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생물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라고 찬송할 때 부연하여 노래하기를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 라고 하였다(계 4:8). (156.1)
 일부 성경 주석가들은 “장차 오실 자”“미래에도 계시는 분”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시는 분” 이라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구절을 단순히 하나님의 영원성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또 미래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156.2)
 물론 하나님의 영원성이야 두말할 나위 없는 진실이다. 9절에도 하나님을 “세세토록 사시는 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토의하고 있는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영원성이 “이제도 계시고” 라는 어구에 이미 다 함축되어 있다. “이제도 계시고” 라는 번역의 희랍어 원어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실 때 사용한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는 용어와 같은 것이다(출 3:14). (156.3)
 희랍어에는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존재하는 자”란 뜻의 다른 단어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피고 있는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는 생물들이 그러한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그들은 “장차 오실 자” 또는 좀더 단순하게 “오는 자”라는 뜻의 단어를 사용했다. (156.4)
 마빈 빈센트(Marvin Vincent) 교수는 많이 사용되는 그의 신약 성경 어휘 사전(Word Studies in the New Testament)에서 이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는 영어 흠정역에서 요한계시록 4장 8절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56.5)
 “장차 오실 자”(호 에르코메노스)는∙∙∙“미래에 존재하는 분”의 동의어가 아니다. 즉 성경 기자는 하나님의 존재가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걸친다는 관념적 개념을 묘사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러할 의도였다면 “미래에 계시는 자”란 뜻의 희랍어 “호 에소메노스”란 어휘를 사용했을 것이다. 문제의 이름(표현)은 하나님의 추상적인 존재를 강조하고 있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백성과 맺은 영원한 언약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유사한 경우가 두 번씩이나 나타나고 있다. 4, 5절에 말하기를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8절에는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였다. (156.6)
 이와같이 세 차례에 걸쳐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오실 자”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러한 분이시라는 것은 우리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156.7)
 어머니들은, 모래판에서 놀다가도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달려오는 아이와, 부르는 소리를 들어도 미적거리는 아이의 차이를 잘 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할 때 “오신다”고 한다. (156.8)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부르기까지 기다리지도 않으신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져 있음을 먼저 아시고 와서 우리를 보살피신다. 그는 우리의 구원에 솔선하여 개입하신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157.1)
 구약 성경에 나타난 “오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전달하고자 하셨을 때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출 19:9)할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선악에 관한 교훈이 절실히 필요할 때 그가 친히 시내 산에 임하여 그들을 가르친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어 하신다. (157.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디를 가든지 당신을 예배하는 제단을 쌓도록 지시하실 때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고, 약속하셨다. 고대의 여러 종교에서는 그들의 신(神)들의 관할권이 일정한 지역 혹은 국가에 제한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를 어디를 가든지 기도로 하나님의 동행을 간구하라 하셨으며 그때마다 그가 오셔서 우리를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셨다. (157.3)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의 보장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께서는 치유의 은사와 함께 오신다고 지적했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157.4)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 6:3).
(157.5)
 재림 때 하나님도 오시는가?
 주의 재림을 열렬히 신봉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과 함께 오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다. 필자는 이미 앞에서 이 문제를 간략히 언급한바 있다. 나타난 증거는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 의 쪽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오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6장 16절을 보면 여섯째 인을 떼는 그 절정의 순간에 악인들의 산과 바위를 향해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소리친다. “보좌에 앉으신 이”는 바로 성부 하나님이란 사실은 이미 앞에서 확인한 바다. 시편 50편 3~6절에는 세상의 종말이 예언되었으며 그 때 하나님께서 화염과 광풍 가운데 세상에 임하여 모든 원수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하실 것이라 하였다. (157.6)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윗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네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157.7)
 아마 이 구절이 일곱째 인을 뗄 때 잠시 동안 “하늘이 고요”한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半時) 동안쯤 고요하”(계 8:1)였다. 만약 그 때에 예수님께서 바로 지상 위의 “공중에”(살전 4:17) 와 계시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때 “모든 천사”가 그와 “함께” 땅에 동행하는 것이라면(마 25:31), 또 만약 성부, 하나님이 구름을 타시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면 하늘에는 남아 있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순간 하늘에는 노래가 끊어지게 될 것이며 하늘의 궁전은 고요하게 될 것이다. (158.1)
 오실 자로서의 예수님과 성령
 한 군대 장교가 예수님에게 중풍으로 고생하는 부하의 치료를 부탁했을 때, 예수님은 선뜻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7)고 대답하셨다. 한 종교 단체 간부가 예수님에게 죽어가는 12살짜리 딸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을 때 예수님은 곧장 그 집으로 향하셨다(눅 8:40~56). 그의 말씀과 행동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예수님을 오시는 자로 나타내고 있다. (1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