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 성경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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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절
문제
 떠나는 것이 흔히 말하듯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가? 바울은 정말 죽는 것을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으나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참고 있는 것인가?
해석
 A.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 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우선 바울의 죽음관과 부활관을 알 필요가 있다. 바울의 죽음관은 과연 죽으면 즉시로 영혼이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영혼 불멸설이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본문의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 이라는 말은 죽어서 영혼이 주와 함께 만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죽음관이 그런 것이 아니라면 여기서 말하는 “떠난다”는 말도 단순히 육체가 죽는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바울의 죽음관과 부활관은 고린도전서 15:51데살로니가전서 4:16에 잘 나타나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바울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 영혼이 천국에 간다고 하지 않았다. 만일 성도들이 죽어 이미 천국에 가있다면 주께서 강림하시는 날 무덤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바울은 죽음을 잠으로 보았다. 부활의 때까지 자는 것처럼 의식이 없이 쉬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부활의 날 홀연히 변화하여 썩지 아니 할 몸을 입을 것이라고 했다. 죽음을 사모하는 것은 바울의 사상이 아니다. 바울은 사망을 죄의 값이라고 생각했으며(롬 6:23), 사망을 원수라고 불렀다(고전 15:27). 더구나 사람이 죽으면 곧 바로 그리스도 곁에 있게 된다는 것은 바울의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바울은 성도가 죽으면 잠자고 있다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 한다고 말했다(고전 15:52).

 그때서야 비로소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 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 할 것이며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 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사망에 대하여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고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말한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란 것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죽으면 잠드는 것이지 주와 함께 천국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B.

 바울이 지금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소망했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8)고 함으로써 재림을 기다렸다. 그는 또한 부활을 중요하게 여겼다. 심지어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이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말하여 지금 죽음이 아니라 재림시의 부활을 대망하였다(고전 15:16-19).


 C.

 죽음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 그렇다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 이란 무슨 말인 가? 바울은 여기서 사망시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교리적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고난받는 삶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자 하는 그의 “종말적 열망” (「개역한글 판」에는 “욕망” 으로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떠난다” 라는 말은 종 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단순한 한 개인의 생물학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고 이 죄악 세상을 떠나는” 종말적 떠남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다. 바울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살아서 “이 죽을 것이” “영원한 생명에게 삼킨 바” (고후 5:4) 되는 것이다. 죽은 다음 즉시로 천국에 가서 주와 함께 거할 수 있다면 왜 죽기를 원하지 않겠는 가?

 소크라테스는 죽으면 감옥인 육체를 벗어나서 자유로운 영혼의 세계에 간다고 믿었기 때문에 기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바울이 원하는 바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좋다고 하면서도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왜 바울은 빨리 죽어 주와 함께 살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것은 떠나는 것이 단순히 이 세상의 죽음을 의미 한다면 떠나봐야 주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을 바울이 잘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떠나는 것” 이 단순한 죽음이라면 죽고 싶다는 것은 현실 도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종말은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울은 차선책으로 몸을 떠날 수 있을 때까지(종말이 올 때까지) 그 종말적 생명을 현세에서 덧입어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요약
 위의 논점을 정리하여 바울의 말을 다시 풀어쓰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탄식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소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죽어버리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죽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죽을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덧입혀져서 영원한 생명에 삼켜진 바 되기를 원하는 종말적인 떠남인 것이다. 우리가 이 죄악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주님을 직접 뵙고 함께 거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참으로 원하는 바는 이 세상이 끝나고 종말이 와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그날이다. 그러나 지금은 당장 종말이 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든지 종말이 와서 주님을 뵐 때든지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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