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와 필자의 쌍동이 동생은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했다. 우리는 아직도, 어머니께서 한참 재미있게 책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책을 그만 덮어두고 엄마의 일을 조금 거들어 달라고 자주 말씀하셨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읽던 대목을 끝내고 일어서려는 생각으로 미적거리기가 일쑤였던 것 같다. (439.1)
 

1945년 9월, 맥아더 장군은 일본과의 강화 조약에 서명한 후, 아마겟돈이 세계의 문어귀에 와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의 말은 과연 옳았는가?
(439.2)
 어머님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신다· 그러나 결국 기다릴 만큼 기다려도 일어서는 기척이 없으면, 어머니는 한참 말없는 시선으로 우리의 관심을 호소하신 후 “괜찮다, 걱정할 것 없다. 나 혼자 할 테다. 너희들이 나를 도와 줄 의향이 없는 듯하니 그럴 필요가 없겠다”고 선언하시고는 나가시는 것이다. (440.1)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 한마디, 곧 이제 우리가 어머니의 자비의 잔을 바닥나게 했구나 하는 암시가 터지는 순간, 우리는 허겁지겁 책장을 덮고 부엌이건, 화장실이건, 혹은 정원이건 어디로든지 어머님이 일하시는 곳을 찾아 뛰어간다. (440.2)
 이와는 사뭇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하여튼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너희들이 나를 순종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니 순종할 필요가 없겠다”고 선언하시는 최후의 순간이 분명히 올 것이다. (440.3)
 참으로 엄숙한 한 사태
 요한계시록은 이 극도로 엄숙한 한 사태에 대해 수차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그 뚜렷한 한 예가 요한계시록 22장 11절이다. 한 음성이 하늘로부터 나서 가장 극한적인 용어를 빌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440.4)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440.5)
 처음 읽을 때는 이 예외적인 선언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거룩한 자는 계속 거룩하게 되리라는 말씀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불의를 하는 자는 계속 불의를 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440.6)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여기에 사용된 이 어법(語法)이 특별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도 우리들은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 라틴어에도 “이뎀 페르 이뎀”(idem per idem:같은 것은〔결국〕같은 것이니까)이란 관용구가 있다.15 (440.7)
 예컨대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무슨 일로 어린아이들의 유치한 행위를 깨닫게 해 주려고 노력했으나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때 결국은 “아이들이란 역시 아이들이군”하고 이야기를 포기하는 예가 있지 않는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국민들은 흔히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될대로 되라지)라고 한숨 쉬고는 걱정을 접어 둔다. 마음이 상한 부모들이 자녀들과의 토론을 중단하고 “시킨대로 해. 이제 끝이야”하고 소리치는 경우가 가끔 있다. (440.8)
 성경에 보면 에스더 왕후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말하면서 철석 같은 결의를 보이고 있다(에 4:6). 하나님은 “나는∙∙∙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것이라고 선언하시면서 당신의 철석 같은 결의를 표명하셨다(출 33:19). 모세가 하나님께 그 이름을 알고 싶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하셨다(출 3:14). (440.9)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22장 11절의 표현도 “이것으로 끝이다”라는 식의 진술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1절은 권고를 끝내고 마지막 결정을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제 완전히 결정토었다. 그리하여 그는 선언하신다. “착한 자는 계속 착하고 악한 자는 계속 악을 행하라.”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제는 끝이다. (440.10)
 성전이 연기로 가득참
 이 두려운 최종적인 결정의 순간은 일곱 재앙을 소개하고 있는 성소의 장면 속에 묘사되어 있다. 요한이 눈을 들어 보니 하늘 성전이 열리면서 일곱 천사가 나왔는데, 그들이 진노의 대접들을 다 받고 난 후에는 성전이 닫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계 15:8). (441.1)
 이 구절도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구약 성경에서 빌어 온 표현이다. 솔로몬 왕은 최초의 성전을 헌당할 때 청동으로 된 작은 단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려 실로 장엄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가 기도를 다 마치자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다”(대하 7:2; 대하 6:13; 왕상 8:54). 이와 같이 솔로몬 성소의 제사장 봉사는 성전에 가득찬 하나님의 영광의 연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하늘 성소의 제사장 봉사는 요한계시록 15장에 나타난 대로 성전에 가득찬 하나님의 영광의 연기와 더불어 끝맺게 될 것이다. 아직은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히 4:16)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아무도” 그 곳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441.2)
 신학자들은 성소가 닫히는 이런 순간을 “집행 유예의 끝”이라고 부른다. 즉 백성들이 어느 편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조사받을 기회가 끝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수 천년 동안 인간들이 동료 인간을 모욕하고 괴롭히는 광경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셨다. 하나님은 조롱하는 자와 박해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유예의 기간”을 주셨다. (441.3)
 그러나 이제 이것으로 족한 것이다.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마 24:14; 계 14:6, 7), 각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사랑의 계명과 관련하여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결단할 충분한 기회를 누렸다. 그러나 이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예의 기간은 끝났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연기로 가득차게”되며,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아무도 “성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한다. (441.4)
 성품의 중요성
 영생을 위한 한 가지 기본적인 자격은 성령으로 태어나서 양육된,신앙과 사랑으로 특정된 성품이다(요 3:5;갈 5:22~24;계 21:27). 진실성은 기본이다.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우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마 22:34-40). 일곱 재앙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처럼 단순히 공포심에 의한 회개와 자복은 진정한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위기가 지나가면 다시 옛날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4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