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재림에 관해 어떤 혼란들이 있었는가? 그것이 오늘날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A.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재림교회였다. 그 교회에는 종말론의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재림을 기다렸다. 핍박이 거세질수록 그들의 기다림도 간절했으나 급한 마음으로 시기를 정하는 문제, 그리고 그들의 삶이 규모가 없어 지탄을 받는 등 몇 가지지 문제들이 생겨났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AD 49-52) 때 세운 교회이다. 원래 바울은 아시아 최대의 무역 도시이며 모든 유통의 중심인 에베소로 직행하여 전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계획을 막으셨다(
행 16:6, 7). 그리고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하여 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인도하셨다. 유럽 전도가 급하셨던 것이다. 만일 성령께서 막지 않으셨으면 유럽 전도는 적어도 3년 이상 늦어질 뻔했다.
유럽으로 들어온 바울 일행은 첫 성인 빌립보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 AD 49년 혹은 50년에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를 방문했을 때 데살로니가는 오랜 역사를 지닌 번창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캇산드로스(Cassander)가 건설하고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 동생인 그의 아내 이름을 따서 데살로니가(Thessalonica)라고 명명하였다. 데살로니가는 전략상의 요지였으며 로마와 동방을 잇는 주요 도로인 에그나티아(Egnatia) 도로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오늘날도 이 도시는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이다.
데살로니가에는 빌립보와 달리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으며 이 회당에서 바울은 세 안식일에 걸쳐 설교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얼마나 오래 머물며 전도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 결과 유대인뿐만 아니라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 (
행 17:4)를 좇았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설립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성공적이던 데살로니가 전도는 바울이 그 도시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시장 거리의 건달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자 어려움에 빠졌고 바울 일행도 페래아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성경 본문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
1:3)를 가진 교회였다. 그들은 많은 핍박을 받고 환난이 심했지만(
살전 1:6; 살후 1:4-7) 그들의 열성 있는 믿음으로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지방에 소문이 자자했으며(
1:8), 믿음의 본이 되었다(
1:7).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간절히 기다렸다(
1:10). 그러나 데살로니가에는 바울이 염려하는 몇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종말론에 관한 문제였다.
B.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들과 바울의 권면 어느 시대이건 핍박을 심하게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은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고 거기에는 몇 가지의 극단적인 태도나 문제점들이 발견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랬다. 데살로니가전 · 후서를 읽어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바울이 염려하는 몇 가지 문 제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거기에 맞는 적당한 권면을 주려는 것이 바울이 데살로니가서를 써 보낸 이유이기도 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 이었다.
(1) 재림의 때와 시기를 정하는 문제,
(2) 재림이 가까웠다고 말하면서 규모 없이 사는 문제,
(3) 죽은 자들에 관한 염려,
(4) 재림이 가까웠다고 주장하면서도 재림의 준비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혼란.
1. 재림의 때와 시기를 정하는 문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에게 재림의 때와 시기에 관하여 물었다(
살전 5:1).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재림의 때와 시기를 알기 원했다. 그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소박한 이유 때문이었다. 즉, 주님의 재림을 더 잘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종이 집 떠난 주인이 돌아오는 시각을 알 수 있다면 주인을 맞을 준비를 더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때를 알 수 있다면 주님을 맞을 준비를 더 철저히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종들이 주인이 돌아올 시간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관심의 차원을 넘어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충실한 종의 태도가 아니다. 더구나 주인이 그 시간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못박아 놓은 것을 캐내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주인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주인이 돌아올 시간을 굳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보면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주인 맞을 준비를 좀 편히 하자는 것이다. 날마다 긴장하여 살 필요 없이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준비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에게
때(
chronos)와
시기(
kairos)에 대해 물었는데 그것은 이전에 사도들이 예수께 물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
행 1:7).
때(
chronos)라는 것은 일정 기간의 시간을 뜻하고 시기 혹은
기한(
kairos)은 한 시점을 말한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이 자세히 알도록 분명히 가르쳤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5:2) 다시 한번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배운 바를 상기시키고 있다.
첫째는 도적의 비유이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것이다(
5:2). 왜 하필이면 도적의 비유가 사용되었을까? 누구도 도적이 올 때를 예측 할 수 없는 것처럼 재림의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예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며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
마 24:36) 아신다고 하셨으며,
“때 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 (
행 1:7)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렇게
“아무도 모른다.” “뜻밖의 시간이다” 라는 예측 불가능의 측면에서 도적의 비유가 사용된 것이다. 왜 도적이 오는 것이 뜻밖의 사건이 되는가?
첫째는 도적이 밤중에 예기치 않게 오기 때문이며,
둘째는 주인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즉 깨어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 (
살전 5:6) 하라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다.
둘째는 해산의 비유이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
살전 5:3)는 것이다. 해산의 고통은 갑자기 멸망이 임하리라는 것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비유로서 구약에서도 자주 쓰이고 있다(
사 13:8; 21:3; 렘 4:31; 호 13:13; 미 4:9). 해산의 비유는 해산의 시기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는 데서 도적의 비유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그 고통이 갑작스럽게 빨리 오기도 하며 예상을 뒤엎고 늦기도 해서 그 예측 불가능성은 도적의 비유나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두 비유가 주어진 목적은, 시간을 알 수 없으니 평소에 늘 깨어 준비하고 살라는 것이다. 산월(産 月)이 가까워 오면 산모는 해산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깨어 근신하며 준비하고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바울에 의하면 그것은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
5:8) 쓰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것이다. (
고후 5:17). 사랑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행함이다. 소망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확정되는 재림의 소망이다.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또 한 가지의 극단적인 문제가 데살로니가후서에 기록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재림이 이미 임했다고 말하여 혼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열광과 동시에 두려움을 일으켰다(
살후 2:2).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염려와 부활의 소망에 대한 혼란도가 져온 것으로 보인다(
4:13). 재림이 이미 임했는 데도 부활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이미 재림하셨다는 거짓 가르침에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재림은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 즉 멸 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재림의 순서에 대해 말한다. 어떤 형태로든 배도는 각 시대를 통해 있어 왔기 때문에 여기서 말한 배도는 조직적이고도 세계적인 마지막 배도를 의미하고 있다.
불법의 사람이 나타난다는 말은 없던 존재가 갑자기 출현한다기보다는 그 정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는 말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재림 직전에 구체화될 불법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그 정체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가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
살후 2:4) 한다고 했다. 그것이 한 개인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특정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떤 개인이 갑자기 나타나 그런 일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각 시대를 통하여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있어 왔다. 그 당시 로마의 세력도 적그리스도라고 볼 수 있지만 재림 직전에 나타나야 한다고 바울이 구분한 것으로 보아 국가로서의 로마 제국은 아니다. 재림 직전에 그 정체가 구체화될 불법의 아들은 다니엘의 기록과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다니엘서에 나오는 작은 뿔의 정체와 아마도 같은 성격의 존재일 것이라고 본다.
2. 죽은 자들에 관한 염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자들에 관한 염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주의 재림이 이미 임하였다는 주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재림이 왔는데도 부활하지 않는 가족들에 대한 슬픔이 있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확실하고도 명쾌하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이는 결코 재림이 오지 않을 것이다. 재림의 때 살아남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할 것이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살아 있는 자들보다 먼저 부활할 것이고 살아남은 자들은 부활한 자들과 합류하여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
4:13-17). 바울은 여기에서 재림의 순서를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부활의 확실함과 아울러 지금 재림이 이미 임하였다는 주장의 허구를 밝힌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신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
(3) 살아남은 자들도 부활한 자들과 함께 합류한다.
(4) 그들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간다.
(5) 거기서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눈에 선명히 떠오르도록 묘사된 재림의 장면이다. 부활을 말한
고린도전서 15장에도 이처럼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확실히 부활할 것임을 밝힘과 동시에 이미 재림이 임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호령 소리와 천사장의 큰 나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하늘에서 강림하실 텐데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할 텐데 아직 부활을 본 사람이 없다. 따라서 재림이 임했다는 그들의 가르침은 거짓이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공중에서 주를 맞이하고 하늘로 끌어올려질 것이며 하늘에서 주와 함께 살 것인데 그들은 아직도 지상에 살면서 재림이 임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거짓이라는 것이다.
3. 재림이 임박했다고 말하면서 규모없이 사는 문제 사실상 데살로니가서는 재림의 징조나 시간보다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권면 한 편지서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재림이 임박했다고 말하면서 규모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규모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
살후 3:11) 자들이었다. 여기서
“규모없다” 라는 헬라어는 군사 용어로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낙오하여 대열을 흐트러트리는 군인의 행동을 말한다. 그들은 재림이 임박했다고 주장하면서 열심히 일하며 사는 것을 경멸했다. 세상이 다 되었는데 아직도 세상 일에 얽매어 사는 믿음 없는 사람들로 간주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생업에는 열심이 없고 오직 재림의 징조나 사건에만 관심을 쏟았으며 그것을 가르치는 일에 전심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규모가 없었고 그들이 비난하는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이나 소식에만 관심이 있으며 자기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적으로 삼아 교회 안에 계속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다.
이 규모없는 사람들은 열성 있고 믿음 있는 것 같으나 사실상 교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행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며 재림 자체도 조롱거리가 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휴거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끼친 영향을 돌이켜보면 그 해독을 짐작할 수 있다(1992). 그들이 자주 시기를 정하고 생업을 팽개치고 가정을 돌보지 않으며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휴거를 기다렸기 때문에 재림의 엄숙함은 조롱거리가 되고 참된 재림 기별마저 전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4. 재림이 가까웠다고 주장하면서도 재림의 준비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혼란 데살로니가 교회는 재림교회였으며 교인들은 재림신자들이었다. 그들의 여러 주장과 관심은
파루시아(
parousia), 즉 재림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사는 모습들을 결정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많은 빛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말하기를 그들에게 더 쓸 것이 없을 정도로 그들이 재림에 관한 많은 문제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
4:9; 5:1). 바울은 그들이 그들의 지식을 따라서 잘 준비하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
5:23)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종말의 마지막 사건인 재림만 생각했지 재림을 준비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근신하며 깨어 있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바울의 염려는 그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 나오는 많은 권면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세상 일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무위도식하고 규모 없게 살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으며, 주의 재림까지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교인들에게 바울은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
살후 3:12)고 권한다.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신실한 청지기는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매일의 일을 신실히 감당하면서 반드시 돌아 오실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그와 회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C.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오늘날의 재림신자들이 배울 교훈 데살로니가 교회는 재림교회이고 그 신자들은 재림신자들이었다. 그들의 경험에서 오늘날의 재림교인들이 배울 교훈들이 많을 것이다.
첫째로, 시기를 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에는 산뜻한 자극과 기대를 일으키지만 곧 실망을 당하게 되며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더 극단적인 자극을 계속해서 필요로 하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책망한 규모 없는 삶으로 곧바로 이어지게 된다.
둘째로,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 들의 삶은 건실하고 규모가 있어야 한다. 신약에서 재림을 맞이한 사람들은 다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밭일을 하다가 혹은 맷돌을 갈다가 재림을 맞이했다. 생업을 버리고 혹은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서 어떤 장소에 가야만 재림을 잘 기다리는 것이 아님을 데살로니가 교회는 잘 보여 주고 있다.
셋째로,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시간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적 삶을 사는 것이다.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느냐가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로 바꾸어져야 하는 것이다. 종말적 삶이란 시골에서 기도하며 징조를 기다리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며, 사랑으로 이웃을 위한 봉사에 힘쓰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올바른 재림신자의 삶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재림을 고대하는 재림교회였고 열성있는 믿음으로 모본이 되는 교회였다. 그러나 이 교회에 재림과 관계된 몇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
첫째는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문제요
둘째는 재림의 임박을 핑계로 규모없이 사는 삶이었다.
둘 다 재림의 엄숙함과 확실성을 훼손하는 행위였다. 바울은 도적의 비유와 해산의 비유를 들어 항상 준비할 것을 요청하지만 먼저 불법 의 비밀이 그 정체를 드러내는 일이 있어야 재림이 있을 것을 천명한다. 그리고 규모없이 사는 자들에 대해서는 일만 만들지 말고 조용히 자기의 할 일을 하라고 권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