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나팔 재앙은 천체, 곧
해의 삼분의 일, 달의 삼분의 일, 그리고 별들의 삼분의 일을 친다. 그 결과로 천체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고 낮의 삼분의 일은 비침이 없고 밤도 그러했다. 이 곳에 묘사된 장면은 애굽에 내린 아홉 번째의 재앙, 곧 흑암의 재앙을 생각나게 한다(
출 10:21-23). 애굽에 대한 예언에서 에스겔은 그 땅에 새로운 재앙이 다가옴을 보았다. 그 재앙은 애굽의 흑암 재앙에 의해 묘사되었다(
겔 32:7-8). 구약의 여러 예언서에서 천체가 어두워지는 것은 심판 때에 등장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일관된 상징이다(
사 13:10; 겔 32:7-8; 욜 2:10; 3:15 참조).
이전의 세 나팔에서 그러하였듯이, 넷째 나팔의 장면도 하늘이 문자적으로 어두워진다기보다 오히려 배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빛이 없는 것을 뜻하는
“어두움”은 복음의 부재로 말미암는 영적 이해력과 통찰력의 결핍을 의미한다(
사 8:20; 60:1-2; 마 4:16 참조). 구약에서 어두움은 죄와 배도에 대한 심판을 일관되게 상징한다. 선지자 미가는 이 비유적 표현을 유다 선지자들의 배도를 묘사할 때 사용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미 3:6)
신약에서 빛은 복음을 대표한다. 예수님 자신은 영적 생명의 궁극적 근원이시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밝히시는 참 빛이시다(
요 1:9), 인간은 그분을 통하여서만이 흑암의 영역에서 구출 받아 하나님의 기이하신 빛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
골 1:13-14; 벧전 2:9). 흑암이란 복음의 부재로, 죄를 상징한다. 백성이 복음의 빛을 거절하고 어두움을 택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예수께서는 복음을 무시하고 거절한 결과는 어두움이라고 매우 분명히 말씀하셨다. 넷째 나팔 재앙의 어두움에 대한 상징성은 바로 이런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셋째 나팔의 배도는 넷째 나팔에서 더 전개된다.
23) 셋째 나팔이 상징적 언어로 중세 교회의 영적 쇠퇴와 배도의 결과를 그리고 있다면, 넷째 나팔은 중세 이후 세상에 만연했던 극심한 어두움을 묘사한다. 첫 단계로서, 복음의 단순성과 순결성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활발 한 세대가 소위 신학적 논쟁들과 다툼들로 그 특징을 이루었던 개신교의 학구주의로 계승되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보다 공인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다음 단계로서,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유럽을 풍미하였던 계몽 시대 혹은 이성 시대의 지적 혁명은 서구 사상을 지배하던 기독교 신앙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 새로운 현상은 전통 종교를 거절하였으며, 합리주의, 회의(懷疑)주의, 인본주의, 그리고 자유주의를 생성시켰다. 그것의 마지막 산물로서 세속주의가 태동하고 요동쳤다. 서방 세계에서 세속화가 과학, 정치, 종교 자유, 예술, 그리고 교육 등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많이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긍정적 영향보다 더 강했다. 물질주의적 출발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부정, 어떤 종류의 믿음이든지 간에 그 믿음에 대하여 갖는 회의주의와 더불어, 세속주의는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인간의 이성으로 대체하여 버렸다. 이러한 세속주의의 부정적 측면은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활력을 죽은 형식주의와 영적 무기력 속으로 퇴보케 하였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서 구원의 소망을 빼앗아 버렸다.
그러므로 넷째 나팔은 만연한 세속주의의 영향 하에서 참 빛의 영적 근원, 즉 성경적 복음에 대한 현세적 어두움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나팔의 심판을 영적 생명의 유일한 근원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살한다고 보는 것이 최선의 이해다.
24) 넷째 나팔 재앙이 끼치는 특별한 영향으로 영적 빛의 근원이 부분적으로(삼분의 일) 어둡게 된다. 그 혹심한 어두움과 두려운 결과는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에서 더욱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