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맞은 성도들과 큰 무리 (7:1-17)
 요한계시록 7장의 장면은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의 개봉 사이에 삽입구적으로 끼어 있다. 여섯째 인은 결론 부분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어지는 지상 역사 최후의 사건으로 이끌어간다. 다가오는 심판으로 인해 반역한 군중은 “이 진노의 큰 날에 누가 능히 서리요?"(6:17)라며 공포 중에 울부짖는다. 그러면서 어린양의 진노에서 자신들을 숨기려고 애쓴다. 요한계시록 7장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것 같다. 그 큰 날에 능히 설 수 있는 사람들은 144,000인과 큰 무리들이다. 따라서 7장은 인침을 받은 144,000인에 관한 첫째 부분과 (7:1-8) 큰 환난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큰 무리에 관한 둘째 부분(7:9-17)으로 나뉜다.

인 맞은 성도들 (7:1-8)
 요한계시록 7장 1-8절은 144,000인이 이스라엘의 12지파로부터 나왔으며, 그들은 땅에 임하는 종말적 파멸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이마에 인침을 받았다고 서술한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7: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땅 네 모퉁이.
 이 구절은 오늘날 우리가 성격상 전 세계에 미칠 만한 어떤 사건을 묘사하기 위하여 ‘나침반의 네 방위(方位)’를 사용하는 것같이 고대 근동에서 사용되었다.1) 그러므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며 유다의 흩어진 자를 땅 사방에서 모으는 것에 대하여 언급한다(사 11:12), 에스겔은 종말이 땅의 온 사방에 임하는 것을 보았다(겔 7:2). 요한계시록 7장 1절에서 분명히 네 모퉁이는 이어 나오는 네 바람과 상응한다.
사방의 바람.
 구약에서 바람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파괴적인 세력을 상징한다. 바람은 하나님의 병거다(렘 4:13),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해 회리바람처럼 병거를 타고 오신다(사 66:15-16),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다가오는 심판을 “뜨거운 바람이 광야 자산(諸山)에서” 불어온다고 표현하였다(렘 4:11-12; 23:19-20; 51:1-2 참조), 여호와의 바람이 악인들 위에 맹렬히 불어 닥쳤다(렘 23:19; 30:23), 호세아는 광야로부터 불어와 비옥한 땅을 파괴하는 여호와의 바람에 대하여 말하였다(호 13:15). 다니엘은 묵시 중에 네 짐승이 나왔던 큰 바다를 흉용케 하는 하늘의 네 바람을 보았다(단 7:2; 8:8; 11:4 참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네 바람을 엘람에 보내셔서 그 백성을 흩어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렘 49:36). 스가랴 6장 5-7절에서, 네 마리 말은 “하늘의 네 영[바람]”으로 해석되었다. 이는 요한계시록 7장 1 절의 네 바람이 6장의 네 기사를 가리키는 또 다른 방식”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2) 외경 집회서 (Ecclesiasticus 또는 Sirach)의 다음 진술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한 유대인들의 사상에서 바람의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약간의 빛을 준다. “복수를 위해 창조된 바람들이 있다. 그 바람들은 그 분노로 육중하게 채찍질한다. 절정의 때에 그것들은 그 힘을 쏟아 부어 그들을 지으신 이의 노를 가라앉힐 것이다.”3)
요한계시록 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해 돋는 데로부터.
 고대 근동에서 이 구절은 동쪽을 지칭하는 한 방식이었다. 구약에서 동편은 종종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에덴은 동쪽에 있었다(창 2:8).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한 것은 동편으로부터였다(겔 43:2). 신약에서 동편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다. 동방박사들은 동편에서 별을 보고 새로 태어난 왕을 선포하였다(마 2:2, 9). 예수님은 돋는 해(눅 1:78)와 계명성(계 22:16)으로 불리신다. 예수님은 동편에서 나타날 인자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마 24:27-30). 그러므로 7장 2절“해 돋는 데서 올라오는 다른 천사”는 아마도 그리스도에게서 사명을 받은 천사이거나 그리스도 자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요한계시록 7: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에스겔 9장에서 끌어온 장면으로, 유랑전에 있을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는 모습이 상징적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선지자는 묵시 중에서 “한 사람이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하늘의 사자를 보았다. 그 사자는 예루살렘의 거민들에 대한 살육이 시작되기 전에 온 도시를 다니면서 신실한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집행자들은 그렇게 표를 받은 어느 누구도 다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마의 표로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과 그렇지 못한 우상 숭배자들이 구별되었다. 이 표는 다가오는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였다(겔 9:1-11).

 인침에 대한 고대의 기본사상은 소유권이다. 문서 등에 인이 찍혔을 때, 그것은 비준(比進)을 위한 것이거나, 그 내용물의 보호를 위한 것이었다(계 5:1의 어구 해설 참조), 신약에서, 사람들이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되는 것으로서 그들의 신분을 의미한다. 인침은 사람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발생하는 어떤 것이다. 성령의 인침은 하나님께 속한 참 그리스도인의 표요, 구원을 보증하는 표다. 바울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설명한다(엡 1:13-14; 고후 1:21-22 참조).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는 자들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테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신실한 백성을 ‘인 받은’ 사람들로 칭하였다(9:4; 14:1; 22:4).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물로서 그분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은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쓰인 것이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계 14:1)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 22:4; 3:12 참조).

 존 폴린은 요한계시록 7장 1-3절은 분명히 인침의 시기를 종말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종말의 때를 배경으로 인치는 사업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하였다.4) 분명히 요한계시록 9장 4절은 이런 가설을 확증해준다. 마치 에스겔의 묵시에서 인침을 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내리는 심판의 기간에 보호함을 받은 것처럼(겔 9:1-7), 이 세상 역사 최후의 위기 때에 인치는 일은 보호의 표로서 그 부가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사해 사본의 다음 본문에서, 어떤 유대인 무리는 종말 때에 에스겔의 묵시가 재현되리라 기대하였다고 제시한다. “그러나 아론의 메시야,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오실 때,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칼에 넘겨질 것이다. 마치 에스겔서에서 말한 대로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겔 9:4)를 하였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언약을 어김으로 인하여 보복의 칼을 받았던 첫 형벌의 때에 일어났던 것과 꼭 같을 것이다. 언약을 체결하였으나 이 율법들을 확고히 붙들지 않는 모든 자들에 대한 판결이 이와 같다. 그들은 벨리알에 의해 멸망의 저주를 받는다.”5)

 또한 보호의 표로서 쳐질 종말적 인침은 “이스라엘의 해방을 주도했던 출애굽 재앙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표로서 문설주”위에 발랐던 유월절 양의 피와 평행을 이룬다(출 12:21-23).6) 그것은 최후의 위기 때에 하나님을 대표하게 될 당신의 백성에 대한 최후 비준이다.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마지막 일곱 재앙의 파괴적 세력으로부터 성령의 특별한 보호하에 있게 된다.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계 3:10) 그것으로부터 빌라델비아 신자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때, 그분이 의미하셨던 말씀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인침을 받을 때(계 9:4; 14:1; 22:4), 하나님과 복음을 반대했던 자들은 짐승의 이름으로 된 표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짐승의 소유물이다(13:16-17; 14:9; 16:2; 19:20; 20:4),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인이 이마에 쳐지는 반면, 짐승의 이름이 새겨진 짐승의 표는 이마에나 손에 쳐진다(계 13:17), “짐승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짐승의 표와 하나님의 인은 사단의 특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후의 싸움에서 모든 사람은 마귀나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다.”7) (최후 위기 속에서 인의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에 관하여는 13장 1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7: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내가 수를 들으니.
 이 구절은 이 곳과 9장 16절에 나온다. 이 곳에서 요한은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수에 대하여 듣고 있다. 반면, 9장 16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자들의 수가 이만만이라는 말을 들었다. 물론 두 숫자는 상징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144,000.
 이 숫자는 분명히 12X12X1,000으로 되어 있다. 12는 구약 이스라엘의 열두 지 파의 수이며, 또한 열두 사도의 터 위에 건축된 교회의 숫자다(엡 2:20 참조), 새 예루살렘에서 열두 문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으며, 열두 기초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144(12X12)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다. 즉, 구약과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일컫는 수다.

 1,000이라는 숫자는(히. 엘레프 eleph) 구약에서 여러 가지를 뜻할 수 있다. 그것은 정확히 1,000이라는 문자적인 수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파의 하부(下部) 단위이거나 (민 31:5; 수 22:14, 21; 삼상 10:19; 23:23; 미 5:2), 약 1,0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부대의 단위일 가능성도 있다.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행정 조직은 지파 단위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전시에 이스라엘의 군대는 예하 부대들이 1,000명 단위인 군부대들로 조직되었다(민 1:16; 10:4; 31:4-6; 삼상 8:12; 18:13; 출 18:21, 25; 삼상 22:7 참조). 이와 같이 1,000명은 고대 이스라엘 군대의 기본 단위였다. ‘수천 명의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군대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또한 그것은 이스라엘의 대대(大隊)들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8) 인 맞은 144,000인은 각 지파별 12부대를 가진 144개의 군부대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이 수는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9) 요한은 전투적 그림을 사용하여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교회, 즉 ‘교전(交戰)하고 있는 교회’를 묘사한다.10) 144,000인은 이제 막 큰 환난을 통과하려 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7장의 인 맞은 성도들을 고대 이스라엘의 군대 제도를 따라 군대 조직에 비추어 이해함은 자연스럽고 매우 적절하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곳의 이스라엘을 문자적 이스라엘로 이해하며, 또 어떤 사람은 이 곳의 이스라엘은 상징으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전자가 갖는 문제점은 열두 지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 지파로 구성되었던 북방 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앗시리아에 정복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왕하 17:5-23). 그 열 지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이송되어 중동의 여러 나라들로 흩어졌다.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그들은 그 나라들에 동화되었거나 그들 속에 합병되었다(왕하 17:24-41 참조). 그러므로 요한 당시에 두 지파만 존재하였기 때문에, 열두 지파는 더 이상 “역사적 실체가 아닌 오로지 신학적 실체”를 대표한다.11)

 더욱이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2지파의 목록은 구약의 목록과 다르다(280쪽 표 참조). 병렬시킨 지파 목록 순서는 서로 다르다. 야곱의 장자 루우벤 대신 유다가 제일 먼저 나온다. 더글라스 에젤이 관찰하는 대로, “구약의 목록들 중에 유다가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창 49장; 겔 48장). 이러한 자리 이동은 어린양이신 메시야가 유다 지파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을 기억하면 쉽게 설명된다(계 5:5-6), 그분은 이 확대된 하나님의 백성의 머리시다.”12)

 단과 에브라임은 생략되었고, 비록 구약은 요셉 지파를 언급하지 않을지라도 요셉과 레위 지파는 포함되었다. 사실, 야곱의 총애를 받았던 요셉은 그의 두 아들, 곧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지파의 머리가 됨으로 두 배의 몫을 받았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12지파가 아니라 13지파였다. 13번째 지파는 레위 지파, 곧 제사장 지파였는데, 그들은 결코 유업을 받지 않았다.

요한계시록 7장 창세기 49장 민수기 1:5-15 에스겔 48장
유다 루우벤 루우벤
루우벤 시므온 시므온 아셀
레위 유다 납달리
아셀 유다 잇사갈 므낫세
납달리 스불론 스불론 에브라임
므낫세 잇사갈 에브라임 루우벤
시므온 므낫세 유다
레위 베냐민 베냐민
잇사갈 아셀 시므온
스불론 납달리 아셀 잇사갈
요셉 요셉 스불론
베냐민 베냐민 납달리

 구약에서 단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배도한 지파로 나온다. 열두 아들에게 행한 임종 발언에서 야곱은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는 자라 하였다 (창 49:17), 이스라엘 역사의 부족시대에, 단 지파는 깎아 만든 우상에게 자신들을 바쳤다(삿 18:27-31), 왕국이 분단되었을 때, 단 지파는 예루살렘 성전에 필적할 만한 우상 숭배의 중심지들 중 하나가 되었다(왕상 12:29-30; 왕하 10:29). 단 지파에 대한 흥미로운 글이 예레미야서에 나온다.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의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거민을 삼켰도다.”(렘 8:16) 후기 유대인 랍비들은 이 본문이 단 지파에서 나올 적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이해하였다.

 마찬가지로, 에브라임 지파는 선지자들의 눈에 이스라엘의 배도와 우상 숭배의 상징이 되었다(호 4:17; 8:9-11; 12:1; 대하 30:1, 10 참조), 시편 기자는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했다고 하였다(시 78:9-10). 이사야 때에 에브라임 지파는 시리아와 동맹하여 유다를 대항하였다(사 7:2-9).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 백성의 원수와 한 편이 되었다. 전통 때문에, 아마 요한은 지파들의 목록에서 단 뿐만 아니라 에브라임도 생략하고, 대신 구약 시대에 열 두 지파에 들지 않았던 레위 지파를 포함시킨 것 같다. 그러므로 요한은 문자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신약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새롭고도 참된 이스라엘이며(롬 2:28-29; 9:6-8; 갈 3:29; 6:16; 약 1:1 참조), 이전에 구약의 이스라엘이 받았던 모든 특권과 약속의 수혜자다.
(주해)
요한계시록 7: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더 나아가서 요한은 묵시 중에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들고 있는 것을 본다. 네 천사가 이렇게 ‘붙드는 것’6장의 네 기사들을 불러내는 것과는 대조를 이룰 것이다. 네 생물이 네 말들을 전면으로 불러낸다는 사실은 사방의 바람을 붙들고 있는 네 천사가 네 생물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이들은 높은 지위의 천사들이다(계 4:6-7).

 이 천사들은 분명히 파괴적인 세력들을 제어하도록 임명된 하나님의 대리자들이다. 이 파괴적 세력들은 땅과 바다, 또는 나무를 해치는 네 바람으로 상징되었다. 땅과 바다는 전 세계적인 것을 의미한다. 10장에서 우리는 힘센 천사가 바다와 땅 위에 서 있는 것을 본다(10:5), 땅 과 바다에는 화가 있다. 이는 사단이 그 곳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12:12), 하나님께서는 하늘 과 땅과 바다의 창조주시다(14:7). 7장에서 땅과 바다는 분명히 부정적인 상징성을 띈다. 땅과 바다는 요한계시록 13장의 두 짐승이 그 곳에서 나왔다는 사실로 인해 특히 흥미롭다. 여기서 나무는 땅 위의 생명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지상에 임할 임박한 종말적 재난들과 사건들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성격상 전 세계적이다.
요한계시록 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요한계시록 7: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또한 요한은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오는 것을 본다. 동편에서 오는 이 천사가 최종적으로 통제한다. 신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해 돋는’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다. 이 천사가 높은 계급의 네 천사들, 아마도 그룹 천 사들을 명령한다는 사실은 그가 천군의 사령관이심을 시사한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늘 천사들의 사령관은 미가엘이다 (12:7). 그리고 분명 미가엘은 그리스도시다. 말할 것 없이 우리는 이 천사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 자신을 발견한다.

 이 천사는 높은 지위의 네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그 파괴적인 세력들을 놓지 말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여러 가지 관찰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사건들의 시간표를 완전히 책임지고 통제하고 계시는 분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인침을 받기까지는 마지막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허락지 아니하실 것이다.

 둘째, 마지막 때 큰 환난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은 보호받기 위하여 그들의 이마에 인침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치는 기본 목적은 구원을 보증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복종함으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의 인을 받게 되고 성령의 인침을 받는다(고후 1:21-22; 엡 1:13-14; 4:30), 성령의 임재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물로서 그분께 속해 있음을 나타내는 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 분명히 인침은 옷을 씻는 것에 해당한다. 즉,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는 것이다(계 7:14; 22:14). 그러므로 인침은 진정한 또는 참 그리스도인에 대한 상징적 표다. 인침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 짓는다. 에젤은 설명하기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통해 그 자신의 백성을 인 치시는 일은 요한의 때로부터 세상 끝날까지, 곧 십자가와 부활의 때로부터 마지막 날까지의 전 기간에 걸쳐 계속된다. 자신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계 7:3) 진노의 그 큰 날에 능히 설 수 있을 것이다.”13)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위기에서, 인침은 추가적인 의미와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위기에서 하나님을 대표하여 서게 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최종적 비준이다. 비애 트리스 닐(Beatrice S. Neall)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의 인은, 사람들에게 심한 고통을 가하여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갖게 하려는 마귀의 세력들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의도되었다. (계 9:4-6). 또한 성도들은 마지막 일곱 재앙들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이 재앙들은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에게만 내린다(16:2), 그러므로 인은 원수에 의한 패배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한다. 그러나 짐승의 분노에서 그들을 보호하지는 않는다(13:15, 17). 마찬가지로, 짐승의 표는 그 추종자들을 짐승의 박해로부터 보호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는 보호하지 못한다(14:9-11).14)
같은 맥락에서 한스 라론델(Hans K. LaRondell)은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침례를 통해 받은 성령의 영적인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사는 하나님의 종들은 짐승의 표와 관련하여 시험을 받고 죽기까지 충성하게 된 이후가 되어야 하나님의 인정의 표, 사망과 파멸의 세력들로부터 방패의 표로 그분의 천사들로부터 독특한 종말적 ‘인’을 받게 될 것이다.15)
종말이 가까워옴에 따라, 하나님의 신실한 남은 무리는 세상에 복음 기별을 선포해야 한다. 이 일 후에 그들은 ‘큰 환난’으로 언급된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사건들을 경험해야 한다. 이 위기의 기간에, 그들은 성령의 특별한 보호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신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그들에게 성취되는 것은 바로 그 때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 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자신들의 집 문설주에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른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재앙들로부터 보호를 받은 것같이(출 12:21-23), 에스겔의 묵시에서 표를 받은 충성 된 자들이 예루살렘에 내린 심판으로부터 보호된 것같이(9:1-11), 성령은 마지막 때의 시련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을 특별히 보호하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은, 하나님의 백성이 인을 받는 것은 그 시련의 때로부터 면제받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은 확실히 굶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넷째 재앙의 뜨거운 열기로 고통을 당한다(계 7:16; 16:8-9 참조) 안전하게 시련을 통과하기 위함임을(계 7:14 참조) 명백히 밝힌다. 이 인침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임이 분명하다. 그 과정은 재림 직전에 절정에 달하고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요한계시록 7장의 인침은 지상에서 인치는 과정의 최후 마무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때 복음 전파는 그 막바지에 이를 것이며, 더 이상 은혜의 시간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환난의 그 시각이 오기까지 악인들은 의인들과 함께 부분적으로 보호받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을 핍박하기 때문에, 그들은 최후의 파멸을 미리 맛보는 것으로 일곱 나팔의 심판을 경험한다. 그러나 일곱 나팔을 붉으로써 이르러오는 예비 심판은 부분적이고 미완성적이다. 그런데 그 큰 시련의 시간이 당도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완전히 인침을 받아 그분 자신의 소유로 인정되고 그런 사람들이 보호를 받게 될 때, 제어하는 천사들은 마지막 재앙의 그 파괴적 세력들을 풀어놓을 것이다(계 16장). 그 때 악인들은 지상에 임할 완전하고도 가혹하며 전 세계적인 최후의 재난들을 경험할 것이다. 베드로가 선언하였듯이,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신다(벧후 2:9).
요한계시록 7: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요한계시록 7:5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한계시록 7: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한계시록 7: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한계시록 7: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숫자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144,000이 라는 말을 듣는다. 여기서 언급된 숫자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인 교회와 관련하여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 이스라엘을 구성한다. 예를 들면,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였을 때(약 1:1), 그는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 불렀고(갈 6:16), 그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이라 하였다(갈 3:29), 다른 곳에서 그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하였다(롬 9:6-9), 바울의 이러한 언급은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그분은 열두 사도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신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 19:28).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백성을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관점에서 묘사함으로써, 요한의 개념은 신약의 전반적인 개념과 일치한다. 그 개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이며, 그들은 이전에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모든 특권과 약속들의 수혜자들이다.

 이 인침을 받은 성도들을 144,000인으로 묘사한 상징성-각 지파별로 12,000인은 이 그 룹뿐만 아니라 뒤이어 나오는 큰 무리의(7:9) 신원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일에 특히 중요하다. 문맥은 144,000인이 문자적 숫자가 아니라, 상징적 숫자로 이해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인침을 받은 자들의 숫자적 제한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인침을 받은 자들의 최종적 완전”(final perfection)이다.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백성은 이제 막 땅의 거민들에게 임하려고 하는 큰 환난의 어귀에 서 있다(계 3:10).16) 그들은 이 지구 역사의 전투들 중에서 가장 큰 전투에 돌입하려 하고 있다. 그들이 고대 이스라엘 군대의 전시(戰時) 모델을 따라 조직된(민 1:16; 31:3-7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큰 군대라는 요한의 묘사는 매우 적절하다. 여기서 각 지파는 1,00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열두 부대로 총 144개의 부대가 있다.

 인침을 받은 144,000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 하에 있는 조직된 군대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의 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사단과 그의 군대를 대적하여 싸울 준비가 된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다. 후에 요한은 묵시에서 또 다른 군대, 즉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분의 백성의 원수인 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요한이들은 그들의 수는 이만 만[2억]이었다(9:16).

 144,000인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로서, 이는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되고 신실한 자들을 지칭한다. 단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목록에서 배제되었다. 구약에서 두 지파는 배도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이 두 지파들의 불충성이 종말적 이스라엘의 지파 목록에서 그 이름이 배제된 이유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144,000인은 참 이스라엘로서 순결하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계 14:1-5), 그들은 “어린양의 피에 그(들의)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7:14), 후에 그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로 기술되어 있다(계 14:4-5). 단과 에브라임 지파가 드러낸 불충성과 배도는 큰 환난을 통과해야 할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 중에 끼어들 틈이 없다.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은 인침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승리한 그리스도의 백성만이 그 날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것이며(계 3:21에 주어진 약속의 성취로서 그렇게 될 것이다). 영원한 유업을 받을 것이다(계 7:14-17).

 144,000인은 마지막 때의 성도들이다. 곧 수세기에 걸친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의 대표자들이다. 그들이 통과해야 할 최후의 위기는 아벨의 죽음 이후로 하나님 백성이 당한 경험을 상징한다.
큰 무리 (7:9-17)
 요한계시록 7장의 첫 부분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를 견딜 수 있는 자들과 관련하여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다음 부분은 큰 환난을 통과하고 종말적 구원에 참여할 자들을 가리킨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내가 보니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표면적으로 이 그룹은 이전에 언급된 144,000인과 구분된다. 첫 그룹은 계수된 무리요 이스라엘의 상징적 열두 지파들로 구성된 반면, 두 번째 그룹은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로 언급한다. 그리고 이 그룹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 으로부터 구속된 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증거는, 144,000인과 큰 무리는 하나요 동일한 그룹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견해는 요한이 이 곳에서 활용하기 시작한 특별한 문학적 기교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기초되어 있다. 이 문학적 기교에 따르면, 묵시 중 요한이 이전에 들은 것과 후에 그가 본 것은 실제적으로는 하나며 동일하다. 그가 본 것은 사실상 그가 앞에서 들은 것에 대한 설명이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의 서론에서, 요한은 그의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는다(1:10). 그가 돌아섰을 때, 그가 나팔은 보지 못하고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님을 본다(1:12-13), 5장에서 그는 유다 지파의 사자(獅子)가 이기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가 돌이켜 그 사자를 보았을 때, 그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본다(5:5-6), 나중에 17장에서 그는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에 대하여 듣는다. 후에 그가 보는 것은 “붉은 짐승 위에 타고 있는 여자”로서, 그녀의 이름은 바벨론이다(17:1-5). 마지막 묵시에서 요한은 처음에는 “어린양의 아내, 곧 신부”에 대하여 듣는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보석들로 상징된 영광스러운 “거룩한 성 예루살렘”(21:9-12)을 본다.

 이 문학적 기교는 7장에 나오는 두 무리의 하나님의 백성을 이해하는 단초다. 먼저 요한은, 인침을 받고 지상에서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144,000이라고 듣는다. 이어, 7장 9-14절에서 이 동일한 무리를 보았을 때, 그들은 액면 그대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인 것처럼 요한에게 보였다. 우리는 144,000인과 큰 무리는 하나님의 동일한 백성으로서 다만 그 역할과 환경이 다르다고 올바른 결론을 내린 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17)

이 점에 대하여 혹세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셀 수 없는 무리와 144,000인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동일한 사람들이다. 우선 이것은 두 구절 현재 논의하고 있는 구절과 144,000인에 대하여 말하는 구절의 주요 사상들 중 하나가 큰 환난이라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사실, 양쪽 구절에는 교회에 큰 환난이 임할 때, 왜 저들이 등장하는지 각각의 이유가 있다. 분명 두 구절의 목적은 교회에게 세상에서 그들의 처지가 불안정함을 알려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큰 환난 중에서도 안전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유일한 차이는 144,000인은 여전히 그 환난을 직면해 있으나, 반면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는 이미 그것을 통과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이 동일한 무리임은 매우 분명하다. 한 무리는 큰 환난 가운데 있거나, 또는 그것을 통과하는 가장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다른 무리는 이미 환난을 경험하여 승리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환경과 다른 시기에 있을 뿐 동일한 무리이며,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일 뿐이다. 전반부에서 그들은 지상에 있는 반면, 후반부에서 그들은 완성된 영광스러운 새 왕국에 이미 가 있다. 전반부에서 그들은 환난 가운데 있는 반면, 후반부에서 그들은 이미 그 환난을 통과하였다.18)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종려가지는 승리의 상징이다. 마카비(Maccabees)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종교적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백성은 종려가지와 거문고와 시로써 승리를 환호하였다.19)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셨을 때, 군중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그분을 맞았다(요 12:13). 요한계시록 7장은 구속받은 자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승리를 축하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큰 환난.
 이 구절은 먼저 다니엘 12장 1절에서 사용되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 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이 환난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 신자들을 위기로부터 보호할 것을 약속하셨을 때 언급된 그 위기일 것이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이 시련의 기간 또는 큰 환난은 요한계시록 13장 11-17절15-18장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주해)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요한계시록 7: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요한계시록 7: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요한계시록 7: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요한계시록 7: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본장의 전반부에서, 요한은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144,000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을 보기 위해 돌이켰을 때, 그가 실제로 본 것은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였다. 표면적으로 큰 무리와 144,000인은 뚜렷이 구분되는 두 그룹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자세한 관찰은, 그들이 다만 그 역할과 환경과 기간과 관점에 있어 다르지만, 하나님의 구속받은 하나의 동일한 백성임을 제시한다. 혹세마는 “전반부에서 그들은 지상에 있다. 후반부에서 그들은 완성된 영광스러운 새 왕국에 이미 가 있다. 전반부에서 그들은 환난 중에 있다. 후반부에서 그들은 이미 그 환난을 통과하였다고 말한다. 이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인침으로 보호받을 필요가 없다.

 그 무리들을 바라보며, 계시자 요한은 그들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무리임을 주목하였다. 이는 일찍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무리로 묘사된 ‘제사장 나라’를 생각나게 한다.(계 1:6; 5:9), 구약에서 끌어온 이 명칭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적용된 것같이, 지파들에 대한 이 숫자 매김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상징적으로 묘사되었다. 이 곳에서 우리는 다섯째 인을 뗄 때 언급된 완성된 하나님의 종들을 보는 것이다(6:11).

 우리는 ‘큰 환난’(7:14) 또는 ‘시험의 때’(3:10)로 알려진 시기의 어귀에 서 있는 144,000인 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에 돌입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곱 인을 뗄 때,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이 전 역사를 통하여 경험할 시련과 환난을 묘사하였다.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백성이 통과해야 하는 큰 환난은 요한의 때로부터 종말까지 하나님의 백성이 견디어 내었던 시련과 환난의 절정이다. 그러므로 144,000인은 교전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참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12지파로 나눠져 있고 구약의 이스라엘 군대의 형태를 따른 군부대로 조직되어 있다. 그들은 이제 막 악인들에게 임할 의로운 심판으로부터 보호받을 목적으로 인침을 받는다.

 큰 환난 자체는 요한계시록 7장이 아니라, 13장 11-17절15-18장에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요한은 환난 자체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일찍이 악인들이 제기한 질문에 관심이 있다. “그(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계 6:17).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바로 큰 무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다. 그들과 144,000인은 동일한 무리다. 앞서 그들은 큰 환난의 어귀에 서서 싸우고 있는 무리로 묘사된 반면, 이제는 큰 환난에 서 나오는 자들로 언급되어 있다(계 7:14). 큰 환난은 지나갔고 전투는 끝났다. 그 점이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은 더 이상 조직된 군부대가 아닌, 전투에서 돌아와 승리를 기뻐하는 무리로 묘사되는 이유다.

 큰 무리는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있다. 흰 옷과 종려가지는 승리의 상징이다. 흰 옷은 성공적인 전쟁을 치른 후 승리를 축하하면서 흰 옷을 입은 로마의 장군들과 병사들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이 장면은 우리에게 축제의 즐거움과 군사적 승리의 경축을 생각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데 교회의 승리자들에게 주신 흰 옷을 입고 그리스도 앞에서 다니리라는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본다(3:4-5; 3:18 참조). 큰 무리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다(7:14),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부터 구원받기 직전 문에 뿌린 유월절 양의 피가 그들을 출애굽의 재앙에서 보호해 준 것처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종말적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계 22:14 참조). 그들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의 결과다. 요한계시록 3장 21절에서 주신 위대한 약속은 이제 실현되었다. 만세의 승리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보좌를 공유한다.

 구속받은 무리들이 보좌 앞에서 외치는 소리는 그들의 승리가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나 성취가 아님을 드러낸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구속받은 무리들은 그들 자신들의 성취에 대하여는 단 한마디도 않는다. 그들의 시련과 고통의 시간에 그들을 보호하고 보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들의 승리는 그들 스스로 성취한 일의 결과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이루신 일의 결과다. 윌리엄 바클리는 이렇게 말한다.

승리한 신자들은 구원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큰 소리로 외친다. 그들로 그 시련과 환난과 고통을 통과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제 그들이 공유하는 영광은 그분의 것이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구주시요, 당신의 백성의 위대하신 구원자이시다.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구원은 도피하여 얻는 구원이 아니라 정복하여 얻는 구원이다. 사람을 환난으로부터 구하는 구원이 아니라, 환난을 통하여 승리를 주는 구원이다. 그 것은 삶을 안일하게 만들지 않고 위대하게 만든다. 모든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모면하는 삶을 찾는 것은 그리스도인 소망의 한 부분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환난이나 고통도 견딜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을 통해 똑바로 설 수 있으며, 저편에 있는 영광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을 말한다.23)
요한계시록 7장 10-12절에서 우리는 요한계시록 5장 9-14절의 찬송이 재연되는 것을 본다. 그것의 목적은 요한계시록 7장에서 요한계시록 3장 21절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지도 모른다.2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그분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저들을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할” 것이다(5:9-10), 요한계시록 7장“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구속받은 자들은 그들의 구원이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신 일의 결과임을 인정한다(7:9-10).

 요한계시록 7장의 장면은 선악간의 대쟁투 전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겪은 경험을 언급한다. 인 맞은 144,000인과 흰 옷을 입은 큰 무리는 극심한 환난을 통과하였으며, 특별한 의미에서 다섯째 인을 뗄 때 소개된 제단 아래의 순교자들과 관련이 있다. 흰 옷을 입은 이 순교자들은 이제 막 죽임을 당하려는 그들의 동료 형제들이 완전해질 때까지 잠시 동안 쉬라는 말을 들었다(6:11). 144,000인과 큰 무리는 압제받고 핍박을 받았으나, 지금은 마침내 완전케된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한다.
요한계시록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요한계시록 7: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요한계시록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요한은 후에 21-22장에서 묘사하는 내용을 이 세 절에서 요약한다. 여기서 우리는 구속받은 자들이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는 첫 광경을 목도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 지상 역사의 마지막 장면들에서,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심판을 두려워하여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숨기를 구하는 반면(계 6:16), 구속받은 자들은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다(계 7:9). 구속받은 자들 이 성전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 수종드는 이 장면은 요한계시록 1장 6절5장 10절을 상기시키는데, 이 두 곳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왕들과 제사장들로 언급되어 있다. 또한 우리에게, 재림 후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제사장들로 묘사된 요한계시록 20장 6절을 생각나게 한다. 요한계시록 7장 15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분을 섬긴다. 그 곳은 분명 온 우주의 통치 본부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곳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하늘에 있는 거룩한 의회의 일원으로 우주를 통치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새 국제역은 하나님께서 “장막을 그들 위에 펼치시리라”로 번역하였다). 여기에서 나타내려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자기 임재의 장막을 그분의 백성 위에 펼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계셨던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나게 한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모습으로 그들 중에 장막을 치셨다. 고대 이스라엘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는 그들에게 뜨거운 열기와 폭풍, 그리고 굶주림과 갈증으로부터 초자연적인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7) 또한 본문은 시온의 딸들을 정결케 하는 일과 시온산의 회복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반영한다. “또 천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사 4:2-6) 이 곳 요한계시록 7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성취된 것을 목도한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사야는 이보다 몇 세기 전에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사 49:10). 뜨거운 열기, 굶주림, 목마름, 그리고 눈물은 큰 환난의 재앙들을 특징짓는 시련들 중에 포함되어 있다(계 16장 참조). 요한계시록 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영적 광야, 곧 큰 환난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보호하신다. 그들의 광야 방황은 끝났다.

 하나님의 임재는 피난처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삶의 시련들을 겪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눈물과 사망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이사야가 고대했던 것이 실현된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서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 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또한 요한계시록 7장 15절은 예수께서 백성 중에서 육신의 장막을 치셨을 때와 그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을” 때를 상기시킨다(요 1:14). 그분이 계시는 곳에는 고통도, 눈물도, 그리고 사망도 없다. 이것은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그들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 깨달은 것이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요 11:21, 32) 새 땅에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는 고통, 눈물, 사망, 그리고 그 외의 어떠한 시련도 없는 삶에 대한 확고한 보증이다(계 21:4 참조).

 그리스도의 가시적 임재는 구속받은 자들을 보호하며 그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데이비드 아우니는 성경과 헬라문학에서 왕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가 목자와 그의 양떼에 비유되고 있다고 하였다(사 44:28; 렘 3:15; 나 3:18 참조).25) 에스겔은 “한 목자를 그들(이스라엘)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다(34:23).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할 것이다(사 37:24), 이 예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것이다. 신약에서 그분은 자주 선한 목자로 일컬음을 받으신다(마 25:32; 요 10:1-16; 히 13:20; 벧전 2:25; 5:4). 그리스도께서는 이 곳 요한계시록 7 장 17절에서 당신의 백성을 목양하신다.

 이사야의 또 다른 예언이 이제 성취된다.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리라(사 32:18). 거기 평화로운 평원에서 그리고 하늘의 생명 강가에서, “오랫동안 순례자요 방랑자로 살아온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은 그들이 거할 집을 발견한다.”26)
7:1-17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 7장의 분명한 목적은 “최후의 싸움을 위해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그들에게 일깨워주는 것이다. 투쟁의 바람이 그 파멸의 일을 이제 막 시작하려 하고 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동시에, 바람을 붙들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신다. 또한 인치는 기별에는 보증이 있다. 인 자체는 성도들의 안전을 보증한다. 일단 그들이 인침을 받으면, 아무리 유혹이 혹독할지라도 그들의 품성은 범접될 수 없으며, 변경될 수 없다. 144,000의 수학적 완전과 조화는, 교회와 세상을 뒤흔드는 사건들이 있을지라도,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6:12-17).”27)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지상에 두 개의 다른 무리의 백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을 지지하지 않는다.28) 이 책의 다른 곳에서 계시자 요한이 이들을 하나님의 종들(1:1), 남은 무리 (12:17), 성도들(14:12), 어린양의 아내(19:7-8; 12장 참조) 등으로 지칭할 때, 그는 하나의 백성만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29) 7장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의 두 무리, 즉 144,000인과 큰 무리는 분명 관련이 있다. 그들은 역사의 두 무대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한 동일한 무리의 백성이다. 먼저, 그들은 큰 환난의 어귀에 서서 싸우는 교회로,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원수들 위에 내릴 재앙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인침을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후에, 그들은 대 환난으로부터 의기양양하게 나온 승리의 교회로 묘사되어 있다.30) 전쟁은 끝났고 그들의 승리는 완전하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서 그들의 영 원한 상급을 받는다.

 요한계시록 7장이 다루는 주요 문제는 144,000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what)라는 것이다. 그들은 더 큰 무리에서 분리되어, 그 나머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이 누릴 수 없는 특권들을 허락받은 선택된 무리가 아니다. 닐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인침을 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아니다. 성도들은 바울의 시대에도 인침을 받았다. 그들은 간사함이 없고 흠이 없는 최초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았거나 어린양을 따르거나, 또는 땅에서부터 구속함을 받았거나, ‘주께 새 노래를 부르는’ 등의 일에 참여한 처음 사람들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5절의 144,000인에 대한 요한의 8중 묘사는 그들이 만세의 성도들과 공통된 유업을 공유한다.”31)

 이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일치한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씨족, 파벌, 계급도 없으며, 특권이 어떤 사람에게는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없는 그런 곳도 아니다. 요한계시록 7장은 하나님의 백성 중 마지막 세대가 “그 이전에는 결코 도달한 적이 없는 성결의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는 사상을 제시하지 않는다.32)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구원은 사람 자신의 성결이나 행위의 결과라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일의 결과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은 모든 세대에 동일하였다. 계시자 요한은, 마지막 때에 사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한 자들이라고 단언하였다(7:14; 12:11 참조). 그들을 승리로 이끈 것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시다(12:11). 그들은 그리스도의 보호로 말미암아 큰 환난에서 승리하여 나올 것이다(7:2-3). 닐도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관찰을 하였다.

무죄(無罪) 상태의 문제는 죄가 행위(act)로 정의되느냐 아니면 본성(nature)으로 정의되느냐에 달려 있다. 마지막 세대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확실히 죄된 행위들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재림시 썩지 않을 것을 입기까지는 자신들의 죄 되고 부패하기 쉬운 본성을 놓지 않는다(고전 15:53)....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은 언제 나 정복하는 중에 있다(헬라어 현재시제 사용), 그리스도만이 정복하셨다(부정과거 시제), 심지어 마지막 일곱 재앙의 기간에도 성도들은 짐승과 그 우상을 여전히 정복 하는 중에 있다(15:2, 헬라어 본문의 시제), 그들은 원수와 안팎으로 여전히 싸우고 있다. 환난의 기간 동안, 그들이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장 큰 죄는 믿음의 결핍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복당하지 않고 정복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다. 그들은 품성에 완전하며,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을 선택한다. 한 편으로, 그들은 죄된 본성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점을 여전히 자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양의 공로로 말미암아 인침을 받고 흠없이 서 있다(7:14).33)
이 시점에서 엘렌 화잇은 “144,000이 누구인가와 같은 영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은 논쟁에” 하나님의 백성은 휘말리지 말도록 경고한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은 속한 시일 내에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34)  다른 곳에서 화잇은 신실한 자들에게 이렇게 권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다 사용하여 144,000인에 들도록 애쓰자.”35)

 어느 견해를 취하든지 간에, 요한계시록 7장의 묵시, 곧 인침을 받고 보좌 앞에 서 있는 성도들에게서 하나의 확실한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 일곱 인을 개봉하는 묵시가 보여 주듯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종종 복음을 위하여 유쾌하지 않은 삶의 경험과 시련에 직면한다. 요한계시록 6장의 사건들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촉발된다. 이는 하늘과 땅이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하늘에 등극하셔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 알지도 못한 채 땅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한계시록은, 하늘들의 통치자이며 그들을 위해 갈바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아낌없이 자신을 바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능력과 보호와 지침을 제공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죄는 진실로 그분, 곧 참된 정복자를 통하여서만 정복될 수 있다.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그들이 최후의 투쟁을 막 통과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전 역사를 통하여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위로하신 것같이, 큰 환난의 때에 저들을 보호하고 위로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보증을 가지고 있다. 미래는 종종 암담해 보일지 모르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통제하고 계신다. 구속받은 자들이 지상에서 나그네로 있는 동안, 그들의 주님이시요 왕이 신 분이 다시 오셔서 영원히 그들과 함께 거하시기까지(7:15), 그분은 그들에게 힘과 소망의 근원이 되신다.

주(註) ——————
1. Johnson, 478. 
2. Mounce, 165, n. 1. 참조 
3. Ecclesiasticus 39:28–31(The Oxford Annotated Apocrypha, 180). 
4. Paulien, "Seals and Trumpets,” 198. 
5. 4Q267 19:105–14 (The Dead Sea Scrolls, trans, Michael Wise, Martin Abegg, Jr., and Edward Cook, 58), 
6. Fiorenza, Revelation, 66; J. M. Ford, 122. 
7. Beatrice S. Neall, “Sealed Saints and the Tribulation,” in Symposium on Revelation, Book 1,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6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255, 
8. Boring, Revelation, 131. 
9. 이 견해를 지지하는 논쟁들을 더 보려면, Aune, Revelation 6-16, 443을 참조하라. 보컴은 요한계시록 7장의 인구 조사는 군사적 목적으로 조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이런 사실은 7장의 문맥과 요한계시록 14장 3-4절에 의해 확인되며, 요한계시록 14장 3-4절에서 144,000인은 전적으로 성 적 절제를 하는 성인 남자들로서, 고대 세계는 그런 절제를 거룩한 전사(戰士)들에게 요구였다고 주장한 (“The List of the Tribes in Revelation 7 Again,”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42[1991:104).
10. Boring, Revelation, 131. 
11. Fiorenza, Revelation, 67. 아우니는 다음의 사실을 지적한다. 서기 1세기 말경에 책을 쓴 요세푸스는 그의 당대에 있었던 12지파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Ant. 11,133), 그리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재집결 에 대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종말적 소망은 틀림없이 이 지파들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Revelation 6-16, 442) 12. Ezell, 60-61. 
13. 상게서, 59. 
14. Neall, “Sealed Saints and the Tribulation,” 256. 
15. Hans K. LaRondell, Chariots of Salvation: The Biblical Drama of Armageddon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87), 171. 
16. Ernst D. Schmitz, "dodeka,”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ed. Colin Brown (Grand Rapids, MI: Zondervan, 1978), 2:695. 
17. 예를 들면, Charles, 1:201; Swete, 99; Beckwith, 539; Ladd, 116-117; Harrington, 98, 101; Bea sley-Murray, 139-141; Giblin, 91-92; Ezell, 59-61. 
18. Herman Hoeksema, 267. 
19. 1 Maccabees 13:51(The Oxford Annotated Apocrypha, 256); 2 Maccabees 10:7(The Oxford An notated Apocrypha, 281). 
20. Herman Hoeksema, 267. 
21. Swete, 99. 
22.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26–27. 
23. 상게서, 2:27. 
24. Paulien, The Bible Explorer, 3.5. 
25. Aune, Revelation 6-16, 477. 
26. Ellen G. White, The Great Controversy (Mountain View, CA: Pacific Press, 1911), 675. 
27. Neall, “Sealed Saints and Tribulation,” 278. 
28. 상게서, 275-278. 
29. 상동. 
30. Ladd, 116. 
31. Neall, “Sealed Saints and Tribulation,” 276. 
32. 상동. 
33. 상게서, 277. 
34. Ellen G. White, quoted in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978. 
35. 상게서, 7: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