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서문 머리말—낯선 책
 또한, 계시록의 도입부에 나오는 복(福)은 시작부터 이 책에 대하여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 그 방법론을 제시한다. 그 구절은 세 동사로 나누어진다. 즉 “읽고,” “듣고” “지키라”는 것이다. (18.3)
 그 책은 먼저 우리에게 읽으라고 요구한다. “읽는 자는 ∙∙∙ 복이 있나니.” 그 복은 “드러난 비밀”인 계시, 즉 계시로부터 발생한다. 그 말은 복을 누리려면 계시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핵심을 놓칠 수가 있다. 사실 이 책을 읽는 행위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흥미롭게도, “읽다”라는 동사는 유일하게 “읽는 라는 단수형(單數)에 들어 있다. 다른 동사들은 “듣는 자들“지키는 자들처럼 복수(複數)형으로 되어 있다. 그 읽는 사람에게는 회당 예배에서 하는 대로, “듣는 자들,” 즉 청중이 있는 것이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그가 읽는 말씀을 무리가 들어야 한다. 우리는 공중(公衆) 예배라고 하는 거룩한 상황 안에 있다. 계시록은 예식문(禮式文)으로서 읽혀야 한다. 정서적이고 신비적인 경험으로서, 리듬과 상징과 영적인 교훈들을 지닌 시(詩)로서 읽혀야 한다. (18.4)
 그러나 계시록에는 의식적(儀式的)인 행위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다. 성경은 그 말씀들을 “예언”이라고 부른다. 감성적으로만 다루어서는 안 되는 그 책은 단순히 신비주의자들과 시인 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참으로 그 말씀들은 성전의 벽을 훨씬 넘고 예배당의 경내를 훨씬 뛰어넘어서 공명(共鳴)한다. 예식문의 수준을 넘어서, 계시록은 그 청중이 연구하고 깨달아야 하는 책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에는 지적(知的)인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는 그 예언을 “들어야” 한다. 히브리적 사고의 배경 안에서 듣고, 우리가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왕상 3:9; 느 8:3; 렘 6:10; 계 2:7; 3:22). (19.1)
 그런 후에야 그 책은 “비밀들을 드러내고,” 역사의 괴로운 행로를 그 최종적인 완성까지 조명해 준다. 지복 선언의 마지막 구절인 “때가 가까움이라”는 말이 그 점을 시사한다(역사—예언적 접근). “듣는 것”의 히브리적 개념은 또한 어떤 사람이 자기가 깨달은 것에 따라 살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을 내포한다. 셰마 이스라엘(신 6:4~9)은 그저 듣기 좋은 가락이 아니다. 히브리어에서 “듣다”라는 동사는 “지키다”“순종하다”라는 동사들의 동의어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펴보는 구절의 마지막 부분이 주는 메시지이다.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19.2)
 우리의 귀에 노래처럼 들리게 예배 의식으로서 읽는 것이나, 예언으로서 우리의 마음에 도전을 주는 것을 넘어서 그 책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그 안에 기록한 것” 과 조화되게 살도록 인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실존적 접근). 이제 지복 선언은 책의 첫 단어들을 주목한다. 그 기록된 메시지가 위로부터 온 계시, “하나님이 주신 계시”(계 1:1)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의 계시록”(이 책의 가장 오래된 제목)15이 요한에게 주신 계시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19.3)
 그러므로 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리가 기록된 말씀이라는 육신 안에 나타난 것으로, 그 본문의 의미를 열렬하고 경건하게 탐구하는 데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주석적 접근). (19.4)
 므노라 구조
 계시록 연구를 위하여 이렇게 다양한 접근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 책 전체를 지지하는 구조 자체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므노라, 또는 칠중(七重)의 모형이라고 부른다(그림 참조). 계시록의 구조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20.1)
   1. 그것은 다니엘와 마찬가지로,16 병행하며 동시에 일어나는 이상들이 일곱 주기로 전개되며, 교차대구적 형태(Chiastic form, X 모양의 그리스어 글자 [chi]에서 유래)로 되어 있다. 즉 그 주기의 후반부가 전반부와 역행하며 대응된다는 의미이다(ABC/C'B'A'). (20.2)
 2. 일곱 주기의 매 시작에는 이스라엘의 큰 거룩한 절기들의 일정(레위기 23장에 규정된 대로)을 암시하는 의례(儀禮) 장면과 함께 이상(異像)의 무대가 성전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그 책은 각 예언의 주기를 유대 절기의 관점에 놓고 본다.17 저자는 우리가 계시록을 유대 절기의 빛에 비추어 보고 역사에 상징적 의미를 비춰 주는 의례들에 비추어 읽도록 초청한다.18 (20.3)
   3. 나아가 다니엘와 마찬가지로 계시록은 크게 두 주요 부분(역사/지상 부분과 종말/천상의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그 가운데에는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과 인자의 재림이 등장한다(계 14; 참조 단 7).20 (20.4)
 계시록의 전반부는 일차적으로 요한이 살아 있던 때로부터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의 역사에 관한 예언적 이상이며, 후반부는 하나님이 오시는 때로부터 하늘 도성이 내려올 때까지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계시록을 단순히 그 저자의 당대의 사건들에 대한 반영으로 해석하는(과거주의 해석) 대신에,21 우리는 그 저자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이상으로서 그 책을 해석하되(역사 · 예언적 해석), 그러한 이해에 수반되는 모든 신앙적 모험과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실존적 접근). 이러한 역사 예언적 해석이 저자의 의도에 가장 충실한 해석일 뿐 아니라 가장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해석이기도 하다.22 (20.5)
[계시록의 므로나 형태]19
 

샤부오트(4, 5장) 킵푸르(11:19) 숙코트 전(前)(19:1~10)
일곱 인(6:1~8:1) 일곱 표적(12~14장) 일곱 승리(19:11~28:15)
(간주곡 7장) (간주곡 14:1~5)


로쉬 하샤나(8:2~5) 킵푸르의 끝(11:19) 숙코트(21:1~8)
페사흐(1:12~20) 일곱 쇼파르(8:6~11:18) 일곱 표적(12~14장) 예루살렘의 일곱 경이 (21:9~22:5)
일곱 교회(2, 3장) (간주곡 10:1~11:14) (간주곡 14:1~5)
지상의 국면(1:1~11:18) 마지막 국면(11:19~14장) 천상의 국면(15~22장)
 
 그 책은 점차적으로 그 계시적인 주제들을 확장하고 발전시키며 강화(强化)해 나간다. 여기서 요한은 그의 이상들을 반복하며 확장해 가는 다니엘의 예를 따르고 있다(특히 다니엘 2, 7, 8장을 보라). “요한의 계시록”은 단일(單一)한 계시이기도 하다. 아포칼룹시스라는 제목은 단수도 되고 복수도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상들을 해석할 때 이러한 반복과 강화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반복적 해석). 이러한 해석은, 인(印)들로써 예고된 사건들은 편지들의 예언을 뒤따르고, 쇼파르들로 예고된 것들은 인들을 뒤따르는 등, 계시록을 시간의 순서대로 이해하는 방법(미래주의와 세대주의 해석)에 대하여 명백히 도전한다.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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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시록의 특징, 목적, 형식 등에 대한 이 모든 예비적인 관찰들은 이 수수께끼 같은 책이 두렵게 하거나 낯설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의문에 대하여 답해 주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달래 주기 위하여 고안된 책인 것을 보여 준다. (22.2)
 주(註)
 1) Hag. 14g; 참조 TJ Hag. 2:1,77b.

 2) Yair Bar-El Rimona Durst, Gregory Katz, Josef Zislin, Ziva Strauss, and Haim Y. Knobler, “Jerusalem Syndrome” The British Journal of Psychiatry 176 (January 2000) 86~90을 보라.

 3) 렘 40:16; 겔 8:12; 느 12:23; 대상 3:15 등.

 4) Polycrates, From His Epistle to Victor and the Roman Church Concerning the Day of Keeping the Passover (Ante-Nicene Fathers, vol. 8, p. 773), Eusebius, Church History 5. 24. 3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p.242)에서 재인용.

 5) Jerom, Lives of Illustrious Men 9 (Ne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3, pp. 364,365).

 6) Ernest Renan, Antichrist: Including the Period From the Arrival of Paul in Rome to the End of the Jewish Revolution, trans, and ed. Joseph Henry Allen (Boston: 1897), p. 17.

 7) “계시”라는 단어는 유대교와 기독교 양쪽의 전통에서 중요한 문학적 사조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으며, 그 용어는 성경 내외의 자료들에 다 적용된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다니엘, 에스겔, 학개, 스가랴 그리고 이사야의 일부가 그에 해당되며, 신약에서는 마 24; 막 13; 살전 4:13~18; 살후 2:1~12; 고전 15:20~26, 51~53이 그러하다. 성경 밖(외경과 위경 문헌들)의 유대인 문헌 중에서는 에녹1서, 2서, 에스라4서(에스드라2서 3~14장), 바룩2서, 모세의 승천기, 아브라함의 계시록, 아담의 계시록, 엘리야의 계시록, 희년서, 열두 족장의 유언 그리고 사해 필사본들 중 일부 본문들을 계시 문헌으로 본다. 기독교 문헌 중에서는 베드로의 계시록, 바울의 계시록, 이사야의 계시록 등을 계시 문헌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위에 소개된 작품들을 “계시 문학”으로 분류한 것은 인위적이고 임의대로 한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 더욱이, 요한계시록(계시록)은 다른 “계시 문학적” 문헌들과 구별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그 예언의 의도, 윤리적 의미, 낙관주의, 그 저자 [가명이 아님] 등).

 8) 단2:19,22,28, 29, 30,47; 10:1.

 9) 계시록에는 7개의 지복(至福)이 있다(계 1:3; 14:13; 16:15; 19:9; 20:6; 22:7, 14). 그 일곱 모두가 장차 오실 하나님을 암시한다.

 10) Henry Barclay Swete, The Apocalypse of St. John: The Greek Text With Introduction, Notes an Indices, 3rd ed. (London: reprint 1917), p. cliii을 보라.

 11) 참조 1:4, 9; 22:8

 12) 다니엘에서는 계시적 이상의 도입부에 그 표현을 일곱 번 사용한다(Dan. 7:15,28; 8:15,27; 9:2; 10:2,7).

 13) 다니엘와 계시록 사이의 평행과 관련을 보려면, Richard Lehmann, “Relationships Between Daniel and Revelation” in Symposium on Revelation-Book 1, ed. Frank B. Holbrook,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General Conference of Seventh-day Adventists, 1992), vol. 6, pp. 131~144을 보라. 참조 Jean-Pierre Ruiz, Ezekiel in the Apocalypse: The Transformation of Prophetic language in revelation 16, 17~19, 10, Europian University Studies, Series XXIII, Theology (Frankfurt am Main: 1989), vol. 376; and G. K. Beale, The Use of Daniel in Jewish Apocalyptic Literature and in the Revelation of St. John (Lanham, Md.: 1984).

 14) Jacques B. Doukhan, Secrets of Daniel: Wisdom and Dreams of a Jewish Prince in Exile (Hagerstown, Md.: Review and Hemld Pub, Assn., 2000).

 15) 제2세기의 문서인 Canon Muratori와 교부들의 문헌이 이를 입증한다( David E. Anne, Revelation,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Word Books, 1997], vol. 52, p. 4을 보라).

 16) Jacques B. Doukhan, Daniel: The Vision of the End, rev. ed. (Berrien Springs, Mich.: Andres University Press, 1989), pp.3~6을 보라.

 17) 제목에 나오는 유대 절기들은 히브리 원어로 쓸 것이다. 샵바트(안식일), 페사흐(유월절), 샤부오트(오순절), 로쉬 하샤나(신년, 나팔절), 킵푸르(대속죄일), 숙코트(초막절) 등이다.

 18)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대 절기들의 비슷한 패턴에 대하여는, George R. Beasley-Murray, John, 2nd ed.,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36(Nashville: 1999), p. lix을 보라.

 19) 참조 K. A. Strand, Interpreting the Book of Revelation: Hermeneutical Guidelines, With Brief Introduction to Literary Analysis, rev.

 and enl. ed. (Worthington, Ohio: Ann Arbor Publishers, 1976), p. 51.

 20) Doukhan, Secrets cf Daniel, p. 1004 보라.

 21)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인 루이스 데 알카자르(1544~1614년)가 처음으로 이러한 해석을 도입하였다. 이 예언을 교황권에 적용하는 개혁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회 신학자들은 그것을 요한 당대의 유대교와 이교 로마에 적용한다. 19세기 독일의 합리주의는 이러한 견해를 더욱 발전시켰고, 역사־비평적 방법론의 길을 닦았다·

 22) 리옹의 이레내우스(기원후 130~202)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였다. 계시록이 기록된 지 몇년 되지 않아 출생한 이 교부는 요한을 개인적으로 만났던 순교자 폴뤼카르포스의 제자였다(Eusebius Church History 5. 20. 6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cond Series, vol. 1, pp 238, 2391] ). 힙폴뤼투스와 오리게네스의 영향으로 교회는 중세시대에 그 관점을 포기하고 더 우화적, 영적, 도덕적인 해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후에 16세기 개혁자들과 함께 재등장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