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요한계시록 연구 요한계시록 8:2~9:21 — 심판의 경고 나팔 4.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성경 예언상의 이슬람
 말들의 입에서 나오는 연기 그리고 뱀 같은 꼬리와 2만만(2억)이란 엄청난 수자들은 물론 말(馬) 그 자체처럼 비유적 표현이다. 그러나 그 표현들은 역시 그들이 상징하고자하는 대상과 밀접히 연관된 것이다. 오토만 투르크는 상당수의 노련한 기병들과 화약 무기를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249.10)
 

이슬람의 거대한 대포는 “불과 연기와 유황”분출하면서 무거운 돌들을 쏘아 올려 1453년 동방 정교(正敎)의 수부(首府)인 콘스탄티노플의 두터운 성벽을 무너뜨렸다.
 화약의 주 성분의 하나는 “유황”이다. 화약은 탈 때 연기가 많이 난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 화약의 사용이 크게 줄어들었다. 화약은 발사체를 긴 발사관 밖으로 발사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 긴 발사관이 요한의 눈에는 말의 “꼬리”로 보였을 성싶다. (251.1)
 오토만 군대와 유럽측 군대가 사용했던 초기의 화약 무기에는 개인 화기(火器), 특히 졸렬한 화승총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밖에 수류탄, 박격포, 대포 등도 있었다. 처음에 청동으로 제조한 대형 대포는 너무 무거워서 소를 이용해서도 운반이 힘들었기 때문에, 투르크 군대는 때로 청동 재료를 마차로 운반해다가 전투 현장에서 직접 대포를 제조해 사용했다. 이들 초기의 대포들은 명중률이 낮아서 병사들을 살해하는 데는 비능률적이었으나 벽돌과 돌로 된 성곽을 공격하는 데는 위력적이었다. 아무리 견고한 성벽이라 할지라도 십여 개의 대포가 하루에 10여 발씩 쏘아대면 구멍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251.2)
 콘스탄티노플은 견고한 석벽으로 둘러싸인 도성이었지만 오토만 투르크의 군대는 청동 대포를 사용하여, 드디어 1453년 5월 29일 이 성을 함락시켰다. 유구한 역사의 비잔틴 제국을 끝내 “죽였던” 것이다. (251.3)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승리로 이끈 모하메드 2세(Mohammed 또는 Mehmet)는 당시 23세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그를 정복자 모하메드라 호칭했다. 그는 50세에 못 미처 사망했으나 그 앞서 강력하고 부유한 오토만 제국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251.4)
 오토만 제국이 루터의 종교 개혁에 이바지 함
 오토만 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는 세기적 사건에서 뿐만 아니라 개신교 종교 개혁의 성공에서도 중대한 역할을 수 행했다. 정복왕 모하메드의 후계자들 중 가장 저명한 사람이 슐레이만 대제(Suleiman the Magnificent)이다. 그의 통치 기간(1520~1566)은 종교 개혁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카알 5세의 통치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251.5)
 카알 5세는 헌신적이고 근면한 통치자였을 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로마 가톨릭 교도였다. 그는 1517년에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촉발시키자 크게 고심하였다. 그런데 종교 개혁의 파문은 북부 유럽 일대로 신속히 파급되어 그의 고심은 심화되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 모종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가 개혁하려는 대상은 성직자들의 성직 태도였으며 가톨릭의 교리는 아니었다. (251.6)
 당시 카알 5세가 다스리는 영토는 스페인, 동부 유럽의 일부,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스페인 식민지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늘날의 화란, 스위스, 독일, 이탈리아의 일부로 이루어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실로 황제라는 호칭에 어울릴만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251.7)
 그런데 그처럼 막강한 부와 권력의 정상에 앉아있던 카알 5세가 그토록 원했으면서도 왜 개신교를 박멸시킬 수 없었는가? (251.8)
 부분적인 원인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오토만 투르크의 침공에 있었다. 프랑스 국왕 프랑스와 1세와 독일의 일부 제후들 및 교황까지도 카알 5세를 두려워 한 나머지 그의 세력이 너무 강력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1세도, 독일의 일부 제후들도, 그리고 교황 자신도 단독으로 카알 5세의 힘을 견제하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들 각자는 오토만 제국의 황제인 슐레이만 대제의 지원만 받아서 넉넉히 카알 5세를 견제할 수 있었다. (251.9)
 이리하여 슐레이만 대제는 육군과 해군과 재정적 원조를 보내 카알 5세와 싸우는 또다른 그리스도교 세력을 번번히 지원했던 것이다. (251.10)
 그리하여 개신교 운동의 발흥기에 카알 5세가 개신교 세력과 정면으로 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카알 5세는 교황과 프랑스를 대적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카알 5세의 군대는 1527 년에 로마 시를 약탈하고 교황을 투옥했다). (252.1)
 독일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운동을 지칭하기 위해 “개신교”(Protestant)란 낱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1529년에 카알 5세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고 이 “이단”들을 공격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슐레이만 대제가 프랑스 국왕의 개인적인 요청에 의해 이슬람 군대를 파견하여 가톨릭 도시 비엔나를 공격하게 했다.30 카알 5세는 개신교와 모슬렘의 두 세력을 동시에 맞아 싸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모슬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개신교 세력의 지원을 얻어야 할 입장에 있었다. 그는 다시 종교상의 불 일치를 제쳐두지 않을 수 없었다. (252.2)
 현대의 한 역사가는 지적하기를 “합스부르그 가(家, 카알 5세의 왕가)에 대한 오토만의 압력이야말로∙∙∙종교 개혁의 세력을 강화시키고 그 공인을 얻어내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했다. “16세기와 17세기에 있어서 오토만 제국의 주요 정책의 하나는∙∙∙프로테스탄트(루터의 개신교 세력) 집단과 칼빈 파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것이었다.”31 또 한 사람의 역사 학자는 지적하기를 “만약 투르크의 세력이 없었다면 개신교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였다.32 (252.3)
 마틴 루터가 사망한 다음해인 1547년에 이르러 비로소 카알 5세는 루터 파의 제후들과 싸울만한 입장이 되었다. 그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대를 이끌고 자신의 봉신들이며 루터 파에 속하는 제후들의 영토로 진격하여 그들을 무찔렀다. 그러나 그런 승리로도 개신교를 박멸시키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였다. 그때는 이미 개신교 신앙 원칙이 백성들의 심령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252.4)
 역사학자 토마스 M. 린지(Lindsay)의 말을 빌면, “공공 예배에서 중세 라틴어 대신 독일어가 사용되었고, 예배자들은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예배 의식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예배에 참예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강단에는 독일어 성경이 비치되었고 신도들의 좌석에 앉아 있는 평신도들도 같은 성경을 손에 들게 되었다. 시편을 번역한 찬미와 독일어 복음 성가들이 불리웠으며, 독일어로 설교가 진행되었다.” “또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조처도 이루어졌다.”33 (252.5)
 카알 5세는 개신교를 박멸시키지 못한 사실에 깊이 낙망하여 좌절 가운데 제국의 왕위를 아들에게 내놓고 말았다. 그는 스페인의 한 수도원 바로 곁에 건축한 작은 별장 “상 게르니모데 유스테”로 물러났다. 그는 마지막까지 아들 필립을 향해 “스페인 내의 이단들을∙∙∙그들을 위한 호소에 전혀 개의치 말고 철저히 박멸하라”고 힐책하였다. 그는 그의 부인 이사벨라가 사망할 때 쥐고 있었던 그 십자가를 손에 쥐고 “예수여, 제가 갑니다” 라고 기도하며 사망했다. 그의 신실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가 없다. (252.6)
 오토만 제국의 전성기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때부터 160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1699년에 이르러 “지난 300여 년간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해온 오토만 제국은 이제 더이상 공격적인 세력이 되지 못했다.”35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오토만 세력은 그 영향력이 개신교 존립의 유지에 필요했던 바로 그 순간에 절정을 이루었다. (2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