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언 (1:1-8)
 요한계시록의 첫 여덟 절은 서언(緖言)의 형태로, 책 전반의 일반적인 내용을 요약하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서언은 그 책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기록되었는지를 설명하고, 그 책의 저자를 소개하며, 그 책의 성격과 주요 주제들을 기술하여 그 책의 나머지 부분을 조율한다. 서언은 도입부(1:1-3), 인사와 송영(1:4-6), 그리고 책의 주요 주제에 대한 진술(1:7-8) 등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서론 (1:1-3)
 서언의 첫 부분은 고대 편지의 전형적인 도입에 해당한다. 저자는 우선 이 책의 제목을 말한다. 이어서 저자에 관하여, 계시가 어떻게 주어졌으며, 이 책의 성격과 목적이 무엇이고, 이 책이 어떻게 읽혀져야 하는지 등에 대한 몇 가지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계시’라는 단어는 헬라어 아포칼립시스(apokalupsis, The Apocalypse)에서 나왔는데, 아포(apo, ~로부터)와 칼룹시스(kalupsis, ‘덮개’ 혹은 ‘가리개’)의 합성어다. 그러므로 ‘아포칼립스’‘가리개 벗기기’, 또는 ‘덮개 열기’ 등의 의미가 있다. 이 용어는 이전에 감추어졌던, 숨겨졌던, 혹은 은밀한 것이 드러났음을 가리킨다.1) 신약에서 이말은 오로지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하여서만 사용되었다(눅 2:32; 롬 16:25; 엡 3:5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라는 구는 주어적(主語的) 소유격 또는 목적어적(目的語的) 소유격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계시하는 주체로서 그리스도를 지칭할 수도 있고(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계시), 또는 계시의 대상으로서 그리스도를 지칭할 수 있다(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 문법적으로 두 가지 다 가능한데, 문맥은 기본적으로 전자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계시를 받아 그것을 요한에게 전달하시기 때문이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22:16) 그런데 본문은 계시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아버지 하나님을 요한계시록의 저자(1:1; 22:6)로 밝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한 부활 후의 활동들을 통해 책의 제일 처음부터 중심 인물로 등장하신다(1:12-20 참조). 그분은 분명 요한계시록의 내용이시다. 이 말은 두 번째 의미도 동등하게 포함되어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계시”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이며, 당신의 충성스러운 백성을 위한 그분의 구원 활동에 관한 계시다.
속히 될 일.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헬, 하 데이 게네스싸이 ha dei genesthai, 22:6에 반복됨)이라는 이 구절은 특히 헬라어 구약 성경 다니엘 2장 28절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 해석에 관련된 다니엘의 이야기를 메아리친다. 그 구절은 감람산 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 (마 24:16; 막 13:7; 눅 21:9)을 또한 반영한다. 이 배경적 본문들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라는 말은 맹목적으로 꼭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계시한 하나님의 목적이 확실히 성취될 것’임을 가리킨다고 이해해야 한다.2)
지시하신 것이라.
 헬라어 세마이노(‘알리다’, ‘표시나 상징으로 보여 주다’, ‘설명하다’, 표시나 상징으로 전달하다)는 특별히 어떤 종류의 표시(sign)로 전달하다 혹은 알린다는 뜻이다.3) 신약의 다른 곳에서 이 말은 미래의 사건을 가리킨 상징적 표현에 일관되게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어떤 모양으로 죽으실 것인지”를 보여 주셨다(요 12:33; 18:32; 21:19 참조), 선지자 아가보는 성령의 감동하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통치기간 중에 대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signified, 행 11:28), 요한계시록 1장 1절세마이노(sign-i-fy)는 요한계시록의 묵시들이 요한에게 비유적(figurative) 혹은 상징적(symbolic) 으로 전달되었음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증거하다’ 또는 ‘증언하다’라는 동사 마르튀레오(martyreo)는 과거시제, 소위 말하는 서간(書簡)형 부정과거(不定過去)다. 이는 요한이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계시록을 기록하였음을 암시하는데, 왜냐하면 독자들이 그들의 시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읽었을 때, 요한이 증거한 시점은 과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사 마르튀레오는 이 곳과 요한계시록 22장 16, 18, 20절에만 나오는 단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하나님의 말씀’‘예수의 증거’라는 말은 요한계시록에서 세번 붙어 나온다(1:2, 9; 20:4).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별(여호와의 말씀)을 지칭하는 전문적인 표현이다(렘 1:2; 호 1:1; 욜 1:1; 습 1:1; 슥 11:1), 종종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그가 본”이라는 구절로 보충된다(사 2:1; 미 1:1; 슥 1:7).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여호와의 말씀”이 구약에서 이해된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요한이 “그가 본 모든 것”“하나님의 말씀” 으로 지칭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구약의 선지자들의 노선을 따르고 있으며, 요한계시록은 구약 예언의 모든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4) 문맥상 이 곳에 사용된 헬라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표현은 주어적 소유격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묵시적 상징(요한이 본 것)으로 요한에게 전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5)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증거”를 보았다. 요한은 “그가 본 모든 것”을 다 기록하였으며, 그렇게 기록된 책은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로 일컬어진다(계 1:3; 22:7, 10, 18). 즉, 그 책의 목적은 계시의 책으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계 1:1)는 것이다. 더욱이, 요한계시록 19장 10절“예수의 증거”“예언의 신”, 곧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으로 정의한다.6)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읽는 자와 듣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이 구절은 교회의 공중 앞에서 읽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어로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마카리오스(makarios, 행복한)로서 이 단어에서부터 ‘macarismi’(행복)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단어는 산 위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산상 설교(마 5:3-12)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다. 신약에서 이 말은 단순히 세속적 의미의 행복 이상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제 그 성취를 경험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깊은 내적 즐거움을 가리킨다. 마카리오이(makarioi)한 사람들은 매우 또는 최상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7)

 이 복은 요한계시록의 칠복 중 첫 번째 복이다.


 ● “읽고 깨닫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1:3)

 ●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나니”(14:13)

 ● “자기의 옷을 살피며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16:15)

 ●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된 자는 복이 있나니”(19:9)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20:6)

 ●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22:7)

 ● “그 옷을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22:14)


 다음의 개요는 이 칠복이 갖고 있는 면밀한 교차대구법적 구조를 보여 준다.


 A 1:3--책 읽기

   B 14:13--죽음

    C 16:15--옷 지킴

    C’ 19:9--혼인 잔치

   B’ 20:6--죽음

 A’ 22:7--책 읽기

 D 22:14--옷을 빨기


 첫째, 둘째, 셋째 복, 그리고 여섯째, 다섯째, 넷째 복 사이에 각각 상관 관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와 여섯째가 요한계시록을 열고 닫으며, 둘째 복은 다섯째 복과 평행을 이루고, 셋째와 넷째는 조화를 이룬다. 일곱째 복은 복들의 절정을 이루는 것 같은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참된 행복은 그들의 품성의 옷을 빠는데서 찾게 된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의 이 칠중의 복은 칠중의 ‘화, woe’‘아아, ales’라는 말이 등장함으로 균형을 이룬다(8:13; 9:12; 11:14; 12:12; 18:10, 16, 19).8)
(주해)
 서언의 서론적 부분은 뒤에 나올 요한계시록의 난해한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점들을 강조한다. 이것은 우선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며 반드시 일어날 일을 자기 백성에게 보이는 아버지가 계시의 원천이심을 확인한다.

요한계시록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책의 제목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구절로 자신의 책을 펼친다. 그 책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apocalypse]”로 일컬어진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묵시들을 주셨거나,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계시의 대상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거의 확실히 두 개념이 다 의도된 듯하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베일을 벗기는 일, 곧 그분의 계시다. 예수께서는 그 계시를 통하여 교회를 위한 갈바리 이후의 자신의 봉사를 드러내신다. 요한계시록은 구약 성경이 그러하듯이(요 5:39),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마지막 책은 사복음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사렛 사람으로 기술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 우주의 보좌에 좌정하셨다고 설명한다. 그 곳에서, 그분은 더 이상 슬픔의 사람이 아니라, 온 우주의 왕이요, 주님이시다.

 처음부터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은 성경의 마지막 책은 단순히 다가올 무서운 사건들 (아마겟돈 전쟁, 기근, 박해, 혹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통상적 의미의) ‘계시’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천명한다. 이 책은 이 곳 외에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려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를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즉, “시작과 끝”(21:6; 22:13)이요, “처음과 나중”(1:17; 2:8; 22:13)이라고 가리킨다. 그분은 바로 요한계시록의 내용 자체시다. 이 책에서 그리스도를 삭제해 보라. 그러면 무섭고도 기괴한 사건들로 구성된 ‘할리우드(Hollywood)의 요한계시록’ - 곧, 아무런 소망도 없는 무서운 미래를 제시하는 책이 될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온전한 의미의 복음인 ‘좋은 소식’을 그 속에 담고 있다. 케네쓰 스트랜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보증이 있다. 즉, 그분은 항상 역사 속에 계셔서 그들을 양육하시며, 종말적 대단원에서 온전히 옹호하실 것이며, 영원한 생애를 통하여 이해를 초월하는 관대한 보상을 주실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동일한 주제를 취하여 아름답게 뻗어나간다. 이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전반적인 성서 문헌과 어긋나는 일종의 엉뚱한 계시가 결코 아니라, 성경 기별의 핵심과 본질을 바로 전달한다. 요한계시록이 강조하여 지적하는 것처럼, “살아계신 자” 곧 사망과 무덤을 정복하신 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충성된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순교를 당할 때에라도 그들은 승리할 것인바(12:11), “생명의 면류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2:10; 21:1-4; 22:4 참조).9)
이어서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목적을 서술한다. 그 목적이란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히 될 일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이 구절은 무엇보다도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선언한 다니엘 2장 28절을 가리킨다. 다니엘은 “마지막 때에 속히 될 일”을 왕에게 알렸다. 요한은 분명 다니엘서 2장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을 쓴 것이다. 더욱이 감람산에서 예수께서는 재림 전에 “일어나야 할” 것들을 지적하셨다(마 24:6; 막 13:7; 눅 21:9). 다니엘에 의하여 예언되었으며 감람산 담화에서 예수께서 더 깊이 가르치고 지적하신 것들을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리라는 확신을 주기 위함이 요한계시록의 목적이라고 요한은 독자들에게 말한다.

 종말이 오기 전에 어떤 사건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요한계시록 속에서 역사는 우발적이 아님을 지적한다. 위르겐 롤로프(Jurgen Roloff)가 말하듯이, “세상의 사건들은 맹목적인 우연이나 인간의 주도권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획에 따라 펼쳐진다.”10) 지상 역사는 십자가와 함께 그 마지막 국면에 돌입하였다. 요한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계획이 이 곳 지상에서 성취되기 위하여 십자가와 재림 사이에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사건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 주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이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하여 종말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려준다는 사실을 주목함 역시 중요하다. 우리의 구원과 왕국에 들어감에 있어 중요하고 유익한 것들은 예언의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는 것은 정확히 언제 어떻게 그 사건들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알려지도록 계획된 것이 아닌 듯하다.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속하였고, 감추인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였다.”(신 29:29) 인간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없다. 마지막 사건들의 전개 양상이나 시간은 우리에게 비밀이 되었고, 하나님 자신만 알고 계신다(마 24:36; 행 1:7). 정확히 언제 어떻게 마지막 사건들이 발생할 것인지는 성취 이전이 아니라, 성취 때에 가서야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미래 사건의 묘사, 특히 종말에 일어날 사건들은 더 깊은 의도가 있다. 괴상하고 겁나는 이 사건들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우리 마음에 감동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기록되었다(마 20:20), 지혜로우신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사건 중에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한 약속의 온전한 영향이, 예언의 말씀으로 그 사건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제 힘을 발휘할 수 없음을 아셨다. 마지막 위기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지의 심각성을 우리에게 부각시키려는 목표로 그토록 생생하게 사건들을 묘사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것들을 열어 보임은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며, 그 힘든 때에 그들을 붙들어 줄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며(요 16:4),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눅 21:28)다고 말씀하셨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적 기별의 핵심과 취지와 조화를 이룬다. 이 책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신실한 자를 삶의 시련으로부터 빼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은 그리스도께서 삶의 시련 속에서 자기 백성들과 동행하실 것을 보증한다. 그리스도는 항상 그들과 함께 하시며, 세상 끝 날까지 그리하실 것이다.

 그 다음에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사건들은 속히 일어나야 한다(1:1, 3; 22:6)고 말한다. 심지어 요한 당시에도 재림은 “속히” 있을 것으로 묘사되었다(계 2:16; 3:11; 22:7, 12, 20 참조). 요한이 그 약속을 들은 이후 거의 2천년이 지났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 임박한 종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종말과 관련하여 요한은 그 예언들의 최종적 성취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성취의 시작에 관심을 두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무엇보다 ‘속히’라는 말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천년은 하루와 같다(벧후 3:8).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 실현에 있어 최종적 국면에 접어들었다.11) 이와 같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때가 가까웠”다(계 1:3). 그러나 사단에게는 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계 12:10-12). 십자가는 사단을 패배한 원수로 만들었다. 그의 때가 짧다는 현실은 그로 하여금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결사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는 일에 매진하게 하였다. 이 “속히”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과 관련하여 특별히 적용된다. 우리는 예수께서 오늘일지 내일일지 언제일지 그 오실 날을 알지 못한다. 그분의 오심을 위한 준비의 시간과 기회는 미래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언제나 현재에 있다.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은 자신들의 당대에 재림의 임박성을 깨달으라는 촉구를 받았다.12) 요한의 때에도 예수님의 강림은 “곧” 있을 사건이었으며, 그 이후로 재림은 각 세대에게 더욱 임박해졌다.

 요한은 계속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시되었다(signified)고 설명하였다.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이 하늘의 실재나 다가올 사건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도록 사진처럼 묘사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내용들은 비유적 혹은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요한계시록은 그림처럼 말한다. 예언된 장면들과 사건들이 문자 그대로 실재적이지만, 그것들은 이상 속에서 상징적인 표현으로 요한에게 나타났다.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을 선택한 것은 요한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지적하는 듯이 보인다. 하나님은 사람이 있는 형편 속에서 사람을 만나신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기별을 전달하셨을 때에, 그 연로한 선지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하셨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하에서 그가 묵시 중에 본 것을 이제 자신의 언어로 기록한다. 그러나 기록하는 중에 요한은 인간의 언어가 하늘의 실재를 묘사하기에는 부적절함을 자주 깨달았다. 그러므로 요한은, 자신이 이상 중에 본 것을 설명하며 이를 분명히 하려고 ‘같은’이나 ‘듯한’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종종 자신만의 상징들을 덧붙였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현대 독자들은 이 책의 상징적 성격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별들은 그 내용에 대한 문자적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상징들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온다. 이 점을 명심하는 것은 이 책의 많은 상징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실수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읽으면서, 분명히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할 곳이 아니라면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본문이 문자적 의미를 의도한다고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한, 기록된 장면과 사건을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엇은 상징적으로, 무엇은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해석자에게 항상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상징들은 그 책 속에서 이미 뜻이 정해졌지만 (1:20; 12:9; 17:11, 15 참조) 대부분은 설명되지 않았다. 상징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우화적 상상이나 오늘날의 상징이 뜻하는 것에서 나온 의미를 부과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책의 상징들을 해석하는 열쇠는 우화적(allegory)이 아니라 표상적(typology)이다. 상징의 의미는 영감 받은 저자의 의도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당대의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던 의미에 의해 주관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은, 우리의 상황이 아니라, 영감받는 저자의 언어와 시간과 장소 속에서 전달된 것임을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언어는 고대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묵시적 상징 언어였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은 성령의 인도를 받은 요한이 자신의 묵시들을 1세기의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였을 상징과 이미지로 묘사하였음을 명백히 지적한다. 언어는 그들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환경이 갖는 일상의 실체들을 반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은 “독자 혹은 청중의 지성에 뿐만 아니라 감성에도” 호소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한다.13) 그러므로 상징적 언어의 의미를 결정함에 있어 일차적인 임무는 원 수신자들, 즉 요한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였을 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주의 깊은 연구는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의 상징은 구약에서 빌려왔음을 나타낸다. 요한계시록은 거룩한 역사로부터 온 장면과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이세벨, 모세, 다윗, 소돔, 애굽, 바벨론, 예루살렘 및 유프라테스 강 등의 인명이나 지명을 비롯하여 어린양, 나팔, 무저갱에서 나온 메뚜기, 시온산, 모세의 노래, 유프라테스 강이 마름, 성전과 성전의 기명, 기타 수 백 개 다른 내용 속에 표현된 주제들은 모두 구약에서 취한 것이다.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묘사함에 있어서 영감은 과거의 언어를 사용한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은 특히 창조, 홍수, 출애굽, 다윗 왕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유수 등의 주요 구약 사건들 위에 기초되었다. 이런 사건들의 인유는, 하나님의 미래의 구원 활동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 활동과 매우 유사할 것임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감동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소망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하신 일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과거에 늘 함께 하셨던 동일한 전능하신 하나님이 미래에도 역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실 것이다.

 대부분의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언어가 구약에서 빌려온 것이긴 하지만 요한이 이상 속에서 본 많은 장면의 묘사는 당시의 그레코로만 주제와 행습으로 물들어 있다. 또한 요한계시록의 언어는 유대적 묵시 문학의 상징을 크게 반영한다(예를 들어, 무서운 짐승, 머리, 뿔, 별, 땅의 네 바람, 여자, 일곱 머리 달린 용). 이런 묵시적 상징과 개념은 1세기 백성들의 언어의 일부였으며, 그들은 그러한 상징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끝으로, 요한계시록의 많은 구절들은 신약의 신학적 개념과 주제들과 매우 유사하다. 요한계시록의 많은 개념들은 특히 예수의 어록과 바울의 어떤 진술을 반영한다. 신약과 요한계시록의 여러 구절과의 유사성에 주의를 기울이면, 요한계시록의 기별을 더 넓게 이해할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기별의 깊은 이해는 요한이 자신의 책 속에 수집해 놓은 상징과 이미지를 끌어온 주 자료인 구약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일단 어떤 상징에 관한 구약의 배경이 확인되면, 고려 대상인 구약의 이미지가 복음에 의하여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영감 받은 저자가 그 수정한 의미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 상징을 사용한 정황을 연구한다.14) 이 연구는 요한계시록의 많은 상징을 설명하며, 각 상징이 나오는 본문에서 영감 받은 저자가 전하려고 했던 기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요한계시록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요한은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15) 그 기별은 요한의 풍부한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상 속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충성스러운 증인으로서 영감 받은 선지자는 묵시 중에 자신이 본 것을 다 전달한다. 요한이 본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 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저자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적 묵시로 전달하실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된다. 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 의하면, 예수의 증거는 “예언의 영”이다. 요한은 예수의 증거를 기록하였고, 그것을 예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였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이 자신의 생각이 아님을 매우 분명히 한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한 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구약의 어떤 예언과 마찬가지로 예언서다(1:3; 22:7). 따라서 그것은 예언서로 접근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서언의 서론은 읽는 자와 듣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말로 끝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칠복(七福, 1:3; 14:13; 16:15; 19:9; 20:6; 22:7, 14)중 첫 번째 복이다. 성경에서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이르러 올 최상의 행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다. “예언의 책을 읽는 자와 그것을 듣고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다.” 신성의 충만과 총체(divine fullness and totality)를 지칭하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성경의 마지막 책에 칠복이 언급 되어 있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칠복은 축복의 충만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되어 있음을 시사한다.16)

 본문이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는 자들에게 행복이라는 특별한 복들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분명 교회에서 읽는 것을 뜻한다. 읽는 자는 예언의 책을 공적으로 읽는 자, 즉 설교자다. 반면, 듣는 자들은 함께 모여서 읽는 것을 듣는 회중들이다. 예언들을 읽고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한 반면, 충만한 복이 그 기별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특별히 선언되었다. 이 축복은 요한계시록의 결론에서 반복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필립 휴즈(Philip E. Hughes)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물론, 읽거나 듣는 것은 필수 사항이지만 예비적인 것이다. 그러나 경고에 유의하고 예언이 담고 있는 훈계들에 순종하는 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반응이다. 그렇지 않고 읽고 듣기만 하는 것은 무가치하다.”17)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일반적인 책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다(2:1). 이 책은 교회에서 읽혀지고 신자들의 전 공동체가 듣고 준수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내진 것이다. 그 기별을 읽는 사람은 회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청중들이 이 예언의 책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이해할 때, 그들은 그 반응으로서 그 책의 기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준수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눅 11:28) 말씀으로 예수께서는 순종을 장려하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교회는 진실로 행복하다. 왜냐하면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한 최후의 사건과 종말에 관한 묘사 등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마지막 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시며, 언제나 그렇게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마 28:20).

인사말과 송영 (1:4-6)
 요한은 책의 목적과 내용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한 다음, 원래의 독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본문은 삼위 하나님의 인사를 담고 있다. 그 인사는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구원에 대하여 그분에게 돌리는 찬양 노래와 합하며 그 절정에 이른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한글 성경은 5절-역자 주)이 인사법은 바울과 베드로가 그들의 서신 허두에서 사용하는 말로(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벧전 1:2; 벧후 1:2 참조), 초기 교회의 일상적인 인사말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말은 실제로 관습적인 헬라어 인사말 카리스(charis 은혜)와 히브리어 인사말 샬롬(평화, 헬. eirène 에이레네)를 결합한 말로서,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된 인사말이었다. 이 두 관습적 단어의 결합은 “인간적 인사말과 소원 이상의 뜻이 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구원(shalom)이 종말의 삶 속에서도 확실하다고 말한다.”18)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이 세 가지가 들어 있는 칭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치는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표현하는 구약의 위대한 언약의 이름 야훼 (Yahweh, 출 3:14 참조)를 지칭함이 거의 확실하다.19) 분명 1장 8절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 아버지를 지칭하며, 4장 8절에서는 하나님의 다른 칭호 곧 전능자와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visitation) 을 가리킨다.”20) 애초부터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적 임재는 과거에 행하셨던 그분의 활동과 미래에 행하실 활동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일곱 영.
 요한계시록 22장 6절에도 성령은 복수(複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 보좌 앞에 일곱 영”3장 1절“하나님의 일곱 영”이다. 이 곳 외에 “하나님의 일곱 영”은 보좌 앞에서 타고 있는 “일곱 등불”(4:5),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5:6)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비유적 표현에 대한 구약의 배경은 먼저 이사야 11장 2절의 70인역에서 발견된다. 이 곳에서,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경건의 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한글 성경에는 “경건의 신”이라는 말이 없다-역자 주) 등 주의 성령에 대한 일곱 호칭이 언급된다. 또 다른 구절은 스가랴 4장에 나오는데, 선지자는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4:10)을 가리키는 “일곱 등잔”(4:2)을 보았다. 이 구절들은 세상에서 행하는 성령의 활동을 가리킨다(슥 4:6). 요한은 스가랴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성령의 칠중(七重) 충만을 묘사 한다.21) 이 곳의 “일곱 영”(계 1:4-6)이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와 평강의 동일한 근원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은 1장 4절이 교회를 위한 성령의 칠중 활동을 나타내는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물론 상징적으로 신성의 충만과 총체를 나타낸다(계 5:1의 어구 해설 참조).

 일곱 “영”은 성령이 활동하는 일곱 교회와 평행을 이룬다.22) 일곱 교회에 보낸 각 편지는 이런 권고로써 결론을 내린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만일 교회들이 그리스도인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면, 그 의미는 명료하다. 이 “일곱 영”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위한 성령의 활동의 충만과 보편성을 뜻하는 것 같다.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이 세 가지 칭호들은 분명 70인역의 시편 89편에서 왔다. 전적으로 이 시편은 사무엘하 7장 8-16절의 다윗의 언약에 관한 것이다. 시편 89편 27, 37절에서 다윗의 후손은 야훼의 장자로, 그리고 “땅의 왕들 중 지극히 높은 자”로 언급되어 있다. 그분은 “하늘의 충실한 증인” 으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다.
증인.
 헬라어 마르튀스(martus)는 일반적으로 ‘증인’이라는 의미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을 즈음, 초기 교회의 많은 충성스러운 증인들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마르튀스라는 단어는 순교자(martyr), 즉 “죽기까지 증거한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계 2:13 참조). 한편, “예수님의 죽음은 첫 순교로 간주되었다.”23)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헬라어 프로토토코스(prötotokos)는 문자적으로 ‘처음 난 자’를 의미하는데, 다윗의 후손을 말한 시편 89편 27절“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에서 가져왔다. 유대인 학자들에 의해 이 본문은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구절로 해석되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는 칭호는 바울이 골로새서 1장 18절에서 사용했으며, 요한계시록 1장 5절에서와 같이 골로새서에서 예수님은 존귀와 영광의 첫째 자리를 차지한 주권자로 선언되었다(빌 2:5-11 참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는 구절은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존귀와 최상위의 첫째 자리를 차지하시고며 “열왕의 통치자”(1:5)로서 땅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임을 시사한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
 (문자적으로는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 자”), 현재분사는 현재 계속되고 있는 행위를 암시한다. 즉, 그분은 지금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속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부정과거 분사로서 어떤 시점에서 완성된 행위를 가리킨다. 계속적이고 현재적인 예수님의 사랑과는 달리, 죄로부터의 해방은 과거에 완성된 행위다.
요한계시록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부정과거 직설법으로서,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 이상적으로 또는 잠재적으로 성취된 것”이라는 뜻이다.24)
(주해)
요한계시록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여기서는 요한계시록이 서신으로 소개된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라는 형태는 “바울은 __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고전 1:1-2; 고후 1:1; 갈 1:1-2; 빌 1:1; 살전 1:1; 살후 1:1 참조)라고 시작하는 바울의 서신들을 상기시킨다. 더욱이 요한계시록은 예언이라고 주장한다(1:3; 22:7, 18-19). 요한계시록의 기별은 묵시적 형태로 기술되었다(1:1 참조).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본래 로마의 아시아 속주에 있는 역사적인 일곱 교회에게 보낸 예언적 묵시적 형태로 된 서신으로, 그들의 특이하고도 직접적인 상황과 필요에 대해 말한다(1:11 참조).

 이 일곱 교회는 분명히 소아시아에 실제로 있었던 교회들이었다. 요한계시록에서 충만(fullness), 총체(totality)를 뜻하는 ‘일곱’이 상징적 숫자라는 사실은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쓸 때, 그것은 실제로 전 역사에 걸친 모든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음을 시사한다.25) 가장 오래된 신약 책들의 목록을 가지고 있는 무라토리 정경은(2세기) 요한계시록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요한은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상은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26) 요한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7, 11, 17, 29; 3:6, 13, 22; 13:9 참조)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상기할 때, 이 주장은 옳다고 생각된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신약 서신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서신 인사법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서간(書簡) 형식이라는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된 이 말은 통상적인 인사말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은혜는 인간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은총을,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서 뒤따르는 영적 복리의 상태를 말한다.”27) 브루스 메츠거(Bruce M. Metzger)가 언급한 대로,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은 언제나 그러한 순서로 되어 있다. 결코 “평강과 은혜”라고 하지 않는다. 두 단어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베푸신 호의와 가납”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백성이 평화, 즉 하나님과의 평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은혜 때문이며, 그 결과로서 가장 혹독한 삶의 와중에서도 내적 평정과 평온을 누릴 수 있다.28)

 이 은혜와 평강은 신성의 삼위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록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성경의 다른 곳에도) 나오지 않으나, 바로 이 책의 허두는 종말의 때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일하시는 신성의 삼위 하나님을 소개한다. 이 분들은 모두 교회에 보내는 은혜와 평강의 근원이시다. 이 사실은 요한계시록의 후반부가 참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을 위한 그분의 구원 활동을 흉내내는 사단적 삼 두를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매우 의미심장하다(요한계시록 12:1-22:5의 개관 참조).

 삼위의 첫째 분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개역개정 판) 장차 오실 이로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구약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다. 이 이후로 구약에서 야훼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가 다른 분이 아닌 신성의 제1위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 과거에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 구원의 사업을 현재 행하고 계시는 하나님, 그분은 우리의 미래와 관련하여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히 보장하신다. 능력이 많으시고 미쁘신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자기 백성을 위해 일어나 행동하실 것이다.

 삼위의 둘째 분은 그(의) 보좌 앞에 일곱 영으로 소개되었다. 바로 이 곳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이고, 성령의 역사(役事)의 충만함과 보편성을 의미한다. “일곱 영”은 성령이 활동하시는 일곱 교회들과 평행을 이룬다. 신약에는 성령의 나눠주심(히 2:4), 또는 교회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나시는 성령에 대한 개념이 소개되어 있다 (고전 12:7; 14:32; 계 22:6). “그러므로 이 곳에서 말하는 일곱 영에 관한 개념은 하나님께서 일곱 교회에게 나누어 주신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29) 각 교회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촉구를 받는다.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삼위가 다 언급된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부터). 이 세 가지 칭호들로 요한은 예수께서 진실로 어떤 분이심을 묘사한다. 첫째, 그분은 충성된 증인이시다. (3:14 참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요 3:11, 32-33; 8:13-14). 예수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요 18:37)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충성된 증인으로 인침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죽음은 첫 순교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일 뿐만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시다(고전 15:23). 부활하여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부활의 힘으로 땅의 왕들의 머리가 되셨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그는 예수님을 어느 높은 산으로 데려가서 천하 열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었다. 그는 예수님에게 땅의 나라들이 자신에게 넘겨졌다고 말하면서 흥정을 벌였다(눅 4:6). “네가 만일 엎드려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들을 너에게 주리라.”(마 4:8-9; 눅 4:6-7) 예수께서는 이 타협을 거절하셨다. 절하면 주겠다고 사단이 예수께 제안했던 “땅의 나라들”에 대한 주권은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스스로 취하셨다. 이제 그분은 우주의 주로서 하늘 보좌 위에서 다스리신다(계 3:21),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고 주장하신 것은 부활 이후였다. 그 권세가 표명되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엡 1:20-21; 롬 1:4 참조)신 때였다.

 이 세 가지 칭호-충성된 증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땅의 임금들의 머리에 대한 구약적 배경은 분명히 헬라어 구약의 시편 89편 27, 37절이다. 이 곳에서 다윗의 후손은 야훼의 맏아들로, 그리고 하늘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그리고 보좌 위에서 다스리시는 “땅의 임금들 중 최고의 임금”으로 언급된다. 이 세 칭호는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모든 약속과 소망의 성취이심을 확인하게 한다. 지상 생애를 통한 그분의 충성된 증언과 부활과 하늘에서의 그분의 강력한 통치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인데, 역사가 그 종국에 다가감에 따라 더욱 그렇다.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요한계시록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님의 신원을 확인한 후,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을 기술하면서 전진한다. 여기에 뒤따라 나오는 노래는 실제로 송영이거나 하나님의 능하신 행위들에 대한 고대의 찬양송이다(롬 11:36; 유 24-25; 계 5:13 참조), 송영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노래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리스도의 세 가지 활동은 그분의 세 칭호에 대응하는 것으로, 그분의 백성을 위한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에게라는 말은, 헬라어 본문이 가리키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신다는 의미다. 이어서 요한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사랑에 대해 이중으로 증거한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은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여기서 시제의 변화가 생긴다. 십자가 상에서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로 단번에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하셨다. 헬라어는 그때 완성된 한 번의 행위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 바꾸어 말하면, “십자가 상에서 일어난 일은 때를 맞춰 일어난 하나의 귀중한 행위로, 그것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사랑의 표현이었다.”30)

 당신의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영구적인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그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이다(계 5:9b-10; 20:6 참조). 이것은 구속받은 자들이 죄로부터 구속받은 결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신분이다. “그들은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국민의 한 부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분과 함께 왕들이 되었으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하나가 됨으로 그분의 제사장직을 공유하게 되었다.”31) 고대 세계에서 왕들과 제사장들은 정치적, 종교적 영역과 관련하여 가장 강력한 신분을 지녔다. 제사장 나라라는 명칭은 구약에서 끌어온 것으로서 출애굽의 경험 위에 구축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신 7:6-8), 그분은 애굽의 압제에서 그들을 구원하셨으며, 그분은 모세를 통하여 그들이 당신 자신의 소유가 되고, 민족들 중에서 택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제사장들의 나라가 될 것이었으나(출 19:5-6)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함으로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역할을 성취하지 못했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제공되었던 호칭들과 특권들은 이제 신약에서 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의 소유가 되었다. (벧전 2:9-10 참조),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신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으며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게 보낸 기별과 교회에게 말한 기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미래의 약속(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과거에 이미 발생한 어떤 것으로서 주어졌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미 나라와 제사장들이 되었다(계 5:10 참조), 동일한 사상이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표현되어 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이미 “나라와 제사장들”이라는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격상된 것은 그리스도의 영구한 사랑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위대한 구원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었다(엡 2:6).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은, 비록 그들이 현재 이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을지라도, 이미 하늘의 처소들에서 높여졌으며,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영광에 참여한다.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은 변함없이 “땅에 거하는 자들”로 언급된다(계 6:10; 8:13; 11:10; 13:8, 14; 14:6 참조).

 그리스도인이 하늘 시민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이 그의 집이 아님을 끊임없이 일깨운다(빌 3:20 참조).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 주석은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나라에 충성한다. 그가 어디에 살든지 간에, 그는 자기 나라의 명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유념함은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의 안내자가 된다. 다가오는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는 순결, 겸손, 온유, 사랑 등은 여기 이 땅에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하늘 시민임을 드러내어야 한다.”32)

 비록 그들은 여전히 이 땅에 있다 할지라도, 이 놀라운 사랑은 구속받은 자들로 하여금 하늘에 거하는 왕과 제사장처럼 느끼며 살도록 해준다. 집합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다. 즉,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백성이다. 개인적으로, 그들은 제사장들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처럼,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간다. 그분의 임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을 안겨준다. 이 세상 역사가 그 종말로 신속히 다가가고 있을 때, 그들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언제나 나갈 수 있다(히 4:16).

 그리스도의 다함이 없는 사랑, 죄의 속박으로부터 그분이 주신 자유라는 선물,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백성을 끌어 올려 나라와 제사장들이 되게 하신 새롭고 영광스러운 신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아멘. 이것은 신약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깨닫고 이해하게 될 때, 그들은 자발적으로 찬양의 노래로 화답한다(딤후 4:18; 히 13:21; 벧전 4:11; 벧후 3:14; 계 7:10 참조). 이 곳 요한계시록에서, 찬양은 당신의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영구한 사랑에 대한 구속받은 자들의 반응이다. 그리스도의 영구한 사랑을 통하여 그들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고, 그분 안에서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격상되었다. 요한계시록 14장 7절에 의하면, 이러한 반응은 바로 종말 때의 백성에게 촉구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에게 찬양을 돌리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다.

 요한계시록의 시작은 얼마나 위대한가! 누구나 존 폴린의 말에 확실하게 동의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과 연합할 때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계시다.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분이신 것만큼이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분과 함께 연합하기로 한다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그 무엇보다도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슬픔에 찌들려 있지 말고, 대신 우리의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하늘에서 높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라는 위대한 호소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얻는 이 새로운 신분을 보게 될 때, 바로 그 때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고 섬기는 일에 진실로 고무될 것이다.33)
요한은 이제 모든 주의를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 즉 영광과 위엄 중에 오시는 예수님의 신속한 재림으로 돌린다.
책의 주제 (1:7-8)
 서언의 마지막 부분은 이 땅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재림과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알려준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그가 오시리라.
 (헬, erchetai 에르케타이), 미래적 현재시제는 미래에 일어날 행동이 지만, 그것이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경우에 미래적 현재시제 용법은 재림의 확실성 뿐만 아니라 임박성을 강조한다.
요한계시록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알파와 오메가.
 알파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요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다. 후에 요한계시록에서 이 구절은 “시작과 끝”(21:6), 그리고 “처음과 나중” (22:13), 즉 ‘기역에서 히읗까지’ 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성을 지적한다.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b; 사 41:4; 44:6; 48:12 참조)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영원성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하는 무궁함, 곧 무한한 생명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34)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1장 17절2장 8절에서 사용되었다.
전능하신 자.
 헬라어 판토크라토르(pantokrator)는 헬라어 구약 성경 [70인역]에서 만군의 여호와(The Lord of Sabaoth)를 대신하여 사용되었다(호 12:5; 암 9:5 참조), 요한계시록에서 아홉 번 사용된 이 단어는(1:8; 4:8; 11:17; 15:3; 16:7, 14; 19:6, 15; 21:22) 하나님의 최상권을 가리키는데, 다음의 환호 속에 가장 잘 정의되어 있다.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
(주해)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기술한 후, 요한은 예수께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이 엄숙한 진술은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 문자적으로, 개인적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사건은 요한계시록의 여타의 모든 사건들이 그것을 향하여 이동해 가는 사건이다. 그분의 재림은 이 세상 역사의 종말과 영원한 왕국의 시작을 구분할 것이다. 재림에 대한 인상적인 장면을 묘사하며, 요한은 다니엘 7장 13절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인자 같은 이”의 그림과 종말에 관한 스가랴 12장 10-14절의 예언적 그림을 연결시킨다. 스가랴서에서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그들이 찌른 한 분을 보며, 그를 기인하여 애통한다. 이어서 요한은 이 두 구절을 감람산에서의 예수님의 예언적 담화(談話)에 연결시킨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그가 오시리라.”는 구절은 미래의 사건을 현재의 현실로 언급하는데, 요한계시록 도처에서 재림은 “내가 올 것이다.”라는 예언적 미래보다는 “내가 온다.”(계 2:16; 3:11; 22:7, 12, 20 참조)라는 현재 시제로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재림의 확실성과 그것의 임박성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재림의 확실성은 “예, 아멘.”이라는 말로 확인된다. 헬라어는 나이(nai)와 아멘(amen)으로 되어 있다(나이는 긍정에 대한 헬라어요, 아멘은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다).

 두 말을 합하면, 그것은 긍정에 대한 강조적 표현으로 ‘예, 진실로’라는 의미다. 유사한 사상이 요한계시록 끝에도 나온다. “진실로, 내가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서언의 마지막 기별은 영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재확증이다. 주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그분은 기역부터 히읗까지시다. 그분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시다. 성경적 관점에서, 이 세상 역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미 있는 시작과 끝이 있다. 재림은 실제로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강림이다. 그분은 과거에도 행동하였고, 지금도 행동하며, 언제나 행동하실 것이다. 약속은 약속을 준 사람만큼이나 확고하고 확실하다. 이 약속은 영원하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 이 세상 역사의 끝은 부패나 발전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하여서가 아니라 영광과 위엄 중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이르러올 것이다.35) 그리고 그 약속은 그분의 영원하신 본질과 계획에 일치하게 성취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미래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붙들고 있는 영원하며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요한계시록은 영존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전체 역사를 통제하고 계심을 확증한다. 그분은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아신다. 그분은 궁극적으로 역사의 진로를 이끄신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근원이시다.
1:1-8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 1장 1-8절 뒤돌아보기

 이상의 몇 절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기별을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몇 가지를 관찰하였다. 우선, 요한은 바로 처음부터 요한계시록이 두 개의 지배적인 주제 위에 세워졌음을 명확히 한다. 지배적인 첫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그분은 누구시며,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무엇을 행하시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요한계시록의 첫 번째 초점이시다. 그는 요한계시록의 기별들의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시다. 지배적인 둘째 주제는 “반드시 속히 될 일” 즉,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 사건들과 함께 있을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한 내용이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것이 향하여 가는 사건이 바로 재림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단지 종말에 대한 계시로만 보는 그 어떠한 해석도 요한계시록의 근본 목적을 놓치는 것이다. 요한은 우리에게 자신의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된 것이라고 단언한다. 종말적 주제는 십자가 상에서 이미 일어난 일에 비추어서만 그 중요성을 지닌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연구하면서 괴상한 이미지와 장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사 부활하여 이제는 우주의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주님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통제 하신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종말적 사건에 대한 묘사는 우리를 주눅 들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여전히 확고한 약속을 주셨다. “두려워 말라.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엘렌 화잇은 미래에 관한 집착에 대하여 경고한다. “많은 이들이 현재의 의무, 현재의 위안과 축복에서 눈길을 돌려, 미래의 위기에 관한 곤란을 미리 당겨온다. 이것은 환난의 때를 미리 조성하는 것이며, 그런 식으로 기대된 환난을 위하여는 은혜를 받지 못할 것이다.”  화잇은 또 덧붙였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올 환난의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계속 백성앞에 제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 중에 흔들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에게 전해야 하는 현대 진리가 아니다.”37)

 또한 서언은 요한계시록이 예언적-묵시적 형식의 편지라고 하였다. 적어도 두 개의 중요한 핵심이 여기서 강조되어야 한다. 바울의 서신들처럼, 요한계시록은 원래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보낸 서신으로 실제적인 삶의 정황과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비록 상징적 언어로 기록되었을지라도, 일반적으로 요한계시록의 기별들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해된 것이었다. 당시의 용어들과 이미지들의 의미를 분별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소아시아의 기독교 공동체가 그 상징적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고자 노력해야 한다.

 편지 형식을 뛰어 넘어, 요한계시록은 또한 예언서다. 비록 본래 1세기의 교회에게 보냈을 지라도, 그 기별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요한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말씀하고 있다. 이 책은 분명 종말의 때에 초점을 맞추며 십자가에서 재림에 이르는 이 세상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이 책의 기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시하였던 미래를 붙들고 계신다는 것이다. 예언의 말씀은 미래에 대한 누군가의 지나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이 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38)

 미래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에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주의를 주셨다.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4:29; 13:19 참조) 엘렌 화잇은 이렇게 언급하였다. “현재 우리는 미래에 전개될 장면에 관하여 정확히 묘사할 수가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주의 큰 날이 가깝기 때문에 지금은 우리가 깨어 기도할 때라는 것이다.”39)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세상이 종말에 가까이 이름에 따라 우리를 준비시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대한 계시라기보다 종말에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과 관련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계시다.

 마지막으로, 서언은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의 기본 구조를 제공한다. 서언의 도입(1:1-3)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교회에게 전달된 과정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수께, 예수께서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그리고 요한을 통하여 교회에게 전달되었음을 나타낸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기록하고, 이어서 그것을 예언서의 형태로 교회에게 전달한다. 우리는 여기서 세 부분의 과정을 볼 수 있다.

 a.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으신다. 
 b. 예수님은 당신의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셔서 당신의 계시를 전달하신다. 
 c. 요한은 묵시 중에서 자신이 본 것들을 예언의 말씀 형태로 교회에게 전달한다.

 계시의 전달 과정은 이 책의 후반에 나타날 것이다. 먼저, 5장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인봉된 책의 형태로 계시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본다. 그런 다음 10장에서, 힘센 천사가 이제 개봉된 한 책을 요한에게 준다. 그 책을 받은 후 요한은 그 기별을 예언의 말씀으로(10:11) 백성에게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요한계시록 12장 1절은 완전히 새로운 부분이기에, 요한계시록 12장 1절부터 22장 5절까지는 인봉된 책의 내용을 기술하는 것 같다.

 이 전달 사슬은 의미심장하게도 요한계시록의 기별들이 요한에게서 시작한 어떤 기별이 아님을 보여 준다.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기별의 기원은 하늘의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다. 그 기별들은 묵시에 의해 상징적 형태로 요한에게 전달되었다. 요한은 자신이 본 것을 모두 기록하였고, 그것을 예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벧후 1:19)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의무가 있다.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정확히 말씀하신 바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주(註) ——————
1. Tenney, 28.
2. Swete. 2.
3. F. J. A. Hort. The Apocalypse of St. John(London: Macmillan, 1908). 6; Aune, Revelation 1-5,15.
4. Aune, Revelation 1-5, 19.
5. Strand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가 구약과 신약임을 보이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바른 해석이 아닌 것 같다(“Two Witnesses of Rev 11:3-12,”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19.2 [1981]: 127-135).
6.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160.
7. Donald A. Hagner, Matthew 1-13, Word Biblical Commentary 33a (Dallas, TX: Word Books, 1993), 91.
8. William H. Shea, “The Covenant Form of the Letters to the Seven Churches.” Andrews University Seminaiy Studies 21(1983):74.
9. Kenneth A. Strand, “The Seven Heads: Do They Represent Roman Emperors?” in Symposium on Revelation, Book 2,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7(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 206.
10. Roloff, 19.
11. 상동.
12. Paulien, The Bible Explorer, 2:1.
13. Fiorenza, Revelation, 40.
14.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725.
15. Fiorenza, Revelation, 40.
16.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26-27. 참조
17. Philip E. Hughes, The Book of Revelation(Grand Rapids, MI: Eerdmans, 1990), 17.
18. Roloff, 23.
19. Martin McNamara, The New Testament and the Palestinian Targum to the Pentateuch 참조(Rome: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1966), 101—105 ; 더욱 최근에 Aune은 3조로 된 하나님의 이름이 헬라자료에서 빌려온것이라는주장을 하는데(Revelation 1-5, 30-32),이것은 앞서 언급한 McNamara의 책에서 반박되고 있다.(McNamara의 견해에 대한 Aune의 반박은 Revelation 1-5. 32-33에 나와 있다).
20. Aune, Revelation 17-22, 939-940.
21. Bauckman, The Climax of Pi'ophecy, 162-166.참조
22. Swete, 6.
23. Walter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3d ed.(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620.
24. Robert L. Thomas. Revelation 1-7: An Exegetical Conimenta»y(ChicagoMoody Press. 1992). 71.
25.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29.
26. The Canon Muratory 57-59 (Wilhelm Schneemelcher, ed.. New Testament Apociypha. 2d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1991]. 이 인용은 Barclay에게서 가져왔다(ibid. 1:29).
27. Mounce. 68.
28. Metzger. Breaking the Code: Understanding the Book of Beve/ation(Nashville. TN: Abingdon, 1993). 23.
29.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I :40.
30. 상게서. 34
31. Beale. 192.
32.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 7:171.
33. Jon Paulien, The Bible Explorer. Audiocassette Series(Harrisburg, PA: TAG. 1996). 2:1.
34. Swete, 11.
35. Herman Hoeksema. Behold. He Con1eth(Grand Rapids, MI: 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 1969). 27.
36. Ellen G. White, Last Day Events(Nampa, ID: Pacific Press. 1992). 17.
37. 상동.
38. Paulien. The Bible Explorer. 2:1.
39. Ellen G. White. Last Day Events.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