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점령한 후 취한 첫 조치의 하나는 포로로 잡혀 온 유대 백성들을 풀어 주어 고국 유대로 돌아가게 한 것이었다. 이 같은 고레스의 관대한 조치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에 대해 마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듯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고레스를 “나의 목자”라, “나의 기름받은 자”라, “열국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도록 선택한 사람으로 일컬었다고 하였다(사 44:27~45:1). (434.3)
 고레스(Cyrus)왕은 바벨론의 동쪽에 위치했던 바사(페르시아)의 임금이었다. 그는 동쪽에서 온 왕이었다. 재림 때에도 예수님은 동쪽에서 처음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바벨론의 멸망과 관련된 사건들은 온 세계를 고동시키는 아마겟돈 전쟁의 상징적인 모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34.4)
 

1944년 6월, 수백만 명의 병력을 실은 배들이 영국 해협을 쉽게 건넜다. 현대의 군대들은 유브라데 강(삽입사진)을 건너기 위해 그 강이 실제로 마르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434.5)
 다니엘의 시대에는 유브라데 강이 바벨론을 위해 무역로(貿易路), 교통로, 그리고 식용 및 관개용 수로의 기능을 크게 했다. 또 만수가 되었을 때는 도시의 방벽으로도 한 몫을 다했다. 유브라데 강은 바벨론 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435.1)
 성경에 의하면 무엇이 마지막 때의 바벨론에게 절대적인 뒷받침이었다가 갑자기 없어졌다고 했는가? (435.2)
 마지막 때의 유브라데 강
 요한계시록 17장 15절에서 큰 성 바벨론이 음녀로 비유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따라서 이 예언에 나와 있는 “유브라데 강”은 인간의 정부 하에 조직되어 있는 세계의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다.*

* 249페이지에서 여섯째 나팔의 유브라데 강을 일반적인 지리적 명칭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이사야 8장 27절에서 유브라데 강이 사용된 용례와 유사하다. 우리들은 이미 앞에서 일곱 재앙과 일곱 나팔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역사적 기술인 요한계시록의 전반부에 속하는 앞의 여섯 나팔은 다소간 지역 사회들에 적용된다. 마지막 사건을 기술한 요한계시록의 후반부에 나오는 여섯째와 일곱째 재앙은 전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435.3)
 다음으로 우리는,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이 그 죽게 된 상처를 치유한 이후에 그 위세가 전보다 더 커지는 것을 기억한다. 새끼 양같이 두 뿔을 가진 짐승이 세상의 모든 백성들을 강요하여 짐승의 우상을 건립케 한다. 요한계시록 13장 11~17절은 하나의 적대적이고 강압적인 드라마를 펼쳐 보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국가가 조작하는 종교를 신봉하지 않을 때에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위협에 직면한다. (435.4)
 465~472 페이지에서 검토하게 될 요한계시록 17장 12~14절은 유사한 시나리오를 다른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에 “열 뿔”“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주었으며,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운다. 세상 권세가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는 방식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17장 12, 14절요한계시록 13장 11~17절과 동일하다. 두 성경절이 똑같이, 모든 국가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거짓 종교를 강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바벨론의 승리로 묘사하고 있다. 고대 바벨론이 문자적인 의미의 유브라데 강에 크게 의존하였듯이, 현대의 바벨론은 상징적인 의미의 유브라데 강 곧 세계 백성들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435.5)
 그러나 하나의 급격한 반동이 야기된다. 요한계시록 17장 16절에 의하면, 전세계의 열국을 뜻하는 열 뿔과 짐승이 큰 성 바벨론을 뜻하는 음녀를 배반한다. 즉 그들이 “음녀를 미워하여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고 하였다. (435.6)
 이제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열국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셨다고 했다. 우리는 즉각 여섯째 재앙 때 유브라데 강이 마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란 사실을 상기케 된다. 하나님의 한 천사가 유브라데 강을 마르게 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수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영적 지도자들의 위선을 간파하고 그들이 신뢰했던 성직자들에 대해 혐오를 느끼는 순간,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 같은 새 인식을 갖게 하는데 한 몫을 해 오셨다고 주장하신다. 환멸로 인한 새로운 자각이야말로 하나의 엄청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435.7)
 이 환멸감은 “유브라데 강”이 마르게 되는 사태, 즉 “바벨론”으로 알려진 마지막 시대의 거짓된 종교 체제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철회되는 사태로 귀결된다. (435.8)
 세계 전쟁은 일어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내용 중에는 어느 것 하나도, 마지막 시대에 열국 사이에 생길 무서운 전쟁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435.9)
 사실 아마겟돈 전쟁에 관한 예언 말고도 세계 전쟁이 있을 것을 예견한 다른 예언들이 있다. 인간은 항상 싸워 왔다. 하물며 전에 없던 대환난의 시대에 치열한 전투가 없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처칠이 말한 그 “죽음”은 지금도 “준비”자세로 대기 중에 있으며 이제 곧 무섭게 그 위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435.10)
 일곱째 나팔(계 11:15~18)은 “이방〔나라들이〕이 분노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며”,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가 당도하였다고 말한다. 이 진노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칠 것이라(또는 “완전할 것”이라)고 한 일곱 재앙의 진노를 말한다. 늘 피차에 다투기를 많이 하는 이방 나라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특별히 사악한 의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란 구절은 핵 전쟁을 뜻하는 것이다. (436.1)
 그러나 이 국제 전쟁은, 온갖 종류의 다른 적대 상황과 관련된 상징적인 아마겟돈 전쟁이나 또는 상징적인 유브라데 강의 말라붙는 일과는 별로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아마겟돈”전쟁 때에는 이 땅의 임금들이 마귀들에 의하여 한 곳으로 집결하는데 이 때는 피차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린 양에게 대적하기 위함이다. (436.2)
 애굽과 바벨론, 노예 생활과 포로 생활
 조금 전에 우리는,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된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425페이지에서는 출애굽의 일곱 재앙과 마지막 때의 일곱 재앙을 서로 비교해 보았다. 요한의 일곱 재앙 묵시는, 유대인들을 노예 신세로 붙들어 두었던 애굽 생활과 유대인들을 포로로 붙들어 두었던 바벨론 생활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14 뿐만 아니라 이 묵시는, 유대인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영광스러운 사건과 그들이 바벨론에서 고국으로 귀환하는 구원의 경험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홍해에서 애굽의 군대를 대항하여 싸우셨다. 하나님은 고레스 왕을 도와 바벨론을 무찔렀다. 이 때에 유브라데 강이 실지로 말랐다. 두 경우에서 하나님은 하나같이 당신의 백성을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하셨다. (436.3)
 드보라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므깃도 평원에서 기적을 행하사 그의 백성을 점령군의 손에서 구원하셨다. 여호사밧 임금 때는 침략군들을 기적적으로 궤멸시키시고 유대 민족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심판의 때에는, 요엘 선지자가 마지막 시대의 묵시에서 본 여호사밧의 골짜기, 그 결단의 골짜기로 이 땅에서의 추수를 위하여 하나님이 그의 천사들과 함께 당도하실 것이다. (4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