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아들.” 그리스도는 그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이고 우리는 그의 집이다. 그러나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을”때만 그의 집이 될 수 있다. 사용된 단어는 확신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무모하게 나아가는 뜻의 담대함이 아니라 확신에 기초한 거룩한 담대함, 그런 담대함에 기초된 확신이다.
만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바른 관계가 맺어져 있다면 그의 아버지가 높은 자리를 갖고 있다고 하여 지나치게 위압당할 자녀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왕의 자녀가 그의 아버지께 겁도없이 담대하게 나아가 관리들이 깊숙히 절을 하며 왕에게 커다란 경의를 표하고있는 동안에도 그의 손을 잡거나 무릎 위에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그에게 나오기를 원하시지, 종의 두려움으로 나아 오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그분은 이러한 확신을, 아들됨의 표로 간주하시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계신다. 실로 종들이 아니고 자녀들이라면 우리는 거룩한 담대함을 보일 것이다.
이것에 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도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
롬 8:14-17).
갈라디아서에서도 그는 같은 내용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
갈 4:7).
여기서 바울은 종의 영 즉 속박의 영을 비난하였다. 그는 우리가 받을 것이 이 영이 아니고 양자의 영—갈라디아서에서
“그의 아들의영”으로 불리웠고
“우리가 그것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이라고 말한다.
“아바”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사랑과 확신을 특별한 개념과 높도 경외로써 표현하는 아버지에 해당하는 아람어이다. 그것은 사랑스런 말로써 어린 시절부터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읆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막 14:36)라고 말씀하시므로 그 두려운 시간에 그것을 사용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종의 정신을 너무 지나치게 표시하면서 그들이 겸손과 혼동하고 있는 열등의식을 공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했으나 그에게는, 꾸며 겸손한 체한 것은 없었고 종의 영은 결코 없었다.
“저녁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 기를 시작하”(
요 13:4, 5)시던 날 밤의 그분을 생각해 보라. 그분이 씻기시기 위해 허리를 굽허셨던 그 순간보다 더 위대한 때는 결코 없었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는지 아셨다. 그는
“아버지께서 모든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
요 13:3)셨다. 그리고 그가 씻기시기 위해 일어선 것은 그의 이러한 위대함에 대한 인식에서였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갈 것을 아신 그분을 보라. 종의 정신이나, 열등의식이 없이 씻기시기 위해 무릎을 꿇은 그분을 보라. 그렇다! 그분은 하늘의 모든 은혜와, 그분의 임재의 모든 위엄으로써, 그는 경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하여 무릎을 꿇으신다. 얼마나 놀라운 사양과 겸손이며 얼마나 감동적인 위엄인가! 그분은 봉사하셨으나 굴종의 정신으로 하지 않았다.
두 성직자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들은 기독교 목사와 유태인 랍비였다. 그들은 미국 대통령과 회견을 하러 가는 길에 어떻게 그에게 접근할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랍비가 야곱이 노년에 바로 앞에 갔을 때 그를 축복했던것 같이 하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이것이 동의가 되어 두 사람이 대통령 앞에 나아갔을 때 일반적인 소개 의식을 하는 대신에 랍비는 축도하며 그의 손을 들고 말하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대를 축복하고 보호하소서”라고 말하였다. 대통령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인 채 축복을 받았다. 모든 분위기가 돌변하였다. 두사람은 부탁하러 왔었다. 지금 그들은 오히려 한 사람에게 주었다. 그리스도인은 지존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들은 하늘 왕국의 대사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위엄으로 서있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비록 그들이 온유하고 겸손할지라도 그들이 종이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신분을 감출 필요가 없다. 그들의 믿음을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위대한 왕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표로 조용하면서도 확신에 찬 영을 보일 것이다.
히브리서 후반부에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
히 10:19)다고 권고 받는데, 이는 지상의 대제사장 같은 지위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오”(
히 4:16)기를 권유 받기에 이른다.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 갈 권세를” (
계 22:14)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러한 문들은 우리가 노래할 때의 입처럼 조금 벌어지듯 열려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넓게 열려 있다.
“너희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사 26:2). 그들은 생 명나무에 나아갈 권세를 가진다. 그들은 왕국에 속해있다. 그들은 담대함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들됨은 담대함 이상의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우리는
“소망을 견고히” 잡아야 할뿐 아니라
“끝까지 소망의 기쁨을” 견고히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슬픔을 가지고 부들과 갈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을 만족해 하지 않으신다. 자식들이 그렇게 함은 마치 이 세상의 부모들이 자기들을 불행하게 내어버린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또한 하나님을 그렇게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우울하고 낙담하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잘못된 증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명랑하기를 바라시지, 우리의 행실로 인해 하나님의 인상이 잘못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것이 상속자가 종과 구별되는 특징적인 표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