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첫 네 인에 등장하는 네 기사는 효과적인 복음 전파와 그것을 거절함으로 인한 결과들을 대표한다. 흰 말을 탄 자는 신실한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묘사한다.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분리가 일어난다. 어떤 이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이들은 거절하고 거역한다. 붉은 말을 탄 자는 복음에 대한 반대를 묘사한다. 복음을 거절하고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영적 사망으로 이끄는 영적 기근이 뒤따른다. 검은 말 탄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근을 묘 사하는 반면, 청황색 말 탄 자는 그 기근의 결과로서 이르러올 온역과 사망을 묘사한다. 이 모든 장면들은 구약에서 끌어온 것이며, 그 장면들은 사람이 복음을 거절하고 죄 가운데 살기로 선택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영구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네 말 탄 자는 일반적인 현실 즉, 각 사람이 복음과 대면하였을 때, 그들이 무슨 경험을 하게 될 것인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복음을 듣고 받아들 일 때, 그는 그리스도와 갖는 밀접한 관계로 인해 충만한 축복과 구원의 기쁨을 경험한다. 다른 한 편으로, 복음에 대한 거절과 거역은 언제나 영적 기근과 영적 사망으로 이끄는 점진적 쇠퇴의 결과를 낳는다.
존 폴린의 제안대로, 네 말 탄 자는 특히 기독교 시대의 첫 일 천년 간 교회가 겪은 경험을 묘사할 수도 있다.
20)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 주석에 따르면
“인들이 개봉될 때에 나타나는 장면들은 구체적 적용과 일반적 적용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21) 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통하여 전반적으로 신실함이 그 특징이 되었던 초기 기독교회에서, 복음 전파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 다음 기간에는 영적으로 점차 쇠퇴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근을 유발하였고, 전 중세 기간에 걸쳐 영적 사망이 기독교의 특징이 되었다. 그 것은 영적 쇠퇴와 핍박의 기간이었다. 그 때 참된 믿음은 상실되어, 사랑의 복음 기별은 저항 받고, 잊어버린바 되며, 점차적으로 전통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더욱이,
요한계시록 11장 3-14절이 암시하듯이, 네 기사의 장면은 첫 일천 년을 지난다. 그러므로 네 기사는 기독교 역사상 첫 일천 년의 역사와 시작에 초점을 두기는 하지만, 기독교 전 시대의 일반적인 현실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네 인을 개봉할 때 묘사된 심판은 부분적이요 예비적이다. 복음 전파는 어찌되었던 일세기와 함께 끝나지 않았다. 흰 말을 탄 자는 이기고 또 이기기 위하여 여전히 전진하고 있다(
계 6:2). 네 기사는 미래의 현실에 대한 선봉자들에 불과하다.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한 번 더 최종적이고도 엄청난 복음이 선포될 것이다(
계 14:6-12; 18:1-4 참조). 늦은 비로 주도된 이 복음은 하나님의 신실한 남은 백성을 통하여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권세로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이다. 그 때 온 세계는
“그의 영광으로 환하여” 질 것이다(
18:1). 이 복음이 전파된 결과,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거절하고 저항한다. 이어서, 완전히 복음이 전파되어 모든 인간의 운명이 결정될 때,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복음을 거절하고 거역한 자들 위에 부어질 것이다. 네 기사에게서 암시된 언약의 저주들은 그 때 이루어져 끝날 것이다.
네 기사의 장면은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그것은 복음 기별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것은 언제나 영적 기근과 질병과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장면을 통해 또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복음의 중심 주제인 예수님과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말 직전, 세상의 거민들에게 영원한 복음이 마지막으로 선포될 것이다(
계 14:6-12; 18:1-4).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지 아니하고 은혜와 자비를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의 것이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히 3:15)
네 말 탄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한 자들 위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들을 상징한다. 반면, 다섯째 인의 장면은 요한계시록의 주요 주제처럼 보이는, 적대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당면하는 상황을 소개한다.
51) 그 장면은 두 그룹의 백성을 무대 위에 등장시키는데, 곧 핍박하는 자들과 핍박받는 자들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임을 당한 신실한 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
6:10)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과 심판을 부르짖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반응하고 개입하신다.
네 말 탄 자는 특별히 첫 천년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복음에 불성실했던 자들에 대한 여러 심판을 상징할 수 있다. 반면, 다섯째 인의 장면에서, 폴린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기사들에게서 암시되었던 박해의 결과, 특히 둘째 기사에 의한 박해를 본다. 그러므로 다섯째 인은 네 기사보다 시간상 더 후의 것을 대표한다. ‘언제까지’라는 구절이 다니엘 7장 21, 25절; 12장 6-7절에서 중세의 대 환난에 적용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6장 10절은 그 동일한 시기의 순교자들이 항의하는 부르짖음을 적절히 대표한다.”52) 여섯째 인은 우리를 세상 역사의 종말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임할 다가오는 심판을 묘사한다. 그 때 이들은 “그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6:17) 하며 공포로 울부짖는다.
그 날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 맞은 백성이라고 하면서,
7장은 위의 질문에 답한다. 또한 그것은
“땅에 거하는 자들” 위에 쏟아질 최후의 심판과 땅의 멸망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치는 일이 완성되기까지는 이를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7:3), 이것은 제단 아래의 순교자들에게 주신, 그들의 동료 종들도 함께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라는 응답과 상응한다.
7장의 나머지 부분은 일곱째 인의 고요가 그 특징이 된 천년기와 그 후속 기간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하나님의 백성은 옹호되었고, 마침내 그들은 안식을 찾았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어찌 될 것인가?
요한계시록 8장 2-5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고통당하는 백성의 기도를 듣고 계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천사들이 일곱 나팔을 부는 장면은 분명히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리 멀지 않다. 나는 나의 거룩한 백성을 악의적으로 공격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이미 심판하고 있다.” 일곱 나팔을 부는 것과 제단 밑에 있는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 곧 네 천사들에게 주신 명령,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계 7:3)는 명령과는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인치는 일이 완성될 때, 하나님의 심판은 개시될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 2절은 신원받은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양을 돌릴 그 날로 이끌어간다. 이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이유는 그분이
“당신의 종들의 피에 대하여 복수하”셨고, 또한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기 때문이다(
계 16:5-7 참조).
제단 밑에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오, 주여 언제까지...”라는 부르짖음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름으로 인해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이 세상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연중 끊이지 않고 부르짖는 그 외침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신 것같이, 그를 따르는 자들도 같은 일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예수께서 그 길을 밟고 지나셨다는 사실에서 여전히 위로를 찾을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죽기까지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그것은 곧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성취될 종말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 할 것이다. 존 폴린의 말을 들어보자.
교회들을 호위하시는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계 1~3장) 또한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좌정해 계신다(
계 4~5장), 당신의 백성이 고통당하거나 당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이 세상을 홀로 걷도록 강요받을 때에라도, 그분은 그들을 아시고 돌보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전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이 요한계시록의 종말 묵시 속에 있는 이상한 이미지들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고 하여 놀랄 일은 아니다.
6장의 인들은 십자가와 재림 사이에 사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확실히 묘사한다.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혹시 그들의 믿음이 환상에 지나지 않을까 종종 의아해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영광과 화려함은 복음의 반대자들과 함께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늘에서 인들이 개봉될 때, 지상 역사와 경험의 냉혹한 현실들이 뒤따른다는 사실은, 이 현실들이 어린양의 통제하에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어린양은 이미 통치하고 계시며(
계 5장), 또한 그분의 완전한 왕국은 곧 완성될 것이다(
계 11:15-18).
53)
요한계시록 6-7장은 십자가와 재림 사이에 이 땅에 살며 시련과 고통을 겪는 하나님의 압제받는 백성에게 지속적이며 강력한 기별을 보낸다. 데이비드 마샬(David Marshall)이 말하듯이,
“요한계시록은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 삶을 액면 그대로 그린다. 그러나 또한 그 현실 속에서 희망을 준다.”54) 비록 바람이 기괴하게 불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 와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하늘의 보좌에 좌정해 계신다는 확고한 보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관할하신다. 약 2천 년 전에 주어진 약속은 여전히 확고하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1. Paulien, “The Seven Seals,”223–224.
2. Charles, 1:160; Caird, 122;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4; Morris, 102.
3. Ladd, 97.
4. Johnson, 473.
5. Ladd, 98.
6.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78.
7. Paulien, “The Seven Seals,” 229.
8. Ladd, 98.
9. Paulien, “The Seven Seals,” 229.
10. 상게서, 230.
11. Charles, 1:166.
12. Thomas, Revelation 1-7, 422.
13. Ladd, 100.
14. Mounce, 155.
15. Ladd, 101.
16. Paulien, Bible Explorer 3.3.
17. J. M. Ford, 108.
18. 바클리도 이 사실을 지적한다(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9).
19. 상동.
20. 더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Paulien, “The Seven Seals,” 233-234를 참조하라.
21.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775.
22. 바벨론 탈무드 Shabbath 1526 (Epstein, 2/2:780) 참조; J. M. Ford, 111을 보라.
23. Mounce, 158(그는 이 구절이 순교자들 자신들의 증언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Gerhard Pfandl, “The Remnant Church and the Spirit of Prophecy,” in Symposium on Revelation, Book 2,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7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313: Hans K.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of the Bible (Sarasota, FL: First Impressions, 1997), 283–26.
24. H. Strathmann, “martus, et al.”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 Kittel and G. W. Bromiley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1976), 4:501-502에서 스트라트만이 말했듯이.
25. Aune, Revelation 6-16, 411; 참조 Beckwith, 527.
26. 1 Enoch 47:4(Charlesworth, 1:35).
27. 4 Ezra 4:35-36(Charlesworth, 1:531).
28. 2 Barch 23:4-5a(Charlesworth, 1:629).
29. Ladd, 106.
30.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1.
31. Joel N. Musvosvi, Vengeance in the Apocalypse, Andrews University Seminary Doctoral Dissertation Series 17(Berrien Springs, MI: Andrews University Press, 1993), 232.
32. Fiorenza, Revelation, 64.
33. 4 Ezra 4:35a(Charlesworth, 1:531).
34.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14.
35. J. M. Ford, 111.
36. Testament of Moses 10:3-7(Charlesworth, 1:932); 2 Baruch 70:8 (Charlesworth, 1:645).
37. Paulien, “The Seven Seals.”236; 이러한 이해에 대하여 라론델이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내 생각으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의 책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140-141을 보라.
38.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779 참조.
39. 상게서, 참조
40. 상게서, 5:502.
41. Paulien, “The Seven Seals,”237.
42. 다양한 견해의 목록을 보려면, Aune, Revelation 6-16, 507-508을 참조하라.
43. Charles, 1:223-224;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2:40-41; J. M. Ford, 130; Morris, 116; Caird, 106-107;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70–83.
44. 4 Ezra 7:30(Charlesworth, 1:537).
45. Morris, 117; Ladd, 122-123; Mounce, 178-179; Beale, 446-452.
46.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71-83; 그는 Charles(1:223-224)의 책에서 도움을 입었다고 했다. Beale도 동일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451-452).
47. Joseph J. Battistone, God's Church in a Hostile World(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1989), 108.
48. Paulien, “The Seven Seals,” 237.
49. 예를 들어 4 Ezra 6:39; 7:29~31 참조.
50. Paulien, “The Seven Seals,” 237.
51. J. P. Heil, “The Fifth Seal (계 6:9-11) as a Key to the Book of Revelation,” Biblica 74 (1993): 220-243 참조.
52. Paulien, “The Seven Seals,”235-236.
53. 상게서, 238-239. 54. Marshall,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