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로뉘무스(Jerome)에 의하면,
5 로마인들은 네로의 박해로부터 14 년 후(기원후 94)에 요한을 추방하였으며 2년 후(96 년) 도미티아누스가 사망하자 그를 석방하였다. 이러한 유배는 로마의 통치하에 흔히 있던 일이었으며 대개 정치적 인물들과 관계되어 있었다. 죄수들은 그들의 모든 공민권과 재산권을 잃었다.계시록의 도입부에서 요한은 자신의 신분을 증인, 즉
“마르투스”(martus)라고 밝히면서(
계 1:2), 자신이
“환난”을 당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다고 한다(
9절). 그의 과거, 가족, 친구, 거주지, 친숙한 환경으로부터 떨어져 노역과 굴욕으로 짓밟힌 채 가진 것이라고는 희망밖에 없는 계시록의 저자는 이제
킷두쉬 하셈(
kidduush ha-shem,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함)을 유대 전통의 완벽한 방식으로 성취한
“증인”(martyr
3))이 되었다. 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매일 마주치는 압제자들과의 만남은 요한이 유대인으로 가지는 정체성을 더욱 고양시킬 뿐이었다.
3) 순교자(殉敎者))/순단자(殉難者)라는 뜻도 있다(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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