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눈으로 본 요한계시록 서론—“그분이 오신다”
 “그분이 오신다” (요한계시록 1:4~10)
 이스라엘의 하나님
 책을 시작하는 인사말의 첫 마디인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계 1:4)라는 호칭에서부터 저자는 자신의 예언의 근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둔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실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라고 하신 말씀을 연상시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떠한 신학적인 정의로 파악되거나 한정될 수 없는 하나님 으로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단순히 여기 우리의 현재에 존재하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경배하는 하나님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경배하던 분과 동일하다.

  (26.1)
 둘째 단어인 “(전에도) 계셨고”라 는 말은 그분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분은 과거에 “계셨던” 것처럼 현재도 “계시고,” 미래에 는 단순히 “존재” 하시는 것 이상으로 오실 것이다. 미래에도 존재의 동사인 “있다” 라는 단어를 쓰는 대신에, 요한은 “있다”(과거형과 현재형에서 사용되었던)를 “오다”라는 동사로 바꾸었다. 참으로, 하나님은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에 관하여 습득한 모든 지식들과 그분께서 역사에 개입하심으로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여전히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데, 그분이 아직 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오신다는 약속은 미래에 남아 있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보다 더 큰 것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기억 속의 하나님, 존재하는 하나님, 영성과 교통의 하나님 이상으로 그분은 “장차 오실” 하나님이시다. (26.2)
 그 책은 “보좌 앞에 있는”(계 1:4) 영(靈)에 대하여 언급함으로 그 메시지를 더 확실하게 한다. 계시록의 예보들은 점성술이나 심령술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보좌, 즉 온 우주의 주권을 가진 심판자,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부터 나온 것임이 확실하다. (27.1)
 선지자 이사야가 그리스도에게 관(冠)을 씌우는 일곱 영을 열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전에 선행(先行)될 그리스도의 명확하고 공정한 심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害)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3~9). (27.2)
 성령께서 위로부터 세상의 구원과 심판의 비밀들을 밝히시므로 그 책은 다시 한 번 그 자체를 계시, 즉 드러냄의 책으로 정의하게 된다. 이제 그 비밀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계 1:5) 오는 것을 선포하면서 선지자의 말은 더 온화하고 친밀한 어조를 띤다. 요한은 세 가지 행위(“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6절])와 연관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속성(“충성된 증인,”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 “땅의 임금들 의 머리” [5절])을 묘사한다. (27.3)
 예수님의 세 가지 속성은 구원의 세 주요 단계를 암시한다.

 (1) 그분의 성육신. 그것은 인간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하여 증언한다.

 (2)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것은 우리를 구원한다.

 (3) 그분의 왕권. 그것은 우리의 천국 시민권을 보증한다. (27.4)
 사도 바울도 부활에 대하여 숙고하면서 동일한 세 단계를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 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 나라를 하나님께 바칠 때라 ∙∙∙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가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고전 15:20~25). 동일한 주제의 진행을 우리는 오순절에 베드로가 군중에게 한 설교에서도 볼 수 있다(행 2:22~25: cf. 행 7:56). (27.5)
 초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던 그대로의 구속의 계획 전 과정이 예언의 전주곡 노릇을 하고 있다. 오시는 하나님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그러나 예언은 단순히 구원의 복음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어떤 사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고 아는 그리고 그도 우리를 사랑하고 아는 한 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는 그 기다림을 더욱 더 열렬하게 만든다. (28.1)
 계시록이 보여 주는 첫 번째 예언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한 것이다. 그 책은 그리스도를 다니엘에서와 같이 묘사한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계 1:7; 참조 단 7:13). 그 표현은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며 심지어 비웃음을 사기도 해 왔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오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신화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상당히 실제적인 것을 생각하고 있음을 계속해서 진술한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자들도 볼 터이요”(계 1:7). 여기서 본문은 스가랴가 예언한 말씀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 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 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슥 12:10, 11).

  (28.2)
 스가랴에 대한 암시는 애곡하며 통곡하는 느낌과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위로부터 오는 그리스도를 열렬히 기다리는 “나라와 제사장들”(계 1:6)에 상대하여,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세상의 권력에만 의존하는 땅의 왕들이라는 또 다른 진영이 있음을 요한은 보여 준다. 거기에는 그를 못 박고 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로마인들 뿐 아니라 그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일조(一助)한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분의 인기를 질투한 제사장들, 겁나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리스도인” 제자들, 궁극적으로는 대대로 모든 남녀 군중이 그분을 살해하는 데 어느 모로든지 참여한 것이다. 요한은 그들이 실망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왕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받는 대신에 그들은 그분으로 인하여 애곡하게 될 것이다. 그분이 실제로 죽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강림하실 때에 그들은 자신들의 오판(誤判)의 결과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들의 슬픔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느끼는 정서에 비교한다. 그것은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그들이 죽기를 바랐고, 그들이 실제로 살해한 이인데, 이제 그들은 그분이 더 이상 죽어 있지 않은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도 애곡하는 것이다. (29.1)
 예배 시에 부르는 화답의 말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을 확증한다. “그러하리라 아멘”(7절). 그 말은 찔린 분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분이 이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더라”(8절). 그분은 “주 하나님,” 창조의 여호와 엘로힘, 시간의 처음과 끝의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특별히 “장차 올 자”이며, “전능한 자,” 엘 샷다이(El Shaddai)이시다. (29.2)
 이 마지막 이름은 히브리 전통에서 하나님의 가장 오래 된 이름 중 하나이다. 이스라엘은 부조(父祖)들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약속과 축복의 하나님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창 28:3; 35:11). (29.3)
 샵바트(Shabbat)
 요한은 “주의 날”(계 1:10)에 이상(異像)을 받는다. 다수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당장 일요일을 생각하는데, 이는 그 저자가 유대인이며, 히브리 성경으로 양육받았고, 그 조상들의 전통에 기울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역사상 “주의 날”로 일요일을 가리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2세기가 되어서 였다. 그러므로 그 “주의 날”은 안식일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하며, 히브리 성경에서도 그 날을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부른다(출 20:10; 신 5:14). 더욱이 계시록에서 7이라는 숫자를 빈번하게 사용한 것도 우리가 그 책을 시작하는 축일(祝日)이 안식일을 가리킨다고 여길 만한 근거가 된다. 나아가 레위기 23장에 열거된 연중 절기들에서도 안식일이 도입부에 나타난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너희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레 23:3).

  (29.4)
 성경의 전통에 따르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키라고 제정하신 첫 번째 축일이었다(창 2:1~3). 그 날은 또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주시기(출 16:23, 29) 전에 이미 그분께서 거룩하게 만드신 유일한 날이며, 유일하게 계절이나 천체의 운동, 또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지 않는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일로 시작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29.5)
 또한 요한이 고대 히브리 선지자들이 언급한 또 다른 “여호와의 날” 욤 야훼(Yom YHWH, 사 13:9~13; 겔 30:1~5; 욜 2:1~11; 암 5:18~20; 습 1:14~18), 즉 그분이 세상 끝에 오시는 심판의 날을 암시하고 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이 단락의 종말론적인 문맥은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31.1)
 달리 말하자면, 요한은 주의 날(최후의 심판과 파루시아의 날)에 관한 이상을 안식일(또 다른 주의 날)에 받은 것이다. 선지자가 그 두 날을 연관시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안식일은 성경(사 58:14: 61:1~3)과 유대 전통에서 항상 종말론적인 의미를 띠고 있었으며, 거기서 안식일은 구원의 표징이며 “장차 올 세계의 미리 맛보기”1였다. (31.2)
 갑자기 요한은 그의 뒤에서 말하는 커다란 음성을 듣는다(계 1:10). 히브리식 사고(思考)는 사람의 시점에서 과거를 앞에 둔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지각(知覺)의 앞 쪽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미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 뒤에 오는 것이다.2 그러므로 의미상 그 큰 음성은 미래를 상징한다.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