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바울은 율법을 몽학선생에 비유했을까? 몽학선생은 누구인가?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면 그 기능이 끝인가? 그 후에는 우리와 상관이 없는가?
A. 몽학선생(
paidagogos)은 노예로서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귀족 자녀들의 교육을 돕는 일종의 가정교사였다. 그들은 주인의 자녀들이 학교 교육에 익숙해지도록 초등학문을 가르쳤으며 학교까지 안전하게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을 수행했다. 그들은 주인의 자녀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했으며 곁길로 가지 못하도록 했고 그들을 훈련시킬 권리도 주어졌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분은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노예였고 그들의 기능은 주인집 자녀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만 필요하다는 한시적인 관계였다.
B. 왜 바울은 율법을 이런 몽학선생에다 비유 했을까? 율법의 어떤 점이 몽학선생과 같은가?
율법의 역할이 과연 몽학선생처럼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해 주는 것인가? 몽학선생이 주인의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 주면 그의 책임을 다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인도되면 율법은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가? 어떤 학자들은 몽학선생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라고 주장한다. 율법은 계속 존재하지만 율법의 정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순간 없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울이 말한 몽학선생이 율법의 정죄라고 하기에는 문맥상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 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몽학선생을 율법이라고 할 때 율법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우리에게 필요없는 것이 되는가?
C. 율법에는 의식법(ceremonial law), 건강법 (health law), 시민법(civil law), 도덕법 (moral law) 등이 있는데 짐승을 잡아 제사 지내는 구약의 모든 의식법(儀式法)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
히 9:26) 되었을 때 다 폐지되었다. 원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형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많은 관습법이나 시민법 등도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두 돌비에 친히 써서 주신 십계명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지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십자가로 오히려 더 완전케 된 법이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율법을 폐하지 못한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롬 3:31)고 말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율법은 갈바리에서 끝나고 이제는 소용없게 되었다고 말하여 구약시대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며 신약시대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율법과 몽학선생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D. 비유를 가지고 어떤 진리를 설명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고 완벽하지 못하다. 그러나 대강의 뜻은 다음과 같다. 몽학선생이 주인의 자녀를 훈련도 시키며 보호하여 안전하게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처럼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게 향하게 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 도록(
3:24) 우리를 돕는다. 이런 관점에서 율법이 몽학선생에 비유되었다. 그러므로 몽학선생이나 율법의 기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몽학선생 아래” (
3:25)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아들인 것을 잊어버리고 몽학선생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에게 순종하여 구원받으려 하는 것이다. 율법의 기능은 우리의 죄됨을 드러내어 구주의 필요성을 절감하도록 하는 것인데 그 율법을 의지하여 구원을 논하려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학교에 도착한 다음에도 몽학선생은 존재해 있지만 학생은 이제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고 교사 아래 있다.
몽학선생의 비유는 십자가 이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게 되는 것처럼 오해하기 쉬우나 율법은 십계명으로 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몽학선생의 비유는 몽학선생의 존재나 기능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몽학선생을 의지해 그 아래서 구원받으려 하는 인간의 시도가 필요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자녀됨이 분명해졌으므로 다시는
“몽학선생 아래” 살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