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는 지시와 함께 지팡이 같은 척량 갈대를 받았다. 수세기 전에 에스겔은 묵시에서 성전의 모든 부분을 세밀하게 척량하는 한 거룩한 사람을 보았다(
겔 40-42장). 척량은 건축하기 전의 예비 작업이다. 에스겔의 묵시에서 성전은 보수될 목적으로 척량되었다(
겔 39:25-29 참조). 묵시의 목적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그들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성전이 파괴된 것은 이스라엘의 불성실과 배도 때문이었다. 성전을 척량하는 상징적 행위는 백성에게 주는 확고한 보증의 기별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성전을 회복하시고,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겔 39:25-29 참조, 이 성경절은 뒤따라 나오는 성전 척량의 도입 말씀이다). 성전 재건은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43:7-11 참조).
에스겔서의 본문에서 적어도 두 가지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전은 첫째 달 제 10일, 즉 대속죄일에 척량하였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회복하시고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 회복을 약속하신 날이 바로 대속죄일이었다. 둘째, 에스겔의 묵시에서 성전 자체(
겔 40:3-43:12)와 번제단(
43:23-27) 및 백성(
44:1-48:35) 등의 세 가지가 척량과 관련되어 있었다. 요한이 묵시에서 본 성전 척량은 에스겔의 묵시를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이 성전과 그 제단의 척량을 말할 때,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을 즈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예루살렘 성전의 실제적 재건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요한의 생각에는, 하늘에 실제적인 성전이 있다. 하늘 성전은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심이 되는 개념이다. 요한은 하늘 성전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그리고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인식한다. 더 나아가 그 곳은 모든 신적 활동의 중심지, 곧 지상과 관련하여 모든 전략들과 결정들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적대하는 원수의 세력들은 하늘 성전에 대하여 강력한 증오심을 품는다(
계 13:6 참조).
요한의 척량 대상에는 예배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다(
계 5:10; 1:6 참조).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 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 하늘에서 그분과 함께 앉히었다(
엡 2:6).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하늘에서 높임을 받았으며,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그들의 기도는
‘황금제단 위에’ 드려져 그 곳에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
계 8:3-4).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이 묵시에서 경험한 하늘 성전과 제단, 또한 예배자들에 대한 척량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에스겔서를 배경으로 할 때, 이 척량은 백성과 관련된 성전의 회복과 연관이 있다. 우리는 에스겔의 묵시에서 척량과 회복의 대상에 성전과 제단과 이스라엘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았다. 케네쓰 스트랜드는 이 세 가지 요소들이 대속죄일과 관계되어 있음을 보았고, 또한 이 요소들은
레위기 16장 16-19절, 30~31절에서도 묘사되었다고 하였다.
11) 이미 우리는 에스겔서를 통하여 대속죄일은 성전 척량의 때라는 것도 보았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들 두 배경 본문은
요한계시록 11장 1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 같다.
대속죄일은 유대인의 성력(聖曆)에서 가장 엄숙한 날이었다. 그 날에 성소는 그 해에 쌓인 모든 죄들로부터 정결케 되었다. 그 날은 이스라엘의 종교력 중 일종의 최후의
‘척량’일이었다. 케네쓰 스트랜드가 언급하였듯이, 대속죄일은
“성소에 대한 최후 심판의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왜냐하면 그 날에 분리가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곧 백성은 자신들을 괴롭게 하여야 했으며,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었다(레 23:28-29).”12) 요한계시록에서는, 예배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섬기는 사람들과(
11:18; 14:7; 15:4; 19:10 참조), 용과 그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
13:4, 8, 12, 15; 14:9-11; 16:2; 19:20 참조) 사이에 뚜렷한 구분선이 그어진다. 요한계시록에서 두 그룹에 대한 인식은 이 구분선에 기초되어 있다. 생사를 판가름하는 척량의 역할이 특별히
사무엘하 8장 2절에 예시되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에 대한 척량은 상징적인 뜻으로, 그것은 면밀한 평가를 뜻한다. 척량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과 섬기지 않는 자들 사이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이 모든 것은 의인들이 그 상급을 받고 악인들이 그 정죄를 받기 전에 일어난다(
계 11:18).
여섯째와 일곱째 인 사이의 막간과 여섯째와 일곱째 나팔 사이의 막간을 비교하면,
요한계시록 11장 1절의 척량은 하나님의 백성을 인치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계 7:1-4). 매싱버드 포드(J. Massynberde Ford)가 말하듯이,
“선택된 백성을 인치는 일이 일곱째 인에 앞서 있는 것과 꼭 같이,” “거룩한 자들을 척량하고 밖에 있는 자들을 배제하는 일은 일곱째 나팔에 앞서 일어난다.”13) 척량과 인치는 일은 나란히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둘은 인간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척량의 목적은 누가 인을 맞게 될 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 즉, 누가 하나님께 속하고 누가 그분에게 충성하는 자들인 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최후의 환난의 때에 보호함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