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존경하는 아는 한 분이 백혈병 말기 증세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그는 50대의 나이였는데 그가 그런 중병으로 앓고 있었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살 날이 수주일에 불과하다는 선언을 받았던 것이다. 그분 내외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어려움을 치를 때마다 성경을 통하여 진정한 삶의 용기를 얻곤 했었다. 바깥 분이 병원으로 실려간 지 3일 후인 7월 6일에 부인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넘기고 있었다. 그가 책장을 넘기고 있던 성경은 「새 국제역」(New Intermational Version)이었는데 시편 108편이 얼핏 눈에 들어왔다. (288.1)
 그녀는 서둘러 차를 타고 남편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뜻밖의 감격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성경을 들고 시편 108편을 찾아보니 그 난외에 남편이 방금 기록한 “7월 6일” 이란 날자가 적혀 있었다. (288.2)
 그들은 제 각각으로 성경을 통독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로 말미암아 그 두 내외분은 같은 날 같은 성경절을 각기 다른 장소에서 읽었던 것이다. 내외는 함께 앉아 시편 108편을 읽었다. 부인이 소리내어 크게 읽을 때, 읽는 분과 듣는 분 모두 감격으로 눈물지었다. (288.3)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승리를 얻으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시 108:1, 13 N.I.V.).
(288.4)
 장례식 때 부인은, 하나님께서 특히 그 몇 주간의 고통스러운 나날 동안 새로운 사태에 적절히 직면토록 그들 내외를 어떻게 붙드셨는지 이야기했다. 그녀의 마음은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라고 노래한 시인의 마음 그대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부군을 잃은 크고 깊은 슬픔을 실제로 이긴 것이다. (288.5)
 우리의 원수를 끝내 이길 것이라는 반가운 보증은 시편 108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건지시고 그 친구들을 풀 무불에서 건지신 다니엘 3장6장에서도 이 보증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미래의 대환난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 겪게 되는 모든 시련과 고난에도 적용된다. (288.6)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다. 원수에 대한 승리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특권이다. 이 승리는 어느 해 7월 6일과 그 밖의 모든 날에도 적용된다. (288.7)
 그리스도를 자신의 “부활이요 생명”(요 11:25)으로 여기고 무덤 문을 열 열쇠를 쥐신 분으로 생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지막 원수”인 죽음(고전 15:26)에 대한 승리까지 보장되었다. 이 같은 불패(不敗)의 생명력은 하나님의 속성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 그대로 그분을 신뢰하는 우리들에게 내려 주시는 하나의 은사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 곧 성경에 부여하고 있는 본질이기도 하다. (289.1)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를 얻으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N.I.V.).
(289.2)
 성경의 위대한 새 시대
 하나님의 말씀이 불패의 생명력을 구가할 것이라는 보증이야말로 요한계시록 11장 1~13절에 나타난 기별의 골자이다. 첫째로 요한은 신구약 성경을 뜻하는 하나님의 “두 증인”“삼일 반 동안” 죽어 있는 상징을 보았다(관련 문제와 해답 란을 참고하라). 이것은 프랑스 혁명 기간에 성경에 대해 자행된 만행을 예언한 것으로서 이미 앞에서 그 주요 내용을 소개했다. (289.3)
 요한은 이 같은 광경을 목격한 직후에 성경의 운명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는 기록하기를,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계 11:11, 12)하였다. (289.4)
 프랑스 혁명이 그 절정을 넘어 단두대의 무시무시한 유혈 상황이 완화되기가 무섭게 그리스도교는 그 최상의 시대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289.5)
 이 신 시대를 위한 씨앗은 1700년 대의 고통스러운 나날들 속에서 움터 왔다. 영국에서는 벤자민 잉검(Benjamin Ingham), 조지 화이트피일드(George Whitefield), 헌팅턴 백작 부인(Countess of Huntington), 그리고 감리교회의 개척자들인 존 웨즐리(John Wesley)와 차알스 웨즐리(Charles Wesley) 등 여러 복음 지도자들의 활동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조지 화이트피일드의 복음 운동으로 1740년에 대각성이 일어났으며, 뒤이어 침례교회 및 그 밖의 종교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700년 대 중반에는 감리교회 운동이 영국에서 북미로 파급되었다.47 (289.6)
 역시 그 어려운 1700년 대에 여러 단체들은 빈민층에 성경을 값싸게 보급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여기저기에 소규모의 성서 공회들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모라비아 교도들과 “복음 전파 협회”(S.P.G: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및 그 밖의 군소 선교단 체들이 비록 소수이나마 양질의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289.7)
 1,260년의 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1700년 대 말경에는 이렇게 움돋기 시작한 신앙 부흥, 성경 보급, 선교사 파견 운동이 마치 비온 후 무성한 죽순처럼, 방과 후 교문을 쏟아져 나오는 국민학교 아동들처럼, 또 구름 낀 아침에 갑자기 쏟아지는 햇빛처럼 장관을 이루며 활기를 띠었다. 성경에 예언된 산업 혁명과 “서방 열강의 영토 확장”에 편승하여 그리스도교는 일취 월장의 형세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289.8)
 우리는 앞에서 일곱 교회 중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논의할 때 이 같은 복음 운동의 갑작스러운 진전을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재삼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지 한 마디 추가하자면 존 웨즐리가 1791년에 사망할 때까지도 영국의 감리교도들은 7,000 명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1860년에 이르면서 미국 내의 감리교도들의 수효만 해도 2백만을 초과하게 된다.49 복음주의의 다른 교파들도 이와 유사한 성장세를 보였다. (290.1)
 도처에 선교 협회가 설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 선교에 헌신함으로서 해외 선교 사업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25세의 헨리 마틴(Henry Martin)이 1806년에 선교사로서 인도 땅을 밟았을 때, “하나님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게 하소서”라고 절규했다. 그는 이런 정신으로 그 곳에서 6년을 봉사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정신이 그 밖의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사업에 진력하게 했다. 버마의 저드슨(Judson), 인도의 케어리(Carey), 중국의 모리슨(Morrison), 아프리카의 모라트(Morrat)와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등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중심 화제가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큰 종들의 놀라운 헌신을 찬탄하였으며 그리스도인 소년·소녀들은 그 위인들의 뒤를 따라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290.2)
 그리고 그들은 실지로 그들의 다짐을 이행했다. 의사와 간호원으로서, 농경 기술자로서, 교사와 목사로서 그들은 선교지에서 헌신적으로 일했다. 그들은 선교지의 부족들을 위해 문자를 고안하고 그 글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들의 개인적인 소유물들은 너무나 자주 습기로 말미암아 곰팡이에 뒤덮였다. 그들의 선교사 공동 묘지는 순식간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동료들의 무덤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드디어는 그들 자신의 육신마저 말라리아, 티푸스, 성홍열 등의 몹쓸 병으로 쓰러져 갔다. (290.3)
 그들은 그들의 전부를 바쳤으며, 그런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예일 대학의 저명한 선교학 교수인 케네드 스코트 라투렛(Kenneth Scott Latourette)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교는 〔1800년 대에〕 비로소 그 역사상 최초로 고유의 특성을 실제화했으며, 전세계에 신도들을 갖게 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교가 이룩한 성취는 다른 모든 종교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류가 그리스도교의 표준에 완전히 순응하기에는 아직 크게 미급하였다.” 교회 성장의 한 세기가 지나간 후에도 아직 그리스도교 신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지역 전체 인구의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900년 대 초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다소간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51 (2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