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제 9 장 — 하늘에 있는 우리의 대제사장
 히브리서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서 제9장은 언제나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제9장에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의 논리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모세가 지은 성막의 건물, 기구, 봉사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한 후, 사도는 8절에서, 성령께서는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로써(모세의 성막 보이고 있다고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그 다음 이 히브리서 기자는 지상의 성막은 현재까지의 비유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보이면서 지상의 성막과 하늘의 성막을 대조시키고 있다(9, 10절). 그리스도께서는 보다 크고 더욱 완전한 성막을 통하여 당신의 피를 가지시고 성소로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11-14절).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데, 그 언약의 효력은 그 분의 죽음으로써 발생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첫 언약에도 헌신할 때에 죽음이 수반되었는데, 그것은 송아지와 염소의 죽음에 불과하였지만 그 피는 언약의 책과 백성과 성막과 기구들 위에 뿌려졌다(15-21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깨끗케 또는 정결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송아지들과 염소들의 피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좋은 희생제물 곧 그리스도의 피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다(22-23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이제 하늘 성소들(holy places)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께서 두번째 오실 때에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나타나실 것이다(24-28절).

히 9:1-10 (9:1-10)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독자들이 그가 언급하고 있는 성막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다고 가정하여, 그렇게 잘 알려진 사실을 새삼스럽게 소상히 말할 필요가 없음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 있는 성소에 대하여 그의 주의력을 집중하기 전에, 지상 성막의 봉사 중 더욱 중요한 국면들을 하나 하나 열거해 보는 것은 권장할만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 사이에는 병행(行)되는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는 만일 그의 독자들이 지상 성소의 봉사와 제도를 명백히 깨닫는다면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모세의 성막이 그 특유한 중요성을 띄게 되는 때는 표면상으로 나타난 성막의 이면에 그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성령의 말씀을 우리가 깨달을 때이다. 그것은 현재까지의 비유였으니, 곧 개혁의 때까지였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9: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첫 언약에 섬기는 예법이 있었다는 사실은 새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이 있다는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를 비교하려던 참이었으므로, 그가 하늘 성소에도 섬기는 예법이 있다고 말한 사실을 주목해 보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세상의 성소” 보다는 “이 세상에 속한 성소”가 더 좋은 번역이다.
히브리서 9: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첫 장막 성소
 성소의 첫째 칸이 여기서는 첫 장막으로 일컬어지고 있고, 매일의 봉사와 관계가 있는 실체(實在)로 간주되고 있다. 이 첫째 칸은 연중(年中) 매일 사용되었다. 지성소로 일컬어지는 둘째 칸은 대속죄일에 잠시 동안만 개방되었다. 그러므로 첫째 칸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제도로 간주되었고, 첫 장막으로 일컬어진다.
등대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하나의 등대 밖에 없는 모세의 성막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솔로몬의 성전에는 12개의 등대가 있었다. 성막의 건물에는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등대는 성막 내부를 조명(照明)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등대 위에 일곱 등잔이 있었다 해도, 특별히 통상시에는 일곱 등잔이 동시에 커져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 불빛은 기껏해야 다소 희미하였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등대는 금으로 정교(巧)하게 쳐서 만든 것이었다(출 37:17-24, 27).
 상은 성전 기구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설병(陳設硏)과 전제(奠祭)를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것은 조각목(角木)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금으로 입혔다(출 37:10-16). 매 안식일 열두 새 떡덩이들이 상 위에 진설되었는데, 매 떡덩이는 각 지파들을 대표했다(출 25:30; 레 24:5-9).
진설병(陳設硏)
 문자적으로는 “임재 臨在)의 떡”으로 일컬어졌는데, 그 이유는 떡이 “항상 여호와 앞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레 24:8).
성소
 “성소(Sanctuary)라 일컫나니,” “성소(Holy place)라 일컫나니”(RV).
히브리서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여기에서만 둘째 휘장으로 언급되어 있다.
지성소
 혹은 지극히 거룩한 장소, 지성소는 그 크기가 첫째 칸의 절반에 해당되었으며, 가로, 세로, 높이가 동일한 입방체를 이루었다.
히브리서 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금향로가 있고
 이 구절의 표현법은 독특하다. 미국 개역 성경(A. R. V.)은 이 구절을 “금향로” 대신 “금향단”으로 표현하고 있다. 원어상으로는 “단(壇)”이나 “노(爐)”로 번역될 수 있다. 여기서는 “단”으로 의도된 것 같다. 왜냐하면 만일 “향로”로 번역한다고 하면, “향단”이란 말은 이 구절들 속에 언급되지 않게 되는데, 그런 일은 있을 법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향단은 성소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인데, 히브리서와 같은 매우 주의 깊게 쓰여진 논문에서 저자가 특별히 성소 기구의 품목들을 열거할 때, 향단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생략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향로” 대신 “향단”으로 번역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곧 향단이 원래 있었던 성소 안에 있는 것으로 언급되지 않고 지성소 안에 있는 것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출 30:6). 이 단에서는 향이 매일 드려졌다. 향을 드린 제사장들은 사망의 형벌 때문에 지성소로 들어가는 일이 용납되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아 향단은 첫째 칸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여기서 향단이 둘째 칸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향단이 둘째 칸에 위치해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고, 단지 지성소에 그것이 “있었다”고만 묘사한 저자의 진술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독특하고도 의미심장하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가능성을 왕상 6:22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상 6장에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두기 위하여” 전(殿) 안에 내소(內所)를 예비하였다고 되어 있다(19절). 이 내소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였다(23-25절).

 “온 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내소에 속한 단의 전부를 금으로 입혔더라”(22절, ARV), 여기에 언급된 단은 향단이다. 이것이 “내소에 속한,” 또는 지성소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위에 진술된 바와 같이, 향단이 지성소에 위치해 있었다라는 그 어떠한 단언도 없이 단지 지성소에 속해 있었다 또는 히브리서 대로 지성소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단에 매일 드려진 향은 속죄소로 향하여 피워 올랐다. 하나님께서는 속죄소의 그룹 사이에 좌정하여 계셨다. 향이 기도와 함께 올라 갈 때에, 그것은 성소뿐만 아니라 지성소를 가득 채웠다.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시킨 휘장은 천정에까지 닿지 않고 천정에 이르는 도중에까지만 닿았다. 그러므로 첫째 칸—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곳—에서 드려진 향이 둘째 칸까지 이를 수 있었다. 따라서 향단은 성소에 위치해 있으면서 지성소에 “속하였다” “언약궤가 있고” 언약궤라고 일컬어지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쓰신 십계명의 두 돌판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이며, 십계명은 언약인 동시에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언약궤는 성소의 중심적인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속죄가 이루어진 것은 언약궤 속에 든 계명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금항아리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원래의 성막의 법궤 속에 있었다. 후에 그것들이 제거된 것이 분명한데, 이는 특별히 솔로몬 성전의 헌당 때에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왕상 8:9)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약의 비석들
 출애굽기에는 이 비석들이 “증거의 두 판” 그 판들 위에 기록된 말씀들은 “언약의 말씀 곧 십계”로 일컬어지고 있다(출 34:28, 29). 신명기에는 십계명이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신 4:13)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히브리서 9: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영광의 그룹들
 법궤 위에는 순금으로 만들어지고 속죄소와 연하여 하나가 되게 한 두 그룹들이 있었다(출 37:6-9).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사도는 그의 독자들이 성소의 일반적 면모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음으로, 그것에 대하여 길게 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가 영광의 그룹들뿐만 아니라 성소의 다른 것들에 대하여 많이 논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현재 그가 말하고자 하는 목적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간과(看過)하여 버린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성소의 봉사와 제사장들의 직무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주의력을 이 문제에 돌리고 있다.
히브리서 9: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매일의 봉사 중 일부가 성막 안에서 수행되었고, 제사장들에게는 아침, 저녁으로 첫 장막 안으로 들어가 향을 드려야 하는 일이 요구되었다. 초기에는 대제사장이 친히 이 일을 하였다(출 30:7, 8). 이 의식은 매일 수행되었으므로 향은 “영속적인 향”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8절).
히브리서 9: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 차씩 들어가되
 오직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것도 대속죄일에 일년에 오직 한 번 뿐이였다.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대속죄일에 특별한 속죄가 이루어졌으며, 오직 대제사장만 그 일을 집행할 수 있었다. 그가 성소 안으로 가져간 황소의 피는 자신과 백성의 허물을 위한 것이었다.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는 성소와 그 백성을 정결케 하였다.

 바울이 편지한 유대인들은 성소 봉사의 세부 사항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나, 모든 그리스도인 독자들이 다 유대인들처럼 이 의식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성소 봉사에 대한 간단한 연구를 부록에 제시하고 있다.
히브리서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성소나 그 봉사에서 아무런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히브리의 의식(儀式)중에 가치와 영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보이고 있다. 성령께서 하신 이 선언은 성소와 그 봉사의 수준을 단순한 역사적 수준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예언적 제도의 영감 된 기사(記事)의 수준으로 높이 끌어 올려 준다.
성소에 들어가는 길
 성소와 그 봉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성소와 그 봉사는 이러한 목적을 성취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것이 지닌 일시성과 불완전성도 드러내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지성소에 있는 그룹 사이에 좌정해 계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분께로의 접근은 오직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이방인은 첫째 뜰이라고 하는 이방인의 뜰까지만 접근할 수 있었다. 여인들은 둘째 뜰이라고 하는 여인의 뜰 이상으로는 나올 수 없었다. 세째 뜰, 곧 남자들의 뜰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명시된 장소였다. 제사장들에게는 자신들의 들이 있었고, 그들은 성막의 첫째 칸 곧 성소 안으로 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특권도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그러한 일을 하도록 지명받았을 때에만 가능했다. 그 때라 할지라도 거기엔 지성소의 셰키 나로부터 그들을 분리시켜 주는 휘장이 있었고, 그들은 이 휘장을 결코 통과할 수 없었다.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 년에 오직 하루만, 하나님의 면전(面前)에 돌어갈 수 있었다. 대제 사장만이 휘장을 옆으로 제칠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그 때라 할지라도 “사망을 면하기 위하여”(레 16:2) 향연으로 자신을 가리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접근한 후에라도 잠시 동안만 머무를 수 있었다. 그가 다시 하나님의 면전에 나타나기 위하여는 또한 해가 홀 러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사실에 미루어 보아, 성소 의식이 사람이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 그 배열은 매우 미흡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복음이 미리 보여주는 것같이, 또는 우리의 시조(始祖)가 에덴 동산에서 가졌던 것과 같은 하나님께로의 자유로운 접근이 거기엔 없었다. 거기엔 접근이 있었다. 그러나 오직 사람만이, 일 년에 한 번 뿐이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기 전에, 정의(定義)를 요하는 세가지 표현들이 있다. 그것은 곧 “성소(holiest of all, 헬라어로는 한 단어),” “장막,” “서 있을 동안” 이다.

성소
 이 용어의 헬라어는 히브리서에 8번 나타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8:2, “성소(Sanctuary)”; 9:2, “성소(Sanctuary)”; 8절, “성소(holiest of all)”; 12절, “성소(holy place)”; 24절, “성소(holy places)”; 25절, “성소(holy place)”; 10:29, “성소(holiest)”; 13:11, “성소(Sanctuary)”. 이와 같이 헬라어로는 한 단어가 8 구절에서 다섯 가지로 번역되었다—“성소(Sanctuary)” 세 번; “성소(holy place)” 두 번; “성소(holiest),” “성소(holiest of all),” “성소(holy places)” 각각 한 번이다.

 미국 개역성경(A. R. V.)은 보다 일관성이 있다. 그 성경에는 헬라어의 이 용어가 “성소(holy place)”로 일곱 번, “성소(Sanctuary)”로 한 번 번역되었다.

 주지한 바와 같이, 헬라어 원어상으로는 8곳 모두 동일하다. 그리고 매 구절이 복수(複數)로 되어 있다. 흠정역 성경은 히 9:24에서만 복수(holy places)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흠정역 성경은 8곳 중 한 곳만 옳고, 미국 개역성경은 일관성은 더 있지만 8곳 모두 옳지 않다.

 그러나 두 칸을 의미하는 “성소(Sanctuary)”가 만일 한 칸만을 의미하지 않고 전체 성소를 뜻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번역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소(holy places),” 더 좋게는 “성소(holies)”가 정확한 번역이고 성소 건물의 두 칸을 적절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더 좋다.

 두 번역성경을 나란히 대조시키면 다음과 같다.

 흠정역                       미 개역성경

 히 8:2 Sanctuary        Sanctuary

 9:2 Sanctuary             holy place

 9:12 holiest of all       holy place

 9:24 holy places         holy place

 9:25 holy place           holy place

 10:19 holiest               holy place

 13:11 Sanctuary          holy place

 이 8곳 외에 히브리서 9:1(신약 중 오직 이 곳만)에는 이 단어가 단수로 나타나 있다. 두 성경 모두 “sanctuary”로 번역한다. 9장 3절은 복합 형태로 나타나 있는데, 흠정역은 “holiest of all,” 미개역성경은 “holy of holies”로 되어 있다.

 한 단어가 여덟 곳에서 다섯 가지로 번역된 것은, 개인적 판단이 번역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단어는 고려 중인 주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번역상의 일관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미 개역성경이 그 번역상 더 일관성이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도움을 줄지 모르지만, 원어로는 복수로 되어 있는 매 구절들이 단수로 사용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매 경우가 원어상으로는 복수이며, “성소(holy place)” 만을, 또는 “지성소(the most holy)”만을 결코 의미할 수 없으며, 여덟 곳의 매 경우가 복수로서 “성소들(holies또는 holy places)”을 의미하며, 성소와 지성소의 두 칸을 다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해하도록 하자. 따라서 여덟 곳의 각 예들을 “성소들(holies)”로 번역되는 일관성이 요구된다. 위에서 주지한 바와 같이, “성소(Sanctuary)”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것도 그 용어가 한 칸이 아닌 칸을 포함하는 것임이 확실히 이해될 때에만 그렇다.

장막
 두번째 정의를 요하는 단어는 히브리서에 사용된 대로,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하늘의 참 장막과 광야에서 모세가 지은 장막 모두를 언급하고 있다(히 8:2; 9:11, 21). 이 둘 사이의 구별은 명백하여 어느 장막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오해할 필요가 없다.

 히브리서 9: 2, 3, 6에는 이 단어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어 있다. “첫 장막”으로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이 세상에 있는 장막 중 첫째 칸을 의미하고,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은 지성소를 의미한다. 즉 “장막”은 여기서는 칸의 의미로 사용되어 있다.

 9장 8절에도 “첫 장막”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동일한 구절 속의 “성소(holiest of all)”에 대하여 어떤 해석을 하느냐에 달 려 있다. 만일 여기의 “성소”가 둘째 칸을 의미한다고 하면, “첫 장막”은 첫째 칸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보아 온 대로, “성소(holiest of all)”가 오역(誤譯)이어서 “성소(holies)”로 되어야 할 경우, 여기의 “첫 장막”은 하늘의 “참 성소(true holies)”와 대조된 모세의 성소 건물에 대한 일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로버트슨은 그의 어휘 사전에서 8장 2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성소(타 하기아)에 관하여, 9장 2절 하단에서처럼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아무런 구별을 두지 않고 있다(9:8—하단; 10:19; 13:11 참조)”(5권, p. 389).

 즉 9장 8절의 본문의 올바른 번역은 성소(holy places) 이며, 2절과 그 후에 나타나는 대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아무런 구별을 두지 않고 있다. “성소(holiest of all)”로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과 그것은 복수이어서 한 칸이 아니라 두 칸을 포함시키는 성소들(“holies”)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8절은 첫 장막 또는 모세의 장막과 하늘에 있는 참 성소를 비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슴없이 이야기 할 수 있다.
서 있을 동안
 세번째로 정의를 내려야 할 단어이다. “장막”과 관련시켜 볼 때, 이 말은 장막과 같이 건물로 서 있는 것을 가리키 지 않고, 그것의 용도에 대한 말로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기관, 사회 등의 서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와 꼭 같이, 그것은 오히려 “그것의 존속, 곧 위치와 신분을 유지하는 것”, “그것의 지정된 자리를 채우는 것”, “거룩히 지시된 그것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 등을 의미하고 있다. 8절이 의미하는 것은 참 성소들로 들어가는 길이 모세의 장막의 봉사가 하나님의 의향에 아직 응하고 있는 동안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전의 관찰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성소로 들어가는 길, 또는 우리가 보아왔듯이 성소들로 들어가는 길이 첫 장막이 여전히 그것의 지정된 자리를 채우고 있는 동안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그 말씀의 의미를 평가하려 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두 가지의 중요한 해석이 있다. 첫째 해석은 “성소(holiest of all)”가 오역이라는 근거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봉사가 첫째 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은 열리지 않았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진술이 옳다고 할지라도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가 될 수 없다. 지성소의 봉사가 시작되기 전에 성소의 봉사가 끝이 나야 하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일이다(레 16:17). 그러나 저자는 앞 구절들에서 이 사실에 대하여 그의 독자들에게 말했고, 모든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
 성령이 보이신 것은 무엇인가? 둘째 칸에서의 봉사가 시작할 수 있기 전 첫째 칸의 봉사가 그쳐야 한다는 것은 사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령이 말씀하신 무언가를 보이는 바로 그것이며, 또한 그것은 스스로를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같은 말의 반복이 되고, 설상가상으로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성령의 행위로 돌릴 수 없다. 그런 것은 돌고 도는 이론(순환논법]에 불과할 뿐이며, 성령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중대한 선언을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수학자가 칠 곱하기 칠은 사십 구라는 명백한 사실을 말하는—저급한 수준의—것과 같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이말의 진실성을 인정할 것이다. 그 다음 그는 엄숙한 목소리로 “그 안에는 큰 의미가 있다”고 덧붙일 것이다. “그 의미란 무엇인가?” “큰 의미란 이것이다. 곧 칠 곱하기 칠은 사십 구이다!” 그가 정확하게 말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는 그의 청중들의 지성을 모독했다. 우리는 성령께서도 이와 비슷한 선언을 하신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저자가 성소의 두 칸에서 이뤄진 일에 대하여 상세하게 묘사한 것과, 첫째 칸에서의 봉사는 대제사장이 둘째 칸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쳤다는 것을 보이는 것과, 성령께서는 이로써 무언가를 보이신다고 엄숙히 선언하는 것과, 그리하여 저자가 성령께서 이로써 보이신 것은 사실 그 자체라고 말함으로써 이 문제를 용두사미로 만들어 버리는 것 등에 대한 어떤 이유도 생각해 볼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성령의 말씀을 불합리한 것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이 견해는 8절이 첫째 이나 둘째 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않았으며, 단지 모세의 장막, 또는 첫 장막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며, 이 장막과 하늘 성소(holies 또는 Sanctuary)를 대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여전히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다.

 두번째 견해는 8절에서 저자는 그의 논리를 지상 성소에서 하늘 성소로 전환키고 있고, 여기서는 모세의 장막과 하늘 성소, 곧 참 “성소(holies)”를 대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그의 논리를 바꾸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9장 이후의 장들이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일에 할애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전환점이 어디서 이뤄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8-10절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두번째 견해는 옛 성소의 의식들이 영적 의미를 지녔다는 것에 대한 성령의 시인(是認)의 인(印)을 치게한 것이다. 또한 이 견해는 하늘 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지상 성소가 그 지정된 사명을 이루 었을 때 열릴 것이라는 거룩한 선언을 한다. 이 견해는 전체 기별과 일관성을 이루며, 성령의 말씀을 보다 흥미있고 의미있게 만들어 주며, 그리스도께서 봉사하고 계시는 참 장막에 대한 토론의 길을 열어 준다(히 8:2; 9:11).

히브리서 9: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 장막은 비유니
 “이 장막”이라는 말은 전체 레위기의 제도를 말하는 것이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절들에서 분명하게 여겨 지는 것처럼 어떤 특별한 부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방금 언급한 장막의 배열과 대속죄일의 의식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봉사들에 대해 특별히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로마서 5:14에서처럼 어떤 곳에서는 “비유(figure)”라는 말이 “표상(type)”을 의미하는 것임에 반하여, 여기서는 “비유(parable)”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이 단어의 용도는 중요하다. 우리가 “표상(type)”이라는 단어에 너무 지나친 강조점을 둔 나머지, 지상 성소에 있는 세부적인 조그마한 것 하나 하나에 해당하는 원형을 하늘 성소에서 찾고자 시도할 위험이 있다. 이것에 대하여 10장 1절에 경고가 있다. 즉 옛 장막은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것이 비유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두 성소들과 봉사들에 대한 전반적인 윤곽은 동일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네 발(四足]로 기어서 가라”는 비유를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 즉 사소한 것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것의 대응물을 찾고자 시도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는다.
섬기는 자로 ∙∙∙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난점은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대한 결함으로서, 우리가 레위기 제도에 대한 중요 장애물로서 어디에서나 논의하여야 할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완전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산상 설교의 서두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선언하셨다. 교회를 위한 바울의 소망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하여(골 1:28),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는”(골 4:12) 것이었다. 이 완전의 문제가 종교의 근본 적인 필요 사항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성경 말씀들에서 분명해진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가능하다면] 어찌하여 ∙∙∙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히 7:11).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히 7:19).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 10:1).

 완전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목표이다. 이것은 드리는 예물이나 제사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그것들은 “섬기는 자로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이 결함은 봉사 자체에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진실로, 동물의 피가 영혼의 죄를 속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사람이 받게 되는 용서가 영구적으로 그를 더 낫게 만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봉사는 다음날 되풀이되었고, 일년 내내, 해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용서가 완전으로 선도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죄를 일천 번 용서받고도 계속 죄지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 희생 제물을 그의 생애 중 날마다 가져왔을 것이지만 결코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수천의 양”이라 할지라도 완전에 도달하게 할 수는 없었다. 완전은 목표이었기 때문에, 만일 완전하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완전에 대한 암시가 대속죄일의 봉사들 중에 있다.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 여기에 정결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백성은 일년 내내 첫째 칸에서 수행되는 봉사들을 통하여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이제 새 날이 이르렀는데, 그 날과 더불어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다. 이것은 용서 이상의 것으로서, 모든 죄로부터의 정결이었다.

 그러나 이 봉사라 할지라도 만족스럽지는 못하였다. 대속죄일이 끝나자마자 다시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이 휘장으로 막히었다. 다음 해가 되기 전에는 아무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그들 앞에 있는 가능성을 얼핏 보게 되었고, 그런 후 문이 닫혔다. 이것은 길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과 이 봉사를 통하여서는 완전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는 더 나은 무엇이 제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언가 더 나은 이것이 구약에서 예표(豫表)되었다. 사람은 본의 아니게 부정하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는 그의 입술로 경솔한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와 과오를 자복하고, 적절한 희생을 드려서 용서를 받는다. 그는 행복하다. 그러나 그는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그 외의 보다 심각한 죄들이 있음을 느낄 뿐이다. 그 죄들은 고의적이 아닌 죄들의 항목에는 들지도, 들 수도 없다. 자기의 이웃인 이교도들로 말미암아 곁길로 나아가서, 그는 그들의 축제에 참석하여 바알 숭배에 참예했다. 그는 안식일을 모독하여 그 경계선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이웃의 아내를 탐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컬었다.

 이러한 죄들이 그의 마음에 회상되고 그를 짓누른다. 그로서는 어찌하면 될까? 예물을 드릴까? 안된다. 속죄제의 법은 고의적이 아닌 죄들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몇 가지 예외와 함께—,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죄가 너무 무거워서 동물의 희생으로는 속죄받을 수 없다고 느낀다. 이제 그는 다윗의 죄와 회개를 상기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죄들을 위하여 동물의 희생이나 번제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다윗이 말한 바,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나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리이다”(시 51:17)를 듣는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낮추고, 그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다. 그는 하나님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오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신다.

 결론적으로 다윗의 경험은 구약 시대의 사람이 희생제물의 제한적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윗이 그 큰 죄를 범하고 난 후,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시 51:16)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동 물들의 피가 아니라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희생 제도를 통하여 조그만 과오들이라 할지라도 셈이 되어 피흘림이 없이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 반면, 희생 제물은 제물을 드리는 자들로 결코 완전케 할 수 없다는 것도 배웠다. 참된 용서는 마치 그들이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으로 나왔듯이, 영혼의 겸비와 자복을 통하여서만이 얻을 수 있었다.

히브리서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먹고 마시는 것
 히브리서 기자는 의식적(儀式的) 제물들과 그가 이제 고찰(考察)할려고 하는 크신 제물되신 그리스도를 대조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의식들이 양심을 정결케 하는 것이나, 생애를 완전하게 해주는 것에는 거의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씻는 것
 유대인들이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의식적 씻음에는 여러가지 행위들이 있었다. 그러한 의식들 중 어떤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된 것으로서, 그 의식들이 지녔을지도 모를 영적 암시들 외에 위생과 개인적 청결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그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 예식들 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명하시지도 아니한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을 첨가시켰는데, 그것들도 구속력이 있었다.
육체의 예법
 이 예법이 죄되거나 무가치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에 속한 그러한 예법들은 육체에만 유익하였다.
히 9:11, 12 (9:11, 12)
 사도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신 사업에 대하여 고찰하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사업과 옛날 대제사장의 사업을 대조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의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의식들에 대하여 마음을 환기시킨 후에, 그는 이제 하늘의 더 높은 봉사로 향한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9: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그러나(영문) 그리스도께서
 “그러나”는 앞에 지나간 것과 뒤에 오는 것을 대조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앞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위대한 몇 인물들과 그리스도를 대조하였고,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하늘에서의 봉사와 땅에서 이루신 봉사를 대조한다.

오사
 즉 그리스도께서, 에덴 동산에서 구세주를 최초로 약속한 때로부터 사천 년을 기다리신 후, 마침내 오셨다는 말이다.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옛 의식들은 앞의 절들에서 일일 이 열거되었다. 장래 좋은 일이란 복음의 약속들로서, 곧 용서, 성화, 죄에 대한 승리, 영원한 의, 성결, 등인데 단지 상징적으로 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약속들이다.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하여 주석가들은 양분(兩分) 되서 있다. 어떤 이들은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란 하늘의 장막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신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영화롭게 된 몸이라고 주장하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전치사 말미암아는 세번 사용되었다.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의 피로 말미암아,” “자기 피로 말미암아.” 원어상으로 똑 같은 말이 매 경우에 사용되었다. 개역 성경에는 “말미암아(by)” 대신 “통하여(through)”로 되어 있다.

 앞에서 주지한 바와 같이, 헬라어에는 “성소”가 복수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말은 “성소들(holy places)” 또는 “성소(sanctuary)” 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 경우의 성소(sanctuary)는 두 칸으로 이 루어져 있는 전체 성소를 의미할 때에 그렇다. “장막”2절6절에서처럼, 첫째 또는 둘째 장막으로 되어 있지 않고, 원어상으로는 하나의 장막이 아니라 그 장막으로 일컬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정의(定義)가 없이 단순히 “장막”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수단에 의하여],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수단에 의하여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수단에 의하여]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우리는 개역 성경에 나머지 부분들은 그대로 두고 “말미암아” 대신 “통하여 ”로 대체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더 크고 완전한 장막,” 곧 그것으로 말미암아 또는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는 “성소들(holy places)”로 들어가신 것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우리는 이미 주석가들이 주장하는 상이한 견해들을 언급하였다. 이제 두 가지 주요한 견해들에 대하여 살펴 보려고 한다.

 첫째 견해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란 아래의 하늘들(the lower heavens)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하늘들을 통하여 하늘 자체로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아래의 하늘들이란 천사들의 거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내부의 하늘(the inner heaven)과 구분된다. 이 견해에 의한 아래의 하늘들과 참 하늘은 성소의 첫째, 둘째 칸들, 곧 성소와 지성소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기 위하여는 앞절의 “말미암아”“통하여”로 어차피 바꾸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래의 하늘로 “말미암아(by means of)” 하늘 자체로 들어가셨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래의 하늘들을 통하여(through) 하늘 자체에로 들어가셨다”고 번역한다. 그러나 설사 그렇게 바꾼다 할지라도, 이 구절[11절]에 사용된 단어와 다른 두 곳 [12절]에 사용된 단어는 동일어(同一語)로서 두 곳[12절]의 경우 필요한 말은 “말미암아(by)” 이거나 “의하여(in vir—tue of)”로 의미하여야 하는데, 바로 이 곳[11절]은 다른 두 곳의 단어가 지닌 의미, 곧 “말미암아”“의하여”로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의(異義)를 제기한다.

 이 견해는 하늘 성소에 두 칸이 있다는 것을 정확히 전제하고 있지만, 그것은 성소를 아래의 하늘들, 곧 단지 그리스도께서 지성소로 통과하여 들어가시는 관문으로 삼고 있음에 반하여, 지상 성소의 첫째 칸은 본질적으로 실체였으며 그 안에서 매일의 봉사가 수행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독립된 칸이었고, 단지 다른 칸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아니었다. 만일 아래의 하늘들이 첫째 칸이었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것의 의식적, 영적 가치를 부인하면서 그것의 존재를 시인하고 오로지 그것을 언급하고 있겠는가? 왜 9장 초반이 첫째 칸에 대하여 상세히 묘사하고 있으며, 떡상, 진설병, 향을 언급하고 있으며, 전체 제도는 현재까지의 “비유”라고 일컫고 있으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전혀 무시하셨고 그것을 단지 관문으로 여기고 계셨다고 말하는가? 왜 두 칸들이 특별히 2절에서 7절까지 언급되었으며, 24절에서는 “참 것의 그림자”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면서 11절에서는 이 제도가 무시되었는가? 6절에는 제사장들이 “항상—continually”(R. V)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한다. 11절에는, 이 해석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거기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신다. 제사장들이 첫째 칸에 항상 들어간다는 사실은 성령께서 의미있는 것으로 언급하신 점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의 첫째 칸에서의 봉사, 곧 지상의 모형적 성소의 성취이었던 이 봉사에 대한 여하한 언급을 완전히 무시하실 수 있었을까?

 이러한 근거들로 인하여, 우리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은 성소를 지칭한다는 해석을 거절하는 것이다.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하나의 관문에 주어지고, 그럼에도 그러한 괄목할만한 이름을 칭할만한 위치나 봉사가 그것에게 없다고 한다면 이상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 칭호는 분명히 어떤 고상한 위치로 옮기는 것으로 이해된다. 여기 제시된 견해에 따른 해석은 정반대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해석을 거절하지 않으면 안 될 가장 유력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본래부터 독법(讀法) 자체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은 첫째 칸이라는 결론을 여하튼 금지하는 것이다.

 이 해석에 대한 최대의 장애물은 이 구절에 첫째 또는 둘째 칸이라는 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더 크고 온전한 장막”“성소들”이란 두 표현이 있다.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첫째 칸으로 부를만한 아무런 근거나 이유도 없고, 복수로 되어 있는 “성소들”을 둘째 칸에의 적용을 금지하는 근거나 이유도 없다. “성소들”을 첫째 칸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타당성 있는 이유로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첫째 칸이나 둘째 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양(兩) 칸들, 곧 성소 전체를 의미하고, 또 그렇게 의미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고 있지 않는 것에 주목해 보라.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성막을 통하여 하늘 성소로 들어가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통하여 지성소로 들어 가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첫 장막 또는 첫째 칸이라고 언급하지 않는다. 지성소라고 언급하지 않는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 의하여, 수단에 의하여, 또는 통하여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자체에 의한 지지를 받지 못하는 독법(讀法)에 근거한 모든 해석은 거절해야 한다.

 우리의 주의를 끄는 두번째 견해는 본문의 어법에 근거한 것으로서, 언뜻보기에는 옳은 견해인 것 같다. 이 견해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읽는다: “그리스도께서 ∙∙∙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성소로 들어가셨다”(성소들). 장막과 성소들 또는 성소로 두 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하늘에 성소(Sanctuary) 뿐만 아니라 장막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곧 제기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 [성소]로 말미암아 또는 통하여 다른 곳[지성소]으로 들어 가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은 첫째 칸을 의미할 수도 없고, 의미되어서도 안 되며, “성소들” 또는 “성소”가 둘째 칸에 국한될 수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이러한 표현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세번 사용된 전치사 “말미암아(by)”에 대하여 다시 주의를 돌리게 된다. “장막으로 말미암아(by)”, “염소의 피로(by)”, “자기의 피로(by).” 마지막 두개의 “말미암아”의 용법은 분명히 조격(助格), 곧 의하여, ~의 수단으로, 덕택으로의 용법이다. 만일 우리가 첫번째의 “말미암아”에 마지막 두개의 경우에 서와 같은 동일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의 덕택으로, 장막의 수단에 의하여, 장막에 의하여 하늘 성소로 들어가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첫째 칸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첫째 칸에 의하여(by virtue of) 하늘 성소로 들어가셨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말미암아(by)”를 바꾸어서 그것에 다른 두 곳에서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든지, 아니면 “장막”에다 첫째 칸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관성이 있다는 것은 본문에 나타나는 세 경우의 “말미암아(by)”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이미 “더 크고 온전한 장막” 첫째 칸으로 생각할만한 아무런 근거도 증거도 없음을 알았으므로, 여기에 사용된 “장막”의 참 의미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늘 성소가 존재함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표명하자. 우리는 지상에 성소가 있었던 것처럼 진실로 하늘에도 성소가 있음을 믿는다. 만일 우리가 이 성소가 나무나 돌로 지은 건물임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음을 시인한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성격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늘 성소에 대한 전반적인 묘사는 실제적인 사상을 전달하는 확실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것들을 정결케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진 곳에서의 “것들”은 실재(實在)이다(히 9: 23). 우리는 갈바리에서 흘린 실제적 피가 존재하지 않는 영적 성소에서 드려지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다. 진실로, 그 곳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만일 실제적 피를 흘렸다면 참 성소도 마땅히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일관성(一貫性)의 요구하는 바이다. 하늘에 있는 이 성소는 장막이라고도 불리고 성전으로도 일컬어진다(계 11:19; 15:5).

 신약의 기자들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성전”이라는 말을 독특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것과 관련된 다음의 성경절들은 흥미있는 구절들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마 26:61; 27:40; 막 15:19 참조), 거짓 증인들은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막 14:58)고 증거하였다. 설사 그들이 거짓 증언을 하였고, 그리스도가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 것이라고—그분께서 결코 그런 말씀은 하시지 않았다—친히 말했다고 진술하였을지라도, 그리스도가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그가 일으키리라고 말했다고 한 그들의 말은 진실이었다. 신약의 모든 구절들에서와 같이 이 구절들에 나타난 “성전”이라는 헬라어는, 개역성경의 난외주에 명시되어 있듯이, “성전(Temple) 또는 성소(Sanctuary)”로 올바르게 번역할 수 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 또는 “성소”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9-22).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 3:16, 17).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6)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히브리서에도 똑 같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 곳에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 하였다.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 3:5,6).

 베드로는 장막을 하나의 예증으로 사용하고 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3, 14).

 바울도 이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만일 우리가 이 구절들의 내용을 요약한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다(히 3:6). 이 신령한 집은 산 돌들로 지어진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후 2:5). 그 집은 견고한 기초,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엡 2:20)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산 돌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 혹은 ‘성소’(개역성경 난외 주)가 되어간”다(엡 2:21).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 안에 거하실 것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고후 6:16). (엡 2:22참조) 하나님의 이 성전 혹은 성소는 거룩하며, 더렵혀지지 않아야 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옛 성소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중에 거하셨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짓되”(출 25:8). 이 성소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안에 거하신다. “내가 저희 가운데(in) 거 하며”(고후 6: 16);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 망이니라”(골 1:2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7). 이 성전에서는 우리가 산 돌들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벧전 2:4)이시다. 이 신령한 집에서는 성도들이 제사장들로서 영적 제사를 드린다. 그들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며, “왕같은 제 사장들”이다(벧전 2:5, 9). 우리가 성전과 제사장들 안에서 산 돌들이 되는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산 돌이시요. 대제사장이시다(벧전 2:5; 히 5:5; 8:1).

 신약의 여러 부분에서 취한 이 성경절들은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 또는 성소로 일관성 있게 묘사하고 있다. 유대인의 장막은 실제로 그리스도인 교회에 대한 하나의 표상이었다. 우리가 성소의 예식들과 의식들을 연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하며, 이 의식들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산 교회와 참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교회는 여러가지 요소를 함유하고 있는 그것의 기능에 있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성전일 뿐만 아니라, 교인 각 사람이 또한 성전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우리는 멸함을 받지 않기 위하여, 이 성전을 더렵혀서는 안된다(17절).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영적 제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이 구절들에 덧붙여 몸을 장막으로 비유한 베드로의 말과 이 땅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하나님의 집, 곧 손으로 짓지 아니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바울의 말을 첨가할 수 있다(벧후 1:13, 14; 고후 5: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에 의하여 또는 통하여 하늘 성소들에 들어가셨다는 것을 들을 때에, 그것은 곧 당신의 완전하신 생애로 말미암아 당신의 몸을 하나님의 성령의 내재(內在)를 위하여 합당하고 정결한 성전으로 만드신 후,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자기의 피를 가지시고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으며, 그분께서는 이 피를 가지시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제사장들이 피를 의지하여 성소에 들어갔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더 크고 온전한 장막, 곧 당신의 몸된 성전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피 즉 당신의 생명을 의지하여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하나님의 이상(理想)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표명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만든 성전들에 거하시지 않는다. 그분께서 단지 당신의 백성 에 거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성전으로 삼으셔서 그들 에 거하기를 원하시며, 그들 에서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실만한 이상적인 성전을 찾으셨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놀라운 건축물로서 그 모든 부분들이 완전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의 중요성을 거의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께로 가는 길을 그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하여 그들 중에 성소를 두었다는 것과 그들을 그분의 거룩한 임재를 위한 합당한 성전으로 삼으시려고 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성소들을 더럽힌 것은 그들의 죄라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과오를 끝마치며 죄의 종막을 고하기를 바라고 계셨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몸의 성전됨에 대한 아무런 개념을 갖지 못했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잘 알고 있을법한 몸의 하나님의 성전됨에 대한 비유를 사용하셨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오해하여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요 2:21)을 알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에게 논증하려고 하셨던 바로 그것—몸은 하나님을 위한 임재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고소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그분을 죽게 하였다(마 26:61; 27:40).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란 그리스도의 신인(神人) 양성(兩性)을 의미한다고 하는 견해는 초기 교회가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이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말씀하신 요한복음 2:18-21과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에게 돌렸던 진술, 곧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막 14:58)는 말씀과 바울의 진술 즉 만일 우리의 땅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고후 5:1)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씀들에 기초한 것이다. 그들은 이것과 “손으로 짓지 아니 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히 9:11)과 연결시킨다. 이 견해를 더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들은 요한복음 1:14을 인용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장막을 치시매—헬라어].”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다양한 면들을 적절히 강조하고 있다. 이 견해는 전치사 “말미암아(by)”의 용도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매 경우 그것은 “~에 의하여(by virtue of)”를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계시면서 행하셨던 사업을 강조하는 데,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하나님을 위한 적합한 거처(居處)가 되게 해주며, “더 크고 온전한 장막” 또는 원어에서처럼 더 크고”란 말로써 인정(認定)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 즉 당신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셨으며, 당신께서 조사를 위하여 아버지께 드린 온전한 몸은 세워진 표준에 달했으며, 그리하여 하나님 면전에 들어가는 일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내가 믿는 대로는 이 해석은 옳다. 여기 제시된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권위있는 진술들이 이 장의 다음에 있는 부록에 언급되어 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우리를 위한(영문)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이루사(Having obtained)” 또는 “그것으로 이루고 있는(thereby obtaining)” 모두 수납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사망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복을 구속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루사”로 번역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개인의 죄, 세상의 죄에 대한 최종적 승리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구속을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이루고 있는”으로 번역할 수 있다. 여느 때처럼,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공정히 의미할 수 있는 단어나 구(句)를 선택하실 때, 거기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에 진리가 있다. 그런 경우가 바로 이 경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뚜렷한 일을 이루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그 뚜렷한 일을 이루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루신 구원과 영광으로 마침내 있게 될 구속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고 계신” 것이다. 그 동사의 독특한 형태는 신약 중 오직 이곳에서만 발견되고, 이 단어는 “스스로 발견하고, 쟁취하고, 획득하기 위하여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써 얻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 동사는 “혼자서, 또한 자기 힘으로 얻는”으로 올바르게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번역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으로써 혼자서, 또는 자기의 힘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그리하여 이 구속이 우리에게 입혀주는 바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영원한 속죄는 옛 대제사장이 그 백성을 위하여 이룬 일시적 속죄와 구속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성소 봉사에서 얻어지는 용서와 속죄는 임시적이고 일시적이어서 다시 반복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속은 그분의 의가 그러한 것처럼 영원하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신 “좋은 것들”이다.
히 9:13, 14 (9:13, 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홈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황소와 염소는 대속죄일의 속죄를 위한 예식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날에 재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히브리서 기자가 주로 대속죄일을 그의 염두에 두고 있긴 하지만, 그는 대속죄일의 세세한 봉사들에 대한 것보다는 오히려 그의 연구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피와∙∙∙재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넣는 물은 “분리의 물”로 일컬어지며, 죄의 정결과 속죄제를 위하여 사용되었다(민 19: 9, A. R.V).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되기를, 그는 “물과 피로 임한 자”(요일 5:6)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요 19:33, 34).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구속에 대하여 말하면서 사도는 죄의 정결로서 재를 타는 물을 포함시키고 있고, 또한 피와 물을 대등한 위치에 두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암시적이어서 관심있는 학생들이 이 분야를 연구함으로써 풍성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히브리서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하물며
 바울은 그의 논리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 만일 동물들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가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게 할 수 있거든, “하물며” 예수의 피가 어찌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할 수 없겠는가?
그리스도의 피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피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 1:19)라 일컬으며,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피라 하였다(행 20:28).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드리셨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 시자 희생제물 되심에 대하여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서, 이 구절은 그러한 표현의 근거가 된다. 그 분은 마지못해 드린 희생제물이 아니셨다. 그는 자신을 드리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주신 것이 진실인 것처럼, 아들께서 자신을 주신 것도 진실이다(요 3:16; 갈 1:4).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말미암아(through)”11절12절에 번역된 “말미암아(by)”와 원어상으로 동일어로서 “~의 수단에 의하여(by means of), ~의 덕택으로(in virtue of)”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성령은 어느 분을 지칭하는 것인가? 성령이신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영이신가? 원어에 정관사 “그(the)”가 없는 것은 개역성경(R V)의 난외주에 있는 것처럼 “그의 영”으로 읽어야 함을 지적해 준다. 이러한 독법(續法)은 일반적인 논쟁과 일치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당신의 신성으로 말미암아 드리셨다.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써 드리도록 성령께 구하는 일은, 대제사장은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비추어, 불 필요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바리에서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셨으며, 이제는 당신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셨다(히 9:12). 무엇 때문에 그 분께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일을 행하게 하실 것인가? 성령은 대제사장도 아니며 영원한 성령으 로 일컬어지지도 않는다. 주지한 바와 같이, 정관사가 없다. 이 경우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 매우 유별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을 영원하신 성령”이라 하는 대신, 어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에는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또는 개역 성경처럼 “피가 죄를 속하게 되는 것은 그 생명 때문이다(레 17:11)로 되어 있다. 이 말씀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는 말씀 다음에 나온다. “생명”의 히브리 말은 “영혼(soul)”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을 때 그분께 서는 자신 전체를 주셨고,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셨다(사 53:10). 거기엔 그 분의 신인(神人) 양성 兩性), 곧 그분 자신의 영원한 영, 즉 그분의 거룩한 개성이 포함되었다. 그가 자신의 영혼을 죄를 위한 제물로 드리셨을 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고, 아무것도 유보(留保)하지 않으셨다. 즉 그는 지고(至高)한 헌신으로, 즉 자원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한 것도 아니고, 아무런 도덕적 가치성도 지니지 못한—희생제 물의 편에 서는—레위기의 희생제물들과 대조적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희생제물이 되시어, 바로 자신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안에 있는 최고의 것, 곧 그의 영원한 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운명이 포함되어 있는 영원한 언약의 조항들을 이루시기 위하여 의도적이고 스스로의 결정에 따른 행위에 의하여 자신을 주셨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놓을 권세도, 다시 취할 권세도 가지셨다(요 10:18). “혼자의 힘으로” 그는 우리를 죄로부터 정결케 하여 주신다(히 1:3). 이와같이 그가 최고의 도덕적 가치성을 지닌 계획되고, 예정되고, 자원된 행위로써 자신을 주신 것은 그의 영원하신 영으로 말미암아서였다. 그 동일한 영으로서 그는 하늘 성소에서 자신의 일을 계속 수행하신다.
양심으로 깨끗게 하라
 그리스도의 사업이 지나간 과거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현재의 실재로서 여기에 보여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뚜렷한 일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 사업과 그 구속은 영혼 개인에게 적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양심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죽은 행실로부터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이 일은 현재의 계속되는 일로서 모든 세대에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사업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피를 매일, 계속적으로 적용시키는 일을 생각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운행하게 하셨으며, 혼자의 힘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도 갈바리 상에서의 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속이 시작되게 하셨으며, 구속 스스로 계속되게 놓아 두셨다. 성소에서 희생 양을 죽인 것은 화목의 수단, 즉 피를 제공한 명백한 행위였다. 그러나 피가 효력이 있기 위하여는 뿌려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피뿌림은 죽음만큼이나 중요했다. 갈바리에서 흘린 피는 죽은 행실로부터 양심을 정결케 하고 깨끗게 하는 능력이 있다. 죽은 행실은 단지 지나간 과거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의 실재로서의 행위이다.

섬기게
 영혼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업에는 의도하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 우리의 생명(lives), 우리의 양심이 정결케 됨은 우리로 섬기게 하려 함이다. 깨끗한 양심을 지니기 위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받게 되는 것은, 비록 좋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우리가 정결케 되는 것도 섬기기 위함이다.
히 9:15-17 (9:15-17)
 이 구절들은 많은 사람들이 난해한 구절들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 구절들은 언약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을 소개하고 있는 듯이 보이며, 주석가들도 헬라어의 디아떼케를 언제 “계약(covenant)”로 번역하고, 언제 “언약(testament)”으로 번역해야 될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전한 안내자로서 올바른 이해를 하게 해 주는 것은 문맥이라고 믿는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를 인하여
 즉 그리스도의 피는 효력이 있고, 양심을 철 저하게 정결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중보
 앞에서 주지하였듯이, 언약에 대한 헬라어는 “계약(covenant)”“언약(testament)”으로 번역할 수 있다. 올바른 의미를 결정 짓기 위하여는 필요하다. 지금의 경우는 문맥이 “계약”이 더 좋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계약만이 중보자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언약은 한 사람에 의하여 집행되는 문서이다. 그것은 중보자가 필요 없다. 계약은 어떤 일을 하기로, 또는 하지 않기로 동의한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집행된다. 여기엔 중 보자가 필요하다. 언약은 사망시에만 그 효력이 있다. 계약은 사망시에 그 효력이 중지된다. 언약은 집행자가 필요하고, 계약은 중보자가 필요하다.
새 언약
 이것은 예레미야가 그의 책 31:31-34에서 말한 계약이다. 모세는 옛 언약의 중보자이다(출 20:19; 32:30-32; 갈 3:19).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이시다.
죽으사
 옛날 의식법에는 고범죄에 대한 아무런 조항이 없었다는 것을 이미 언급하였다. 그리하여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행 13:39) 여러 죄들이 범해졌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도록 하자. 구약에도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용서가 있었다. 그러나 모세의 법에는 그러한 용서를 위한 아무런 규정이 없었다. 이 구절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기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소망을 붙들게 한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이것”(행 13:38,39)이라고 설교했을 때, 그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히 9:15을 다음과 같이 해석 또는 의역하여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행실로부터 양심을 깨끗게 하실 수 있으므로—옛 언약의 희생 제물들로써는 할 수 없었던—그가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 그의 죽으심으로 모세의 법규, 아래서는 어떤 희생 제물도 할 수 없었던 모든 죄과들에 대한 참된 구속과 속죄가 제공되고, 그리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옛 언약에서나 새 언약 하에서—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받을 수 있게 해 준다.”

 12절영원한 속죄” 14절영원한 성령,” 그리고 15절영원한 기업”을 주시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히브리서 9: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까지 계약의 의미에서 사용하여 왔던 헬라어를 이제는 언약의 의미와 곁들여 사용하고 있다. 15절에 언급된 “영원한 기업”은 유언 또는 언약의 사상을 암시하고 있다. “죽은 후에야”라는 귀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한 기업으로 남겨두시고 돌아가신 것 같이, 첫 언약에서도 죽음이 있었고, 이 죽음은 언약의 비준(批准)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상기시켜 준다(출 24:5-8). 헬라어는 계약과 언약 모두를 의미한다—위에서 주지한 바와 같이—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무슨 의미가 그의 목적에 최선의 것으로 쓰여지든지 간에, 그는 이 말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계약의 의미로 그것을 사용하여 왔다. 이제 그는 그것이 언약의 의미도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언약은 죽음이 있기 전에는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 므로 “유언자가 죽어야 하는 것”“필요한” 일이다. 구약의 피에 의한 인준(認准)은 계약이 유효하게 되었고 그것의 조건이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는 공식 선언이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히 9:18-22 (9:18-22)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9: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히브리서 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첫 언약은 “송아지와 염소의 피”로써 인준되었다. 모세는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렸다. 출애굽기 24:5~8의 기록에는 책에 피를 뿌렸다 거나 염소를 희생제물로 사용하였다는 말이 없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러한 말을 쓴 것은 현재 우리가 얻을 수 없는 자료들에서 얻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장막과 그릇들에 피를 뿌렸다는 말은 주석가들을 다소 당황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장막은 계약을 인준할 즈음엔 존재하지 않았고, 장막의 헌당도 구 개월 후가 되기까지는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장막과 그 봉사, 그리고 그릇들을 계약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들의 봉헌과 성소에 대한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인준 예식의 부분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견해를 받아드린다. 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이 언약궤 안에는 율법책이 보관되어 있었고, 언약의 돌판이 있었다(신 31:26; 9:9; 10:5).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성소를 당신의 거처로 받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율법의 보관소로 삼으시고, 또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게 하셨을 때, 그분은 언약에서의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승인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속죄일에 대한 확실한 언급이 몇 절에 나타나 있다. 구약에는 장막이 기름으로 발리워졌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본 구절들 속에서 말해진 것처럼, 피가 그 장막의 헌당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기름으로 바른 것은 장막뿐만 아니라 단과 그 그릇들에도 마찬가지였다(레 8:10-12). 단에는 피도 뿌렸고 기름도 발랐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의복에는 기름을 발랐을 뿐만 아니라 피도 뿌렸다(24, 30절). 그러나 헌당 때에 장막에 피를 뿌렸다는 말은 전혀 없다. 그러나 레위기 16장에는 대속죄일의 봉사와 성소, 곧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속죄소와 단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 모든 것들에 피를 뿌렸다고 되어 있다(레 16:14-19), 히브리서 기자가, 언약의 비준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비준을 할 때 무슨 일이 행하여졌는 지를 말할 뿐만 아니라 성소의 헌당을 포함시키고 있고, 또한 성소에 피를 뿌렸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헌당 의식들을 염두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의 봉사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헌당예식이 대속죄일의 예식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거의 모든 물건이
 모든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었다. “거의”22절의 두절에 속하기도 하고 수식하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피를 조금도 사용함이 없이 물이나 불로써 정결케 되었다(민 31:23, 24). 어떤 상태에서는 피 대신 가루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될 수 있었다(레 5:11-13). 붉은 암송아지의 재가 직접적인 피의 사용이 없이 속죄제로 사용되었다(민 19장). 일반적으로 피가 정결케 하는 일에 사용되었을지라도, 주지한 바와 같이 예외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일한 예외였고, 피가 통례(通)였다.

히 9:23-28 (9:23-28)
 첫 눈에는 하늘에 무언가 정결케 해야 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이상스럽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사단이 한 때는 천사였고, 그가 하늘에서 죄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선행뿐만 아니라 죄의 기록들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고, 죄와 죄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가 이르러오면 지금까지 죄와 접촉하였던 모든 것들의 정결이 있을 것을 이해하고 있다. 마침내 죄의 기록 자체가 소멸되고 나면, 죄를 생각나게 할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한 하늘에 있는 것들의 정결은 지상 성소의 정결과 매우 부합될 것이다. 지상에 있는 것들이 정결케 된 것 같이, 하늘에 있는 것들도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단정적이다.

(어구(語句) 해설)
히브리서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그러므로∙∙∙필요가 있었으나
 지상에 있는 것들의 본질상, 지상의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들은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은 봉헌과 헌신의 일로 성소가 이용되기 전에 행해졌으며, 그것은 성소 봉사가 계속되는 한, 해마다 그 후로 행해졌다. 사람의 솜씨의 결과로 된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되어야 할 때, 그것이 거룩한 용도를 위하여 구별되기 위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성소의 봉사들이 대부분 죄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성소들과 그 도구들이 계속 부정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함”(레 16:16)이었다. 그러므로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제단을 위한 정결이 있었다(16-20절). 이 정결은 필요한 것이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
 지상 성막의 모든 비품들은 모형이요.. 복사판이요, “하늘에 있는 것들”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모형(pattern)”이라는 말이 히브리서 8:5에는 “모형(example)”으로 번 역되었는데, 이 곳에서는 지상의 봉사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로 말하여 지고 있다. “윤곽(delineation)” 또는 “대표(representa tion)”라는 말이 여기서는 아마도 최상의 번역이 될 것이다.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원어에는 “것들”이란 말이 없다. 그러므로 “하늘들 자체”라고 읽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것들(things)”을, 다른 사람들은 “장소들(places)”을 추가시키는데, 둘 다 받아들일 만하다. 대속죄일의 지상 성소의 정결에서 성소들과 “것들”이 정결케 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성소들과 “것들”이 포함된 “하늘들 자체”가 맞다는 신념에로 기울어지게 된다.
더 좋은 제물
 “제물들”이란 복수의 표현은 제물에 대한 일반적인 사상이다. 여러 가지의 형태들이 레위기의 봉사에 사용되었는데, 이 봉사는 하나의 크신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 안에 함유되어 있다.

 우리의 최고의 관심이 되는 문제는 무언가 하늘에 정결을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는 진술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웨스트코트는 의미심 장한 소견을 말하고 있다. “문장의 전체 구조는 ‘정결케 되었다’는 말이 첫 구절과 둘째 구절 사이에 보충되어야 하며, 더 이상 ‘시작 되었다’의 일반적인 용어로서가 아니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히브리서, 271).

 웨스트코트의 강조점은 이것이다. 즉 지상 성소가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처럼, 하늘 성소도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봉헌되었다거나 시작되었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늘 성소는 지상 성소의 정결과 병행하는 방법으로 정결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델리치는 “두번째 절에서 봉헌(dedication) 또는 헌신(consecration)의 보다 일반 적인 개념을 대치하려는 것은 ∙∙∙ 단지 ∙∙∙ 난관을 피하려는 것이다. 희생의 피로 말미암는 헌신은 여전히 정결 또는 속죄의 개념을 내포할 것이다”고 말한다(히브리서 주석, 2권, 124).

 여러 학자들의 의견들을 인용하거나 반박한 다음, 델리치는 계속한다. “스티얼의 다음의 해석은 매우 진실에 가깝다. ‘우리 속에 현존하고 있는 죄의 결과로서, 하늘의 지성소는 그것이 먼저 속죄의 피로 발리우기 까지는 우리의 접근을 위해 다시 열릴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에푸라니아를 하늘의 지성소에 국한시킴으로써 틀렸다. 우리가 본대로, 여기서 말하는 ‘하늘의 것들’은 지상 성소의 지성소뿐만 아니라 지상 성소의 하늘의 실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전히 의문은 남게 된다. 하늘의 것들이 대속의 죽음과 그 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단지 상징적으로만 아니라 실제로, 정결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로 말해진 것인가? 이것에 대한 나의 견해가 틀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룩한 기자가 품은 의미는 근본적으로 이것이다. 24절에서 말한 세상 밖의 지성소, 아우토스 호 우라노스, 입 숨 코엘룸,(αυτός ο ουρανός, εφsum coelum) 즉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하나님의 영원한 하늘도, 그 자체에는 요동함이 없는 축복과 빛이 있을지라도, 죄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인류를 위한 하늘의 사랑의 빛이 잃어버린 바 되었거나 변질되어 있는 동안은, 또는 오히려 진노의 불로 말미암아 그것이 흐려졌거나 어두워져 있는 동안은 정결이 필요하였다(카싸리제 스싸이—καθαριζεσθαι—). 그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성소, 곧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친히 나타나는 곳도, 잃어버린 바 된 하나님의 자비가 은혜로 회복되어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나타나는 장소로 한번 더 바꿔지기까지는, 죄로 인하여 인간 스스로는 그들의 신령한 본래의 영원한 집으로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는 동안은, 정결이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타 에푸라니아, 즉 타 하기아 영원한 성소 그리고 스케네,—하늘 성소에는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인간의 죄의 결과들을 제거하는 일과 죄에 대항하는 반대 작용, 즉 하나님의 진노의 제거, 또는 오히려 그 진노가 새롭게 된 사랑으로 바꾸어지는 일이 요구되었다”(상동, 125).

 독자들로 하여금 이 인용문의 완전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것을 간추려 보고자 한다.

 델리치는 하늘에 있는 “지성소”“속죄의 피로 발라져야 한다”는 스티얼의 해석을 시인한다. 그러나 그는 지성소만 피로 발라져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보아 온 대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하늘의 것들은 지상 성소의 지성소 뿐만 아니라 지상 성소의 하늘의 실체를 포함한다”고 믿고 있다. 즉 정결에는 “영원한 성소”라 부르는 지성소뿐만 아니라 첫째 칸도 포함된다. 하늘 성소의 두 칸들이 정결케 되어야 한다. 단지 지성소만이 아니다. 요약하면, 그는 하늘의 지성소와 성소와 관련하여 “그것들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인간의 죄의 결과들을 제거하는 일, 죄에 대항하는 반대작용, 즉 하나님의 진노의 제거가 요구되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인간의 죄의 결과들을 제거하는 것에 관한한 이것에 동의한다. 더우기 우리는 하늘 성소의 정결은 죄의 결과들 뿐만 아니라 또는 단지 죄의 결과들만이 아니라 죄 자체의 제거를 포함하여,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는 것”이 포함되는 것을 믿는다. 델리치는 만족한듯이 이 귀절을 인용한다(상동, 124, 125).

 나는 이것이 우리가 연구하는 절을 공정히 나타내고 있다고 믿는다. 지상 성소가 정결케 되었듯이, 하늘 성소도 정결케 되어야 한다. 지상 성소의 정결이 필요되었듯이 하늘 성소의 정결도 “필요하다.” 하늘 성소의 이러한 정결은 단지 봉헌이나 거룩히 바치는 것만이 아니었다. “정결”이란 말은 그러한 해석에 국한시키기기에는 너무 명백하다. 진실로, 하늘 성소의 봉헌이 있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기름부음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정결”의 의미를 남김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명백히 실체적 대속죄일을 가리키고 있고, 그것은 그 외의 어떠한 것으로도 만족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 사이의 유사점의 폭을 넓히고, 지상 성소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사실에 의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적절한 봉사가 시작되기 전에 지상 성소의 봉헌이 있었던 것 같이, 하늘 성소에도 공식적인 봉사가 막을 올리기 전에 봉헌이 있었다고 기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상 성소에서 일년 내내 봉사가 드려진 후에 모든 죄들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날—대속죄일로 일컬어지는 날, 곧 쌓였던 모든 죄들로부터 성소가 정결케 되는—셈하는 날이 왔던 것처럼, 하늘에서도 그리스도의 봉사가 끝마칠 때에 그와 병행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본 성경절이 가지는 의미요 의도하는 바이다. 대속죄일에 대한 보다 충분한 설명이 이 장의 끝에 언급되어 있다.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앞에서 주지하였듯이, “성소”의 헬라어는 복수로 되어 있는 데 여기는 복수로 옳게 번역되어 있다. 12절에도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거기엔 단수로 잘못 번역되어 있다.
참 것의 그림자
 여기의 생략은 부득이 “참 성소들로 읽게 해 준다. 이 참 성소들이 여기서는 “하늘 자체”로 말해지고 있다. 하늘 성소는 하나님의 거처이므로, 성소들을 하늘 자체로 칭하는 것은의 미심장하다. 우리는 푸른 대기권을 하늘이라 하고, 별들이 있는 하늘, 천사들이 거하는 곳을 하늘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처는 하늘 자체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신 곳은 바로 그 곳이며,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지금 하나님 앞에 나타나 계신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는 문자적으로 “하나님 면전(面前)”이다. 대제사장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 연기로 그를 가리우고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 대조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 그런 것 없이 나타나신다. 우리는 이 일의 중요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즉 조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신다. 이 광경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어진 일을 다 마치시고 땅에서 되돌아가셨을 때 벌어졌다. 그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 것은 승인의 말씀을 듣고, 그의 희생이 가납될 만한 것이었음을 확신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이루신 일은 엄밀한 검열의 시험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아담으로서, 그는 첫째 아담이 겪은 것보다 무한히 혹독한 시험을 땅에서 겪으셨다. 이제 그는 사람을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 하나님께서 그를 받아주시느냐의 여하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다. 만일 그가 가납되면, 사람도 가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에, 우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하나님 면전에 나타나신다. 우리는 조사를 받지 않으면 안될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 시험을 견딜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한 빛을 비추시게 하여 견딜 수 있을까?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할 수 있으나 그 외의 방법은 없다. 본 성경절의 “이제”의 영광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이제”로서, 단지 시간상의 어떤 순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나타나 계시는 것이다. 그는 “이제” 나타나 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나타나 계신다.

 델리치는 헬라어의 구조상 “나타나시고”는 계속적인 행위에 대하여 사용될 수 없고, 단 한번만 나타나고 그 이상은 나타나지 않음을 의미해야 한다고 반론을 편다. 그는 구조상 그 자체로서는 여기에서 스스로 나타남의 계속성을 표현하고 있지 않음을 시인한다. 그러나 (지금, νυν)이라는 말은 의심할 여지없이 새 시대(그리스도께서 하늘로 들어가신 것을 시작으로 하여)의 계속적 현존(現存)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에서 스스로 나타남의 계속성이 나타나 있고, 즉 모형과 그림자의 과거와의 대조에서 나타나 있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므로 이 (지금, νυν)은 시간상으로 어떤 독립된 시점이 아니고 길게 연결된 시리즈의 시작이다 :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활동에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 분으로서, 자신을 영원히 드러내시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히브리서 주석, 2 권, pp. 127, 128),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심은 “시간상의 독립된 시점이 아니고 길게 연결된 시리즈의 시작으로 ∙∙∙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 분으로서, 자신을 영원히 드러내신다.” 델리치는 이 구절에 대하여 다음의 말로서 끝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또한 희생 제물로서 영원한 하늘에 들어가신 최종적 목적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서 그 효력상 일시적이거나 다시 반복할 필요가 있는 희생제물이 아니라, 항상 계시고, 항상 살아있는 희생물과 속량물로서, 자신의 몸을 친히 우리를 위한 아낌없는 희생제물로 드리셨다. 이 목적은 단번에 달성되었고, 영원히 달성되었다”(상게서, p. 129).

히브리서 9: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제사장들은 매일 첫째 칸에 들어갔고,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 황소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주 자신을 드리려고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 단 한번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델리치의 말대로, “영속적으로(a long-linked series)” 나타나신다고 한 앞절의 말씀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나타나 계신다 할지라도, 오직 한번 죽으셨고, 그의 한번의 죽음은 영속적인 효력과 영속성이 있다. 자신의 몸에 속죄의 피를 가지시고, 그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롬 12:1)를 드리신다.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제, 단번에, 세상 끝에
 “세상 끝에” 보다는 “시대의 종말에.” 이러한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일, 곧 그분의 성육신, 즉 말구유에 아기로 세상에 강탄(降誕) 하신 일을 언급하는 것이라는 데는 일반적으로 그 의견이 만장일치이다. 그것은 1장 2절“이 마지막 날”과는 약간 다르다. 여기서는 마침내는 절정에 이르게 될 연속된 시대의 종말 또는 종국을 의미하고 있는 반면, 1장 2절은 단순히 현 시대의 마지막 기간을 의미한다. 앞에 지나간 모든 시대들은 오실 구세주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모든 것들이 그 사건을 가리켰고, 그것들이 그 절정에 이르는 길을 나타냈을 때에만 그 의미를 지녔다. 이제 그 일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자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28절에 언급된 “죄와 상관없이 두번째” 나타나시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사람에게는 죽음이 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온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한 번 죽으셨다. 그러나 그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두번째 나타나실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병행시키고 있는 것은 심판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죽으셨다. 죽음 후에는 심판—즉결 심판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온다. 이와같이 그 리스도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죽으셨다. 다음 심판으로 임하실 것인데, 그것은 즉각적인 심판이 아니고 “두번째 나타나실 때”의 심판이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그 때 나타나실 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속죄의 일을 마친 후, 나올 때의 모습과 조화를 이룬다(레 16:24). 그리스도께서 두번째 오실 때, 그는 자기를 기다린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심판으로 임하시는데—대속죄일에 그들의 영혼을 괴롭게 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끊침을 받을 그 때와 병행되는 것이다(마 25:31, 하단; 레 23:29).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리스도도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독특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셨다는 것을 들었으나, 여기서는 그가 드리신바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그가 누구로 말미암아 드려졌는가?라는 즉각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드려지면서 동시에 자신을 드릴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말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것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주신 것과 병행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갈 1:4; 요 3:16). 전자와 후자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삭은 자원하여 스스로 제단에 묶이기를 허락함으로써 자신을 드렸다. 진실로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런 모순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드려졌다. 이 표현은 이사야 53:12에서 따온 것으로,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로 나타내고 있다. 베드로는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벧전 2:24)하시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죄를 그의 몸에 짊어지시고 나무로 갔다”고 번역하면 더 좋을지 모르겠다. 그리스도께서 두번째 오실 때, 그는 죄를 짊어지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속죄를 완전히 이루신 후, 죄와 상관없이 나타나실 것이다.
부가적 설명—성소(「성소 봉사」에서 발췌한 것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제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출 25:2)고 말씀하신 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지 얼마되지 아니한 때였다. 이 제물의 내용은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출 25:3-7)으로 이루어져야 하였다. 그것은 대부분 성소의 건축과 일반적인 예식들에 사용되어야 하였다.

 여기에 언급된 성소는 평상시 장막으로 일컬어진다. 그것은 참으로 나무로 만들어진 벽들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출 26:14)가 되고, 제일 안쪽은 가늘게 꼰 베실로 만들어진 네 겹의 지붕으로 되어 있는 텐트였다. 건물 자체는 별로 크지 않았는데, 대략 15×45피트였고, 뜰이라 불리는 바깥 경내는 넓이가 약 75피트, 길이가 약 150피트였다.

 장막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쉽게 뜯고 옮길 수 있었다. 그 장막이 세워진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어디로 가든지 장막을 가지고 갔다. 건물의 널판들은 일반적인 건축물 같이 못을 쳐서 붙인 것이 아니고 따로따로 된 것으로서, 각 널판은 은 받침 위에 곧게 세워졌다(출 36:20-34). 뜰을 두르는 휘장들은 놋 받침 위에 세워진 기둥들로부터 매달려 있었다. 전체 건축물은, 비록 설계상으로는 아름답고 자못 호화로운 것이었기는 했지만, 일시적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건물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더 영구적인 건물을 세울 때까지만 사용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건물 자체는 두 칸들로 나뉘어져 있었고, 더 큰 첫째 칸은 성소로, 둘째 칸은 지성소로 불리웠다. 아름다운 포장 또는 휘장이 이 칸들을 나누었다. 그 건물의 양 칸들에는 창문이 없었으므로, 특별히 둘째 칸에, 만일 그 칸들이 햇빛에 의존되어 있었더라면, 캄캄하였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첫째 칸에는 일곱 가지의 촛대 위에 있는 등들이 의식이 요구하는 매일의 봉사를 제사장들로 수행할 수 있도록 충분한 빛을 비추었다.

 첫째 칸에는 세 가지의 기구들이 있었는데, 곧 떡상과 일곱 가지의 등대와 향단이었다. 동편을 향하여 있는 건물의 앞쪽에서 첫째 칸으로 들어서면, 그 방의 끝 가까이에 향단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오른편에는 진설병 상이 있고, 그 왼편에는 등대가 있다. 진설병 상 위에는 향과 전제를 위한 별들과 함께 열두 진설병이 두 줄로 놓여 있다. 그 상 위에는 매일의 봉사에 사용된 대접과 숫가락과 잔들이 있었다(출 37:16).

 등대는 순금으로 만들었다. “또 정금으로 등대를 만들되 그것을 쳐서 만들었으니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이 그것이 한 덩이로 되었고”(17절). 그것에는 여섯 가지가 있었는데, 중앙의 한 가지 양편에 세 가지씩 있었다. 기름이 담겨있는 잔들은 살구꽃 형상으로 만들었다(19절). 등대는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불집게와 불똥 그릇도 금으로 되었다(23절).

 이 첫째 칸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는 향단이었다. 그것은 가로, 세로가 약 18인치, 높이가 약 36인치가 되었다. 이 단은 순금으로 입혔고, 그 단의 꼭대기 가에는 금테로 둘렀다. 제사장이 매일의 봉사에서 번제단에서 취하여 온 숯불과 향을 놓는 곳은 바로 이 단 위에서였다. 제사장이 향단의 숯불 위에 향을 피우면, 연기가 올라가 성소뿐만 아니라 지성소를 곧 채웠다. 왜냐하면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은 건물 꼭대기까지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향단은 그 위치는 첫째 칸에 있을지라도 둘째 칸에 까지 봉사했다. 이러한 이유로, 향단은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 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출 30:6) 두어야 했다.

 둘째 칸, 곧 지성소에는 오직 하나의 기구, 즉 법궤가 있었다. 이 법궤는 상자의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길이는 대략 45인치요 넓이는 27인치였다. 이 상자의 덮개는 속죄소라 불리웠다. 속죄소의 둘레에는, 향단에서와 꼭 같이, 금테가 있었다. 모세는 두 돌판에 하나님께서 친수(親手)로 쓰신 십계명을 이 속에 넣었다. 적어도 한 동안은 만나가 든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 9:4)가 이 법궤 속에 있었다.

 속죄소 위에는 금으로 쳐서 만든 황금의 두 그룹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이쪽 끝에 다른 하나는 저쪽 끝에 있었다(출 25:19). 이 그룹들에 관하여는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출 25:20)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 백성과 교통하실 것이었다. 그 분께 서는 모세에게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고 하셨다.

 뜰의 바깥쪽, 곧 회막문 바로 앞에는 물두멍, 즉 물을 담는 큰 대야가 놓여 있었다. 이 대야는 이 목적을 위하여 여인들이 바친 거울의 놋으로 만들었다. 제사장들은 이 물두멍에서 회막에 들어가기 전이나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손발을 씻어야 했다(출 30:17-21; 38:8).

 뜰에는 번제단도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희생 제물을 드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단은 높이가 약 5피트, 높이가 8피트 평방이었다. 그 안은 우묵하게 되어 있었고, 놋으로 입혀 있었다(출 27:1). 번제물이 드려질 때, 동물들이 이 단 위에 놓여졌다. 여기서는 기름도 사뤄졌고, 소제에 필요되는 부분들이 놓여지기도 하였다. 이 단 네 귀퉁이에는 뿔같이 생긴 돌출 부분이 있었다. 어떤 희생제물들 중에는 그 피가 이 뿔들 위에 발라지거나 단 위에 뿌려졌다. 피뿌림에 사용되지 아니한 나머지 피는 단 밑에 쏟았다.

 솔로몬의 통치가 시작된 후에는 옛 회막이 황폐한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수 백년의 연륜을 갖게 되었고, 그 기나긴 세월 동안 풍우에 노출되어 있었다. 다윗은 여호와의 전을 짓기로 작정하였으나, 그는 피를 많이 흘렸으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 일을 하여야 했다.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왕상 6:7)였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렇게 불려지게 되었을 때의, 영구적인 건축물로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동안 사용되었던 일시적 장막보다는 모든 면에서 웅장하였다. 그것은 옛 성소의 두 칸들, 곧 성소와 지성 소로 나뉘었고, 중요한 기구들—첫째 칸의 향단과 둘째 칸의 법궤—은 동일하였다. 그 외에 건물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어떤 것에는 확장과 꾸밈이 있게 되었다. 옛 장막에는 두 그룹이 있었다(출 25:18-20). 솔로몬의 성전에는 금으로 입혀진 “감람나무”의 두 그룹이 지성소에 안치되었다(왕상 6:23-28). 이 그룹들은 내실 위에 놓여졌고, 그 날개는 이 벽에서 저 벽까지 닿았는데, 원래의 그룹은 법궤의 속죄소 위에 있었다.

 성전의 첫째 칸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하나의 등대 대신, 열 등대로서 이 쪽에 다섯, 저 쪽에 다섯이 있었다. 등잔, 불집게, 대야, 숫가락, 향로가 금으로 되었듯이, 이 등대들도 금으로 되었다(왕상 7:49, 50). 진설병이 있는 하나의 떡상 대신, 열개의 떡상이 있어서 “좌편에 다섯, 우편에 다섯”(대하 4:8)이 있었다.

 번제단 또는 놋단이 솔로몬의 성전에서는 상당히 커졌다. 옛 장막의 번제단은 약 7×1.5피트 평방이었는데, 솔로몬의 단은 더 커서 평방 약 30피트 높이 15피트였다. 단의 봉사를 위하여 사용된 솥과 부삽과 고기 갈고리와 그릇들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다(대하 4:11, 16).

 원래의 장막의 물두멍은 씻는 목적으로 있었다. 솔로몬의 성전에는 훨씬 더 큰 물두멍이 뜰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큰 놋 대야로서 지름이 15피트, 높이가 1.5피트로서, 물 약 2천 갈론을 담을 수 있는 크기였고, 그것의 크기 때문에 주조된(鑄造) 바다로 불렀다 왕상 7:23-26). 이 큰 바다 외에 바퀴들 위에는 조그만 열 대야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각각물 약 4백 갈론을 담을 수 있었다(왕상 7:27-37). 필요시에는 그것을 이곳 저곳으로 옮길 수 있었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원래의 모형으로부터 그러한 변화들이 생기긴 했지만, 두 칸들의 근본적인 특성에는—향단과 번제단, 지성소에 있는 법궤—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다윗에 의하여 솔로몬에 주어진 모형은, 이것에 의하여 성전이 지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은 단지 그 성전의 확대된 규모에 따라 필요되었던 그러한 변화들과 함께, 옛 성소가 확대된 것으로 믿을 수 있다.

 솔로몬의 성전은 기원전 6세기에 느부갓네살의 침공에 의하여 파멸되었다. 그 성전이 스룹바벨에 의하여 재건되었을 때, 백성들의 빈곤으로 인하여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영광을 재현시킬 또 하나의 성전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 성전이 너무나 보잘 것 없었으므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이 분변치 못하였다”(에 3:12, 13).

 이 성전에는 한가지 중요한 것이 생략되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없었다. 포로 시련의 기간 동안에 그것이 없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한 돌이 법궤를 대신하였다.

 스룹바벨의 성전은 그리스도의 때까지 있었고, 그리스도 당시 그것은 기원전 37년에 왕이 된 헤롯 대왕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기원전 20년경, 헤롯은 새로운 성전을 지을 준비가 되었을 때, 옛 건물을 조금씩 헐고 짓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성전 봉사는 결코 그치지 않았고, 전자는 점차적으로 후자로 대치되었다. 요 2:20에는 그리스도 당시에 성전을 짓는데 46년이나 걸렸다고 하였고, 기원 66년 이 채 되기도 전, 즉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기 직전에 헤롯의 성전은 완성되었다. 이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을 본따서 지었고, 그 영광과 웅장함이 솔로몬의 것과 비길만 했다. 이 성전에는—다른 성전들이 그랬듯이—두 칸들, 즉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고, 번제단과 물두멍, 등대, 진설병 상, 향단이 있었으나 지성소에 법궤는 없었다.


 매일의 봉사들

 회막 밖의 뜰에서 있은 번제단은 항상 사용되었다. 즉 번제단에는 언제나 희생 제물이 있었다. 매일 양 한 마리가 백성을 위해 드려 졌고, 이 양은 제사장에 의해 준비된 후, 번제단에 놓여져서 서서히 불에 태워졌다. 빨리 태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녁까지 계속되어야 하였고, 그 때 다른 양이 드려지게 되면 그것은 아침 제물이 준비될 때까지 타야 하였다.

 이와같이 번제단에는 아침, 저녁으로 항상 번제물이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되는 영구적인 속죄의 상징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대속의 희생으로 가리워지지 않은 때는 없었다. 그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들은 한 양이 번제단에 있어서 회개의 기초 위에 용서가 그들의 것이 됨을 알았다. 유대 백과사전, 2 권, 277 페이지에는 “아침의 희생 제물은 간밤에 지은 죄들을 위해 속죄하였고, 오후의 제물은 낮 동안 지은 죄들을 위해 속죄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조석(朝石)의 제물은 일년 내내 드려졌고, 결코 빠뜨려 져서는 아니 되었다. 더욱 정교한 제물을 요구한 특별한 경우가 있을지라도 백성을 위한 아침, 저녁의 번제는 항상 드려졌다. 안식일에는 이 제물이 배가(倍加)되었다. 즉 두 양은 아침에, 두 양은 저녁에 드려졌다. 대속죄일이라 할지라도, 이 일은 수행되었다. 민수기 28장29 장에는 16번이나 그 어떠한 것도 상번제(常祭)를 대신하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매번 다른 희생 제물이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상번제” 외의 것으로 말하여지고 있다. 그 것의 영구적인 성격 때문에, 그것은 계속적인, 또는 매일의 봉사로 일컬어졌다.

 성소에서 집무한 제사장들은 24반렬로 나눠졌는데, 각 반렬은 일년에 두번, 한번에 일 주일씩 봉사하였다. 백성도 그랬던 것처럼, 레위인들도 비슷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드려지는 양들은 백성에 의하여 제공되었고, 어떤 특별한 주간을 위한 양들을 제공한 백성의 분파는 그 대표를 예루살렘에 보내서 그 주간을 위한 봉사를 돕게 하였고, 한편 나머지 백성은 특별한 헌신의 주간으로 보냈다.

 매일의 봉사에서 드려진 양은 번제였다. 그것이 백성 전체를 위하여 드려졌을 지라도, 백성 개인을 위한 그것의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한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사람은 합당 한 제물을 성전으로 가져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범법자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서 하루 여행길, 또는 한 주일의 여행길에 있을 수도 있다. 그가 죄지을 때마다 매번 성전에 오기란 불가능하다. 그러한 경우엔 아침, 저녁의 희생 제물이 대속적, 일시적 속죄를 이루 었다. 그것은 대속물에 의한 헌신과 가납을 의미하였다. 개인의 번제에 관하여, “그리하면 열납되어”(레 1:4)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와 꼭같이 국가적 제물은 국가를 위하여 열납되었다.

 매일의 희생제물에서 국가의 죄를 위하여 만들어진 일시적 방편(provision)은 범범자가 자신의 죄를 위한 개인적 희생 제물을 가지고 와서, 죄에 대한 개인적 자복을 할 때에만 효과가 있었다.

 마치 그것은 지금 한 죄인이 갈바리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 암아 구원받는 것도 그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때에만 효력이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골고다에 서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희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사람들에게만 구원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비추어, 딤전 4:10의 말씀이 밝게 빛난다. 그리스도는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매일 매일 죄인들의 생명이 속량되었다. 그들은 일시적이며 임시적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넓게 미치는 은혜라 할지라도,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아침, 저녁의 희생 제물에 의하여 드려진 일반적인 잠정적 속죄에 있어서, 양의 피는 범하여 진 죄들을 기록하였고, 범죄한 개인이 속죄 제물을 가지고 올 때까지, 또는 회개하지 않은 경우엔 대속죄일이 되기까지, 그 죄들을 가리우는 역할을 했다. 그와같이 가리워진 죄들 중 어떤 것은 한번도 고백되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죄들의 기록은 용서를 받았다는 표식이 없이 단지 번 제단 위에 남아 있다. 다른 죄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죄들은 여호와의 회막을 더럽힌다(민 19:13, 20).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과 배도 한 사람들을 위한 은혜의 기간은 대속죄일에 소멸된다. 이 때 누구든지 그 영혼을 괴롭게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백성 중에서 끊쳐”(레 23:29)진다. 즉 그는 교회의 울타리 밖에—파문을 받게—있게 되었다. 그 날 이후로 번제단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16:19) 정결케 되었고, 고백하지 않은 죄들의 기록은 그 엄숙한 때의 최 종적 의식에서 처분되었다.

 영적인 견지에서 볼 때, 국가적 번제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녔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를 이루셨고, 둘째는 백성이 모든 것을 번제단에 둠으로써 하나님께 스스로를 헌신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을 때는 바로 이 후자를 말한 것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일반적인 번제들

 의무적인 속죄제와는 대조적으로, 번제는 자발적인 것이었고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제물이었다. 속죄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번제는 항상 단 위에서 태웠다. 속죄제는 그 기름은 불에 태웠을지라도, 결코 단 위에서 태우지는 않았다. 번제물에 있어서는 드리는 자가 그가 사용할 동물이나 새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속죄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시는 동물의 종류를 명시하셨다. 거기에는 사람이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이 외에도 차이점이 있었는데, 뒤에 논의될 것이지만 주로 피의 봉사에 있어서 그랬다.

 번제는 모든 제물들 중 가장 보편적이고 특색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자체 안에 다른 희생제물들의 주요한 특질들과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원적이고, 헌신적인 제물이었고, 직접적으로 죄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을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속죄가 이루어졌다(레 1:4). 욥은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번제를 드렸다. 그것은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욥 1:5)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번제는 “시내산에서 정한 상번제로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화제”(민 28:6)로 선출되었다.

 번제를 위하여는, 일반적으로 제물을 드리는 자가 희생을 위하여 사용된 정결한 동물을 이끌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동물은 흠없는 수컷이어야 하였다. 그 사람은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려야”(레 1:3)하였다. 동물을 선택한 후, 그는 열납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뜰로 끌고 왔다. 제사장은 희생 제물을 위한 규정들과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것을 조사했다. 조사를 받고 합격한 뒤, 제물을 드리는 자는 동물의 머리 위에 그의 손을 얹었다. 그 다음 그는 동물을 잡아서 껍질을 벗기고 각을 떠야 하였다(4-6절). 동물이 희생된 후, 제사장은 그 피를 찍어서 제단 위의 주변에 뿌렸다(5, 11절). 동물의 간을 뜬 후, 내장과 다리는 모든 더러운 것을 없애기 위해 물로 씻겨졌다. 그런 다음 제사장은 번제단 위에 그 각들을 적절한 순서대로 가지런히 놓았다. 거기서 불에 사루어졌다(9절). 이와같이 번제단 위에 놓여진 희생제물은 그 동물의 모든 부분—머리, 발, 다리, 몸둥이—이 포함되었으나 가죽은 그렇지 않았다. 이 가죽은 집전하는 제사장에게 주어졌다(레 1:8; 7:8).

 호도애나 어린 비둘기가 사용되었을 경우, 제사장은 머리를 비틀어서 죽였고, 그 피를 단 곁에 짜내거나 뿌렸다. 그 다음 새의 몸둥이는 단 위에 놓여져서 일반 번제처럼 소각되었고, 깃털과 멀떠구니는 이러기 전에 먼저 제거되었다(레 1:15, 16).

 번제는 여러 경우에 사용되었는데, 이를테면 문둥병자의 정결(레 14:19, 20), 여인들의 산후(産後) 정결(레 12: 6-8), 의식적 부정(레 15:15, 30) 등에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들에 있어서 번제 뿐만 아니라 속죄제도 드려졌다. 속죄제는 죄를 속하였고, 번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온전한 마음으로 헌신하는 제물을 드리는 자의 태도를 나타내 주었다.

 번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성별의 때(출 29:15-25; 레 8:18) 그리고 그들의 봉사의 시작의 때(레 9:12-14)에 현저하였다. 그것은 나실인의 서원과 관련하여 드려지기도 했다(민 6:14). 이 모든 예들을 통하여, 번제는 개인의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제물을 드리는 자는 상징적으로 자신을 번제단 위에 두었고, 그의 생애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였다.


 소제와 화목제

 흠정역에서 소제는 “소제(meat offering)”로 되어 있다. 그러나 소제에는 어떠한 고기도 사용되지 아니하였고 주로 식물성 제물이었기 때문에, 더욱 정확하게는 “소제(meal offering)”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 소제에는 가루, 옥수수(또는 곡식), 기름, 술, 소금, 향 등이 포함되었다. 소제물이 여호와께 드려졌을 때, 극히 적은 부분이 단 위에 놓여지고 나머지 부분은 제사장에게 속했다.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레 2:3). 번제가 성별(聖別)과 헌신을 의미하였듯이, 소제는 굴복과 의존을 의미했다. 번제는 생애를 전적으로 굴복하는 것을 뜻했고, 소제는 주권과 관리(stewardship)에 대한 시인과 어떤 윗사람에 의존되어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존경의 행위였고, 충성의 서약이었다.

 일반적으로 소제는 번제와 화목제와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소제가 고운 가루로 구성되었을 때,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놓았다(레 2:1). 기름과 유향을 섞은 한 움큼의 가루는 번제단 위에서 하나의 기념물로 태워졌다. 그것은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레 2:2)가 되었다. 한 움큼을 단 위에 놓은 후, 남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속하였다. 그것은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레 2:3) 것이었다.

 소제가 무교전병이나 살짝 구운 과자로 이루어졌을 때, 기름을 섞은 고운 가루로 만들어서 조각을 내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4-6절). 종종 그것은 번철(frying pan)로 구웠다(7절). 소제가 이렇게 준비되고 나면, 제사장은 한 부분을 취하여 그것을 기념물로 번제단 위에서 살랐다(8, 9절). 과자들 중 남은 것은 제사장들에게 속하였고,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여김을 받았다(10절).

 가루와 기름을 부은 무교전병으로 이루어진 제물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유지자시며, 그들은 매일의 양식을 위해 그분께 의존되어 있으며, 풍성한 생명에 참예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시여자(施與者)이심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였던 것 같다. 하나님을 현세의 축복들을 공급하시는 분으로 시인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은 자연히 모든 영적 축복의 근원에로 쏠릴 것이다. 신약은 이 근원을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 곧 하늘에서 내려오신 떡으로 나타내고 있다(요 6:33).

 화목제는 일종의 자비하심에 대하여 일종의 감사 예물로서 그분께 드려졌고, 기쁨과 행복을 가져온 모든 경우에 드려졌다. 그것은 화목을 이루기 위한 경우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이루어진 화목에 대한 축하였다.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들은 화목하였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렸다. 또는 어떤 사람이 큰 위험으로부터 구함을 받아 감사하였거나 서원을 하고자 하였다. 이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요청되는 것이 화목제였다.

 화목 제물을 선택함에 있어서, 제물을 드리는 자는 그 선택의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그는 수소, 양, 어린 양, 염소—수컷이나 암컷을 사용할 수 있었다. 대개의 제물에 있어서, 희생제물은 “열납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레 22:21) 것이어야 하였다. 그러나 화목제가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일 경우, 그것이 완전할 필요는 없다. 예물이 “우양의 지체가 더하거나 덜하거나 한 것”(레 22:23) 일지라도 사용될 수 있었다. 번제의 경우처럼, 제물을 드리는 자는 희생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그것을 회막 문 앞에서 잡아야 하였다. 그 다음 제사장은 단 사면에 그 피를 뿌렸다(레 3:2). 이 일이 끝나면 기름을 태웠다. “이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식물이니라”(11절).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16, 17절).

 번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의 편에서 성별과 헌신을 의미하였고, 소제는 예물을 드리는 자가 그의 모든 현세적 필요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그가 청지기 직분의 책임을 용납함을 의미했다. 화목제는 받은 은혜에 대한 찬양의 예물, 즉 누린 축복들에 대한 감사의 예물로서,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발적 예물이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호의들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 그분께 찬양을 돌렸고, 사람의 자녀들에 나타내신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해 그분의 이름을 드높였다.

 번제는 단 위에서 완전히 불살라졌다. 속죄제는 진 밖에서 태워지거나 제사장이 그것을 먹었다. 그러나 화목제는 하나님과 제사장 사이에 단순히 나누어진 것이 아니고, 한 부분—더 큰 부분은 제물을 드리는 자와 그 가족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몫은 단 위에서 사루어졌다(레 3:14-17). 제사장은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를 받았다(레 7:33,34). 나머지 부분은 제물을 드린 자에게 속하여, 그는 그것을 정결한 사람이면 아무라도 초청하여 함께 먹을 수 있었다. 그 고기는 그 날에나 그 다음날에 먹어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먹을 수 없었다(16-21절).


 속죄제

 만일 한 이스라엘인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라도 부지 중에 범하는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게될”(레 4:22, 23)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상세한 지시에 따라 속죄제를 따라야 하였다. 드려야 할 제물의 종류는 죄인의 신분과 계급에 따라 달랐다. 만일 그 죄인이 제사장이면, 그는 “흠 없는 수송아지”(3절)를 드려야 한다. 만일 족장이면, 그는 “흠 없는 수염소”(23절)를 예물로 드려야 한다. 만일 일반 백성 중 하나이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28절)를 드려야 한다. 그 외의 다른 죄들을 위하여는 그는 “양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레 5:6)를 드려야 한다. “만일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 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7절) 가져가야 한다. 만일 그가 이런 것들도 가져올 힘이 없으면,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예물로 가져가야”(11절) 하였다.

 이 제물들은 부지 중에 범한 모든 죄를 위한 것임을 주지해야 한다(레 4:2, 13, 22, 27).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모를 수 있다. 그 죄는 5장 2, 3, 4절4장 13절에 있는 것처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죄를 깨닫는다. 즉 “깨달을 때에는 허물이 있을 것”(레 5:3, 4) 이다. 그러한 경우에, 그 사람은 속죄제를 드려야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알고 죄를 지었거나 계속적으로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의식적으로 지은 죄이거나 짐짓 지은 죄에 관한 법은, 종종 “고자세(high hand)로 지은 죄”라 일컬어지는, 다음과 같다.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민 15:30, 31).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숭배함으로써 고의적으로 죄를 짓고,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을 모독적으로 거절하였을 때,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 바 되”(출 32:28) 었다. 어떤 사람이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서 안식일에 나무를 하다가 발견되었을 때, 그는 속죄제를 드리라는 권고도 받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은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찌니”(민 15:35). 두 사람이 간음죄를 범했을 때, “둘 다 죽여”(신 22:22)야 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아버지나 어 머니를 저주하면, 그를 “반드시 죽여”(출 21:17)야 했다. 이 규칙은 모든 고의적 범죄들에 대하여 효력이 있었다. 만일 법을 고의적으로 어기는 것에 대하여 숫소나 어린 양을 가져오는 것이 허락되었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사람의 개념을 저하시킬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이 그러한 죄들에 대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암담한 죄들이라 할지라도, 지금도 그러하듯이, 회개와 보상을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었고, 용서받았다. 간음죄도 용서받을 수 있었다. 다윗이 그랬듯이—그러나 제물을 드림으로써가 아니었다. 다윗은 어린 양이나 수염소나 또 수천의 제물이라 할지라도 결코 그의 죄의 댓가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 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 17).

 이것은 전반적인 성경의 예언적 기별과 완전히 조화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사 1:11; 삼상 15:21, 22 참조).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무의식 중에 죄를 범하였을 경우, 즉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을”(레 4:27), 경우, 그는 그의 재정적 능력과 국가적 그의 신분에 따라 꼭 그것에 합당한 제물을 이끌고 와야 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끌고 온 동물이 어떤 것이든 준비 절차들은 동일하였다.

 먼저,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레 5:5)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요한 계단이었다. 죄의 자복과 시인은 용서를 받기 위한 첫째 요구조건이다. 이것은 어떤 일반적인 자복이 아니다. 그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 자복”하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아무 일”이다. 일반적인 자복은 충분치 못 할 것이다.

 자신의 죄를 시인한 훈, 그는 “속죄제 희생의 머리를 안수하고 그 희생을 잡아야 하”(레 4:29)였다.

 속죄제 위에 안수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 신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대속적 고난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즉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고난받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안수가 피차 간의 동일시 또는 어떤 사귐의 의미 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완강히 부인한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우리 도 그들 중에 있는—은 이 안수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중 가장 중 요한 계단이 됨을 보게 된다. 곧 죄인으로부터 죄가 흠 없는 희생물 에게로 전가(轉嫁)되는 것이다. 이 견해에는 안수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으나 전자의 경우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 견해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전가 가능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생각케 해 준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함으로, 만일 죄의 전가가 가능하지 못하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죄를 짊어질 수도, 짊어지시지도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만일 그러한 전가가 가능하다면, 죄 없는 희생 제물 위에 죄인이 안수하는 것은 전가에 대한 가장 적절한 예증이 된다.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증명해 보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인 것같다. 비평가들은 이사야 53장의 중요한 메시야에 대한 성격을 부인할지 모르지만, 단순한 그리스도 인은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을 안한다.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한”“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찔리신” 분에 대하여 읽을 때, 그는 예수님 이 외에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이 사람을 적용시키는 것을 거절한다. 이것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인물, 또는 의인화된 이스라엘, 또는 그 외의 여러 제안들 중 어느 하나를 언급한다고 말함으로써 문제를 피하는 것은 대속적 고난과 죽음의 가능성을 피하기 위한 어떤 이론을 펴려고 애쓰는 것과 매우 흡사한 듯하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난외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요한복음 1:29의 확실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사야의 진술을 “우리 무리의 죄악을 담당하신”(사 53:6) 그리스도께 적용함이 합당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스도 외 그 어느 누구에 관하여도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11절)고 말 해질 수 없다. 그 분만이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셨다. 왜냐하면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시”(12절)고,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8절)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공정하게 나타내 준다. 그가 친히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형벌을 받으셨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그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벧전 2:24) 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그릇된 행동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셨다는 이론만이 그의 죽으심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은 성경이 확언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들 아래서, 만일 속죄에 대한 표상적 가르침에서 이 사실이 드러나야 한다면 왜 이상스럽게 여겨져야 되는가? 전가될 수 있는 죄는 레 16장에 분명히 단언되어 있다. 다음의 말씀을 주목해 보라.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찰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21절).

 여기서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찰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라는 말을 듣고 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이중(二重)의 전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첫째, 아론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있다. 이것은 어떤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죄들이 이스라엘로부터 아론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아론은 이 죄들을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으로 놓아지게”(22절) 될 속죄양 위에 둔다. 여기에 기록된 죄들의 분명한 전가가 있음이 명백하다. 아론은 그 죄들을 염소 위에 두고, 염소는 그 죄들을 짊어진다. 죄의 전가는 백성에게서 아론, 다시 염소에게로 옮겨진다.

 전가는 속죄제의 경우에 있어서도 비슷한 효력이 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동물의 머리 위에 안수하고, 그것을 죽인다. 그 동물은 죄를 짊어진다. 죄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동물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사람은 자유케 된다

 이것은 문둥병—죄에 대한 의미심장한 상징—의 정결과 연관된 의식들에서 효과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다.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에서 나가서 진찰할찌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하고 다른 새는 산 채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 찌며”(레 14:2-7).

 두 새를 취하여 그 중 하나는 죽임을 당했다. 그 다음 산 새는 죽임을 당한 새의 피에 적셔진 후, “들에 놓여” 지게 된다. 하나는 죽고, 나머지는 놓여져서 자유케 된다. 누가 여기에 나타난 아름다운 상징을 보지 못할 것인가?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나 전 회중이 죄를 범하였을 경우, 흠 없는 어린 숫소가 제물로 드려졌다. 숫소가 죽임을 당한 후, 제사장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번 뿌려”(레 4:6, 17)야 했다. 제사장은 또한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앞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아”(7절)야 했다.

 족장이나 백성 중 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제사장이나 전 회중이 죄지었을 경우와 같이, 피를 성소 안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이 때는 휘장 앞에 피를 뿌리거나 향단 뿔에 바르지 않았다. 피는 전혀 성소 안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그러한 경우들에 있어서,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죄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25절)았다(30, 34절 참조).

 의당히 다음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죄들이 피로 말미암아 성소로 전가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경우들에 있어서 피가 전혀 성소 안으로 가져가지 않했는데 어찌 전가가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그러한 경우들에 있어서는 피가 번제단의 뿔들 위에 발라졌고, 이 단은 성소의 한 부분, 곧 중요한 부분이라는 사실로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부가적인 설명도 있다.

 피를 성소로 가져가지 않았거나, 휘장 앞에 뿌려지지 않았거나, 향단의 뿔들 위에 발라지지 않았을 경우, 제사장은 속죄제의 고기의 한 부분을 먹어야 했다고 율법은 규정하고 있다. 레위기 16장에 기록된 속죄제의 법“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아론과 그 아들 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리는 제사장이 그것을 먹되 곧 회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레 6:25, 26).

 이 말씀은 빛을 던져주고 있다. 속죄제를 드린 제사장은, 다른 제사장들과 함께 그것을 먹어야 했을지라도, 그것을 먹어야 했다. “그 고기는 지극히 거룩하니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을 것이니라”(29절). 그러나 30절에 있는 말씀처럼 예외도 있다.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하게 한 속죄제 희생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 지니라.” 이 구절은 단순히,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나 회중 전체가 죄를 지었을 때와 같이, 피를 성소로 가져갈 때는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족장이나 일반 백성 중 하나가 죄 지었을 경우들에만 피를 성소로 가져가지 아니하였고, 고기를 먹어야 했다. 왜 그랬는가?

 한 흥미롭고 교육적인 사건이 성소 역사의 초기에 일어났다.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가로되 이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뇨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그 피를 성소에 들어오지 아니하였으니 그 제육은 너희가 나의 명한대로 먹었어야 할 것이니라”(레 10:6-8).

 모세는 제사장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속죄제를 태웠기 때문에 노하였으며, 그들이 “거룩한 곳에서 속죄제를 먹지 아니한” 이유를 알기를 촉구하였다. 모세가 촉구한 이유는 “그 피를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한” 것이었으며, 이 일이 행하여지지 아니한 것을 보고, 그는 “그 제육은 너희가 나의 명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할 것이니라”고 했다. 더우기 가장 중요한 이유가 제시되었다.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즉 제육을 먹음으로써, 제사장들은 자신들 위에 백성의 죄악을 취하여 그 죄들을 짊어졌다. 그것은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구절들은 옛 이스라엘에게 나타내 보였듯이, 속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넓히는데 크게 이바지한다. 이 계획에는, 속죄하기 위하여, 속죄제의 제육을 먹어야 했던 제사장이 자신에 의해 또는 자신 안에 죄를 취함으로써—죄를 짚어짐으로써, 백성을 위하여 속죄를 이루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사장들이 제육을 먹었을 때, 그들은 “회중의 죄악을 짊어질” 것이었다. 상징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것이 되어, 그들은 “그들을[백성]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할 수” 있었다.

 아론이 그의 아들들을 변호하면서,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겼으리요”(19절) 한 말을 주시해 보는 것은 특별한 경우로서 흥미있는 일이다.

 아론의 아들들 가운데 두 아들은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봉사하던 그 날에 죽임을 당했다(레 10: 1, 2).

 문맥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술취해 있었고, 그리하여 다른 불로 분향하였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 때문에 독주에 대한 경고가 8-11절에 주어졌다.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아론은 이 일로 인하여 크게 언짢았다. 그러나 그의 나머지 두 아들들은 일어난 일에 대하여 전혀 만족을 얻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들이 속죄 제육을 먹지 않음으로 해서 모세로부터 견책을 받았을 때, 아론은 일어났던 사건을 모세에게 상기시킴으로써 그 아들들을 구하고자 나와서,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한 셈이다. 곧 이러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죄를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죄를 담당하기에는 충분하였다.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20절).

 우리는 이제 이 상황을 재검토해 본다. 제사장이나 전체 회중이 범죄하였을 때, 제사장은 피의 일부를 찍어다가 뜰의 바깥쪽에 있는 번제단의 뿔들에 발랐으나 죄를 성소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속죄 제육의 일부를 먹었다. 유대인의 유전에 따르면, 제사장은 적어도 한 감람 크기의 조각을 먹어야 했다. 이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는 죄를 친히 담당했다. 그러나, 처음에 언급한 두 경우에 있어서 피가 성소로 옮겨졌을 때, 고기는 먹지 않았야 했다. 그것은, 레 6:30에 지시된 규율을 따라, 진 밖에서 태워졌다.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하게 한 속죄제 희생의 고기는 먹지 못할찌니 불사를 찌니라”(레 6:30). 히브리서 기자가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히 13:11)고 했을 때, 그는 바로 이 규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속죄 제육을 먹음으로써 회중의 죄들을 자신들에게 담당시켰을 때, 그들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 죄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고백함으로써 동물들 위에 전가되었기 때문인 것이 분명한 듯하다. 그 염소는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회중의 죄악”짊어졌다. 제사장들이 고기를 먹었을 때, 그들은 죄악을 짊어졌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기를 먹음으로써 죄를 자신들 위에 짊어지도록 지시하셨다. 이것이 바로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레 10:17)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죄된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같이, 제사장들은 죄인이 그의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 염소의 죄를—짊어진 고기를 먹었다. 이렇게 하여 그 죄는 죄인으로부터 제사장에게 전가되었다. 그 사람은 자유케 되고, 용서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 죄는 이제 제사장에게, 또는 아마도 더 정확히는, 제사장 직분 위에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고백된 모든 죄는 상징적으로 제사장에게 전가되었고, 그는 대제사장 대신으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였다.

 집전하는 제사장이 속죄 제육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죄를 자신에게 짊어졌을 때, 그는 죄인이 되었다. 그는 회막에서 봉사하는 그 주간 동안 열 사람 또는 백 사람을 위하여 집전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죄들이 그의 죄들이 되었지, 그들의 죄가 아니었다. 그 백성은 용서를 받았고, 기뻐서 돌아갔다. 실제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죄가 제사장에게 전가된 것이었다. 고백한 죄의 기록은 번제단의 뿔들 위에 옮겨졌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기록한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렘 17: 1). 그러나 죄 자체는 제사장이 짊어졌고, 이제 그가 죄인이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죄를 속할 수 없으므로, 이제 그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죄를 위한 한 제물을 이끌고 와야 한다. 그는 그렇게 하여,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모든 죄를 무죄한 짐승 위에 놓는다. 제사장이 죄지었을 때 피를 성소로 가져갔듯이, 이제 그 피는 성소로 옮겨 져서 향단의 뿔들 위에 발라지고, 휘장 앞에 뿌려진 바 되었는데, 휘장 뒤에는 범하여 진바 된 율법이 있다.

 따라서 그 죄들은, 피가 성소의 단의 뿔들 위에 발라지고 뿌려짐으로써, 상징적으로 성소로 옮겨졌다. 즉 어떤 죄들, 곧 제사장들과 회중 전체의 죄들은 직접적으로 성소로 옮겨졌고, 족장들과 일반 백성의 죄들은 제사장이 속죄 제육의 고기를 먹고, 그런 다음 그가 짚어지고 있는 죄들을 위한 속죄 제물을 끌어 옴으로써 간접적으로 성소에 옮겨졌는데, 그 피 또한 휘장 앞으로 옮겨졌다. 이리하여 모든 죄가, 곧 제사장의 죄이든, 백성의 죄든, 마침내는 성소로 가는 길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제사장들이 수행했던 봉사를 대제사장의 조력자로서, 대리자로서 행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 몸소 모든 일에 참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처음에는 아론이 성소의 모든 일을 수행했다. 그는 매일의 희생 제물을 드렸고, 등불을 손질하였으며 떡을 진설하였으며, 피를 뿌렸다. 일이 많아짐에 따라 명확한 임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되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단지 대제사장을 대신했다. 그것은 마치 대제사장이 한 것과 같이 인정되었다. 이것에 관하여 국제 표준성경 백과사전, 4권, 2439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히 2:17)고,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있어서 사람들을 위하여 행동하여야 했다. 그는 죄인을 위하여 봉사한 중보자였다. 대제사장은 전체 백성을 대표했다. 모든 이스라엘은 그의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가 지닌 특권은 백성 전체에게 속했다(출 19:6) ∙∙∙(Vitringa). 대제사장이 백성 전체를 대표한 것은, 첫째로, 그의 양 어깨 위의 보석들 위에 지파들의 이름이 있는 것에서 그런 것 같으며, 둘째로는, 흉패의 열 두 보석 안에 열 두 지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에서 그런 것 같다. 대제사장의 복장속에 이스라엘이 이중(二重)으로 대표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할지’(출 28:12, 29)라고 거룩히 설명되어 있다. 더우기, 그가 가증한 죄를 범하게 되면 백성도 그의 죄에 포함되었다.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레 4:3). 칠십인 역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백성으로 죄짓게 하기 위하여 죄를 범하면,’ 물론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대제사장이다. 그가 범죄하였을 때, 백성도 범죄하였다. 그의 공식적 행위는 그들의[백성의] 행위로 간주되었다. 국가 전체는 그들의 대표자들의 범과에 동참하였다. 그도 참으로 마찬가지인 것 같다.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가 공적 자격으로서 행한 일은 회중 전체가 행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사람을 위하여’(히 5:1).”

 다음의 말씀을 주목해 보라: “대제사장은 백성 전체를 대표하였다. 온 이스라엘은 그의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 그가 범죄했을 때, 백성도 범죄하였다. 그의 공식적 행위는 그들의 행위로 간주되었다. 전체 회중은 그들의 대표자들의 범과에 참예하였다. 그 역(逆)도 진실로 마찬가지인 것 같다.”

 공식적 자격을 가진 대제사장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제도였고, 상징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화신(化身)이었다. 그는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출 28:12). 두 보석에 이스라엘의 이름들을 메고 있었다. 흉패의 열 두 모석에서 그는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출 28:30)에 메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양 어깨와 가슴 위에 이스라엘을 메고 있었다. 애정과 사랑의 중심지를 의미하는 흉패에서, 그는 이스라엘을 그의 가슴 위에 메었다.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진 관(冠)의 황금 면류관에서, 그는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여 “여호와께 받으시게”(출 28:36-38) 하였다.

 아담은 인간의 대표였다. 그가 죄지었을 때, 온 세상이 죄지었고, 사망이 모두에게 임하였다(롬 5:12).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17-19절).

 이와 같이, 둘째 사람이자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대표가 되셨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5-47).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19절). “아담 안에서 내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대제사장은 인간의 대표이기도 하였다. 그는 모든 이스라엘을 대표하였다. 그는 그들의 짐과 죄를 짊어졌다. 그는 모든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였다. 그는 그들의 판결을 메었다. 그가 범죄했을 때, 이스라엘이 범죄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속죄했을 때, 이스라엘은 가납되었다.

 우리는 대제사장이 그의 관 위에 썼던 황금패에 관한 앞의 인용문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에 관한 기록이 출 28:36-39 에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관 전면에 있게 하라 이 패가 아론의 이마에 있어서 그로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너는 가는 베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가는 베실로 관을 만들고 따를 수 놓아 만들찌니라.”

 “여호와제 성결”은 황금패에 새겼으나, 이것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말씀은 “아론이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고,” 그들 이스라엘이 가납되기 위하여” 그 패를 띠어야 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아론은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어, 성결이 그 패 위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그가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고 속죄하기 위하여 그것을 띤다. 성물의 죄건”이라는 말을 주시해 보라. 물론, 무생물은 도덕적 행동을 할 수 없다. 즉 죽은 것은 악하지 않으며,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성의 죄건을 담당하였다고 되어 있다. 성소의 성물이 더렵혀져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무정과 그 범한 모든 죄”(레 16:16)때문이다.

 피가 단의 뿔들 위에 뿌려지거나 발라지고, 휘장을 향하여 뿌려지고, 그것을 그릇에 담아 지성소로 가져가서 거기 뿌렸을 때, 이 칸들(성소와 지성소)과 그 곳에 있는 것들이 더럽힘을 받아 정결이 필요하였다. 이 일은 대속죄일에 수행되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성결절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곧 성이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로 더렵혀졌을지라도, 이것들의 죄건을 담당한 것은 대제사장이었다. 단의 뿔들은 범하여진 죄들의 기록을 지니고 있었다. 대제사장이 그 죄들 자체를 담당했다. 한 사람이 죄지었을 때, 제사장이 그의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단의 뿔들 위에 표식을 하였다는 사실을(레 4:25, 30, 34) 다시 주목해 보라.

 우리가 지금 손자국을 남기듯이, 제사장이 그의 피묻은 손가락을 뿔들 위에 놓아, 그 손자국이 범하여 진 죄들의 기록을 남겼고, 이것은 또한 그 죄를 위한 한 제물이 드려졌다는 증거가 되었다. 예레미야 17:1을 다시 읽어 보자. :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 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단 뿔에 새겨 졌거늘.”

 물론, 어떤 물건이 죄를 담당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므로, 우리는 성소의 성물의 부정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 때문이었다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으며, 그 부정은 매일의 봉사에서 피를 뿌림으로서 상징되었다. 죄를—짊어진—동물의 피가 매일 매일 성소에서 뿌려졌으므로, 성소들은 부정하게 되었으며, 조만간 정결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러나 죄는 인격과 관련되었을 때만이 존재하며, 죄의 기록이 성소에 피로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사실상 죄는 어떤 사람에 의하여서만이 저질러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대제사장이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고,” 백성이 “여호와 앞에 가납되기 위하여”(출 28:38), 대제사장이 황금패를 항상 그 이마에 둘러야 했다는 말씀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거룩한 자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질 수 있다.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각인(刻印)된 패를 그의 이마에 두루는 대제사장은 인성이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사랑이었다. 그러한 사람으로서 그는 백성의 죄들을 담당했다.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을 대표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제사장은 성육신 그리스도를 대표했다.

 우리는 죄들이 피로 말미암아 성소에 전가되었다는 것을, 죄들의 기록이 그렇게 전가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지만, 부인하지 않는다—확신한다. 만일 이 말로 인하여 죄의 기록도 죄를 효과적으로, 최종적으로 제거하기 위하여 말소되어야 한다고 이해할지라도 그렇다. 이것은 부조와 선지자, 상권, 470페이지에 있는 말씀, 곧 “이와 같이 되어 성소는 죄의 기록에서 해방 혹은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와 일치한다.

 우리는 피가 성소로 더럽혔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성소를 부정하게 하는 유일한 방편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죄가 부정하게 만든다. 어디에서 범한 죄이든, 사람이 그의 죄물을 바쳤으나 아니 바쳤거나, 성소들을 더렵힌 것은 죄였다. 민수기 19장에 이것이 관하여 명백히 진술되어 있다. :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스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 즉 부정하리니라”(20절). 여기 부정하면서도 스스로를 정결케 아니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위한 제물로 가져오지 아니하고, 정결을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 이유 때문에 그는 끊쳐 져야 한다—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 때문에. 그는 성소 가까이에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소를 더럽혔다. 즉 사람이 제물을 바치는 바치지 않든 죄 자체가 더럽힌다(13절을 본다). 이 원칙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은 죄들의 처분에 관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말씀들은 성소와 단을 더럽힌 것은 이스라엘의 죄들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해 준다. 이러한 부정은 일년 내내 매일의 봉사를 통하여 생겨났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한 마리의 양이 죽임을 당하였고, 그 피는 단 “주변에” 뿌려졌다. 이것이 단을 더럽혔다. 범죄자들은 그들의 속죄제와 속건제물을 가져왔다. 제사장이나 회중 전체의 경우에는, 희생제물의 피가 성소 안에 뿌려졌다. 족장이나 일반 백성 중 한 사람의 경우에는, 번제단의 뿔들 위에 피를 발랐고, 제사장들은 고기를 먹었다. 이것은 죄들이 제자장에게 전가시켰고, 또한 단을 더럽혔다.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성소와 단이 부정케 되었고, 제사장은 죄들을 짊어지게 되었다. 대속죄일의 봉사들을 통하여 이 모든 죄들이 처분되어야 했고, 성소의 두 칸들과 제사장 및 백성을 정결케 하여야 했다.


 대속죄일

 성소에 매일 뿌려진 피는 정기적으로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 었다. 이것은 순전히 실제적 의미에서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취급하지 않을려고 한다. 우리는 죄와 그 기록을 성소에 전가시키는 상징적 행위로서의 피뿌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죄의 전가에 대하여는 이미 논의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레위기 16장에 세부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연례 정결 의식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한다.

 33절에서 우리는 성소 즉 회막과 단, 또한 제사장들과 백성을 위한 속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이것은 속죄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 즉 성소를 위한 속죄, 곧 성물을 위한 속죄와 사람들을 위한 속죄 곧 제사장들과 백성을 위한 속죄로 나눈다. 백성을 위한 속죄의 목적은 “너희로 결정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서 정결하리라”(30절)고 되어 있다. 성소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 같이 할 것이요”(16절). 단에 대하여는,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19절)라고 진술되어 있다.

 성소들의 정결은 성소 안에 본래부터의 죄나 악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 때문이었음을 주시 해야 할 것이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19절)하여야 한다.

 당연의 다음의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왜 백성에게 정결이 필요하였는가? 그들은 연중(年中) 때때로 제물을 가져와서,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고 돌아가지 않았던가? 무엇 때문에 두 번이나 용서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왜 “해마다 죄를 생각 하게 하는” “기념”이 있어야 하는가?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지”(히 10:3, 2) 않았는가? 이 질문들은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 구원은 언제나 회개와 유종(有終)의 은혜에 좌우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그러나 용서는 무조건적이거나 죄인의 장래의 진로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에스겔이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지 주목해 보라.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겔 18:24).

 이 본문은 한 사람이 의에서 떠날 때, 그의 모든 선행이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악하였는데 그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그 범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22절).

 하나님은 각 사람과 셈을 하신다. 용서를 위한 기도가 진실된 마음에서부터 하나님께로 상달될 때마다,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이 변절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개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로써 그들의 회개는 영구적이 아님을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이고 최종적으로 용서를 하시는 대신, 사람들의 이름 반대편에 용서를 표기하시고, 그들이 그 문제를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졌을 때까지는 죄의 최종적 도말을 분류하신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생애의 마지막에 임하여서도 여전히 동일한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충성된 자로 여기시며, 심판의 날에 그들의 기록은 최종적으로 깨끗케 된다.

 옛 이스라엘이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속죄일이 돌아왔을 때, 각 범법자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변치 않았으며 용서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회를 가졌다. 만일 그가 그리했다면, 죄는 도말이었고, 그는 완전히 정결함을 받았다. 연중 매일 범법자들은 성전에 나타났으며, 또한 용서를 받았다. 대속죄일에 이 죄들은 하나님 앞에 재검토를 받게 되었으며, 또는 히브리서가 지적하는 대로, 거기엔 “죄를 생각하게 하는”(히 10:3) 것이 있었다. 그 날에 모든 참 이스라엘인은 하나님께 그의 헌신을 새롭게 하였고, 그의 회개를 확인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죄의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결함을 받았다.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 이스라엘이 그날 저녁에 “모든 죄에서 정결하여” 집으로 돌아간 때에, 그들의 마음이 행복하였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놀라운 보증이여! 동일한 약속이 신약에 주어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정결케 되었다! “모든 불의에서.”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정결함을 받았다!

 “오, 내 죄가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용서받았다는 영광스러운 사상의 축복이여.”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매일 드리는 아침 희생을 먼저 드렸다. 이 일은 이 날에도 그 전 날들과 마찬가지로 수행되었다(민 29:11). 이 봉사가 끝난 후, 특별한 봉사들이 시작되었다. 레위기 16장의 기록은 다음의 사실을 제공해 준다.

 대제사장은 먼저 목욕을 하고, 거룩한 흰 예복을 입어야 했다. 일년 내내 그는 대제사장의 표식인 아름다운 예복과 보석들로 박힌 에봇과 흉패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날에 지성소로 들어가기 전에, 그는 이 옷들을 벗고 제사장의 흰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의 옷과 제사장의 옷과의 차이점은 띠가 흰 색깔이었고, 그는 제사장의 두건 대신 대제사장의 세마포로 된 관을 썼다(레 16: 4; 출 28:39, 40; 39:28).

 그가 봉사를 시작할 즈음, 대제사장은 회중으로부터 두 수염소와 한 어린 양을 받았는데, 그것은 대제사장 자신의 속죄제물, 곧 숫소와 함께 여호와 앞에 드러졌다. 그는 자신을 위한 숫소를 죽였고, 한 제사장은 피의 일부를 그릇에 담아서 휘저었는데 응고를 막기 위함이었다. 한편 대제사장은 그 봉사 중 다른 부분을 수행했다.

 숫소가 죽임을 당한 후, 대제사장은 번제단에서 숯불을 취하여 향로 속에 넣었다. 그는 한 움큼의 향기로운 향을 취하였고, 숯불과 향을 가지고 회막으로 가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키”(레 16:13) 위하여, 속죄소 위에 향로를 두었다.

 예식의 이 부분을 마친 후, 그는 밖으로 나가서 제사장으로부터 수소의 피를 받아 지성소 안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그의 손가락으로 속죄소 위 동편을 향하여 피를 뿌렸다.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 죄소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14절). 이 행위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6절)하였다.

 숫소가 죽임을 당하기 전에, 다른 예식이 거행되었다. 두 염소를 위한 제비가 뽑혀졌는데,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나머지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뽑혔다(8절).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가 뽑힌 염소는 속죄제로 드려져야 하였고(9절), 다른 염소, 곧 속죄양은 산채로 여호와 앞에 드려져서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야”(10절) 하였다.

 대제사장의 숫소의 피로 의식을 수행하고 지성소에서 나온 후, 그는 백성을 위하여 있는 속죄 염소를 잡았다. 그는 다시 지성소에 들 어가서, 그가 숫소의 피를 속죄소 위와 앞에 뿌렸듯이, 염소의 피를 뿌렸다(15절).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16절), 이것으로 지성소를 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 그런 다음 그는 회막, 곤 성소를 위하여 동일한 일을 수행했다. 성소를 위한 속죄를 다친 후, 그는 제단으로 나아가 염소의 피와 숫소의 피를 제단의 뿔들 위에 바름으로써 제단을 위한 속죄를 하였다. 그는 피를 그의 손가락으로 일곱번 뿌려서,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19절) 하였다.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마찰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 찌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죄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찌니라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어”(레 16:20-22).

 이 부분의 봉사가 마쳤으므로, 아론은 흰 세마포 옷을 벗고, 손수물로 씻은 후, 그의 정규 대제사장복을 입었다(23, 24절). 그는 다시 나와서 자신을 위한 번제와 백성을 위한 번제를 드렸다(24절). 그 때 속죄제의 기름은 제단 위에 불살렸다. 속죄 염소를 광야로 끌고 간 사람은 그가 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기 전에, 목욕을 하고 옷을 씻어야했다. 피는 성소로 가져가고 몸은 진 밖에서 불태운바 된 숫소를 처분한 사람은 그도 역시 돌아올 수 있기 전에,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했다(26-28절). 민수기 29: 7-11에 언급된 특별 예물은 번제를 위하여 수송아지 하나, 수양 하나, 그리고 수양 일곱으로 이루어졌고,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죄제 외에니라”는 정규 저녁 희생 제물이 드려지기 전에 드려졌다.

 그날에 행하여진 일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 16:30). 33절에 요약하기를,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며 희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할찌니”라 하였다.

 이제 속죄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상징이 어떻게 실체에 응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묻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된다. 성소가 피로 말미암아 더럽혀졌는데 어찌하여 바로 그 피로써 정결케 될 수 있을까? 피가 성소를 정결케 하기는커녕 오히려 여전히 성소를 더 부정케 하는 것이 아닌가?

 민수기 35:33의 말씀은 우리의 주위를 끈다: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리라.”

 이 구절은 유추함으로써 성소의 정결에 적용시킬 수 있는 한 원칙을 구현한다. “피가 땅을 더럽히나니.” 이 말씀은 분명하다. “땅은 이를 홀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이것에 의하면, 피는 더럽히기도 하고 정결제도 한다. 바로 성소가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어떠한 표상도 그것이 묘사할려고 의도하는 것의 꼭 그대로의 대응물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제적 속죄 사업에는 지상에서 꼭 거기에 병행하는 것을 찾을 수 없는 여러 요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을 예증하기에 꼭 맞는 표상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한 마리의 양은 그리스도를 대표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분이 그랬던 것처럼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은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 살아있는 다른 동물이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표상은 완전하지 않다.

 대제사장은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으나 제사장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자신의 죄 때문에 드렸던 어떠한 제물도 참된 표상이 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여러 예식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업을 예증하기 위하여 필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완전히 예증하지는 못하였다. 제사장은 그리스도의 봉사 중 어떤 국면들만 표상하였다. 대제사장이나 휘장, 진설병, 향, 양, 염소, 소제, 그리고 성소 봉사에 있은 그 외의 여러 항목들도 마찬가지였다. 거룩한 칸 [성소]은 그것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지성소, 뜰, 제단, 물두멍, 속죄속도 그것의 지닌 의미가 있었다. 거의 모든 것, 곧 제사장의 의복으로부터 부정한 자에게 뿌리기 위하여 사용된 재에 이르기까지 상징적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합한다 할지라도 완전한 표상이 되지는 못하였고, 그 중에 상당수가 표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 원래의 것을 불완전하게 반사하였다.

 우리는 아론이 백성을 대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백성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을 앞에서 주지하였다. 그가 행한 것을 그들도 행했다. 그들이 행한 것을 그도 행했다. 다시 이 점을 강조하기로 하자.

 대제사장은 “전체 백성을 대표했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의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의 안에서 “제사장에게 속한 모든 것이 집합되어 그 극치에 달하였다.” “그가 죄를 지었을 때, 백성이 죄를 지었다.”

 아담은 인간의 대표자였다. 그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그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고,”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롬 5:12, 18, 17, 51).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의 대표자이셨다. 그는 둘째 사람이셨으며 마지막 아담이셨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이 둘째 사람, 곧 “하늘에서 오신 주님”은 첫째 사람이 그의 범죄로 인하여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려 놓으셨다. 첫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둘째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첫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18절).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한 표상이었고, 그 백성의 대표자이었다. 백성의 대표자로서 그는 그들의 죄와 동일시되었고, 죽을 만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한 표상으로서 그는 그들의 중보자요, 구주였다. 어느 경우든 그는 그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과 계약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그 백성이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거절하셨다면 그의 안에 있는 그 백성을 거절하신 것이다. 이 이유로 인해 백성은 대속죄일에 방울들의 소리를 그토록 듣고자 했던 것이다. 마침내 속죄가 효력을 발생하고 화목이 완성되었을 때, 대제사장이 그의 대제사장복에 달고 있던 방울들의 소리는 하나님께서 그 대속물을 가납하셨다는 표였다. 그가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방울들의 명쾌한 소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들렸을 때, 그들의 기쁨과 감사는 뜻 깊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 말미암아 한번 더 그들을 가납하셨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그는 백성의 대표자로서 들어갔다. 그의 안에서 이스라엘이 그 해의 피를 셈하기 위하여 여호와 앞에 나타났다. 이 죄들의 기록은 성소와 번제단의 피에 나타나 있었다. 대속죄일과 함께 셈하는 날, 곧 심판의 날이 이르렀는데, 그때 모든 죄들이 하나님 앞에 재검토되어야 하였다. 대제사장은, 향연의 휘장이 그를 보호해 주었지만, 하나님의 면전에 나타났다. 그 해 처음으로 죄가 지성소의 하나님 앞에 제시되었다. 대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번” 뿌렸고, 그리하여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였다(레 16:14, 11). 그는 정결함을 받았다. 그의 동일시되고 있는 죄가 무엇이든지, 그가 책임져야 할 죄가 무엇이든지, 상징적으로 성소에 전가되었다. 그는 정결함을 받았으나, 성소는 그렇지 않았다.

 죄를 위한 희생 제물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희생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하는 것에 대하여 강조하여 왔다. 그것에 의하여 죄가 희생제물에게 전가된다. 매 경우에 희생제물은 그 머리 위에 있는 죄와 함께 죽는다. 즉 죄를 위하여 죽는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신 위에 우리 죄를 짊어지셨고, 죄있는 사람이 되셨다. 죄가 있게 되었으므로, 그는 죽으셔야 하는데, 이는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가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을 때, 그는 자신과 우리를 동일시하셨고, 우리의 죄를 친히 짊어지셨기 때문에 죽으셨다. 그가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가 그에게 놓여졌기 때문이었으며, 그는 그 형벌을 담당하시지 않으면 안된다. 그와 같이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그는 율법의 요구들을 만족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위한 한 대속물로서 뿐만 아니라 무죄하신 분으로서 돌아가셨다.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우리는 겸손 하게 그것을 말한다—그는 죽으셔야 한다. 율법이 그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죄짓지 아니하셨다. 그는 무죄하 셨다. 그럼에도 그는 죽으셨다. 무죄하신 한분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계획의 명백한 한 부분이다. 한 죄인으로서의 그의 죽으심은 율법의 요구들을 만족시킨다. 무죄하신 한 분으로서의 그의 죽으심은 구속을 제공해 주며, 사망으로부터 죄인을 자유케 한다.

 대제사장이 수송아지를 드려, 그 피를 속죄소 위와 앞에 뿌린 후, 그는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찌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레 16:15, 16) 이라는 말을 들었다.

 앞에서도 주지한 바이지만, 여기서는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가 두 가지의 다른 일을 성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려고 한다. 수송아지의 피는 아론과 그의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염소의 피는 백성과 성소를 위하여 속죄한다(11, 15, 16절), 수송아지의 피가 성소를 정결케 한다거나, 성소를 위하여 속죄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염소의 피가 그렇게 한다고 명확히 진술되어 있다(15, 16절). 이것은 다음에 설명될 것이다. 조그만 하나의 예외가 있지만, 어떤 사람을 위한 속죄가 이루어지는 매 경우에 있어서, 속죄는 피로 말미암아 성취되며, 그것은 죄가 성소로 전가됨을 암시한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희생 제물에게 전가시키며, 그 희생제물은 죽임을 당하며, 그 피는 번제단 위에 나 성소 안에 뿌려진다. 그 피는—죄가 희생제물 위에 고백되었기 때문에—죄를 짊어진 피로 부를 수도 있는데, 상징적으로나 의식적으로 그것은 그 피가 뿌려지는 장소를 더럽힌다. 그리하여 성소는 부정하게 된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수송아지의 피를 뿌린 후 나올 때, 그는 정결함을 받았다. 그가 짊어진 죄, 곧 그가 담당해야 할 죄가 무엇이 든간에 성소에 고백되었고 또한 전가되었다. 그가 지성소로부터 나왔을 때, 그는 정결함을 받았고, 자유케 되었고, 거룩하게 되어, 그리스도 곧 죄 없으신 한 분의 표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죄들을 고백하였고, 그 죄들은 용서되었으며, 더 이상 회개해야 할 것이 없어졌다. 그가 막 그 피를 뿌리려고 하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 역시 무죄하신 한 분을 표상했다. 일년 동안 드려진 모든 제물에서,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려져 있다. 대속죄일의 염소를 통하여 그는 해함이 없고, 더럽힘을 받지 않고, 무죄하신 하나님의 선택된 분으로 표상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대속죄일의 염소를 통하여 우리는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상징적 언급을 보게 되는데,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 보다 높이 되신 자”(히 7:26)이시다. 이 염소의 피는 정결케 하는 효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성소의 정결을 가능하게 해 준다.

 지상 장막의 봉사는 하늘 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업에 대한 상징인데, 하늘 성소에는 범하여진 죄들과 고백되어진 죄들의 기록이 간직되어 있다. 대속죄일이 이르러 왔을 때, 모든 이스라엘은 그 날의 회개가 피로 성소에 기록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사업이 마쳐지기 위하여, 그 기록이 제거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죄들이 도말되어야 하였고, 성소가 그 피의 부정으로부터 정결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특별한 정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대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로 들어가서 자신과 그의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였다. 이 일이 이루지고난 다음에, 정결케 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지성소는 염소의 피로써 정결케 되었고, 그리하여 거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죄의 기록이 도말되었다. 이 일 후에 제단도 정결케 되었다.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할 것이요.”(레 16:19).

 그리하여 그는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렸다”(20절). 이 날의 의식들이 끝난 후에, 모든 것이 정결케 되었고, 화목하게 되었고, 속죄되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

 회중에게서 취하여 온 두 염소 위에 제비가 뽑혔을 때, 하나는 여호와를 위하여,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하여 뽑혔다(레 16:8). 어떤 사람은 두 염소 모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의 두 국면을 대표하는 것으로 믿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두 염소는 두 반대 세력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하나는 여호와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것인데, 후자는 “사단을 위한” 것으로 의미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학자들은, 아마도 대부분, 아사셀은 인격적이며 악하고 초인간적 영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학자들은 그것이 특별히 “일련의 행동으로써 제거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합리적인 듯이 보이는 것은 한 염소가 여호와, 곧 인격적 존재를 위한 것인 것 같이, 다른 염소도 어떤 인격적 존재를 위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더우기, 두 염소는 분명히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장 모순이 없는 견해는 아사셀은 여호와와 반대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바로 사단 이외에 어느 누구도 될 수 없다.

 우리가 아사셀을 인격적이고 사악한 영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증거의 값어치를 믿고 하지만, 이 견해에는 반드시 고려해 보아야 할 어떤 난점들이 있다. 그 중에 주된 어려움은 아사셀에 대한 다음의 성경절이다 :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 지니라”(레 16:10). 만일 아사셀이 사단을 대표한다면, “그것으로 속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아사셀의 직무를 생각해 봄으로써 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아사셀은 화목의 사업이 완성된 후, 오직 대속죄일에만 두드러지게 등장하였다. 이론이 “그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찰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 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은”(레 16:20-22) 후였다.

 제사장은 화목의 목적을 이루었다. 곧, 성소와 제단이 정결케 되었다. 속죄가 이루어졌다. 정결의 목적이 이루어졌다. 그 때까지는 아사셀 염소가 그 특별한 역할을 위하여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사셀 염소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가 이미 이루어 놓은 속죄와 무관하였다. 그 일은 완성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의 죄가 아사셀 염소의 머리 위에 놓여졌을 때, 우리의 주장이 건전할 수 없다는 이의(異議)가 제기된다. 의문의 성결절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 위에 안찰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 지니”(레 16:21).

 이렇게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죄들은 책임 공유(共有)의 에너지가 있다. 죄지은 사람은,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종종 최대의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어떤 사람은 저지른 죄 이상으로 비난받는다. 어떤 아이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은 도둑질하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올바른 원칙을 그들은 자녀에게 주입시키지 못하는 부모들은 언젠가 셈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사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죄에 대한 책임을 한 사람에게만 추적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단이 짊어지고 있는 죄들, 곧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죄들, 즉 그리스도께서 짊어지고 계신 죄들을 생각나게 해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만이 대속적 속죄로서 죄를 짊어지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들과 사단은 응분의 보답과 벌을 목적으로 죄를 짊어지시다.

 사단이 그의 개인적 죄들에 대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自明)한 일이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죄의 창시자이다. 만일 죄가 일단 처벌되어질 것 같으면, 사단은 도피할 수 없다. 그의 책임은 자신의 개인적 죄들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으로 죄짓게 한 죄들에까지 미친다. 이것은, 누구에 의하여 죄가 범해졌든 간에, 모든 죄를 포용한다. 그는 타락한 천사들의 죄에도 책임이 있고, 사람들의 죄에도 책임이 있다. 하늘에서나 땅 위에서, 그가 근본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죄라곤 어느 곳에도 없다. 성도에 의하여 범해진 죄이든, 죄인에 의하여 범해진 죄이든, 사단의 죄의 선동자이다. 이것은 범죄한 천사들이 그들이 행한 것에 대하여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사람들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각 죄인이 그가 죄지은 정도만큼을 처벌을 받는 것만이 공명정 대한 일이다. 사단은 그러한 그들의 죄는 짊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 그가 책임을 지게 될 죄는 그들로 죄 짓게 한 그의 사악한 일이다. 곧 그들로 파멸에 이르도록 재촉하고 부추긴 일이다.

 공동 책임의 원칙이 우리의 첫 부모의 죄 가운데 예증되어 있다. 사단은 그들을 유혹하였고, 그들은 타락하였다. 죄에 대한 사단의 역할 때문에, 뱀은 저주를 받았다. 그들의 죄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만 책임을 지우지는 않으셨다. 그렇다고 그들을 면제하지도 않으셨다. 사단이 죄지은 것 같이 사람도 그랬다. 거기에는 정상을 참작할만한 여지라곤 없었다. 모두가 죄지었고, 응분의 보상에 따라, 모두가 처벌되었다. 최초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 방법에 예증된 공동 책임의 이 원칙은 여전히 그 효력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제정하신 바요, 그 공의는 의에 대한 인간의 의식 속에서 그 반응을 발견한다.

 사단에게 모든 사람의 죄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이 있으므로, 이 죄들은 최종적으로 그의 위에 놓아져야 하며, 그가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아야 한다. 이 형벌은 속죄적인 것도 아니요, 대속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죄수가 교수대에 달림으로써 자신의 죄를 속한다는 의미를 제외하고는 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순히 자기 자신의 죄들과 그가 다른 사람으로 죄 짓게 한 영향력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다.

 공동 책임의 원칙은 사단의 개인적 죄들을 제외한 모든 죄에 해당된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우리는 너무나 타락했으므로 사단의 충동이 없이도 더 깊이 타락할 수 있게 된 사람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라 할지라도 사단은 그의 분단된 책임을 진다. 왜냐하면 그가 그 사람으로 타락의 길에 들어서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존경할만한” 죄인들의 경우에서뿐만 아니라 가장 악한 죄인들의 경우에서도 책임이 있다.

 사단의 죄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있어서 특별히 가증하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죄짓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죄를 혐오한다. 그러나 사단은 그를 유혹한다. 그 사람은 일천 번 저항하고, 사단은 일천 번 되풀이한다. 드디어 그 사람은 굴복한다. 그러나 곧 회개한다. 그는 용서를 구한다. 그 죄는 하늘에 기록되었다. 이제 용서가 그 반대편에 표시되어 있다. 그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그의 죄들을 그리스도, 곧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위대하신 분, 자원하여 죄를 취하신 분,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죄인이 받아야 마땅한 형벌을 당하시는 그 분 위에 두었다.

 그 다음 최후의 심판이 이른다. 죄는 도말되고, 인간의 기록은 깨끗해진다. 그러나 사람으로 죄짓게 만든 사단의 일에 대해서는 어쩔 것인가? 그것도 속하여졌는가? 그렇지 않았다. 사단은 그것에 대하여 스스로 고통을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만일 이스라엘의 죄들이 사단 위에 최종적으로 두어지게 되면, 그는 속죄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과오이다. 사단은 어떠한 대속적 속죄와도 무관하다. 성도들은 결코 그에게 아무런 빚도 지지 않았다. 그가 죄를 짊어지는 일은 구원과 결단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가 하는 일은 악하니, 오직 악하기만 할 뿐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짊어지셨다(요 3:16). 사람들의 축적된 모든 죄들이 그분 위에 놓여졌다. 그 분은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딤전 4:10) 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반면, 그의 죽으심은 그 분의 희생을 받아들일 사람들에게만 유효하였다. 그분을 자신들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죄를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구원의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입었다. 어떤 죄인도 타고날 때부터 생명의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의 계속적인 생존과 구원을 받아들릴 기회는 갈바리의 희생에 의해서만이 그를 위해 제공된다. 은혜의 시간이 그의 결정을 위하여 허락된다. 이 시간은 피로 산 시간이다.

 마침내 그가 그것이 제공되는 조건부의 생명은 받아드리지 않겠다고 최종적이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릴 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그는 그 결과를 담당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구원이 되풀이하여 그에게 제시되었으나, 그는 그것을 일축하여 버렸다. 성도께서는 그를 떠나신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못박았다.

 성소 봉사를 통하여 구원의 단순한 원칙들이 명백히 가르친 바 되었다. 회개한 죄인은 그의 양을 이끌고 와서, 그 머리에 손을 얹고, 그의 죄를 고백하고, 마침내 그 양을 죽였다. 그 다음 제사장은 그 피를 뿌렸고, 고기를 먹었다. 한편 그 사람은 죄의 용서를 받고 돌아갔다. 고기를 먹음으로써 제사장은 그 죄를 친히 졌으며, 그리하여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신 그 분에 대한 한 표상이 되었다. 대속죄 일에 그 해의 축적된 죄들을 짊어진 대제사장은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를 가지고 고백 된 모든 죄들을 위하여 속죄하였다. 그리하여 기록조차도 남음이 없이 죄가 도말되었다. 회개한 이스라엘은 그날에 단지 자신들의 죄만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죄들을 도말시켰으며, 더 이상 그 죄들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지 않고,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은 끊김을 당했다. 즉 축출되었다. 이것은 산 자의 땅에서와 하나님의 은혜에서 최종 적으로 단절됨에 대한 하나의 표상이었다.

 이것은 성소를 통하여 가르쳐진 것으로서, 구원에 대한 단순한 교훈이다. 매일의 번죄에서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는데, 계속적인 희생 제물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으며, 그것은 고백된 죄이든 고백되지 않은 죄이든 모든 죄를 위한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방편을 제공하였다. 속죄제에서 그들은 제공된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용서를 얻는 사람들을 보았다. 대속죄일에서 그들은 대제사장이 이미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았거나, 아직도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회개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완전한 정결을 마련해 주고, 속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대속죄일과 함께 속죄가 완성되었고, 아무것도 첨가될 필요가 있거나 첨가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죄들은 그 날에 기록되었고, 기록조차도 없어졌다. 아사셀 염소를 통하여 그들은 사단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과 정결한 우주에 대한 한 보증을 보았다.

 염소가 대제사장이 선두에 선 승리의 행진이 아니라, 지명받은 사람에 의해 이끌리는 애통의 행렬에 이끌려 나왔을 때, 그들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을 떠나간 모든 사람의 운명을 보았다. 어떤 죄수가 교수대로 이끌려 가듯이, 목에 밧줄로 매인 염소가 멸망으로 이끌려 갔다. 죄수가 자신의 범죄를 속죄하듯이, 염소도 속죄하였지만 구원에 이르는 속죄가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형벌의 속죄였다.

 최후의 심판의 날에는 의인의 죄들을 도말할 뿐만 아니라 우주로부터 죄를 지워버리는 일이 포함되었다. 그것은 사단의 머리 위에 그에게 책임이 있는 모든 죄를 놓는 일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들의 영혼을 괴롭게 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끊김을 받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소 봉사에 있어서도 성소 정결이 완성된 후, 그 죄들이 아사셀 염소의 머리 위에 두어졌다. 그런 다음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끊쳐졌다”(레 16:20-22; 23:29).

 아사셀 염소를 끌고가는 일은 모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엄숙한 순간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통하여 각 사람은 그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의무를 행하지 못했을 때,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인지에 대한 생생한 예증을 보았다. 진밖, 곧 광야로 끌려나가 홀로 버린 바 되고, 굶주림과 갈증, 더위와 밤의 추위의 희생물이 되고, 야수들과 기타 밤의 위험들에 둘러 싸이고, 죄의식으로 괴로와 하고, 하나님의 저주가 그에게 임하여 있고-이것이 아사셀 염소의 운명이었고,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운명이 될 것이다. 그 교훈은 생생하고 힘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으며, 누구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교훈이 아니었다.

부가적 설명—성전에 관한 화잇 부인의 글들
 “영세 전부터 광명하고 거룩한 ‘스랍’ 천사를 위하여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께서 내재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지 못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지고 더러 워져서 신령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이미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쓰시고 사람이 되심으로 하늘의 목적은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인류 안에 거하시고 또한 구원하는 은혜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은 다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이 모든 영혼에게 고상한 운명이 공개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거하도록 계획하셨다”(시대의 소망, 1권, 204, 205).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중에 예수께서는 ‘메시야’ 로서의 당신의 사명을 선포하시고 당신의 사업에 착수하고 계셨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로 세움을 입은 성전은 이스라엘과 세상을 위하여 한 실물 교훈이 되도록 계획되었던 것이다∙∙∙. 세상의 매매하는 자들로부터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에 예수께서는 마음을 더러운 죄—영혼을 부패하게 하는 세속적인 욕망, 이기적인 욕정, 악한 습관—에서 떠나 정결하게 하시는 당신의 사명을 공표하신 것이었다”(상동).

 “예수께서는 회의적인 유대인들이 당신의 말씀의 감추인 의미를 찾아내도록 의도하신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당신의 제자들까지라도 그 당시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야, 그들은 그 분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했고, 그 의미들을 올바르게 깨달았다. 그들은 그분께서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취할 권세도 있다는 말씀도 하신 것을 기억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발이 향하고 계신 행로를 잘 아셨는데, 곧 끝까지를 아셨다. 그 분의 말씀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예루살렘 성전과 자신의 육체를 의미하였다”(Redemption—First Advent, p. 81).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시기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지’으라(출 25:8) 하시고 백성들 가운데 있는 성소에 거하시었다. 그 백성이 광야에서 그 지리한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표상인 성소는 내내 그들과 함께 있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인간이 치고 있는 장막 가운데 당신의 성막을 세우셨다. 그가 사람의 천막 곁에 당신의 장막을 치신 것은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로 당신의 거룩한 품성과 생애를 익히 알게 하기 위하심이었 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시대의 소망, 1권, 19, 20).

 “유대인의 장막(성소)은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하나의 표상이었다∙∙∙. 하나님께 충성되고 신실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지상 교회는 ‘참 장막’으로서, 거기에서 구세주께서 봉사하고 계신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높고 고상한 대 무대 위에 이 장막을 치셨다. 이 장막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분께서는 동, 서, 남, 북으로부터 그 장막을 구성하게 될 사람들을 모으신다∙∙∙.. 거룩한 장막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지어진다. 그리스도는 참 장막의 섬기는 자시며, 당신을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의 대제사장이시다”(영문 시조, 1900. 2. 14, p. 98).

 “참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으로 대표되어 있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 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 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세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엡 2:422)다고 하였다”(상게서).

 “시내산의 계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필요와 무력함을 인상깊게 해 줄 수 있었을 뿐이다. 성소의 희생봉사를 통하여 가르치고자 한 또 다른 교훈은 죄의 용서, 구세주를 통한 생명에 이르는 순종의 능력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상징적 성소의 목적이 성취되어야 했다. 즉 그 영광스러운 건물, 무지개 색깔로 그룹으로 수놓인 휘장에 반사하여 빛나는 황금의 벽, 사방을 가득 채우는, 계속 타오르는 향연, 흠 없는 세마포 의복을 입은 제사장들, 지성소의 그 은밀한 신비 속에서, 곧 속죄소 위, 머리를 숙이고 경배하는 천사들 사이에 있는 지성소의 영광 등은 상징적이었다. 그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인간을 위한 당신의 목적을 알아차리기를 바라셨다. 그것은 오랜 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 이 제시한 목표와 동일하였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Ed 36)

 “각 사람에게는 각자의 할 일이 주어진다—단지 옥수수나 밀 밭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위한 열렬하고 인내심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돌마다 산 돌이어야 하며, 세상에 빛을 반사하고 비추는 돌이어야 한다. 평신도들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게 하라. 그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달란트를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은혜와 더 만은 능력을 주실 것이다”(교회 증언, 8권, 246).

 “그리스도를 예표하던 제사 의식은 지나가버렸으나 사람들은 세상의 죄를 위하여 바쳐진 참된 희생 제물에 그 눈을 돌리셨다. 지상의 제사장 직분은 끝이 났다. 그러나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를 바라본다.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 지 아니한∙∙∙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오직 자기 피로 영 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12:24; 9:8-12).”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성전의 봉사가 지상에서 하늘의 성전으로 옮기워지고, 성소와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아니할 지라도 제자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조금도 손실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었다. 저들은 구주께서 계시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저희의 교제에 간격을 느끼거나 능력의 감퇴를 느끼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시는 한편 그의 성령으로 여전히 지상의 교회를 섬기는 자가 되신다. 그는 육안에서 사라지신 바 되었으나 그가 떠나가실 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 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하신 허락은 성취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무력한 사역자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주시는 한편 활력을 주는 그의 임재하심으로 아직도 자기의 교회에 함께 하신다”(시대의 소망, 1권, 214, 215).

 “우리는 대속죄일에 살고 있다. 우리는 백성의 죄들로부터 성소를 정결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업과 조화되게 일을 해야 한다. 혼인 예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계시는 사업을 거절하지 않게 하라. 그분이 계시는 것 같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믿음으로 보고 있는, 하늘 성소에서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 성취하고 계시는 사업을 백성 앞에 제시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늘 성소에서 진행하고 계시는 사업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 곧 모든 부정으로부터 영혼의 성전을 정결케 하지 않고, 이 사업과 조화되지 않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와, 또 이 시대를 위한 진리와 사업으로 부터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사람과 짝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은 마음과 품성에 미칠 품위있고 고상한 하늘의 감화력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연구해야 하며, 예수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받아드려야 한다.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고찰해야 한다. 여하한 정욕이 여하한 방법이나 여하한 정도로서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여, 육욕에 굴복될 때, 우리는 정신과 품성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상실하여 버린다. 하늘 성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업이 악한 자의 유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희미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이기적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에 집착한다. 그들의 진정한 도덕적 표준은 그들의 행위로써 결정된다”
(리뷰 앤드 헤럴드, 1890. 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