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를 주신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반대되는 것이 아닌가?
A. 이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그 비유에 대한 설명 사이에 기록되어 있다. 만일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하여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상식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도 어긋난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목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결과로 해석한다. 즉 비유로 말하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게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마 13:13)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본뜻일 것이다.
B. 본문 말씀의 참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 말씀과 대구가 되는 구약과 다른 복음서의 말씀을 참고해야 한다. 이 말씀은
이사야 6:9, 10을 인용한 단축형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사야 6:9, 10은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백성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가장 완전히 인용하고 있다(
마 13:14, 15). 이사야서와 마태복음은 백성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듣기에 둔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그들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일차적인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는 말씀이다.
C. 그러나 마가복음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저희로 하여금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언뜻 생각하면 깨닫지 못하는 책임은 완악한 그들에게 있다는 마태복음의 말씀과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마가복음의 기사는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첫째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 시대의 언어는 흔히
“결과가 마치 목적”인 듯 이해 되곤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확한 현대어 해석은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해야 원래의 뜻에 가깝다.
둘째로. 마태복음의 해석처럼 그들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완악한 바리새인들과 그 추종자들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된 것이다.
셋째로,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셨다”라고 번역하는 것을 옳다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의 공격성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비난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다. 비유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인상적이고도 효과적인 진리의 전달 방법이 되었으나 완악한 사람들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여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없도록 막는 완충 작용을 해주었다.
마가복음의 이 난해한 말씀은 배경이 되는 이사야서를 안용한 마태복음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 된다. 즉 깨닫지 못하는 책임은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의로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완익한 그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유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인상적이고도 효과적인 진리의 전달 방법이 되었으나 완익한 사람들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여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없도록 막는 완충 작용을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