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가 나타나기를 오랫동안 고대해 왔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마 11:3)라고 여쭈었다. 한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에게, 오신다고 한 메시아이시냐고 여쭈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한번은 예수님 자신이 자신에 대해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하셨다. 또 다른 경우에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요 10:10)자 함이라 하셨다. 그는 “자기 땅”(요 1:11)에 오셨다. (158.3)
 성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오시는 분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물론 오시는 분이시다. 그는 최후의 만찬에서 재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내가 다시 오리라”(요 14:3) 하셨다. (158.4)
 예수님께서 과거에 오셨고 다시 오신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동안은 어떻게 된 기간인가? 우리에게 지금 예수님이 필요하다면 그분은 오시는 것인가? (158.5)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당신의 재림을 약속하신 후에 초림과 재림의 중간 기간에 대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그 다음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신 후 “우리가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 23) 하셨다. (158.6)
 이것은 생각만해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요한이 보았듯이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이 일이 어떻게 진실이 될 수 있는가? (158.7)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상담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성)령이라”(요 14:16, 17), “보혜사(상담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리라”(요 14:26). 즉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을 대표하여 성령을 보내시고, 이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문자적인 의미로 재림하기에 앞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계속 임하실 것이라 하셨다. (158.8)
 성령은 우리에게 오시어 성경에 기록된바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그런 형태의 일들을 행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가르치시며 인도하신다(요 14:26). 성령은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고 의의 필요를 인식케 한다(요 16:8). 그는 우리를 위해 중재의 일까지 하신다(롬 8:26). (158.9)
 예수님은 성령을 보혜사(요 14:26) 또는 위로자라 부르셨다. 예수님은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 부르셨다. 이는 자신 말고 또 다른 보혜사란 뜻이다. 이 말의 희랍어 원어는 “파라클레이토스” 인데 “누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초청된 사람” 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대언자”로 불려지고 있다. 즉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청해 온 사람이다. 이때에도 역시 희랍어 원어는 파라 클레이토스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파라클레이토스이다. 즉 필요할 때면 언제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특별한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파라클 레이토스이다(요 14:16). (159.1)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동안 성령은 이 곳 땅 위에서 우리들 사이에서 일하고 계신다.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신비스러운 방식에 의해 그는 우리의 안에도 거하신다(고전 6:19). (159.2)
 성 삼위의 제3위이신 성령 또한 오시는 하나님이시며, 와서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대의 소망”(The Desire of Ages)의 저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159.3)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모든 슬픔과 고통 중에서나
   앞길이 캄캄하고 장래가 암담하게 보일 때에
   또한 우리가 무기력하고 외로움을 느낄 때에
믿음의 기도의 응답으로서
보혜사가 보내신바 될 것이다.

환경은 세상의 모든 친구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을지 모르지만
   환경이 어떠해도, 거리가 아무리 멀다해도
하늘의 보혜사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지는 못한다.

우리가 어디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언제나 그는 우리의 오른편에 서서 우리를 밀어주시고
   붙드시며
   지키시고
   용기를 주신다.3
(159.4)
 하나님께서 언제, 어느 곳에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일정한 장소에 나아가 우리의 기억을 재충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어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의 약속들에 대해 상기할 필요가 있다. (159.5)
 여러분은 정기적인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기도하는가? 베갯머리도 좋고 거실이나 식당도 좋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0장 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내가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하셨다. (159.6)
 그러나, 기도하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급하고 바쁘게 드나들어서는 안 된다. (159.7)
 공포와 의심을 그대로 안고 그 자리를 떠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여러분을 도우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새로이 인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라. (160.1)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다”(신 29:29), 하나님은 우리들의 자녀들에게도 임하신다. 베드로는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 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고 말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의 말씀도 외롭고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어린이들에게 특별히 위안이 되는 말씀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60.2)
 하나님은 우리들의 매일의 필요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야말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들에게 대한 요한계시록의 기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다. 하늘의 우주 지휘소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 장(章)들에서도 생물들은 하나님을 우리들에게 오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1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