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인을 각각 세부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몇 가지 일반적인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요한계시록 6장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첫째,
요한계시록 6장은
4-5장 위에 구축되어 있다.
6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5장에서 일어난 일의 결과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4-5장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하늘 보좌 등극과 왕으로서 그분의 직임의 시작, 즉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을 묘사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특별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일곱 인을 떼는 일은 그리스도의 취임과 등극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여섯째 인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것에 수반되는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6:15-17). 이것은 일곱 인의 개봉 장면이 그리스도의 승천 및 우주 보좌로의 등극으로부터 왕과 세상의 심판자로서 완전한 자격을 갖춰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의 역사적 기간을 망라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둘째,
요한계시록 6장의 사건들은 인 자체의 내용을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인을 떼실 때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일곱 인을 뗌으로써 생긴 사 건들은 모두 땅에서 일어난다. 일곱 인을 떼는 것도, 그 다음에 나오는 사건들도
요한계시록 5 장의 인봉 된 두루마리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지 않다. 두루마리는 열리지 않았으며, 그 내용들은 일곱 인 모두 떼어지기까지는 공개되지 않는다.
1) 조지 래드(George E. Ladd)에 의하면, 일곱 인을 모두 뗀다는 것은
“그 책과 종말적 사건들을 실제적으로 개봉하기 위한 예비 단계”이다.
2) 또는 케네쓰 스트랜드가 설명하듯이, 일곱 인의 개봉은
“종말적 절정인 심판 때, 하나님께서 ... 운명의 책을 펴서 읽기 위하여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길을 예비하시는 단계들 218 또는 방편”을 의미한다(
계 20:12 참조).
3) 일곱 인의 의미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일곱 인의 묵시는 전쟁으로 특징 지은 1세기의 로마제국의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이런 해석에 따르면, 첫째 인은 1세기 말 로마제국을 끊임없이 위협하였던 호전적인 파르티아(Parthians) 민족을 상징할 것이다. 그들은 언제라도 유프라테스 강을 건널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여러 번 로마 군대를 패퇴시켰다. 나머지 인들에 대한 이해도 이 해석의 노선을 따른다. 이 해석이 제시하는 바에 의하면, 인들은 로마제국의 탄압을 무너뜨린 정치적, 국가적, 그리고 실제적 무질서를 상징하였다.
5) 의심할 것 없이,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종말의 때에 살고 있었고, 당대의 적합성을
요한계시록 6장에서 찾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앞에 언급된 이해에는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다. 무엇보다도, 조지 래드가 말한 것처럼, 로마제국에서 1세기 후반의 상황은
“특별히 전쟁이 그 특징을 이룬 때가 아니었다. 실상, 로마 군대의 힘은 저항 세력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렸으므로, 아르메니아에서 스페인까지 평화가 깃들었다. 서방 세계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위대한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여러 세기에 걸쳐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무력에 기초한 평화였다. 그리고 그 군대의 주둔으로 나타난 로마의 힘은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6) 둘째, 일곱 인에 대한 문자적 이해는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성격과 어긋난다. 인들의 장면에 나오는(첫째 인의 흰말과 같은) 수많은 요소들은 문자적 적용에 맞지 않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이해는 책 전체의 신학적 구조와 맞지 않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6장의 신학적 의미는 파르티아인들과 로마제국 사이의 전쟁보다 더 깊다.
그렇다면 일곱 인을 템으로써 발생하는 사건들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 열쇠는
5장에 있다. 그러므로 일곱 인을 떼는 장면은 그리스도의 등극과 함께 시작된다. 구약에서 새 로 등극한 왕이 그의 보좌에 올랐을 때, 온 나라의 운명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구약의 여러 즉위식에는 일반적으로 새로 등극한 왕의 심판 행위가 뒤따랐다. 그 때 왕은 불충하며 반역자로 드러난 자들을 처벌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는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에게 호의를 베풀곤 하였다(
왕상 2장;
16:11;
왕하 9:14-10:27;
11:1, 13-16 참조). 이 심판의 측면이 일곱 인을 떼는 묵시에 나타나 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그분의 등극으로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그분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를 상징한 언약의 두루마리를 받으셨을 때, 온 인류의 운명은 그분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분은 자신의 충성된 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고,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도록 권세를 부여하셨다(
계 5:9-10; 1:5-6 참조), 이어서, 일곱 인의 개봉에서 묘사된 것같이, 새로 등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전쟁, 살육, 기아, 염병 등 지상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사슬을 연속적으로 당기셨다.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요한계시록 6장에서 그들이 발견했을 적용과는 상관없이, 그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배경이 되는 성경의 본문들은 일곱 인을 개봉하는 것이 왜 중요하며,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다.
일곱 인의 구약적 배경 언약의 저주들. 존 폴린의 말대로,
요한계시록 6장 1-8절의 언어는
“오경에 나오는 언약의 저주들과 바벨론 유랑을 통한 저주 집행”과 평행을 이룬다.
7)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인도하여 내신 후, 그분은 그들과 어떤 세부 조항들이 포함된 언약을 맺으셨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과 협력한다면, 그들은 상급과 축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언약을 순종치 아니하고 계속 불순종한다면, 언약의 저주들로 알려진 파국적인 결과를 당할 것이다(
신 28:15-68 참조).
구약에서 언약의 저주들은
“전쟁, 기근, 역병, 그리고 들짐승들”로 묘사되었으며,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네 가지 중한 벌”로 언급되었다(
겔 14:21; 렘 15:3 참조: 개역표준역 RSV,
“네 종류의 파괴자들”). 이러한 언약의 저주들의 근간이 되는 본문은
레위기 26장 21-26절이다.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 배나 더 칠지라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저자가 강조함).
위의 말씀에 이스라엘의 불충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실 형벌들이 묘사되어 있다.
레위기 26장과
요한계시록 6장에 사용된 언어, 즉 칠중의 재앙-칼, 기근, 염병, 그리고 들침 승 등 사이에 평행을 이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 재앙들은 모두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임한다. 더욱이, 기근은 저울에 빵을 달아서 주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레 26:26; 계 6:6 참조). 동일한 언어와 개념들이
신명기 32장 23-25절의 모세의 고별 설교에서 반복된다.
시작 단계에서, 언약의 저주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내리신 예비 심판들이었다. 그 저주의 목적은 백성으로 그들의 배도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고, 그들로 회개하게 하며, 하나님과의 적극적인 관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구약에서 분명한 것은, 그 저주들을 실행함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앗수르와 바벨론 같은 원수의 나라들을 이용하셨다는 것이다. 이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심판을 내리실 때, 종종 그분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앗수르를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 10:5-6).
그러므로 언약의 저주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언약에 불성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보호막을 거두실 것이다. 그 결과로 원수의 나라들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힐 것이다. 그들은 그 백성을 대적하여 검으로 칠 것이다. 들짐승들이 그들에게서 자녀들을 빼앗을 것이며, 그들의 생축을 멸할 것이다. 염병과 기근이 그 땅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죄를 고집한다면, 최후의 결과로서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부터 유랑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후기 역사에서, (어떤 순서로도 올 수 있는)
“네 가지 중한 벌”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일반적으로 언약에 불성실한 것과 관련하여 심판의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 심판들은 너무나 잘 알려진 고정 관념적인 것이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살기를 고집스럽게 거절한 것에 대한 결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에서, 이 심판들은 언약의
‘화(禍)들’에 대한 전문 용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로 배도를 벌하셨고, 백성이 회개하도록 애쓰셨다(
렘 14:12-13; 15:2-3; 21:6-9; 24:10; 29:17-18; 겔 5:12-17; 6:11-12; 14:12-23; 33:27-29), 회개에 실패한 이스라엘과 유다는 궁극적 심판, 곧 유수를 겪었다.
데이비드 아우니는, 바르 코크바(Bar-Kohba)의 반란(서기 132-135)으로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에 대한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의 한 보고에 주목한다.
“오십육만 명이 수 차례의 습격과 전투 즉 칼로 살해되었고, 기근과 질병, 그리고 불로 파멸된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리하여 온 유대가 황폐화되었다. 이런 결과에 대하여 백성들은 이미 전쟁 전에 경고를 받았었다.... 수많은 늑대와 하이에나들이 그들의 도시로 울부짖으며 뛰어 다녔다.” (괄호 안은 아우니의 삽입)
8) 이 묘사에서 구약의 언약에 나오는 칼, 기근, 질병 및 들짐승 등 저주의 모든 요소를 볼 수 있다.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벌하기 위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이 원수의 나라들이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는 일에 그 도가 지나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심판을 원수들에게로 향하게 역전시키셨다.
신명기 32장 41-43절에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
나의 화살로 피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열국에 대한 자신의 예언에서, 요엘은 열국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처벌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욜 3:2-7).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그들이 너희 목전에 시온에서 모든 악을 행한 대로 내가 바벨론과 갈대아 모든 거민에게 갚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51:24)
이 예언은 바벨론 유수로 성취되었다. 그때 자기 백성에게로 향했던 하나님의 심판들이 이제는 자기 백성을 괴롭힌 원수의 나라들에게 향하였다.
9) 스가랴 1장 12-15절은 이런 개념에 대한 대표적 본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유사한 진술들이 선지서의 다른 본문들에서 발견된다(
렘 50:17-20, 33-34; 51:24; 욜 3:19-21; 습 3:19-20; 슥 14:3-21 등 참조).
언약의 저주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쏟아졌을 때,
“그 저주는 백성들로 회개케 하기 위한 예 비적 심판이었음을 주목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그 언약의 저주는 자기 백성의 피를 흘린 열 국 위에 쏟아졌을 때 복수의 심판으로 임하였다(다섯째 인 참조).”10) 앞서 나온 선지자들의 글은
“일곱 인에 대한 충분한 평행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확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즉, 계시자[요한]는 그가 요한계시록 6장을 기록했을 때 그 평행구들을 알고 있었다”고 폴린은 결론지었다.
11) 요한계시록 6장의 언어와 구약의 언약/저주의 구절들 사이에 있는 현저한 평행구들은 일곱 인의 개봉 장면과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신약의 언약과 그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생긴 결과들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 데이비드 마샬(David Marshall)이 말하듯이,
“복음이 전파되고 거절될 때마다 결과들이 따랐다.”12) 이것은
요한계시록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인봉된 언약의 두루마리를 하늘보좌에서 그분의 등극의 표로 취하셨다는 사실, 곧 그분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를 대표한 행위라는 사실에 의해 지지된다. 그러므로 그분의 등극은 언약의 내용들이 집행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스가랴의 묵시. 일곱 인의 개봉 장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구약의 또 다른 성경 구절은
스가랴 1장 8-17절이다. 선지자는 묵시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각기 다른 색깔의 네 말을 보았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네 말의 색깔은 그들이 수행하는 일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반면, 스가랴의 묵시에서 말들의 색깔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 같다.
스가랴 6장에서, 이 네말은
“하늘의 네 바람[영들]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즉
6:5)으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7장 1-3절의 네 바람이
신명기 32장에서처럼 언약의 반전(反轉)으로 풀려난
요한계시록 6장의 말들과 관련이 있음을 드러내는지도 모른다.
13) 스가랴의 묵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것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과 불성실 탓에 처벌을 받았다.
스가랴 1 장 12절의
“언제까지” 라는 질문은
요한계시록 6장의 다섯째 인의 개봉 장면에서 보인 제단 아래의 순교자들의 부르 짖음을 상기시킨다. 스가랴에게 그 대답이 주어졌다.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즉
1:14, 15) 그분의 백성은 그들의 불성실과 죄로 인해 형벌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보호의 능력을 제거하셨고, 그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시고, 그 압제자들에 대한 심판을 행하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요한계시록 6장은 분명히 언약-저주의 형태를 따른다. 첫 네 인들을 개봉할 때 묘사된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을 일깨우고 회개시키며 회복케 하려고 의도되었던 결과 또는 예비적 심판들을 묘사한다. 베드로의 언급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한다(
벧전 4:17),
요한계시록 6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가혹한 핍박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다섯째 인의 개봉 장면에서, 제단 아래의 순교자들은 자신들을 신원해 달라고 부르짖는다.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계 6:10) 이 부르짖음은
스가랴 1 장 12-15절의 부르짖음과 현저하게 평행을 이룬다.
여섯째 인의 개봉 장면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에게로 향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원수들에게 쏟아질 심판의 때가 이르렀다.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을 받아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타난다(
7:9-17;
21-22장 참조), 그들의 원수들은 이제 일곱 나팔을 부는 장면에서 묘사된 혹독한 심판을 경험할 것이다. 일곱 나팔 재앙(
요한계시록 8-9장)은 진실로 요한계시록 16~
20장에 묘사된 최후의 그리고 궁극적 심판에 앞서 있을 예비 심판이다.
요한계시록 6장의 신약적 배경 또한
요한계시록 6장은 공관복음 묵시록(Synoptic Apocalypse), 곧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그리고
누가복음 21장에 기록된 감람산의 예수님의 종말적 담화와 평행을 이룬다. 그 설교에서 예수님은 종말의 때가지 이어질 사건들을 묘사하신다. 그분의 언어는
요한계시록 6장의 요한의 언어를 상기시킨다. 일곱 인은 공관복음의 묵시문학적 배열을 밀접히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덧붙여, 공관복음의 묵시록에 나타난 사건들과 일곱 인을 개봉할 때 수반되는 사건들 사이에, 비록 언제나 동일한 순서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주제적 평행구들이 많이 나타난다. 많은 주석가들은
요한계시록 6장의 구조와
마태복음 24장과
마가복음 13장에 기록된 공관복음 묵시록 사이에 이러한 유사점들이 있음을 주목하였다.
14) 242쪽의 비교는 이러한 평행구들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1세기와 재림 사이에 하나님의 백성이 겪을 경험을 묘사하실 때, 그분은 구약의 언어와 주제를 사용하신다. 저주들은
“주의 날”에 수반되는 하늘의 징조들과 통합되었다.
15)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영감의 저자는 유사한 디자인 형식을 사용한다. 공관복음의 계시와
요한계시록 6장 사이의 평행구들은 일곱 인의 개봉 장면이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등극하신 때로부터 그가 땅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땅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언급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종말의 때에 살고 있다고 믿은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의 징조-전쟁, 반란, 내란과 경제적 투쟁, 기근, 온역, 신실한 자들에 대한 박해, 거짓 선지자들, 복음의 전파들이 자신들 당대에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감 받은 요한계시록의 저자의 의도는 분명히 1세기의 상황을 넘어선다.
공관복음의 묵시록은 주로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째, 예수님은 1세기와 재림 사이에 있을 기독교 시대의 전반적인 실체들을 묘사하신다. 그 시대는 복음 선포의 시대요, 전쟁, 기근, 온역, 그리고 핍박의 시대다(
마 24:4-14). 예수님은 이것들이 종말의 징조로 의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땅은 그들의 집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속히 오심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요한계시록 6장의 첫 네 인은
마태복음 24장 4-14절과 평행을 이룬다. 그 인들은 단순히 종말의 때와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기독교 시대의 실상들과 관련이 있다.
두 번째 부분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수반될 특별한 환난의 기간에 대해 간략히 말씀하신다. 이 기간에 하나님의 백성은 엄청난 핍박을 당할 것이다(
마 24:15-22). 다섯째 인의 개봉 장면은 분명히 이 부분과 평행을 이룬다. 비록 핍박이 사도 시대에 시작되었을지라도, 제단 아래에서 부르짖는 순교자들의 부르짖음은 예수께서 감람산 설교에서 예언하셨던 환난과 핍박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 24:21)
셋째,
마태복음 24장 23-31절에서 예수님은 이 환난의 때에 “재림 자체로 이끌어갈 하늘의 징조들과 마지막 때의 기만이 뒤따를 것임을 설명하신다.
16) 여섯째 인은 중세의 대 환난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잘 들어맞는다. 이 기간은 파멸적인 1755년의 리스본 지진과 하늘의 징조들로서 1780년의 암흑일과 그 날 밤에 달이 핏빛으로 변한 일, 그리고 1833년의 광휘 찬란 한 유성우로써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들을 감람산의 담화 중 말씀하신 예수님의 예언의 성취로 간주하였다. 그 설교에서 예수님은 큰 환난 직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말씀하셨다(
마 24:29).
그러나 여섯째 인은 재림 전에 그리고 그것과 관련하여 일어날 미래의 사건들을 가리킨다. 일곱째 인을 뗄때의 침묵은 분명히 재림 후에 일어난다(
계 8:1).
존 폴린은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 때의 기만이 여섯째 인을 뗄 때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요한의 간단한 묘사에서 생략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후에 요한계시록 13-17장에서 매우 자세히 취급되었다. 그러므로 여섯째 인을 뗄 때에 일어날 사건들은 요한계시록 13-17장에서 묘사된 것들과 동시대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17) 일곱 인 개봉의 성격 요한계시록 6장의 장면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예수께서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으신 것처럼, 이기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있는
요한계시록 3장 21절의 도약판 구절은 일곱 인 개봉의 성격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와 그 후속으로 그분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보좌에 좌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요한계시록 4~
5장이
요한계시록 3장 21절의 후반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음을 관찰하였다.
요한계시록 7장 9-17절은
요한계시록 3장 21절 전반부의 성취를 기술하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게 될 승리자들과 관련이 있다.
6장이
5장과
7장 사이에 놓여 있으므로, 일곱 인의 개봉은
3장 21절의
“이기는 자에게”라는 진술과 상응한다. 일곱 인의 개봉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마침내 그분의 보좌에 앉게 될 때까지의
‘진행 기간’과 상관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의 백성은 이기는 과정에 있다.”18)
계 4-5장 |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고 아버지와 함께 그의 보좌에 좌정하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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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6장 |
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의 진행 과정을 묘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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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7장 |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보좌에 좌정하신 그리스도와 합류 (9-1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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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요한계시록 6장의 일곱 인의 개봉 장면은,
“특별히 그 초점을 복음과” 세상에서 겪을
“하나님의 백성의 경험”에 맞추면서, 십자가와 재림 사이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9) 오순절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등극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이 퍼져 나가는 출발점이다. 복음이 선포되고 있을 때, 지상의 하나님의 백성은 종종 신실하지 않다. 아시아 속주의 일곱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과 필요는 전 역사에 걸친 모든 기독교회의 상황과 필요를 반영한다.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기별은 하나님의 백성을 경고하고 그들의 죄된 상태에서 그들을 일깨우고 회개케 하기 위하여 보내졌다. 일곱 기별의 궁극적 목적은 그들로 승리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승리자들 만이 언젠가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를 공유하게 될 것이며, 그들은 일곱 교회에 보낸 기별 속에 약속된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일반적 적용 외에는 일곱 교회와 마찬가지로 일곱 인을 떼는 광경을 기독교 역사의 여러 다른 기간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한 것 같다.
20) 에베소 교회에 보낸 기별처럼(
2:1-7) 첫 인을 떼는 장면은 짧은 기간 동안 복음이 세계적으로 신속히 전파된 일반적 충성으로 꼴지워진 사도시대와 일치한다. 둘째 인의 개봉 장면은 로마제국에 편만했던 핍박의 기간에 잘 맞는 것 같다(
2:8-11), 셋째 인은 점차적인 영적 쇠락과 중세 암흑 시대로 끌고 간 타협으로 꼴 지워진 그 다음 기간에 적용될 수 있다(
2:12-17 참조), 넷째 인은 그 뒤를 이은 하나님의 말씀 기근의 때에 적용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중세 시대를 통틀어 기독교를 꼴 지은 영적 사망으로 들어갔다. 참된 믿음이 없어지고 사랑의 복음 기별이 저항을 받아 잊혀지고, 점차적으로 전통으로 대치된 영적 쇠퇴와 핍박의 시대였다. 중세 이후의 혹심한 핍박 속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섯째 인의 상징적 장면은 중대한 의미가 있었는데, 특히 종교개혁 이후 17, 18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에 더욱 특별하였다. 그리고 여섯째 인은 분명 우리를 마지막 때의 재림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 6장이 어떤 진행 과정을 묘사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을 통하여 자기 백성으로 승리자가 되게 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를 공유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인도하신다.
21) 일곱 인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그분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도구들이다.
22) 공관복음 묵시록은, 재림을 선포하는 사건들의 목적이 종말의 가까움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감람산 담화의 결론에서 분명해진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눅 21:34-36) 인들의 개봉에 대한 묵시와 감람산 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종말적 담화에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이 사건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일깨우고 회개케 하기 위함이다.
요한계시록 3장 21절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승리자들은 어느 날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다섯째 인을 공개하는 장면에서,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은
“언제까지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7장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답을 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실한 백성을 의롭다고 하실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인내해야 한다. 그 약속이 성취되기 전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성도들을 핍박한 자들과 원수들 위에 쏟아질 것이다. 이 심판의 행위들은
요한계시록 8-9장의 나팔을 부는 상징적 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