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 간청한 강도는 그날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갔는가? 사람이 죽으면 즉시로 천당이나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는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3일 후 예수께서는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다”고 마리아에게 말씀하신다(
요 20:17). 영혼불멸설 에 의하면 예수 같은 이는 죽자마자 천당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을 텐데 왜 아직 가지 못하였다고 했는가?
A.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좌우편 강도들은 처음에는 군중들과 함께 예수를 모욕하였다. 그러나 그중에 한 사람은 점점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고 마침내 흉악한 자기 죄를 깨달았다. 그리고는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간청하였다. 행악자의 이 소원을 예수께서는 시원스럽게 들어 주셨다.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지금 십자가에 달린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구원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문제가 되었는데,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가 그것이다. 십자가의 강도가 그날 당장 천당에 갔는가? 그렇다면 예수는 왜 며칠 후에 아직도 하늘에 가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가?
B. 이 문제를 중요한 주석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성경 해석에 참고하고 있는
그랜드 종합주석은
누가복음 23:43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강도에게 “오늘 즉 십자가에서 운명하면 곧바로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는 낙원이 성도가 사후에 곧바로 가는 처소임을 암시한다. 즉 낙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개별적으로 사후에 가서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과 함께 부활하여 영육을 다 가진 존재로서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머무르는
“중간기 처소”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낙원에서 사후의 성 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랜드 종합주석, 13:520).
이 주석은 많은 문제점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갈 때까지 임시로 중간 장소인 낙원에 가 있는다는 것은 성경에 전혀 근거가 없는 교리로서,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연옥을 생각케 한다. 육체 없는 영혼들만 배회하면서 마지막 구원을 기다리는 낙원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왜 필요할까? 더구나 예수가 강도에게 분명히 약속 하시기를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예수께서도 천국에는 못 가고 그 영혼만 낙원에 가서 대기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가 강도에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약속하신 것은 확실한 구원을 약속한 것이지
“네 영혼만 낙원에 가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말 씀은 아님이 틀림없다.
요한복음 20:17, 즉
“나 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는 구절을
그랜드 종합주석은 어떻게 해석했을까?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그 해석은 싱겁기 그지없다. 만지지 말라는 말은 내가 하늘에 가서 할 일이 많으니 나에게 매달려서 하늘에 못 가도록 말리지 말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부활 한 후 처음으로 만나 그저 놀라기만 했을 마리아가 예수님이 하늘에 못 가시도록 붙들었을 리도 없을 뿐더러 예수는 부활한 후 40일이나 함께 있었기 때문에 위의 해석은 적절하지 못하다.
호크마 주석 역시
“오늘”과
“낙원”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낙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을 소개하고 있으나 저자는 천국과 낙원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 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 구원의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오늘 낙원에 간다”는 말의 구체적 의미는 말하지 않고 있다(
호크마 주석, 3:672).
헨드릭슨 주석은 중간 상태인 낙원을 인정하지 않고 천국과 낙원은 같은 말이라는 것을
고린도후서 12장을 예로 들어 분명히 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말한다.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최고의 하늘이다. 다시 말하면 천국이다. 그런데 12:3에서 바울은 그곳을 낙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요한계시록 2:7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일 낙원이 천국이 아니고 영혼들이 육체를 만날 때까지 대기하는 중간 장소라면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은 어울리지 않는다. 육체가 없는 영혼들은 생명나무 과일을 먹을 수 없다. 이렇게 헨드릭슨 주석은 낙원이 곧 천국임을 잘 밝히고 있지만
“오늘” 에 대해서는 역시 다음 과 같은 약간 애매한 표현으로 설명하고 만다.
“그는 먼 미래의 축복을 구했다. 그러나 그는 바 로 이날에 속하는 약속을 받았다. 예수는 '오늘 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
누가복음, 하권, 408). 핸 드릭슨은 아마도 오늘 낙원에 갔다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오늘이란 말은 즉각적인 구원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C. 예수께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한 그날에 낙원에 가지 않았으므로
“오늘” 이란 말은 그날에 낙원에 갈 것이라는 말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늘은 여기서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 헬라어는 원래 구두점이 없고 단어의 순서 역시 문장 중 어느 곳에 두어도 되는 언어이기 때문에 때로는 혼란이 오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은 앞의 문장
“네게 이르노니” 에 붙을 수도 있고 뒤의 문장
“네 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에 포함될 수도 있다. 여기서는
“오늘”이 앞의 문장
“네게 이르노니”에 붙는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즉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 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오늘(지금 당장) 약속하는데 그 나라에 임할 때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한 말씀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강도에게 죽은 후 오늘 당장 낙원에 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날 낙원에 가지 않고 무덤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이것은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의미이다. 즉 구원을 즉각적으로 선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