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중에서 안식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히브리서 4장에서 저자는 안식 또는 쉼에 대해 10번 언급하는데 그 안식과 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저자는
4장의 안식론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늘 독자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곤 했다. 특히
4:9의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같은 말씀은 안식일을 현재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들어가지 못하고 아직도 들어갈 때가 남아 있는 안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남아 있는 안식은, 그래서 우리가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안식은 제7일 안식일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구절을 안식일은 어떤 한 날이 아니며 앞으로 들어가야 할 하나의 안식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까?
A. 먼저
히브리서 4:1-11의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다.
히브리서 3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모세나 여호수아가 주지 못한 안식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4장은
3장에 이어서 모세나 여호수아가 주지 못한 안식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를 설명한다고 봐야 문맥에 맞다. 그러므로
3장과
4장은 동일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시 95:7-11).
시편 95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 데 전반부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내용이고(
95:1-6),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후반부 (
95:7-11)는 광야에서 불순종하여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들면서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고 순종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B. 이러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다음은
히브리서 4장에 언급되는 모든 안식과 쉼을 분류하여 분석하고 각각의 배경과 의미와 사상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1) 먼저 신약에 나오는 “안식”과 “안식일”의 헬라어 용법은 다음과 같다.
헬라어 |
용법과 반도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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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바톤 sabbaton |
안식일 57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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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바티스모스 sabbatismos |
안식할 때 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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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파우시스 katapausis |
안식 7번, 쉼 2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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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파우오 katapaud |
쉼 1번,쉼을 주다 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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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히브리서 4장에 나오는 안식과 쉼의 용법은 다음과 같다.
헬라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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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카타파우신 ten katapausin |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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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카타파우신 ten katapausin |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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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카타파우신 ten katapausin |
저희가 네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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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카테파우센 katepausen |
모든 일을 쉬셨다 하셨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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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카타파우신 ten katapausin |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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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카테파우센 katepausen |
여호수아가 저회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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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삽바티스모스 sabbatismos |
그런즉 안식할 때가 ... 남아 있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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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카타파우신 ten katapausin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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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0 카테파우센 katepausen |
자기 일을 쉼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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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1 카타파우신 ten katapausin |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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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1-11 (1)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카타파우시스(
katapausis),
카타파우오(
katapauo)의 헬라어 형태는
“쉼, 쉼을 주다”의 뜻으로 신약에서 11번 쓰였는데 모두 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에 나온다.
창세기 2:2에서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셨을 때의 그 안식”도 「70인역」에
카타파우시스로 쓰여졌다.
“그러므로는
3장 마지막 절의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를 받는 말이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강퍅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광야에서 죽어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에 들어간 백성들도 안식을 누리지는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안식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 기업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신 12:9, 10). 그들의 마음은 그들의 여행이 끝난 후에 이르러올 안식, 각 사람이 자기 소유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그런 안식을 갈망하였다. 그러나 그 안식은 단순히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원수들이 그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 비록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여러 해를 싸워야 하였다. 요단강만 건너면 안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싸움을 위해서도 다 준비해 놓으셨다. 그분께서는 약속하셨다.
“나의 사자가 네 앞에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
출 23:20). 그러나 이 약속은 조건적으로 주어졌다. 그 약속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조건을 채우지 못했다. 그들은 끊임없는 우상숭배로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 안식의 약속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게 되었다.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의 헬라어
카타레이포메네스(
kataleipomenēs) 는 현재시제다. 이것은 안식의 약속이 현재도 계속 남아 있다는 것과 들어오라는 초청과 권고가 지금도 계속되고 진행 중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의 안식”은 어떤 물질적인 성취나 안락이 아니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얻는 영적 가나안의 경험이었다.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외부적 안락 속에 묻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의 생애를 계속하는 사람의 양심은 인생을 짐으로 만든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께 완전한 굴복을 경험하고 난 후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그의 가치관이 변한다. 그의 죄는 용서되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마침내 방황하던 그 영혼은 쉼을 얻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된 안식에 들어간다. 육적 가나안의 안식은 실패로 끝났고, 이제 우리에게는 영적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약속이 남아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광야의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아 안식에 들어가기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2)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 함이라” “우리와 같이 저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라고 하지 않고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 라고 말한 것이 재미있다. 복음의 내용은 똑같은 것이었고 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듣긴 들었지만 믿음으로 화합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오늘날 신자들은 말씀을 듣고 화합해야 한다. 그래야 유익이 있을 것이다.
(3) 4: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복음을 듣고도 믿고 화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믿고 화합하는 사람은 그 안식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들어가는도다” (
eiserchometha)는 현재형으로 벌써 들어가고 현재도 들어가며 계속해서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안식이 아직 열려 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바울이 기록하고 있던 바로 그때에도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지만 믿는 우리들은 확실히 들어간다.
믿는 우리들이 들어가는 저 안식은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믿는 자가 들어가는 안식은 단순히 휴식(rest)이나 어떤 쉼(a rest)이 아니라 원래의 그 안식(the rest in the original) 을 말한다. 원래의 그 안식은 무엇인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는 했으나 줄 수는 없었던 그 안식, 하나님께서 매 세대마다 그 안식으로 초청하셨으나 오직 믿는 자만 들어 갈 수 있었던 그 안식, 바울 시대에도
“들어가고” (to enter),
“들어가고 있다” (are entering)는 그 영적 안식은 어떤 안식이었는가?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세상의 창조, 바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안식을 주리라고 계획하고 계셨다. 이것은 창조의 6일 후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또 사람을 그와 함께 안식하도록 초청한 사실로 부터 명백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쉴새없이 일만하는 삶을 주시기 위해 창조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전 존재가 안식 속에 거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그의 피조물들이 생명의 충만함, 완전하고 만족한 생활, 그리고 일과 휴식이 가장 적당히 조화된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외부적인 성취가 환경의 변화에도 불변하는 안식, 영혼의 안식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
마 11:28) 라고 말씀하실 때 의미하신 안식이다. 분명히 안식은 일과 마찬가지로 그의 프로그램의 한 부분이었다. 네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에 굴복시키라. 그러면 그는 너에게 안식 - 너의 영혼을 위한 안식, 그리고 방황으로부터의 안식 - 을 주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4) 4:4, 5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세상을 창조하실 때 주신 안식 그것은 곧 제7 일 안식일에 잘 나타나 있다. 영원한 안식과 제7 일 안식일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안식은 제7일 안식일의 안식이 그 원형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의 주제를 논의하면서
창세기 2:2의
“하나님이 제칠일에 모든 일을 쉬셨다” 라는 대표적인 안식일 구절을 인용함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들어가려는 안식의 기원을 창조 주일의 제7일에 있었던 하나님의 안식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 심지어 안식일을 기억하는 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의 하나님 인줄 알게 하리라” (
겔 20:20)라고까지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안식의 원형을 제7일 안식일에서 찾으시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진술들은 안식일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중요하며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야 할 우리에게도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제7일 안식일에 그렇게도 관심을 쏟으시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데 불순종하는 백성들은 마음을 강팍케 하고 그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5) 4:6-8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순종치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준비해 주신 안식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아직도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안식에 들어갈 자들은 남아 있다. 바울은 여기서 독자들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한 가지 의문에 답하고 있다. 즉 모세는 안식을 주지 못하였지만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았느냐 하는 질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 가서도 계속되는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오랜 후에 다윗 시대에 다시 마음을 강팍케 말라는 것은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지 못했다는 증거다.
(6) 4: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그러므로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 왜 여기서만 유일하게
삽바티스모스(
sabbatismos)를 썼을까?
삽바티스모스는 이곳에서만 나오는 단어로서
“안식”(
katapausis)과는 달리
“안식일의 준수” 혹은 안식일을 지킴" 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 용어는 풀루타르크(Plutarch)에서도
“안식일의 준수” 라는 뜻으로 나타나고(Superst 3 [Moralia 1662]), 기독교 문서 중 네 곳에서도
“제7일 안식일의 축제” 라는 뜻으로 나타나고 있다(Justin Dialogue 23:3;
Epiph. Panar. haer. 30. 2. 2:
Martyrdom of Peter and Paul. ch. 1:
Const. Apost. 2. 36. 2).
그러므로
4:9의 정확한 뜻은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준수하는 것) 남아 있도다.” 문맥으로 보거나 언어학상으로 보아도 이 말은 여기서 제7일 안식 일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4:9에서도
“안식” 이라는 일관된 용어 대신에 일부러
삽바티스모스라는 유일하고도 특수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에서 제7일 안식일의 준수가 하나님의 안식과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는가를 보여 주려 하고 있는 것이며 그 안식일의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7)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즉 그리스도를 만나고 순종하여
삽바티스모스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쉬신 것처럼 자기 일을 쉰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쉬 셨는가? 여기서 기자는 다시 한번
창세기 2:2의 제7일 안식일을 언급하고 있다. 아담과 하와의 첫날은 안식일이었다. 그들의 인생의 첫날 아담과 하와가 본 하나님의 모습은 일곱째 날에 안식의 쉼을 누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무거운 의무와 일에서 그들의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안식으로부터 그들의 첫날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진수이었고 참된 안식의 기원이었다. 그러므로
4:10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가 주시는 안식에 들어간 자는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신 것처럼 제7일에 자기 일을 쉰다.
(8)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 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 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지금까지 말한 것의 총 결론이다. 안식은 미래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믿는 자들이 들어가는(
4:3) 현재적 경험으로 제시되며 그것은 또한
“들어가고”,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도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지금의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보다 먼저 복음을 받았으나 불순종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한 이스라엘의 전례를 밟지 말아야 한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히브리서 3장과
4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사람에게 주시고자 예비하셨던
“영원한 안식”에 대해 논하고 있다. 사람은 타락으로 그 안식을 잃었다. 모세도 그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하였으며 여호수아도 그 안식을 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안식의 약속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과 순종으로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미 믿는 자들이 들어갔고 지금도
“계속 들어가고 있으며,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4장에는
“안식”에 대한 분명한 세 개의 개념이 나오고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바라던 안식 즉
“가나안의 안식”이다. 그것은 얻지 못했다. 배반과 우상숭배 속에서 모세도 주지 못했고 여호수아도 줄 수 없었다.
둘째는 영적 “가나안의 안식"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안식이었다. 그것은 참된 믿음과 순종 속에서 얻어지는 그리스도께서만 주실 수 있는 안식이다.
셋째로 그 참된 안식의 원형을 히브리서 기자는 제7일 안식일의 안식에서 가져오고 있다. 모든 참된 안식은
“제7일 안식일의 안식”의 안식이 그 원형이며 불가분의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제7일 안식일을 준수(
삽바티스모스)하여 그 안식을 맛보고 그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