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어떻게 시험을 기쁘게 여길 수 있는가?
시험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왜 기쁘게 여기라고 하는가? 믿는 사람에게도 시험이 오는가?
A.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말은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주기도문의 내용과 반대되는가? 아니다. 이것은 패러독스(paradox)나 풍자가 아니다.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탄원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는 시험을 자초하지는 않는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피할 수 없는 시험을 만나면 실망하지 말고 오히려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믿는 사람에게도 시험이 오는가? 시험은 누구에게나 이르러 온다. 이 죄악 세상에서 그 누구도 시험을 피할 수는 없다.
B. 시험을 만나면 고통스럽고 힘들다. 그런데 야고보는 왜 기쁘게 여기라고 하는가? 그리스도 인에게는 어떤 가혹한 시험 (
페이라스모스,
perasmos)도 믿음의 시련(
도키미온,
dokimion) 이 된다(
1:3). 믿음의 시련이라고 할 때 시련은 헬라어로
도키미온이라고 하는데 금을 제련할 때 쓰는 말이다. 연단이나 순수함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신앙이 없으면
페이라스모스(시험)는
페이라스모스(시험)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페이라스모스(시험)를
도키미온(시련)으로 바꿀 수 있다. 그 시험이 금을 제련하듯 이 우리의 품성을 변화시키고 순수하게 만드는 것이다. 불행이 오히려 축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비밀이요, 그리스도인의 기쁨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
벧전 1:7)이라고 말한 것이다.
C. 그뿐만 아니라 믿음의 시련은 다시 인내를 만들어 낸다(
1:3).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믿음을 통해서 참아낼 수 있는 인내가 생기는 것이다. 성도의 인내는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
1:4) 만들어 준다. 믿음의 시련으로 만들어지는 인내가 우리의 성품을 온전케 만드는 것이다. 야고보는 다시 한 번 강조하여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기쁘게 여기라” 보다 한층 더 나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런 과정을 거치고 마침내 승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것이기 때문이다(
1:12). 바꾸어 말하면 시험 없이는 우리를 단련시키는 믿음의 시련도 없을 것이요 인내도 없고 성품의 온전함도 없고 생명의 면류관도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 된다. 이렇게 시험은 그리스도인에게 좌절이 아니라 오히려 면 류관을 얻을 하나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길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시험은 그리스도인에게 실망을 주는 대신 오히려 복이 되기 때문에 기뻐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시험을 믿음의 시련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비신앙인들과 다른 점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시험은 시험일 뿐이고 상실은 상실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시험 자체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시험을 우리를 연단하는 믿음의 시련으로 바꾼다. 믿음의 시련은 우리에게 인내를 주며 그 인내는 우리의 온전한 성품을 위하여 필수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통하여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