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봉된 두루마리 (5:1-14)
 요한계시록 5장4장의 장면 위에 구축된다. 여기서 요한은 보좌에 좌정해 계신 하나님의 그 우편에서 ‘안팎으로 쓰인’ 일곱 인으로 인봉된 하나의 두루마리를 본다. 그는 온 우주의 어느 누구도 그 특이한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치 않음을 알게 된다. 그 후, 어린양/사자 같은 형상, “죽임을 당한 것” 같은 “다윗의 뿌리”가 그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하다는 것이 알려지는데, 이는 그분이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보좌에 좌정해 계신 분의 오른 편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셨을 때, 찬양의 송가가 온 우주에 울려 퍼진다.

인봉된 두루마리 (5:1-14)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오른 손에.
 헬라어 에피 텐 덱시안(epi tén dexian)은 일반적으로 ‘오른손에’로 번역 되어 왔다. 주된 이유는, 요한이 이 비유적 표현을 에스겔 2장 2-10절에서 끌어온 것으로 주장 되었기 때문인데, 에스겔은 하나님의 펼친 손에서 한 두루마리를 보았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5장 1절은 그분의 오른손에 두루마리를 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이 되리라. 에피 텐 덱 시안이라는 구절은 성경에서 이 곳 외에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헬라 문헌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렵다. 서기 1세기에서 7세기의 문헌에 가끔 나타나는 이 표현은 에피 텐 덱시안이 영어의 ‘오른편에, at the right hand’와 상응하는 관용구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기본적으로 (신체의 한 부분으로서) 오른손이 아니라 오른편과 관련이 있다. 이는 요한이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보좌 위에서 인봉된 두루마리를 보았음을 의미한다.1)
두루마리.
 서기 1세기에 헬라어 비블리온(biblion)은 두루마리에 대한 통상적인 단어였다. 또한 비블리온은 사용된 재질들(파피루스, 점토판, 또는 양피지 같은)과 상관없이, 코덱스 (codex 낱장들을 한데 묶은 것), 일반 글, 편지, 그리고 법적 문서 등과 같은 여느 형태의 문서에 대하여도 사용되었다. 증거에 따르면, 요한계시록 5장의 인봉된 비블리온은 두루마리 형태에 속하는 책이다.

 첫째, 코덱스는 서기 1세기 후반 또는 2세기가 되기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2)

 둘째, 하늘이 종이 축(비블리온)이 말린 것같이 떠나갔다는 요한의 묘사는(계 6:14), 요한 자신은 코덱스보다는 두루마리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안팎으로’라는 구절은 책이 아니라 두루마리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다. ‘안’은 두루마리가 펼쳐지기 전 그것의 안쪽을 가리키고, ‘밖’은 두루마리가 펼쳐진 후 그것의 뒤쪽을 가리킨다.
안팎으로 썼고.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르다고 본다. 그러나 문장상 ‘밖’‘인으로 인봉된’을 연결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안쪽에 쓰였고, 밖에는 일곱 인으로 봉해졌고). 문법적으로는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렇게 이해할 가능성은 낮은데, 왜냐하면 “안팎으로 썼고”라는 구절은 비교적 희귀한 고대의 관습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고대의 두루마리들은 일반적으로 한 편(안쪽)에만 쓰였고, 뒤(바깥)는 종종 공란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때때로 안쪽에 쓰인 것이 뒤쪽으로 넘어가서 거기에서 완성되었다. 양피지의 양편에 기록한 문서들은 오피스쏘그라포스 (opisthographos)라고 칭해졌는데, 서기 1, 2세기에는 희귀한 것이 아니었다.3) 적어도 양편에 기록된 두 문서, 즉 모세가 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증거의 두 판”과(출 32:15) 에스겔이 본 “그 안 팎에 글이 있는” 두루마리 등이 구약에 언급되어 있다(겔 2:9-10).

 “안팎에 썼고”라는 구절은 요한 당시에 널리 알려지고 사용되었던 소위 ‘이중(二重)문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중문서는 꼭 같은 종이 위에 같은 내용을 두 번 기록 하였다. 파피루스의 상반부는 변경이나 수정을 방지하기 위해 말아서 실로 묶었으며, 하반부는 묶지 않은 채로 두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말리고 묶여진 부분은 안쪽 본문으로, 묶이지 않은 하반부는 바깥 본문으로 지칭되었다.4) “안팎으로 썼고”라는 구절이 그 안쪽과 뒤편에 완전 문서로 기록된 두루마리 문서인지 아니면 두루마리 형태로 된 이중문서를 가리키는지를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요한계시록 5장의 문맥은 두루마리의 한 부분은 인봉되었고, 다른 부분은 펼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0장의 작은 두루마리는 이중문서의 인봉되지 않은 바깥쪽 본문을 언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봉하였더라.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 5장의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졌다고 기술되었다. 이것은 고대 세계에서 문서를 봉하는 일반적 관습과 일치하였다. 법적 문서(매매, 계약, 유언, 그리고 서신과 같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압인(押印)은 기록된 내용의 끝에 보통 인장이나 반지로 찍혔다. 그러므로 봉인(封印)은 문서의 신빙성, 유효성, 권위, 비준, 또는 보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인(sign)의 기능을 대신하였다. 부적절한 폭로로부터 내용을 보호하기 위하여, 문서는 실로 묶여서 그 매듭 위의 불래(bullae 진흙, 밀랍, 혹은 그 외의 부드러운 재질로 된 한방울의 액체)에 납인되곤 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파피루스는 두루 말린 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다(욥 38:14). 인이 깨뜨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인봉된 문서가 공개되지 않았음을 의미 할 것이다. 소유주만이 인을 깨뜨려 그 내용을 공개할 수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인치는 관습은 평범한 일이었다. 계약에 대한 예레미야의 이야기에서, “매매 문서”를 증인들 앞에서 인쳤으며, 그러한 매매 문서는 법적 구속력을 가졌다(렘 32:10, 11), 이사야가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사 29:11)이라고 말했을 때, 아마 그런 문서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주변 국가들 가운데는 흔히 개인이 인을 소유하였던 반면, 이스라엘에서는 기본적으로 왕들과 관리들이 인을 소유하였다. 구약에서 인을 찍는 일은 일반적으로 공식적, 법적 행위로서 종종 대부분 왕이나 그의 신하에 의해 수행되었다.
일곱 인.
 하나 이상의 인으로 문서를 봉인하는 관습은 요한 당시의 고대 근동에서 널리 퍼져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두 개에서 일곱 개 혹은 그 이상의 인으로 봉인된 문서들을 많이 찾아내었다. 예를 들어 어떤 증거에 의하면, 일곱 개 이상의 인이 사용된 경우가 있었다 하더라도, 로마법은 유언이나 언약이 그 내용을 효력 있게 하기 위하여 증인들에 의해 최소한 일곱 인으로 봉인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동일한 로마법 체계는 계약이나 출생신고 등을 포함한 몇몇 다른 문서들은 일곱 증인이 사인을 함으로써 공인되도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에는 봉인한 자들의 이름이 있어 그들에 의해서만 열 수 있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5장의 인봉된 두루마리에 대한 묘사가 요한 당시의 법적 문서의 보편적 유형과 일치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당시 대개의 인봉된 두루마리가 그러했듯이, 요한계시록 5장의 두루 말리고 끈으로 묶인 두루마리는 그것의 바깥 가장자리를 따라 밀랍으로 된 인들이 매듭에 찍혔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 인이 모두 떼어지기 전까지는 열 수 없었고, 그 내용이 공개될 수 없었다. 일곱 인 모두를 떼는 것은 두루마리를 실제로 열고, 그 내용을 공개할 수 있기 위한 예비 혹 준비 절차다.5)
일곱.
 두루마리가 일곱 인으로 봉인되었다는 사실은 요한계시록과 성경 전체의 ‘일곱’이라는 숫자의 의미에 비추어 특히 중요하다(일곱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이든 상징적이든, 거의 600 구절에 걸쳐 나온다). ‘일곱’“다소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성경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된 유일한 숫자”이며, “당대의 성경 밖의 문학에서 일관되게 상징적으로 사용된 유일한 숫자”다.6)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듯이, ‘일곱’의 상징적 사용과 관련한 고대의 기본적이고, 구약적인 개념은 ‘충만’, ‘완성’ 또는 ‘완전’을 뜻한다. 칼 렝스토르프(Karl H. Rengstorf)는 충만 그리고 전체라 는 의미의 일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곱이 갖는 의미는 시간이 칠일이라는 주기 속에서 흐르고 있다는 관찰에서 기인된다. 이것은 일곱과 완성된 기간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추상적 일곱이라는 숫자와 전체 또는 완성이라는 개념의 일곱을 같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발판이 된다. 일곱은 완전한 전체를 대표하기에 짧고도 함축성 있게 전체를 표현하는 소정의 단위다. 따라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전체, 즉 하나님께서 원하여 정하신 전체라는 특성을 지닌다.7)
구약에서 ‘일곱’은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 사이에 체결된 언약에 대해 성수(聖數)의 역할을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언약 관계들과 책임들” 그리고 의식 제도는 ‘일곱’이라는 숫자와 연관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8) 신적 총체성의 표현으로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요한계시록에서 56회 사용되었다). 본 주석의 서론에서 보았듯이, 숫자 ‘칠’은 요한계시록의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합당하냐.
 헬라어 악시오스(axxios)는 ‘합당한’, ‘존중할 만한’, ‘받을 가치가 있는’, ‘적합한’, 그리고 ‘적절한’ 등의 의미가 있다. 요한 당시에 ‘합당한’이라는 개념은 어떤 후보를 일반적 특성 혹은 가치에서 높은 지위나 명예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해주거나 적합하게 해줄 뚜렷한 자격으로 발전하였다. 뛰어난 로마 귀족은 그가 이룩한 탁월한 성취로 인해 칭송과 중앙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로 간주되곤 하였다. 요한의 때로부터 ‘합당함’은 로마 황제가 자신의 통치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 가치가 되었다. 즉, 황제는 신하들의 애정과 충성을 이끌어냈으므로 통치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이다. 왕권과 명예와 관련되어 있는 이 세속적 용어는 점차적으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언어에 스며들었다. 이 용어는 구약의 왕권과 제사장직과 관련하여 유대인 저술가들이 자주 사용하였다.9) 요한계시록 4장5장에서 ‘합당한’이라는 용어는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특별한 지위와 임무를 부여하는 독특한 자격을 가리킨다. 4장 11절의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존귀와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5장에서, 그 죽음을 통해 구원을 받을수 있게 된 그분의 승리적 죽음에 의해(5절) 어린양은 두루마리를 취하기에 합당하신 자로 선언된다(5:9). 그 후 그분은 왕권에 해당하는 모든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 되신다 (5:12). 마지막으로,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분”과 어린양은 온 땅과 하늘의 존재들로부터 존귀와 예배를 받으신다(5:13-14).10)
요한계시록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유다 지파의 사자.
 이 칭호는 창세기 49장 9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곱의 마지막 축복에서 유다는 승리의 사자로 칭함을 받았다. 고대로부터 짐승들의 왕으로 불렸던 사자의 힘과 용기와 위엄스런 모습은 유대교에 있어서 승리의 메시야를 상징하기에 적합하였다. 예를 들면, 외경서 에스라 4서에는 “지극히 높으신 자가 마지막까지 보전하셨고, 다윗의 후손에게서 일어 날 메시야”로 묘사된 위압적인 사자를 언급하였다.11) 유대 전승에 나타난 여러 다른 예에 의하면, 창세기 49장에 비추어 해석된 사자의 모습은 메시야와 왕의 대권을 상징하며, 그것은 다윗의 보좌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12)
다윗의 뿌리순.
 이 칭호는 “유다 지파의 사자”를 다윗 왕의 후손으로 지칭하는 앞의 칭호를 가장 명확히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 칭호는 이사야 11장 1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구절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화평과 의의 미래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선언한다(사 11:10 참조). 본 구절에서 “뿌리”는 베임을 당한 다윗의 넘어진 나무에서 나올 새 순의 근원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성취하시고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순)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할 때인 미래에 대하여 말한다(렘 23:5-6; 33:14-16). 스가랴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고하여 이르기를 만 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슥 6:12-13)13)

 위에 언급한 구약의 여러 구절 중에서, “뿌리(순)”는 다윗의 보좌의 영구성과(삼하 7:12-16 참조) 관련하여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이 성취될 때와 연관되어 있다. 그 때에 한 후손이 다윗의 보좌에 앉아 만국을 다스릴 것이다. 요한 당시의 유대 백성 중에서, “다윗의 뿌리(순)”는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 메시야와 관련하여 그들이 선호하는 칭호가 되었다(눅 1:32-33 참조), 신약에서 ‘다윗의 뿌리’‘다윗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빼어난 왕, 메시야인 예수님과 관련하여 잘 알려진 칭호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사야 11장 10절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히 성취된 것으로 인용한다(롬 15:12),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진술에서 뿐만 아니라(22:16), 중요한 예언 부분의 서두에서(5:5) 그리스도를 “다윗의 뿌리(순)”로 제시하는 것은 특별히 흥미롭다. 이것은 구약의 약속들이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요한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일곱 뿔.
 구약에서 뿔은 힘과 권세를 대표한다. 애굽 인들에게 하나님은 들소의 뿔과 같았다(민 23:22). 모세의 축복 중에서, 요셉은 그의 뿔로 열방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게 된다(신 33:17), 한나의 뿔은 주 안에서 높임을 받으며, 그녀는 대적들 앞에서 담대히 설 수 있다. (삼하 2:1). 특별한 방법으로, 뿔은 왕의 권세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여호와께서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삼상 2:10) 선지자 시드기야는 수리아에 대한 아합 왕의 승리의 상징으로서 철로 된 뿔을 만들었다(왕상 22:11). 그리고 뿔은 요한계시록에서 그와 같이 상징적으로 사용된다(12:3; 13:1; 17:3, 12; 다니엘 7-8장 참조). “일곱 뿔”은 권세의 충만 또는 전능을 의미한다.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이 비유적 표현은 스가랴 4장 10절에서 온 것으로, 선지자는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 곧 일곱 등불을 보았다. “일곱 눈”은 전능을 의미한다(계 1:4의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눈’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온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성령에 대한 상징적 언어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헬라어 아포스텔로(apostelló 내보내다, 보내다)는 특별한 임무를 띠고 보냄을 받은 공식적인 대표에 대한 전문 용어다(마 11:10; 행 10:17; 계 1:1; 22:6 참조).14) 이 곳에 쓰인 용어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권세로 일하시는 성령의 세계적 사명을 가리킨다.15) 이러한 보냄과 성령의 사명은 요한복음에서 더 자세히 설명한다(14:26; 15:26; 16:7-15).
요한계시록 5: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오른손에서.
 헬라어 엑 테스 덱시아스(ek tés dexias)요한계시록 5장 7절 이외에는 신약의 어느 곳에도 “오른손에”(5:1)라고 나오지 않으며, 헬라 문헌에서도 매우 희귀하다. 그나마 있는 증거는 그 뜻이 ‘오른손에’ 혹은 ‘오른편에’를 뜻한다고 제시한다.16) 그러나 이 구절의 의미는 앞서 나온 5장 1절“오른편에”라는 관용구에 근거하여 정의되어야 한다. 인봉된 두루마리가 하나님의 우편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엑 테스 덱시아스가 여기서는 “오른 편”을 의미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요한계시록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고.
 흠정역 성경은 일인칭 복수 목적어를 넣어서 본문을 번역한다. “당신이 ...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여 하나님께 드리시고.” 올바른 독법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신원을 밝히는 데 있어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원본에 있었다면, 그것은 노래하는 사람들(장로들과 네 생물)을 구속받은 무리 중에 포함시키는 것이리라.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에티오피아 사본은 ‘우리’(헤마스 hémas)를 배제하는 반면, 다른 모든 헬라어 사본들과 역본들은 ‘우리’라는 대명사를 ‘하나님께’ 앞이나 뒤에 또는 그것 대신으로 넣는다. 알렉산드리아 사본이 최상의 증인이라는 기존의 주장에 기초하여 ‘우리’를 본문에서 제외시켰다. ‘우리’ 를 포함시켜야 할 강력한 사본적 지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내적 요인들은 ‘우리’가 생략된 본문을 우선적인 독법으로 지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9절의 일인칭이 10절에서 삼인칭 [저희로]으로 갑자기 바뀌면 매우 어색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장로들과 네 생물이 노래를 했다는 사실은 네 생물을 구속받은 성도들과 동일시하는 결과가 되어 이것 역시 문맥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개념이다.
요한계시록 5: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저희로 ...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흠정역은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우리를 ...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흠정역의 독법은 후기의 하급 본문에 기초해 있다. 흠정역 번역자들은 라틴 불카타(Latin Vulgate)에서 그 본문을 취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필사자들이 일인칭 독법을 취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1장 6절과 본문을 상관시키려 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 편으로, 동사 ‘다스리다’ (그들이 다스리다)의 현재 시제의 독법과 미래시제의 독법(그들이 다스릴 것이다)은 똑같이 사본학적 지지를 받는다. 헬라어 신약 성경의 UBS와 NA 편집위원회와 많은 주석가들은 “알렉산드리아 사본이 미래시제인 바실류수신(basileusousin)을 현재시제로 잘못 읽고 있다”는 그들의 관찰에 근거하여 미래시제를 선호한다.17)
(주해)
 요한은 여전히 하늘 성전/궁전의 열린 문을 통하여 주시하고 있다. 갑자기 장엄한 축하 예배가 사라지고 모든 시선이 보좌에 집중된다.
요한계시록 5: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이번에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우편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본다.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 있다기보다 오른편 보좌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고대 근동에서 보좌는 “하나의 자리가 아니고 흡사 소파 같”았다.18) 그래서 한 사람 이상이 그 위에 앉을 수 있었다. 왕의 오른편에 앉는 것은 최고의 영광으로 간주되었다. 인봉된 두루마리는 하나님 우편 보좌에 와서 그것을 취하고, 그 자리에 앉을 합당한 후보자를 기다리고 있다. 두루마리를 취하여 열 수 있는 능력은 통치권을 대표할 것이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왕이 보좌에 올랐을 때, 그는 왕관과 함께 언약의 두루마리를 받았다. 그 두루마리는 바로 신명기였으며(왕하 11:12; 신 17:18-20; 삼상 10:25 참조), 또한 그것은 보좌 등극의 상징이 되었다. 두루마리를 받은 새 왕은 보좌에 앉아 통치를 시작할 것이었다. 두루마리를 소유하여 그것을 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통치권과 발생 가능한 어떤 위기 상황을 대처할 권한이 왕에게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동시에, 언약 두루마리 소유는 이스라엘의 왕이 위대한 왕이신 하나님과 공동 통치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우리는 시편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공동 통치자로서 그의 우편에 앉는 장면을 읽는다(시 80:17; 110:1).

 인봉된 두루마리가 하나님의 오른손 안에 놓여 있기보다는 우편 보좌 위에 있었음을 아는 것은 그 사건을 바르게 해석하는 데 중요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우편에”(롬 8:34; 엡 1:20; 골 3:1; 히 10:12; 벧전 3:22) 있는 하늘 보좌 위에서 높임을 받으셨음은 특별히 중요하다. 이와 같이 그분은 모든 권세와 능력과 우주적 통치권을 받으셨다(엡 1:20-22; 히 1:13; 벧전 3:22).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의 보좌에 오르셨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적인 믿음이었고(행 2:33-36; 히 8:1),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시 110:1; 마 22:41-45; 26:62-65 참조).

 두루마리는 당시의 법적 문서의 형태로 기술되어 있다. 우선, 요한은 두루마리가 안팎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데, 대개 그것은 기록된 자료가 매우 많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구약에서 언급되었던 것으로서 양면에 기록된 두 문서를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증거의 두 돌판”이라는 말을 읽는다. 모세가 산에서 가져온 것에는 “그 판의 양면 이편 저편에 글자가 있었다(출 32:15). 마찬가지로 에스겔은 묵시 가운데서 그의 앞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보았는데, “그 안팎에” 글이 있었다(겔 2:9-10). 이러한 구약적 배경에 비추어, 요한계시록 5장에 기록된 두루마리의 양면 중에서 분명히 한 면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체결 된 언약이 있을 것이고, 또한 다른 면에는 예언적 기별이 있을 것이다.19) 그리고 신약적 문맥에 따르면, 두루마리는 분명히 “율법과 선지자”와 관련이 있다(행 13:15; 마 5:17; 요 1:45 참조).

 또한 두루마리는 요한 당시에 널리 사용되었고, 잘 알려진 형태의 소위 ‘이중문서’였을 가능성도 상당이 있다(계 5:1의 어구 해설 참조), 두루마리의 열린 부분은 바깥 본문으로서 인봉 되지 않았고,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더 긴 부분은 안쪽 본문인데, 인봉되어 있었다. 인봉된 부분은 적법한 관청에서 그 모든 인을 깨뜨려야만 개봉될 수 있었는데, 그 곳에서 내용이 비교되고 그 진실성이 입증될 수 있었다. 만일 인봉된 두루마리가 이중문서라면, 요한계시록 10장의 작은 두루마리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은 두루마리는 요한계시록 5장의 인봉된 두루마리의 바깥쪽 눈에 보이는 본문에 해당될 것이다. 작은 두루마리의 내용은 분명히 요한계시록 12장 1절부터 22장 5절에 기술되어 있으며, 요한계시록 5장의 인봉된 두루마리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두루마리는 또한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다고 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인들은 오로지 왕과 그의 신하들만이 소유하였다. 인침은 두 가지 기본적 개념, 즉 내용물의 인정이나 비준을 의미한다. 그것은 기록된 내용의 끝에 권세자의 도장이나 반지로 인을 쳐야 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침은 사인을 대신하는 기능을 하였고, 문서의 신빙성, 효력, 또는 비준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5장의 문맥은 또 다른 개념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인침’은 하나님의 계시가 정해진 때까지 ‘간수’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 이유는 백성이 불성실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주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단 12:4, 9; 계 10:4). 요한계시록 5장의 두루마리가 인봉된 것은 그것의 내용을 덮어서 감추어 두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두루마리는 인봉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능히 그것을 펴거나 보거나 할 수 없”다(계 5:3-4). 모든 봉인이 깨뜨려지기까지는 두루마리를 열어 그 내용을 공개하는 일은 불 가능하다.

 두루마리가 일곱 인들로써 인 쳐졌다고 하는 사실은,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가 ‘충만’, ‘완성’ 또는 ‘완전’이라는 상징적 의미에 비춰볼 때 특히 중요하다.

 첫째, ‘일곱’은 하나님의 충만과 총체성의 개념을 드러낸다.

 둘째, 일곱 인으로 인 친다함은 두루마리가 ‘완전히 인쳐졌’ 음을 의미한다.

 비록 본문에서(5:3-4 참조) 두루마리의 내용이 감춰졌음을 많이 강조하고 있을지라도, 전체 문맥은 일곱 인을 강조한 근본 목적이 단순히 요한계시록의 독자들에게 두루 마리의 내용이 매우 비밀스럽다거나 인간의 지식으로부터 숨겨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이 아님을 나타낸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본장의 주요 초점이 인봉된 두루마리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인들을 깨뜨리고 여는 것에 있다는 사실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을 엿볼 수 있다. (5:2, 5, 9). 인봉된 두루마리 자체는 5장에서 개봉되지 않고 6-8장에서 개봉된다. 칠중의 인침을 매우 강조한 근본 목적은 우주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총체적인 ‘합당치 않음’과 무능력을 하나님의 총체적인 충만과 그리스도의 ‘합당하심’ 및 그분의 능력과 대조하려는 것이다. 온 우주에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우주의 보좌에 좌정 하실 수 있으며, 종말적 주권자로서 이 지구의 역사를 끝내실 수 있다.

 요한계시록 5장의 문맥은 두루마리가 인봉된 것은 인간적 요인, 즉 인간의 “합당치 않음”과 무능력 때문이었음을 시사한다.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라는 질문은(5:2) “하늘이나 땅 위에나 땅 아래의 아무도 그 두루마리를 펴서 그 봉인들을 깨뜨리기에 합당치 않았다”는 필연적인 결론을 내리게 한다(5:2-4). 이 사실은 매우 강력히 강조되었다. 또 한 편으로는, 요한계시록 5장 5절의 힘찬 “보라”(한글 성경에는 없음-역자 주)는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요”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봉인된 책을 취하시고, 그 인봉을 떼시려고 나타나실 때의 신적 합당 함과 전능을 말하는 대목의 시작이다. 두루마리를 취하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왕에게만 속하는 온 하늘 무리들의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신다(5:11-14).

 요한 당시의 유대인들은 다윗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공동 통치자로서 다스리는 이스라엘 왕들의 왕권과 권세를 의미했던 언약의 책을(신 17:18-20; 왕하 11:12) 다윗 왕국이 붕괴되고 바벨론 유수 동안 인봉된 것으로 간주하였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인봉’된 것은 이스라엘 왕들과 그들이 통치했던 백성의 합당치 못함'과 불성실로 기인된 것이다(사 8:16; 단 12:4, 9). 그 인봉은 이스라엘의 이상적이고 참된 왕의 역할을 할 다윗의 후손이 미래에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계 4:1-11:19 개관 참조),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왕으로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이 구약적 개념 위에 구축하였다.
요한계시록 5: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요한계시록 5: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요한계시록 5: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힘센 천사가 큰 음성으로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라고 외친다. “누가 합당하냐?”라는 질문은 유별한 자격을 요구한다. 콜린즈가 제시하듯이, 요한계시록 전체의 맥락 속에서 “하늘 의회가 직면한 문제는 땅에서의 반역과 유사한 사단의 반역임이 분명하다.... 선지자의 눈물은 이 상황이 바뀌었으면 하는 신실한 자들의 소망을 나타낸다.”20) 요한은, 아무도 합당치 않기 때문에,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는 것을 이해한다. ‘합당한’은 본 장 전체의 핵심 단어다. 요한 당시에 이 말은 특이한 자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자격에 의하여 어떤 후보자가 영예로운 직임을 맡기에 적합하게 되거나 적격자가 되었다. 그러한 자격은 전쟁의 승리를 통하여 과시된 용맹성과 용감성과 같은 탁월한 성취에 근거하였다. 보좌라는 맥락에서 볼 때(요한계시록 4-5장의), ‘합당한’ 이란 말은 특정한 자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자격은 통치자에게 보좌와 통치권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백성의 애정과 충성을 요구할 수 있게 할 것이었다.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 5장의 합당함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하나님께서 이 독특한 자격의 소유자이심을 시사한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창조주 되심에 근거하여 왕에게 속하는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기에 합당하신 자로 선언되신다. 그분은 우주를 통치하는 보좌 위에 좌정해 계신다. 마찬가지로 5장에서, 무수한 천군들이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소리친다. “(당신은)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5:9)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천사들과 합류하여 엎드려 경배하면서 환호하여 외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5:12)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왕에게만 돌려졌던 이 환호의 외침들, 즉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그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면서(동양의 왕들이 그들의 대 군주 앞에서 그러했듯이),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며”(4:11),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5:12)라는 환호의 외침들을 읽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 지상의 왕/황제 와 관련된 의식 장면들이 떠올랐을 것이 분명하다.
요한계시록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울고 있던 요한은 “누가 두루마리를 떼기에 합당하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힘찬 “보라”는 여기서, 온 우주 가운데 봉함된 두루마리를 열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등장 속에서 신적 ‘합당함’과 전능함을 소개한다. 비록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이 공로 개념이 신약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을지라도(예, 행 2:22-36; 빌 2:5-11; 히 12:2), 이 장면에서는 독특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승리는,

 첫째, 그분을 언약의 두루마리를 취하여 인을 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만들었다. 이 두루마리는 구약의 다윗가의 왕들이 합당치 못했기 때문에 인봉되고 보존되었던 것이다.

 둘째, 그 승리는 그리스도에게 아버지와 더불어 하늘 보 좌를 공유하며, 또한 우주의 주권을 잡아 다스리는 자격을 부여하였다(계 3:21).

 그리스도를 아버지와 함께 보좌와 왕의 대권을 공유하기에 합당한 분으로 만들어준 독특 한 자격은 그분이 왕이라는 사실에서 암시된다. 유대 지파의 사자(창 49:9 참조)나 다윗의 뿌리 (사 11:1, 10 참조)라는 그리스도께 주어진 두 개의 칭호는 여기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칭 호들은 구약의 위대한 예언적 칭호들로서, 이스라엘의 보좌에 오를 이상적인 왕인 다윗의 후손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구약의 이러한 예언들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 성취된다. 이러한 두 칭호를 가진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 즉 메시야와 동일시되신다. 이스라엘 왕들은 ‘합당치 못했고’ 불성실하였다. 언약의 책이 인봉된 것은 그들의 ‘합당치 못함’ 때문이 었고, 그 책은 그것을 취하여 열기에 합당한 다윗의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윗 계보의 약속된 왕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 그분은 다윗 보좌의 참된 상속자시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소망과 기대가 성취되고, 신구약의 언약이 성취된다.

 하늘 보좌에 접근하기에 ‘합당한’ 유일한 분인 ‘다윗의 뿌리’가 보좌 우편의 인봉된 책을 취하시고 “보좌에 앉으신 이와” 함께 왕께 드리는 찬사를 받는 장면을 1세기의 기독교인들이 읽었 을 때에 그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구약 예언의 성취를 그 속에서 보았다. 그들은 약속된 왕, 곧 ‘다윗의 뿌리’가 하늘 보좌에 등극하실 그 약속된 ‘날’이 이른 것을 알았다.

 요한이 ‘그 사자’를 보기 위해 돌이켰을 때, 실제로 그는 죽임을 당한 것같은 어린양이 서 있는 것을 본다. 사자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그가 ‘이기었다’)을 보이고 있는 반면, 어린 양은 그가 어떻게 그 일을 행하셨는지를 보여 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어린양의 모습은, 요한계시록의 나머지에서도 그러하듯이 구약의 희생제도의 개념과 의식에 기초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제도에서, 희생된 어린양의 피는 구속과 관련되어 있었다.21) 여기에 그 장면의 핵심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승리의 죽음을 통하여 인봉된 두루마리를 취하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구속하실 수 있었고, 사망을 이기고 승리하실 수 있었다(계 5:5-6). 그리스도를 이 영예에 합당 한 분으로 그리고 유일한 분으로 만든 것은 십자가였다.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그분의 승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아버지와 함께 하늘의 보좌를 공유하실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신다(계 3:21).

 그리스도의 독특한 자격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는 말로 보강된다. 일곱 뿔과 일곱 눈은 통치와 심판을 위한 그분의 신성의 권세와 능력을 시사한다. 어린양이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두루마리가 일곱 인으로 인봉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곱 뿔은 그리스도의 전능성을 상징하며, 일곱으로 봉해진 두루마리를 취하여 여는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 그분의 전지성을 대표하는 일곱 눈은 두 루마리를 읽고 그 내용으로 당신의 백성을 훈계할 그분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일곱 영은 온 땅에 보냄을 받은 성령 충만을 의미한다.

 성령이 온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언급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오직 이 곳뿐이다(요한계시의 앞부분에서 “일곱 영”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계 1:4; 4:5 참조). 만일 요한계시록 5장이 오순절에 있은 그리스도의 즉위식을 기술하는 것이라면(모든 증거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 구절의 중요성은 분명하다. 요한복음 7장 39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였다. 그의 오순절 설교에서, 베드로는 성령이 지상에 강림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등극하신 결과라고 설명하였다(행 2:32-36).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우주의 보좌 위에 높이 계시기 때문에, 십자가상의 그분의 승리의 죽음을 인간의 삶에 적용하고 온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 함에 성령의 일은 무제한적이다.
요한계시록 5: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이 곳에서 전체 묵시 중 절정의 순간이 나타난다.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그 순간이란, 하늘 성전/궁정의 보좌실에서 승리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우편에 있는 보좌로부터 왕권의 징표요 모든 권세와 주권의 이양을 상징하는 두루마리를 취하실 때다. 이 행위를 통하여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께 세상의 주권을 위임하셨다. 인간의 합당치 않음을 인하여 인봉되고 보관되었던 언약의 책은 이제 다윗 계보의 약속된 이상적인 왕, 실제로 다윗의 뿌리이며 유다 지파의 사자, 종말적 ‘아들’로서 승리하신 그리스도께 넘겨진다(단 7:13-14; 계 1:13; 2:18; 14:14).

 상징적으로 두루마리를 취하는 일은 ‘공식적인 의식 행위’로서, 그것에 의해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로서 ‘우주 최고의 통치자’의 직임을 부여받으신다.22) 두루마리를 소유하심으로써 그분은 우주를 다스리는 합법적인 왕이 되신다. 두루마리를 열고 읽는 그분의 능력은 “주권의 기능을 실제로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의 통치자로 나타나신다. 그분은 당신에 의해 완성된 구속 사업에 기초하여 역사의 마지막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권위를 가지고 집행하라는 요청을 받으신다.”23) 인봉된 두루마리를 상징적으로 취하는 행위와 함께, 모든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영원한 칙령에 따라 그리스도의 손에 맡겨진다.
요한계시록 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리스도께서 두루마리를 취하는 순간, 왕에게만 돌리는 찬양과 환호의 갈채가 그분에게로 향한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4장 9-10절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는 제왕적 환호를 들을 때마다 장로들이 엎드려 그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내려놓고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경배하는 것을 보았다. 이 곳 5장 6-8절에서, 어린양이(유다 지파의 사자 또는 “다윗의 뿌리”) 보좌와 네 생물의 ‘가운데’와 장로들 ‘사이에’ 서 계신다(6절). 그분이 두루마리를 취하실 때 장로들과 네 생물은 다시 엎드리는데, 이번에는 그리스도 앞에 엎드린다 (5:8-10, 12), 인봉된 두루마리를 취하기에 합당하다는 것은(5:9) 왕의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기에 합당함을 의미한다(4:11),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통치권을 취하는 것과 동등한 것으로, 거기에는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이 따른다(5:12).
요한계시록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5: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5: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요한계시록 5: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요한계시록 5: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죽음에 의하여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로부터 인간을 구속하시고 그들을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을 수 있게 되신다. 우선 그분이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두루마리를 취하여 인을 떼기에 합당하다고 선언된다. 그분만이 합당하신 이유는 그분만이 획득하실 수 있었던 승리 때문이다. 그분은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분이요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다(계 1:18), 반 운니크(W. C. van Unnik)는 “그는 자신의 고난 속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승리를 얻으셨다. 그가 이루신 사업의 위대성이 9절에 묘사되어 있다. 그는 모든 족속들로부터 노예들을 속량하셨으며, 만백성 심지어 이교도들(!) 중의 그 노예-이스라엘 사람에게만 국한된 특권(출 19:5 이하)으로 알았던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제사장, 왕으로 삼으셨다”고 진술한다.24) 이제 그분은 왕권의 모든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고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선언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5:12). 이 시점에서 논리적으로 추리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우편의 보좌에 좌정하신다. 즉, 두루마리를 취하심으로 그는 두루마리가 있었던 그의 자리에 앉으시는 것이다.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보좌실에 있는 하늘 존재들의 위치다. 모두가 보좌를 옹위하고 있고 어린양에게 제왕적 환호를 돌린다(5:11). 이와 같이 4장에서 강조되었던 보좌의 구심점이 다시 강조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5장의 허두에서는 그렇게 강조되지 않았다. 이제 아버지와 두루마리를 가지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보좌를 옹위하고 있는 모든 천군의 경배를 똑같이 받으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 지어다(5:13). 이것들은 왕권에만 적용할 수 있는 속성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곳에서 아버지와 동일하게 찬양을 받으신다는 사실은 그들의 동등성을 암시하는데, 왜냐하면 두 분은 공동 통치자로서 우주의 보좌 위에 함께 등극해 계시기 때문이다.

 신약의 나머지 책들은 승천 후에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여 권세와 능력과 우주적 통치권을 받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들을 반복한다(롬 8:34; 엡 1:20-22; 골 3:1; 히 10:12; 12:2; 벧전 3:21-22). 오순절에 행한 설교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가 되신 것은 바로 오순절 때였다고 언급하였다(행 2:33-36), 그분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 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엡 1:21-23)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 임할 일을 인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주께서 통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아버지와 두루마리를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하늘의 존재들로부터 존귀와 경배를 받으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5:13).
5:1-14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 4장5장은 구원의 계획에 속하였던 위대한 사건들 중 네 번째, 즉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후에 승천하여 영화롭게 되셔서 아버지의 우편에 있는 하늘 보좌에 오르신 그리스도의 대관식에 관하여 기술한다. 아직 일어나야 할 두 개의 사건이 더 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종결될 재림과 후속적인 최후의 심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등극은 우주 역사상 중요한 한 획을 긋는 것 같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다스림을 시작하게 한 사건이다. 하늘 보좌에 오르신 그리스도의 등극으로 죄와 사단에 대한 승리가 보장된다. 그리스도의 등극은 “종말의 시작을 명시하며, 역사의 종말적 성격을 정의하는데, 누가 어린양의 승리에 참여할 것인지를 기술한다.”25) 이것은 요한계시록 4-5장을 요한계시록 전체의 중심부로 만들어준다.

 반 운니크에 의하면, 요한계시록 5장“책 전체의 구조에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 곳에 기술된 것들은 빠뜨려질 수 없고 놓쳐질 수 없다. 그 이유는 만일 그렇게 되면 후속적인 것들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26) 최소한 두 가지의 이유로 요한계시록 4-5장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특별히 중요하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우편의 하늘 성전에 등극하신 것은 하늘 성소의 개관(開館)을 의미한다. 비록 요한계시록이 예수님의 등극으로 말미암는 그분의 왕적 역할을 매우 강조하고 있을지라도, 히브리서는 하늘에서의 그 분의 제사장적 측면을 더욱 각별히 묘사한다. 십자가 상에서의 그의 희생적 죽음과 부활의 결과로서, 예수께서는 하늘에 오르셨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으며, 그 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1:3, 13; 8:1; 10:12; 12:2). 히브리서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 8:1-2) 보좌에 앉히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하늘 성소의 봉사자가 되실 자격을 갖추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과 히브리서는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이 그리스도의 봉사의 두 측면이 완전한 하나의 그림으로 통합된다. 그 두 책은 우리에게 당신의 신실한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부활 후의 봉사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요한계시록 4-5장이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등극이 오순절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베드로는 그의 오순절 설교에서 하나님 우편의 하늘 보좌에 그리스도께서 높이 되심으로써 성령의 강림을 위한 문이 열렸다고 말하였다(행 2:32-33). 즉,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높이 되심[등극]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으며, 등극 후에 성령이 강림하셨다. 요한복음 7장 39절에 의하면, 성령은 예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이후에 오실 수 있었다. 성령의 강림을 합법적이고 가시적으로 만든 것은 십자가 상의 예수님의 죽음과 승천, 그리고 하늘 성전에서 있은 후속적 등극이었다. 바울은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 4:8)고 진술한다. 그 다음 구절은, 이 선물들이 성령의 선물임을 밝힌다(4:11-14). 이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일곱 눈’“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 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셨다는 이야기의 설명이 될 것이다(계 5:6), 충만의 숫자인 일곱은 요한계시록의 원 독자들이었던 일곱 교회, 곧 하나님의 우주적 교회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것과 부합한다. 비록 성령이 1장 4절4장 5절에서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언급되고 있을지라도, 그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것”5장 6절에서만 언급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령이 땅에 보냄을 받은 것은 오순절 때였기 때문이다. 엘렌 화잇은 의미 있는 주석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의 제자들이 약속된 축복을 받게 되리라는 신호였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들은 축복을 기다려야 하였다. 하늘 문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며 보좌에 오르셨다. 이 예식이 끝나지 마자 성령이 제자들에게 풍성히 내려졌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영원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모든 영광으로 영화롭게 되셨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주의 취임식이 끝났다는 하늘의 통고였다. 그분은 당신의 약속에 따라 하늘로부터 성령을 그의 제자들에게 보내셨는데, 이것은 왕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분이요, 따라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시라는 증거였다.27)
이 기별은 세상 역사의 끝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특별히 중요하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확장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복음 전파의 시작과 그 중심 기별은 하늘 보좌에 주님으로 등극하신 예수님이었다.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핵심이었고(빌 2:6-11; 히 8:1), 또한 그들이 전파하는 기별의 모퉁이 돌이었다(행 2:32-36; 5:30-31; 엡 1:20; 골 3:1; 히 8:1; 10:12; 벧전 3:22), 영화롭게 되신 주께서 우주의 보좌를 통제하며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그들의 활동에 동기를 부여하였고, 핍박과 삶의 어려운 상황을 맞은 그들에게 믿음과 용기의 근원이 되었다(행 7:55-56; 롬 8:34). 결과는 어떠했는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복음 전파에 반응을 나타내었다. 그 때로부터 그리고 성령의 봉사를 통한 예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왕국은 확장되었고, 계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은 기본적인 것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주요 임무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요(요 15:26),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언제나 마음에 새겨야 한다(요 16:14),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영원한 복음의 요청에 백성으로 응하게 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며, 그분을 경배하게 하는 것은(계 14:7)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의 복음 뿐이다. 십자가에 달렸고, 부활하였으며, 영화롭게 되신 주님이요 왕이신 그분은 우주의 보좌에 좌정해 계신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 그분이 통제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의 핵심을 염두에 두어 잃어버린 바 되고 고통 당하는 인류에게 최후의 기별을 전파할 때, 성공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주(註) ——————
1. 이 구절이 심층적으로 다뤄진 것을 보려면 Stefanovic, 145-155를 보라. 
2. Bruce Metzg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2d ed. (Oxford Clarendon Press, 1964), 6. 
3. Stefanovic, 125-126. 
4. 상동, 
5. Ladd, 81. 
6. John J. Davis, Biblical Numerology (Grand Rapids: MI: Baker, 1968), 116-118. 
7. Karl H. Rengstorf, “hepta, et al.,”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 Kittel and G. W. Bromiley(Grand Rapids, MI: Eerdmans, 1964-1976), 2:628; 고대 Greco-Roman 시대의 ‘일곱’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에 대하여는 Aune, Revelation 1-5, 114-115를 보라. 
8. Milton S, Terry, Biblical Hermeneutics (Grand Rapids, MI: Zondervan, 1890: reprint 1978), 382–383 참조. 
9. 이 부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Stefanovic, 125-126을 보라. 
10. 상게서, 167-181. 
11. 4 Ezra 12:31-32(Charlesworth, 1:550). 
12. Stefanovic, 181-184 참조. 
13. 상게서, 184-195 참조. 
14. Karl H. Rengstorf, “apostello, et al.,”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Kittel and G. W. Bromley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1976), 1:400. 
15. Swete 79; Ladd, 88.
16. Stefanovic, 152-153. 참조 
17. Metzg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736. #3 
18.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148. 
19. Charles H. Giblin, The Book of Revelation (Collegeville, MN: Michael Glazier, 1991), 75. 
20. Collins, The Apocalypse, 39. 
21 요한계시록 5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어린양 개념을 더 알기 원하면 Aune, Revelation 1-5, 367-373을 보라. 
22. Mauro, 171. 
23. Roloff, 76. 
24. W. C. van Unnik, “Worthy is the Lamb: The Background of Apoc 5”, in Mélanges bibliques en hommage au R. P. Béda Rigaux, ed. A. Halleux, 445–461([Gembloux]: Duculot, 1970), 460. 
25. Fred B. Craddock, “Preaching the Book of Revelation”, Interpretation 40(1986), 276. 
26. van Unnik, 445. 
27. White, The Acts of the Apostles, 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