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3 장 — 그리스도와 모세
 제 3장은 자연스럽게 1절에서 6절7절에서 19절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첫 부분은 그리스도와 모세를 비교 대조하였고, 둘째 부분은 광야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논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주제는 4장까지 계속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크게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모세의 법이라고 알려진 율법을 주었다. 그는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백성을 위하여 중보하였다. 그는 성소를 지었고, 하나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그에게 말씀하셨다. 랍비들은 모세의 영혼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영혼과 맞먹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또한 우리의 랍비 모세라는 칭호가 허브리어로 그 수치가 613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란 글자의 수치와 일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본장의 후반부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논하고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광야로 인도해 내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사십 년간 방황하였다. 그는 결코 그들을 출발할 때에 한 그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들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들의 잘못이었다.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였다. 그래서 불신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다.

히 3:1-6 (3:1-6)
 이 절들은 그리스도의 일과 모세의 일을 비교 대조한다. 그렇게 함으로 사도는 모세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지 않고 그의 신실함을 칭찬한다. 그리스도와 모세는 함께 집을 지었고 둘다 그들의 일에 충성하였다. 그러나 둘 중에 그리스도가 더 컸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 집안에 아들인 반면, 모세는 종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앞에서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나으심을 보여준 것 같이 이제는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는 구주의 지상 이름이다. 그리고 신약에서 사용될 때는 일반적으로 그분의 성육신되신 신분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는 그 분의 신성을 가리킨다. 예수는 그분을 사람의 아들로 소개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한다. 3장 1절에서와 같이 두 이름이 함께 사용될 때 그것은 신인(神人)이시며 우리의 구주요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절에서 우리는 그분이 특별히 사도이시고 대제사장으로써의 지위에 계심을 깊이 생각하도록 권고 받는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이다. 비록 여러 곳에서(요 5:24; 6:44; 17:3) 그분은 보냄을 받은자로 언급되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사도란 이름으로 불리운 곳은 오직 여기 뿐이다.

히브리서 3: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충성하기를 ··· 모세가 한 것과 같으니
 저자는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비교 대조하면서 그분을 모세의 원형으로 소개한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모세가 사도나 제사장이 아니었을지라도, 그러나 그는 두 직분에 모두 봉사하였다. 모세는 그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전에 사도가 그러했던 것만큼 확실하게 하나님 자신에 의해 선택되어 거룩한사명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기별자였다. 그는 성막을 지었고 성소봉사를 제정하였고 아론을 지시하였다. 그는 첫 희생제물을 드렸고 아론의 일을 감독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대제사장이었으며 그 이상이었다.

 이 절의 강조점은 모세와 그리스도 모두 그들을 “지명한 분”께 신실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의 기록이 이 점을 강조한다. 어느 때도 그리스도는 자의로 행하지 않으셨고 그 자신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원대로 하는 고로”(요 5:30).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 그의 이름이 바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계 3:14)다.

 그와 같이 모세도 역시 그가 행하도록 주어진 일에 충성하였다 그는 “나의 본 집(즉 하나님의 집)에 충성”(민 12:7)하였다.

 이 집을 짓는데에 하나님 자신께서 모형을 제시하셨고 모세에게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출 25:40)고 말씀하셨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필하매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출 39:42, 43).

 같은 모양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시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요 5:36).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스스로 할수 없으시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의 역사가 마쳤을때 그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요 7:14)고 선언하셨다. 그리하여 모세와 그리스도 모두 그들의 각각 처한 곳에서 충성하였다.
히브리서 3: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더욱 영광
 그리스도는 건축자가 집보다 더 큰 것 같이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지니셨다. 집이 이무리 존귀하다 할찌라도 건축자가 더 위대한 것은 명백하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건축자로 모세는 집으로 간주했는데, 그는 이러한 예증을 뒤에서 부가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서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럼으로써 모세는 그 집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건축자이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간접적인 선언이다.
히브리서 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모세∙∙∙ 사환
 여기에 와서 표상이 바뀌는데 더 이상 모세는 집이 아니고 그 집의 사환이다. 그가 그렇게 충성한 것을 기록이 증거하고 있다.
한 증거
 모세가 집을 짓는 것은 후에 이야기될 모든 것의 증거인데 그것은 참 성막과, 그리스도가 봉사하는 참 봉사의 표상이었다. 모세 자신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신 18:15)라고 선포할 때 자신과 같은 자가 나을 것을 알고 있었다.
히브리서 3: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리스도∙∙∙아들.” 그리스도는 그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이고 우리는 그의 집이다. 그러나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을”때만 그의 집이 될 수 있다. 사용된 단어는 확신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모하게 나아가는 뜻의 담대함이 아니라 확신에 기초한 거룩한 담대함, 그런 담대함에 기초된 확신이다.

 만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바른 관계가 맺어져 있다면 그의 아버지가 높은 자리를 갖고 있다고 하여 지나치게 위압당할 자녀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왕의 자녀가 그의 아버지께 겁도없이 담대하게 나아가 관리들이 깊숙히 절을 하며 왕에게 커다란 경의를 표하고있는 동안에도 그의 손을 잡거나 무릎 위에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나오기를 원하시지, 종의 두려움으로 나아 오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그분은 이러한 확신을, 아들됨의 표로 간주하시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계신다. 실로 종들이 아니고 자녀들이라면 우리는 거룩한 담대함을 보일 것이다.

 이것에 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도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4-17).

 갈라디아서에서도 그는 같은 내용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4:7).

 여기서 바울은 종의 영 즉 속박의 영을 비난하였다. 그는 우리가 받을 것이 이 영이 아니고 양자의 영—갈라디아서에서 “그의 아들의영”으로 불리웠고 “우리가 그것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이라고 말한다. “아바”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사랑과 확신을 특별한 개념과 높도 경외로써 표현하는 아버지에 해당하는 아람어이다. 그것은 사랑스런 말로써 어린 시절부터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읆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말씀하시므로 그 두려운 시간에 그것을 사용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종의 정신을 너무 지나치게 표시하면서 그들이 겸손과 혼동하고 있는 열등의식을 공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했으나 그에게는, 꾸며 겸손한 체한 것은 없었고 종의 영은 결코 없었다.

 “저녁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 기를 시작하”(요 13:4, 5)시던 날 밤의 그분을 생각해 보라. 그분이 씻기시기 위해 허리를 굽허셨던 그 순간보다 더 위대한 때는 결코 없었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는지 아셨다. 그는 “아버지께서 모든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요 13:3)셨다. 그리고 그가 씻기시기 위해 일어선 것은 그의 이러한 위대함에 대한 인식에서였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갈 것을 아신 그분을 보라. 종의 정신이나, 열등의식이 없이 씻기시기 위해 무릎을 꿇은 그분을 보라. 그렇다! 그분은 하늘의 모든 은혜와, 그분의 임재의 모든 위엄으로써, 그는 경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하여 무릎을 꿇으신다. 얼마나 놀라운 사양과 겸손이며 얼마나 감동적인 위엄인가! 그분은 봉사하셨으나 굴종의 정신으로 하지 않았다.

 두 성직자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들은 기독교 목사와 유태인 랍비였다. 그들은 미국 대통령과 회견을 하러 가는 길에 어떻게 그에게 접근할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랍비가 야곱이 노년에 바로 앞에 갔을 때 그를 축복했던것 같이 하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이것이 동의가 되어 두 사람이 대통령 앞에 나아갔을 때 일반적인 소개 의식을 하는 대신에 랍비는 축도하며 그의 손을 들고 말하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대를 축복하고 보호하소서”라고 말하였다. 대통령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인 채 축복을 받았다. 모든 분위기가 돌변하였다. 두사람은 부탁하러 왔었다. 지금 그들은 오히려 한 사람에게 주었다. 그리스도인은 지존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들은 하늘 왕국의 대사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위엄으로 서있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비록 그들이 온유하고 겸손할지라도 그들이 종이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신분을 감출 필요가 없다. 그들의 믿음을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위대한 왕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표로 조용하면서도 확신에 찬 영을 보일 것이다.

 히브리서 후반부에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히 10:19)다고 권고 받는데, 이는 지상의 대제사장 같은 지위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오”(히 4:16)기를 권유 받기에 이른다.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 갈 권세를” (계 22:14)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러한 문들은 우리가 노래할 때의 입처럼 조금 벌어지듯 열려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넓게 열려 있다. “너희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사 26:2). 그들은 생 명나무에 나아갈 권세를 가진다. 그들은 왕국에 속해있다. 그들은 담대함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들됨은 담대함 이상의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우리는 “소망을 견고히” 잡아야 할뿐 아니라 “끝까지 소망의 기쁨을” 견고히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슬픔을 가지고 부들과 갈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을 만족해 하지 않으신다. 자식들이 그렇게 함은 마치 이 세상의 부모들이 자기들을 불행하게 내어버린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또한 하나님을 그렇게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우울하고 낙담하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잘못된 증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명랑하기를 바라시지, 우리의 행실로 인해 하나님의 인상이 잘못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것이 상속자가 종과 구별되는 특징적인 표중의 하나이다.
히 3:7-19 (3:7-19)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을 다룬다.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열거하고 이 실패의 이유를 지적한다.

 사도는 두가지 목적을 마음에 갖고 광야의 경험을 열거하는데 둘다 중요하다.

 첫째는 예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보다 우월함을 보이려 한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계획하신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했다. 모세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 경계에서 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들이지 못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 땅으로는 인도해 들였으나 그는 그들을 안식으로 이끌어 들이지는 못하였다. 모세나 여호수아가 하지 못한 것을 그리스도는 이루셨고, 지금도 하시고 계신다. 모든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보이는데, 이 이론은 저자의 일반적인 취지와 일치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 때문에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은 사도에게 독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이 했던 것처럼 실패를 하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들을 하나님의 참 안식으로 인도할 지도자가 이제 나타났다. 그들은 그분을 따르는데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르심과 선택을 확실하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그의 두번째 목적이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성령이 이르신다
 이 귀절은 시편 95:7-11에서 취하여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시편 기자를 다윗으로 보지만 영감은 성령으로 돌린다. 이는 말씀에 무게를 더하게 한다.

오늘날
 “오늘날,” 이란 말은 여기에서와 또 다음 장에서 사용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오늘이며, 구원의 날이다. 그것은 부르심이 들리는 오늘(this day)이며, 어느 날(anyday) 이며, 매일(everyday)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시대에 오늘날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시대에 오늘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시대에도 오늘날이다. 이는 항상 현재로서의 오늘이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심에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멸망당했을지라도, 오늘이 광야에서 닫쳐지지는 않았다. 비록 많은 사람이 그분을 거절했을지라도 그날은 그리스도의 시대에도 닫쳐지지 않았다. 비록 마지막 자비의 부르심이 울리려 하고 있으나 그날은 오늘날에도 아직 닫쳐지지 않았다. 신뢰의 믿음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이 없도록 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분은 이제 막 그들을 바로의 군대로부터 구원해 주셨고 그들을 위하여 홍해를 가르셨다. 그들이 쓴 물에 당도했을때 “훙해를 마른 신으로 건느게 해 주셨고 바로의 군대를 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갈증으로 멸하도록 허락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기다리고 참읍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분이 최선으로 보실때 우리에게 물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을 보이는 대신 모세와 아론에게 대하여 불평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그들은 전혀 아무런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그러한 확신의 부족을 나타냈을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의 도구로 쓰실 수 없으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믿게하기 위하여 더 많은 이적을 그들에게 보여야 하는가? 잠시후 그들의 음식이 핍절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서 만나를 비같이 내려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용할 것을 거두라고 말씀하셨다.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4)고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시험하였으나 그들은 시험에 서지 못하였다.

 세번째 시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었”(출 17:1)을 때 이르러 왔다. 이때쯤 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고 계셨음을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를 거스려 전에 했던 불평을 터트리며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 말라 죽게 하느냐?”(3절)며 물을 달라 아우성 쳤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로 바위를 쳐서 물을 얻게 하셨다(56절).

 히브리서가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이 마지막 경험이다. 하나님께서는 첫번째, 두번째는 그들을 견책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세번째로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을 땐(출 17:7). 그들은 너무나 멀리 나아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셨다. 히브리에서는 그것을 “노하심”(8절)이라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으나 그들은 그들의 공과를 배우지 않았다.
히브리서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들의 광야 방황이 끝나갈 무렵, 위에 언급한 경험들을 한후 거의 사십 년만에 이스라엘 백성은 신 광야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물이 부족하였다. 이렇게 오랜 기간이 지난후라 그들은 하나님 신뢰하기를 배운것 같았다. 그러나 그 대신 그들은 전과같이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들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민 20:4 )고 부르짖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었다. 다시 한번 그들은 시험과 맞서 실패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민 20:13).
히브리서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I was displeased. A. R. V. )
 이것은 아주 부드러운 문장이다. 하나님에게는 단지 기버하시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한 이유가 있었다. 사십년 동안 그들은 그분의 역사(役事)를 보았다. 매일 만나가 하늘에서 비같이 내렸다(출 16:4). 그들의 옷은 기적적으로 낡아지지 않았다. “너희 신발이 헤어지지 아니하여으며”(신 29:5).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 하였느니라”(신 8:4).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그들의 옷을 개인적인 기적으로 보존해 주셨음에도 그들은 그 공과를 배우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항상 마음에 미혹되어 내길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 참아 오셨다. 그분은 그들을 위하여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들은 행동에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에서” 범죄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면서도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내 안식
 이스라엘 백성의 최대 희망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적으로부터 안식을 약속하셨다. 그들은 그들의 광야 생활의 방황으로부터 피곤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어려움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들의 모든 소망은 그들의 약속의 집인 가나안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약속의 땅에 들어 가는 것보다 더 큰 것을 계획하고 계셨다. 그분은 그들이 그의 안식에 들어오기를 원하셨다. 이 초청은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실 때 주신 것과 비교되는 초청이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안식을 그들에게 결코 주지 못할 것이다. 그 분의 안식은 죗짐이 떠나가 버렸을 때야 인간이 자유케 되는 영혼의 휴식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은 이 안식에로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진실로 소수가 믿음으로 들어갔으나 대부분은 거절했고 광야에서 멸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세대들을 거절하셨다. 마지막으로 가나안에 들어간 수 천명 중 다만 몇 명만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다.
히브리서 3: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이제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을 예로 삼아 경고를 줄 기회를 갖는다. “삼가하라.” 그는 혹 너희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있지 않도록”하라고 말한다. “믿지 아니하는 악심은”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난관이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휴식에 이르지 못한 이유이었다. 그 위험은 바울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우리의 시대에도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과거의 이러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제 때에 이르지 않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곧 믿음을 잃고 만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들보다 믿음이 더욱 적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가지지 못했던 하나님의 전능과 보호에 대한 더 많은 중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의 결핍은 3장 첫 부분에서 기록된 그리스도와 모세의 충성심과 뚜렷 하게 대조가 된다.
히브리서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의 의무를 계속 환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제공하신 모든 방법 즉 정한 기간 동안의 공중예배, 기도와 명상, 연구와 교제, 가정 예배, 선교 사업, 불행한 자들과 갖힌자들을 위한 사업, 병원과 감옥소에서의 일, 주의 전에서의 예배 참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또 자신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는 모든 수단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죄의 유혹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의 덧없는 쾌락과 유혹을 알고 있다. 그것은 종종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올무에 걸려든다. 속임수는 항상 그 즉시는 명백치 않다. 술은 맛이 좋고 들뜨고 유쾌한 기분을 줄찌는 모르나 그 반응은 속임수를 나타내고 사람들은 잠시동안 스스로의 방향과 제 정신을 잃은것을 후회하게된다. 다른 죄도 매력적이고 쾌락의 약속을 줄찌는 모르나, 자기 최면은 순간만 지속될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 그리고 상한 건강, 파괴된 가정, 불화, 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멸시함, 친구와 소유물의 상실, 양심의 정죄, 영생의 상실이 수확의 실제성을 깨우치면서 무서운 충격으로 이르러 온다. 자기 파멸은 많은 사람에게, 단 하나의 출구, 즉 죗된 생애의 절정에 이르게 하고, 더 많은 치욕을 가져오며,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리게 하는 매우 비겁하면서 이기적인 수단으로 여겨 질것이다. 우리는 죄의 유혹으로부터 강팍해지지 않도록 매일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히브리서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그리스도의 동역자”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는 것은 먼 장래가 아니다.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가장 가치있는 경험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능한 최고의 수확이다. 이 절은 6절과 병행한다.

 우리는 6절에서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는 권고를 받았다. 이곳에서 우리는 확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념의 시작을” 굳게 잡으라고 듣게 된다. 우리가 첫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의 믿음, 신념, 담대함이 처음에는 강한 것처럼 우리는 계속 견고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처음 사랑이나 우리의 처음 확신을 잃으면 안된다. 이들 권고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에게 쓰여졌고, 거기에 최초로 적용되었다. 그들은 자기의 소유물을 다른 사람들과 서로 나누어 가졌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세상 소유물을 사도들의 발 아래 바쳤다(행 2:44, 45; 4:32-35).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 때로부터 많은 해가 지났으나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그분은 그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다. 그런데 왜 그분은 지체하셨는가?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과 40일간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떠나신 후에 거의 40년이 지났다. 그들은 믿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계속하여 붙잡으라는 권고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 이상의 것이 필요했는데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게으르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업을 위해 근면하게 그분과 동역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나 하나님의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바울 시대에도 예루살렘 교회는 같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때는 참으로깨어 있어야할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가 믿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앞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히 6:9, 20) 그리스도와 합하여 들어가기 원하셨다. 그러나 아무도 부르심에 주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히브리서 3: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이 절은 8절의 내용을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기를 열망하신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마치 바로가 마지막까지 뉘우치지 않고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작은 강퍅함이 있을터인데, 이것들이 비록 그 즉시로 영혼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매우 해로우며 우리는 그것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자, 가난한 자, 버림을 당한 자를 도우라는 부르심을 대하여 마음을 냉혹히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이 모은 돈이 현명하게 쓰여지지 않는다고 느끼면서 그들의 구제를 제한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태도는 그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인간애의 젖줄을 마르게 하는 것으로, 치명적인 해가 된다. 계속적으로 병자와 고통받는 자와 접촉하는 것은 그들이 울어나야 할 만큼의 동정심보다 더 적게 동정적인 사람이 되게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위험인데 특별히 의사와 간호원들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들은 사람들의 고통은 종종 어떤 위반의 결과이고 고통받는 자는 단지 그 뿌린것을 거두고 있다고 알고 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러한 이유로써 동정과 자비심을 묵살시키니나 없애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떤이들은 그들 자신을 항상 자제하기로 작정하고 어떤 환경에서나 눈물을 훌리지 않고 어떤 특별한 열정이나 기쁨을 보이지 않겠다고 마음 먹는다. 이들은 고립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얼마 못가서 정상적으로 깊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에도 올바르게 응답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그들의 가능성을 전 분량에 이르기까지 살지 않고 있다. 그들은 차차 늙어지면서 무력해지고 무관심하게 된다. 젊은 사람들은 그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게 되고 미구에 그들은 조용한 구석자리로 밀려나 앉게된다. 인생은 그들의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말하는 데나 재산권이나, 개인적인 습관에 있어서 부주의한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꼬집어 말할 필요는 없지만 작은 습관들이 영원한 행위로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최종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이상의 것을 언급하셨다. 각자 자신을 살펴보자.
히브리서 3: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듣고 격노께 하던 자가 누구요?
 그 땅에 들어갔던 유명한 사람들 중에 갈렙과 여호수아가 언급되었다(민 26:65). 그외 좀 덜 유명한 사람들로 제사장 에르아살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있다(수 17:4; 22:13, 31, 32; 민 25:7). 기록들을 연구해 보면 다른 제사장들도 역시 충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3: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히브리서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불순종하였다.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참으셨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의 방황으로부터 안식을 얻고자 열망하였으나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조건들을 형성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왕국에 부적격한 자들로서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브리서 3: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했을지라도 그것은 임의로한 판결이 아니었다. 오직 그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들의 불신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