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날에 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말한 방언은 과연 무엇인가? 왜 다른 은사도 많은데 하필이면 방언의 은사를 그때 주셨는가? 지금도 그때처럼 방언을 해야 하는가? 지금 교회들에서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과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A. 방언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령 침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첫째 증거는 방언(方言)이라고 확언한다. 그리고 사도 행전에서 몇 가지 증거를 들고 있다.
첫째, 오순 절날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그들은 성령 충만의 표적으로 방언을 했다(
2:4).
둘째, 고넬료의 가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때 그들 이 방언을 했다(
10:46).
셋째, 에베소 교회에서 바울이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
19:6) 하였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서 성령 충만의 외적 표적의 공통 분모였던 방언이 오늘날 성도들의 성령 충만한 체험의 외적인 표적이 된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방언은 성경적으로 확증된 성령 충만한 체험의 강력한 외적 표현 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 중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으로 방언의 은사, 신유의 역사를 들 수 있고, 또한 일반적으로 성령 침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는 방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성령 운동을 연구할 때 가장 깊이 연구해야 할 문제가 방언 현상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성령 은사를 강조하는 교회의 신자들 사이에서 방언의 역할과 위력이란 대단한 것이다. 방언은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외적인 우월감을 고취시킨다. 억눌리고 찌든 사람들에게 방언은 그들의 지위를 놀라울 만큼 짧은 시간에 격상(格上)시켜 주는 마술 상자 같은 것이다. 사회에서나 교회 안에서 힘없고 약하고 무식한 사람이 방언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놀라움과 부러움과 주목을 받아 새로운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방언이 과연 성령 충만의 첫째 외적 증거라 할 수 있는지 고찰해 보는 것은 성령 운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라 하겠다.
B. 방언은 과연 하늘의 언어인가?
그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인가?
사도행전 2 장의 방언과 현대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껄임 같은 방언은 같은 종류인가?
방언은 유익한 것인가?
해로운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방언하기를 원하시는가?
원하시지 않는가?
이런 어려운 문제들은 성령 선물 운동이 오순절 교회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대부분의 교회들을 유행처럼 휩쓸었던 지난 몇 십 년 동안 많은 진실한 기독교인들을 당혹하게 했던 문제들이었다. 그것은 또한 많은 지성적인 비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회의와 환멸을 느끼도록 하는 요인도 되었던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방언 현상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충만하게 임했던 오순절 때였다(
2장), 구약에 방언이라고 언급된 것들은 다 어떤 민족의 언어나 외국어들을 의미했다(
창 10:5, 20, 31; 느 13:24; 단 1:4),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제자들이 말한 방언도 다 외국어 방언이었다. 오순절에 최소한 15지역 이상에서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향 말로 위대한 복음을 듣고 놀라 소리쳤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2:8).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이 맨 처음 받은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울이 성령의 은사 중 제일 마지막에 두거나 아예 생략해 버리기도 했던(
롬 12:6-8; 엡 4:7-11) 방언이었다. 그것은 방언의 은사가 그 당시 환경에서 가장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하여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 (
2:5) 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심과 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새로운 구원의 도리를 전 세계에 전할 다시 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어의 장벽이 있었다. 유대 땅을 떠난지 오래되고 타향에서 태어난 유대인들(
2:8)과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이 언어의 차이는 복음 선포에 큰 장애가 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적적인 방법으로 사도들의 부족을 보충하셨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일생 동안에도 성취할 수 없었던 일을 그들을 위하여 행하셨다. 사도들은 저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의 방언을 정확하게 말함으로 이제 해외에 복음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었다.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하나님의 큰 일”은 그들의 모국어로 강력하게 전파되었다. 그것은 잠시 동안이나마 언어의 혼란을 하나로 통일해 버린 바벨탑 이전으로의 회복이었다. 이것이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방언의 은사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한 사정 아래서 주신 특별한 은사였다.
방언은 오순절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는 없었던 은사였다. 그리고 사도시대 이후로부터 19세기까지는 보편적으로 방언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방언 은사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따라 오순절에 주어진 것이라면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거두어 가실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오순절의 순수한 방언을 오늘날에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방언이 오늘날 보편적으로 필수적 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수 있다.
C. 방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신 후 방언을 말하였으므로 (
2:4; 10:46; 19:6) 오늘날 성령 침례를 받은 사람들도 방언을 말하는 것이 당연히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도행전의 세 경우는 다 방언이 주어질 만한 중대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다. 오순절의 방언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도의 목적과 아울러 하나님께서 성령의 강림을 강하게 인상 짓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방언(
10:46)은 이방인을 꺼려하고 하나님의 뜻에 회의를 가지고 있는 베드로 일행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차별 없이 유대인과 똑같은 성령을 내려 주신다는 것을 강하고 확실하게 알리시기 위하여 주셨다.
에베소 교인들(
19:6)은 요한에게 침례만 받았을 뿐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설명해 주고 안수하여 성령을 받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체험을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의 체험과 연결시키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침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방언을 말해야 된다는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성령 충만이 있었으나 방언 현상이 없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4:8; 6:5; 7:55; 9:17; 13:9, 52). 오순절에 3,000명이 믿었으나 방언을 했다는 말은 없다. 5,000명의 회심에도 그런 언급이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바울은 기독교 교리의 정수를 말하면서 로마서에 단 한 번도 방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보다 후대에 쓰여진 로마서 (
12:6)와 에베소서 (
4:11, 12)에는 방언의 은사가 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기도를 가장 많이 드리신 예수께서 방언으로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D. 문제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 현상이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오순절의 방언과 같은 성질의 어떤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당시 희랍신들의 제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황홀 상태의 지껄임이 었는가 하는 것을 명확히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바울 자신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한결같이 방언에 대하여 글롯사(glossa)란 헬라어를 써서 일단은 구분하는 것을 피했다.
고린도가 국제 무역도시였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주워들은 외국어를 연결하여 방언이라고 자랑했는지도 모른다. 또 이교신 제사에 익숙했던 이방인 개종자들이 황홀 상태에서 나오는 지껄임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하면서 영적인 능력을 과시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것이 외국어이든 열광적인 지껄임이든지 간에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모두 다 성령의 은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지럽고 소란스러웠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책망한 바울의 편지에서도 증명이 된다.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교회에서 ...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 보다 나으니라” (
고전 14:7, 9, 19).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일부 방언 현상을 찬성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방언이든지 간에 그 결과가 걱정스럽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이 성령 충만의 결과가 아님이 확실하므로 바울은 찬성할 수 없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바울이 사실상 고린도 교회의 일부 방언을 금하고 싶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잘라 말했다.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
고전 14:19). 그것은 그들의 방언은 성령 충만의 결과도 아니며 쓸데없으니 하지 말라는 책망의 완곡한 표현이다.
E. 그렇다면 바울은 왜 문제가 되는 표현들, 예컨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
고전 14:5, 14, 39) 같은 애매 모호한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들에 대한 바울의 부모 같은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이차 전도 여행 때 일년 반이나 머물렀던 사랑하는 교회였다. 에베소에서 3년간 머물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어지러운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과 슬픔에 잠겨
“많은 눈물로” (
고후 2:4) 고린도전서를 기록해 보냈다. 바울은 자기 편지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파가 많은 고린도 교회에서 연약하고 일시적인 실수를 저질렀던 형제들이 매도되고 정죄될까 두려웠다.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
고후 2:7) 하는 것이 바울의 심정이었다.
그는 심지어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고후 7:8). 그러므로 바울은 엄하게 방언을 금지하고 꾸짖고 싶었지만 그의 이런 사랑과 염려 때문에 직접 보지도 않은 방언같은 미묘한 현상에 대해 직접적인 질책을 하는 것을 피하고 완곡한 표현을 쓴 다음, 그가 직접 가서 그가 들은 말마다 사실 여부를 확정” 하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고후 13:1). 바울은 그래서 내가 갈때 까지는
“금하지 말라”는 아주 소극적이고 걱정스 러운 한 마디를 덧붙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현대 교회들이 성령의 침례를 받은 증거로 강조하는 방언을 과연 필요로 하시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즐기기 위하여 꼭 방언을 할 줄 알아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비정상적인 방언 현상이 과연 성령 충만의 증거일까?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많은 성경 학도들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지껄이는 방언은 거의 모든 종교에 공통된 원시적인 일반 현상으로서 언어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언어적 특징이 전혀 없는 생명 없는 소리요 허공에다 외치는 공허한 자기 소리일 뿐이다. 모든 은사 중에서 특히 방언의 은사가 가장 모방하기 쉬운 것이었다. 발성 기관은 하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방언 현상은 희랍신의 축제나 강신술, 몰몬교, 힌두교, 그리고 이슬람교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분명한 것이었다. 헛소리로 표현된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뜻이 있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런 비정상적으로 지껄이는 방언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고 분명히 믿을 수 있다. 방언으로 해야만 하나님께서 인상깊게 들으시며 기도의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큰 오해이며 불신이다. 오늘날의 소위 방언은 통역을 세워도 어지러운 언어의 분열이요 무질서의 표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정상적인 소음 속에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방언이 전혀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여 성령의 은사를 제한시킬 필요도 없다. 오순절과 같은 방언 현상은 특수한 사정과 환경에서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현대의 방언은 삽시간에 전 세계에 퍼져 나가는 신문, 잡지 등 출판물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식간에 온 세상에 전달하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수백 개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