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나타난 구원 시편 11편 하늘이 보증하는 공의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 며∙∙∙”(벧후 2: 6. 유 7절과 비교).
(149.3)
한편,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가장 고양된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149.4)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다시 뵈오리로다”
(시 11:7)
(149.5)
 의인들이란 생활 가운데서 “정의”를 구현한 사람들로서 “마음이 바른 자들”(2절)로 불리운다. 하나님은 강포를 좋아하는 자를 미워하시고(5절), 의로운 일을 좋아하는 이를 사랑하시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7절. 시 33: 5, 37:28과 비교). (150.1)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행위에만 관심이 있으시다는 말인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자. (150.2)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 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4, 5). (150.3)
 또한 사무엘이 발견한 것도 그렇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150.4)
 마음이 정직한 자들을 위한 약속에 관해 자못 흥분되는 것은 그들이 “그 얼굴을 뵈”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적 이스라엘에 있어서 모든 물질적 축복이란 복 주시는 이인 하나님과 갖는 생명을 다 바치는 관계에서 오는 부수적인 상황인 것이다. (150.5)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 4:6)
(151.1)
 다윗의 장차 올 구원에 대한 확신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151.2)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15)
(151.3)
 하나님을 보는 이 계시적 환상—the visio Dei—은 모든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으로서 이스라엘이 열망하던 것이었다.(시 16:11 참조). 그것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갖는 결코 끝이 없는 우정 관계를 확인해 주었다. (151.4)
 그 이중적 관점에서 시편 11편은 우리의 짧은 인생을 하늘의 빛 속으로 인도해 주며, 우리의 행위와 사상을 영원한 의미로 채워 준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를 따르는 무 리들에게 약속하실 때 시편 11편을 염두에 두셨던 듯하다. (151.5)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151.6)
 성경의 마지막 책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자 하는 우리의 이 궁극적 소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마지막 구원에 의해 세상이 신령한 땅으로 변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영원히 거하시기 위해 내려 오실 때에 일어날 것이다. (151.7)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2:3, 4).
(152.1)
 성경은 하나님과 복낙원을 보게 되는 그 황홀경과 그 신명나는 감정을 모두 전달하지는 못한다. 이 경험의 실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복된 소망으로 남아 있다. 이 때 하나님의 확신이 주어진다. (152.2)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전 2:9)
(1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