Anthropology of Paul”. Existence and Faith (London: Hodder & Stonghton, 1960): 173~185: D. S. Dockery. “Romans 7:14~25: Pauline Tension in the Christian Life". Grace Theological Joumal 2 (1981): 239~257: J. P. Dunn, "Rom 7:14–25 in the Theology of Paul". Theologische Zeitschrift 31 (1975): 257–73: W. G. Kümmel, Römer 7 und die Bekehrung des Paulus (Munich: Kaiser, 1974).

 3. 로마서 7:14~25의 해석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의 자서전적 기록으로 자기의 회심 전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2) 바울의 자서 전적인 기록으로 회심 후 그리스도인이 된 현재의 경험을 말한다.

  (3) 비그리스도인인 유대인의 처지를 묘사한 것이다.

  (4)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지 간에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어 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참 담한 절망을 묘사한 것이다.

  (5)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힘으로 살다가 낙망하여 지친 사람들의 경험이다.

  (6) 십자가 밑에서 자신의 절망적인 모습을 바라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C. E. B. Cranfield, The Epistles to the Romans, vol. 1 (Edinburgh: T & T Clark, 1975), 344 참고.

 4. Nygren, 187~189 참고. 

 5. 이 학설에 동조하는 학자들을 좀 더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J. A. Bengel, R. Bultman, J. Denney. C. H. Dodd, A. E. Garvie, F. Godet, C. Gore, K. E. Kirk, W. Sanday. J. Weiss.

 6. Johannes Weiss, Das Urchristentum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17). 399.

 7. A. E. Garvie. Romans, The New Century Bible, vol. 23 (New York: H. Frowde, 1901). 175.

 8. J. S. Stewart, A Man in Christ: the Vital Element of St. Paul's Religion (New York: Harper, 1935), 99.

 9.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5), 247.

 10. Nygren, 284~303.

 11. Mitton의 견해와 유사한 것에 대해서는 John A. T. Robinson, Wrestling with Romans (London: SCM Press, 1979), 82쪽 이하를 보라.

 12. C. Lesllie Mitton, “Romans vii. Recon| sidered", The Expository Times 65 (1953~1954): 99~103.

 13. Mitton, 100.

 14. Ibid.

 15. Ibid., 101,

 16. Ibid., 103.

 17. Ibid., 132

 18. 7:7, 8, 9, 10. 11,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19. Mitton, 135.

 20, William Hendricksen, 헨드릭슨 성경주석 로마서 상, 손종국 역 (서울: 아가페출판사, 1983), 310.

 21. 롬 5:18; 7:7, 21, 25; 9:16, 18; 10:17; 14:12, 19.
요약
 로마서 7장8장은 본질상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다. 그것은 두 장을 이어주는 접속사 아라 눈(ara nun)으로 증명이 된다. 7장은 십자가 밑에서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탄식하는 죄인의 부르짖음이요, 자기 자신의 죄됨과 약함을 바라보는 사람의 절망적인 경험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은 낙망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 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부르짖게 된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그런 처절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께서 주시는 승리와 자유를 체험한 사람의 경험이다. 옛 사람과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7장의 경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럴 때마다 즉각 눈을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 (히 12:2)에게로 향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고(7:25) 승리를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8장의 승리를 외칠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의 참담한 경험이 있어야 8장의 구원이 비로소 구원으로 확신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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