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경절은 신약에서 가장 해석하기가 어려운 난해구절에 속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영혼불멸의 근거가 되는 성경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언뜻 보면 이 성경절은 예수께서 영으로 부활하셔서 지옥에 있는 노아 당시에 멸망했던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전도하신 것으로 잘못 해석할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첫째 노아 당시의 사람들의 영혼이 예수님 부활 당시까지 지옥에 있었다면 분명히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다. 그들의 육체는 홍수 때 멸망당했지만 그들의 영혼은 불멸이라는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죽는 사람들도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각각 천국과 지옥에 간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이미 죽은 사람에게 다시 복음이 전파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 두 번째의 기회가 오느냐 하는 문제다. 만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실제로 노아 당시에 멸망당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면 그것은 영혼이 불멸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옥설의 중요한 기본 성경절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천당과 지옥에 간다는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구원받을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A. 시도된 해석들과 그 문제점들
(1) 첫 번째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육체는 요셉의 무덤에 두신 채 자신의 영이 지옥에 가서 노아 시대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전도하셨다는 해석이다. 비록 이것은 연옥설의 근거가 되고 또 역사적 지지를 받아왔지만 위에서 밝힌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이 남아 있다. 즉 죽은 다음에 영으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영혼불멸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호하며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는 연옥설이 성경의 전체 적인 교리와 위배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2) 두 번째 해석은 이 부분을 침례에 대해 설명하려고 침례를 상징하는 노아 방주 이야기와 침례의 정의를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홍수와 물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럴듯한 설명이지만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전혀 침례가 아니며 갑자기 이곳에서 침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베드로의 의도가 아닐 것이다. 또한
3:20은 노아 홍수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멸망받았다는 이야기이지 침례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내용은 전혀 아니다.
(3) 세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전, 노아의 날에 죄악의 옥에 갇혀 있던 불쌍한 그 당시의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성령으로 복음 을 전파하였으나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명이었다. 이 이론은 다른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 가장 좋은 해석인 것처럼 보이지만 왜 고난받는 수신자들에게 노아 방주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야만 된다.
B. 어느 성경절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책 전체의 배경과 저자의 기록 목적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 그 글을 읽을 수신자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도 숙고해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자가 왜 그런 내용을 기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저자가 의도했던 원래의 의미도 파악할 수 없다. 더구나 앞뒤 문맥을 생각지 않고 해당 구절만 떼어 내어 해석하려고 할 경우 엉뚱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베드로전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베드로가 목회자적인 심정으로 쓴 편지서이다. 그 당시 교회는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시련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인들이 오히려 득세하고 잘 되는 것처럼 보였다. 충성스럽게 살려고 애쓰지만 몰려오는 시련으로 구원의 확신도 흔들리고 상심하여 신앙 생활까지도 약해진 신자들을 위하여 베드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로 들어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애매한 고난(
2:21-25)과, 불의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3:18-22)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오히려 기뻐할 일이며 (
4:12-19),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잠깐 고난을 받는 우리들을 온전케 하실 것임을 말하므로 (
5:10, 11)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한다. 따라서 베드로전서의 모든 내용은 이런 고난과 핍박이라는 배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C. 3:18은 헬라어 성경에서 왜냐하면(
hoti)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3:18 이하는
3:17의 설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3:18-22은
3:17의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낫다는 구절을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선을 행하지만 여전히 고난과 핍박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당시의 성도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생기는 고난이 당시에는 참기 어려워 보이나 반드시 열매를 맺고 만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예를 들어 설명하려는 것이다.
3:18의 “그리스도께서도" 라는 문구가 그리스도 께서도 선을 행하셨으나 고난을 받으셨다는 예를 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D. 그렇다면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뜻은 무엇인가? 우선
“영으로 부활하셨다”의
“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자. 여기서
“영”이란
“육체”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자신이 영이 아니라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
눅 24:39), 그렇다면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성령을 영으로 표현하였다.
요한복음 14:17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영으로 소개하시기 위해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도행전 2:17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라고 말씀하셨다.
로마서 1:4에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말은 성령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E. 예수께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하셨다고 하는데 옥에 있는 영들이란 누구일까?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 (
3:20)이다. 그러면 그들을 왜 감옥에 있다고 했는가? 옥이란 지옥을 의미하는가? 성경에서 옥(獄)이란 어떤 공간을 뜻하지 않고 영적인 의미로 쓰였다. 즉 성경에서 옥이란 이 죄악 세상을 상징하는 데 쓰였다. 그 한 예로 다윗은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
시 142:7)라고 하였다. 여기서 다윗이 의미하는 옥이란 실제의 감옥이 아님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그곳은 주의 이름을 감사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곳이요 포위된 곳이다.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보면 옥은 절망적인 이 죄악 세상이기도 하고, 아울러 불의와 욕망으로 얽혀 있는 죄의 감옥이기도 하다.
F. 예수께서 언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는가?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 (
3:20)이다. 예수께서는 만질 수 있는 육체로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지(
행 1:3) 지옥에 다니시면서 영들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노아 당시에 노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령과 함께 노아를 통해 복음을 친히 전파하셨으나 구원 받은 사람은 겨우 8명이었고 그외는 다 물로 멸망을 당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일하셨을지라도 그 결과는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그런 고통을 참으셨는데 하물며 고난의 대가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낙망해서야 되겠는가.
G. 이제는 우리 앞서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노아 당시에 멸망의 상징이었으며 사람을 멸망시키는 도구로 쓰여졌던 물이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었다. 즉 물로 받는 침례이다. 이런 불의와 고통을 당하신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우리는 이제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
베드로전서 3:17-22에서 베드로가 노아 홍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침례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물 이야기를 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그의 주제는 한결같이 선을 행하면서도 고통받는 성도들의 고난이며 더 심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예를 들어 성도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려는 생각뿐이다. 고난받을 이유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온다고 너무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부활시키신 강력한 성령으로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불의를 당하신 그리스도가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불의를 이긴 우리들도 하늘에 올라 영광을 누리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