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증인 (11:1-14)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요한계시록 11장 1-14절을 요한계시록 중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단원 중 하나로 여긴다. 앞 단원에서(10:8-11) 전개되고 있는 것과 관련 있는 부가적 정보를 제공한다고 여겨지기에 이 단원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1장10장과 마찬가지로 여섯째 나팔의 한 부분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단원은 성전 척량(11:1-2)과 두 증 인(11:3-14)의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성전 척량 (11:1-2)
 우리는 요한계시록 10장 8-11절의 묵시에서, 어떻게 요한이 수동적인 방관자에서 능동적인 참여자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보았다. 그는 작은 두루마리를 먹었고, 그 내용을 소화하였다. 그 후 그는 많은 백성에게 다시 예언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기별은 무엇인가? 다음 단원의 시작은 그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 같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그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 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지팡이 같은 갈대.
 헬라어 칼라모스(kalamos)는 요단 계곡에서 자라는 식물로서 그 속이 비어 있는 갈대를 말한다. 갈대는 곧고 길어서(10피트 이상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척량 막대기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였다.
척량.
 헬라어 메트레오(metreó 측량하다)는 비유적으로 ‘평가하다’, ‘재판하다’를 뜻할 것이다. 신약에서 메트론(metron) 또는 메트레오가 두드러지게 들어 있는 구절들은 “마지막 심판 때 있을 하나님의 사법적 행위”를 가리킨다(마 7:2; 막 4:24 참조).1) 척량 과정에서 사용된 요한계시록 11장 1절의 단어는, 그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척량하거나 평가하였던 고린도 교회의 일부 신자들과 관련하여 고린도후서 10장 12절에도 나온다. 구약 시대에 척량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생사를 판가름할 심판을 의미하였다. 예를 들면, 다윗은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렸다(삼하 8:2). 요한계시록 11장의 척량 과정은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케네쓰 스트랜드(Kenneth Strand)에 의하면, 요한계시록 11장 1절에서 명시된 척량 과정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구약의 유일한 책은 레위기 16장이다. 스트랜드는 성전과 제단과 경배자들에 대한 척량과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 대한 묘사가 주제적으로 가장 완벽한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2) 대속죄일에 제사장 자신들과 성소와 제단과 회중을 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 성경에서 성소와 제단과 백성이 함께 언급되어 있는 유일한 또 다른 곳은 바로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이다. 요한계시록 11장 1절에서 제사장이 생략된 것을 제외하고는 지금 공부하고 있는 세 개의 주제와 동일한 요소들, 즉 성전, 제단, 예배자들이 두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나온다. 그 중 하나가 생략되었다는 사실은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신약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속죄(혹은 ‘척량’)하실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3) 더 나아가 스트랜드는 두 본문에서, 세 항목들의 순서 혹은 차례가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관찰하였다. “두 경우에, 성전에서 제단으로, 제단에서 예배자들에게로 이동된다.”4) 스트랜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결론을 내린다.

또한 요한계시록 11장 1절의 평행구는 실제적 의미의 척량보다 영적 의미의 ‘척량’을 포함한다. 이것은 문맥에 비춰 볼 때 명백하다. 문맥에 따른 ‘성전’‘제단’은 예루살렘에 있는 실제적 성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실체를 가리킨다(성전을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한 일반적 용례를 4~5장, 8:3-5; 11:19 등에서 참조하라). 그리고 경배자들에 대한 “척량”은 용어 자체가 실제적이 아니라 영적임을 암시한다.5)
하나님의 성전.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는 나오스(naos)인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성전의 가장 안쪽 곧 지성소를 가리킨다. 나오스히에론(hieron, 요한계시록에는 없음)과 구분된다. 히에론은 성전의 전체 건물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뜰과 성전 소유지가 포함된다(마 4:5; 요 2:14 참조). 그러므로 복음서들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곳은 언제나 히에론이었다(마 26:55눅 21:37; 요 7:28).

 요한계시록 11장 1절에서 척량되는 성전의 의미에 관하여 여러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1) 가장 대중적인 견해로, 성전은 그리스도인 교회 또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는 것이다(고전 3:16 참조). 이 견해의 취약점은, 비록 ‘성전’이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서 자주 등장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교회를 상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요한은 성전과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함에 매우 일관성이 있다(성전, 제단, 그리고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 계 7:17; 15:8 참조).

 (2) 또 다른 견해는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 방식은 예루살렘 성전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 약 20년 전에 파괴되었고, 요한 당시에는(서기 90년경)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3) 세 번째 견해에 의하면,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하늘 성전에 대한 척량일 것이다. 요한에게 하늘 성전은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는 계속적으로 하늘 성전과 그 기구의 항목들을 열거한다 (3:12; 11:19; 14:17; 15:5-8; 16:1, 17).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하늘 성전을 가리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표현이 계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3:12; 11:19; 7:15 참조).
제단.
 비록 본문은 여기에 등장하는 제단이 어느 제단인지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분향단이다. 이 제단이 구약 성전의 바깥, 즉 뜰에 있었던 번제단일 수는 없다(요한은 분명히 바깥뜰을 척량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구약 성전에서, 금향단은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있었다(출 30:6 참조), 그것은 요한계시록 8장 3-6절의 금향단과 동일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요한계시록 11: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척량하지 말고.
 헬라어 엑발로 엑소센(ekballó exothen)은 문자적으로 ‘밖으로 던지다’, ‘쫓아내다’의 의미를 지닌다. 이 곳에서 이 단어는 바깥뜰(마당)이 성전과 그 경내를 측량하는 대상에서 ‘제외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치 요한복음 9장 34-35절에서 소경이 회당에서 쫓겨난 것과 관련하여 이 단어가 사용된 것과 같다(요삼 10 참조).
[바깥]마당.
 예루살렘 성전은 두 뜰로 구분되는데, 안쪽 뜰은 다시 세 부분, 즉 제사장의 뜰, 이스라엘 남자들의 뜰, 그리고 여인들의 뜰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바깥뜰은 이방인들의 뜰이었다. 성전 건물의 바깥마당은 덮개가 없었고, 울타리로 안마당과 구분되어 있었다. 이방인들은 성전의 바깥뜰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울타리를 넘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넘는다면 그것은 사형이었다. 거기에는 울타리를 넘는 이방인은 그가 누구든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경고판이 있었다.
이방인.
 헬라어 에쓰노이(ethnoi)‘나라들’ 혹은 ‘이방인’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적대적인 세력이며, 복음 전파를 반대하는 자들이다(계 11:2, 18; 14:8; 16:19; 18:3, 23; 19:15; 20:3, 8).
짓밟으리라.
 헬라어 파테오(paetd)‘발로 밟다’, ‘짓밟다’라는 의미다. 이 단어는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짓밟음과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14장 20절19장 15절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사 63:3 참조), 구약에서 이 표현은 종종 원수의 나라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할 때 사용되었다(사 63:18; 렘 12:10), 짓밟는다는 비유적 표현은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넷째 짐승과 관련하여 다니엘서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그 짐승은 그 먹이를 발로 짓밟았다(단 7:7, 19, 23). 또한 이 표현은 넷째 짐승의 열 뿔에서 나온 작은 뿔의 활동들을 가리킨다(단 8:9-13). 특히 그러한 핍박의 대상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었으며, 그 기간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였다(단 7:25),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예언하셨다(눅 21:24). 마흔두 달 동안 거룩한 성을 짓밟을 것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 13장 1-10절의 바다 짐승이 마흔두 달 간 활동하는 것과 부합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을 짓밟는 것과 바다 짐승의 활동들은 동일하다.
마흔두 달.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 명칭은 이 곳과 13장 5절에서 상징적 바다 짐승과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그 바다 짐승의 활동들과 관련하여 언급되었다. 이 기간은 분명히 1260일과(11:3; 12:6) “한 때 두 때 반 때” 와(12:14) 동일하다. 요한계시록 12장 6절과 14절의 평행 구절은 한 때 두 때 반 때와 1260일이 동일한 기간이며 여인의 핍박받는 기간임을 가리킨다. 만일 이 세 가지의 시간 명칭이 동일한 기간을 가리킨다면, 이 명칭은 어디에 그 기원이 있는가? 분명 다니엘서에서 왔다(7:24-2512:7). 그 곳에서 이 구절은 오로지 상징적 작은 뿔의 활동 기간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 기간에 작은 뿔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압제하고 박해한다. 요한은 다니엘서의 예언을 이어받아 그것을 요한계시록 13장 1-10절의 상징적 적그리스도인 바다 짐승으로 더욱 발전시킨다. 그 곳에서 마흔두 달은 다니엘서의 한 때 두 때 반 때와 부합하는데, 즉 일 년(360일), 이 년(720일), 반 년(180일, 도합 1260일)이다.6)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이 시간을 가리키는 말들을 (11장12-13장에서 여러 방식으로 반복된다) 마흔두 달이라는 문자적 기간이 아니라, 중세 시대로 알려진 1200년 이상의 예언적 기간으로 보는 것이다. 출애굽 초기의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이 기간에 교회는 ‘광야’를 방황하며 고난당하였다(계 12:6, 14 참조), 이 때 성경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자들은 정죄를 받아 박해를 당하였다. 역사주의 해석자들 가운데 “적그리스도가 활개 친 1260일 기간의 시작과 끝”에 대하여 일치되지 않으나 “1260년이라는 기간이 적그리스도에게 할당되었고, 그 기간이 종국을 향해 가고 있다는 확신에는 모두 일치하였다”고 리로 이 프룸(LeRoy E. Froom)은 말하였다.7) 시작점으로 제안된 해는 455, 508, 538, 606 및 756년이었다. 한스 K, 라론델은 이 주제를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그는 마흔 두 달, 한 때 두 때 반 때 및 1260일이라는 기간은 실제적인 1260년에 적용된다고 보았으나 “교회 역사상 정확하게 연대를 고정시키”지는 않았다.8) 그러나 하루가 일 년을 뜻한다고 하는 성경 예언의 연일 상징에 근거하여9)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전통적으로 이 예언적 기간의 시작을 교회가 아리안 세력으로부터 벗어나서 교권을 확립하게 되는 538년으로 보았다. 바로 이것이 이 예언적 기간의 시작이 된 것이다. 1798년 프랑스 혁명이 교회의 종교 정치적 압제 세력을 흔들었을 때를 마흔두 달/1260일 기간의 끝으로 보았다.10)

 그러나 시간을 가리키는 이 세 표현은 양적으로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중요한 것 같다. 우선, 마흔두 달은 엘리야의 삼년 반 동안의 증거를 가리킬 수 있다(눅 4:25; 약 5:17 참조). 이 방인 여왕 이세벨의 대배도와 박해의 기간에 하늘은 삼년 반 동안 닫혔다(계 11:3, 6), 더욱이 이 기간은 삼년 반 동안 거절과 굴욕의 ‘베옷’을 입고 증거하신 예수님의 생애를 가리킨다. 공관복음에서 정확한 예수님의 봉사 기간을 산출하는 일은 불가능하나, 요한복음은 세 번의 유월절을 언급한다(2:13; 6:4; 13:1). 예수님의 봉사가 첫 유월절 여러 달 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분의 지상 봉사는 삼 년 반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이레의 절반’이라는 다니엘의 예언과 일치할 것이다(단 9:27), 다니엘의 이 예언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봉사를 가리키는 성경절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한 편으로 마흔두 달은, 이스라엘의 대배도의 기간에 있은 엘리야의 경험과 교회의 경험을 연결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신실한 증거의 삶을 사셨던 예수의 삼 년 반 동안의 삶을 경 험하는 셈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라고 (요 15:20) 말씀하셨다.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이 무엇을 지칭하든, 요한계시록에서 그것은 언제나 긴 기간에 걸쳐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지배하였고, 그들을 압제했던 악인들과 관련되어 있다(계 11:2; 13:5 참조). 이와 대조적으로, 1260일은 언제나 신실한 자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할당된 기간을 지칭한다. 비록 압제와 박해를 받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이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계 11:3; 12:6 참조).
(주해)
요한계시록 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요한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는 지시와 함께 지팡이 같은 척량 갈대를 받았다. 수세기 전에 에스겔은 묵시에서 성전의 모든 부분을 세밀하게 척량하는 한 거룩한 사람을 보았다(겔 40-42장). 척량은 건축하기 전의 예비 작업이다. 에스겔의 묵시에서 성전은 보수될 목적으로 척량되었다(겔 39:25-29 참조). 묵시의 목적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그들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성전이 파괴된 것은 이스라엘의 불성실과 배도 때문이었다. 성전을 척량하는 상징적 행위는 백성에게 주는 확고한 보증의 기별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성전을 회복하시고,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이었다(겔 39:25-29 참조, 이 성경절은 뒤따라 나오는 성전 척량의 도입 말씀이다). 성전 재건은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43:7-11 참조).

 에스겔서의 본문에서 적어도 두 가지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성전은 첫째 달 제 10일, 즉 대속죄일에 척량하였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회복하시고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 회복을 약속하신 날이 바로 대속죄일이었다. 둘째, 에스겔의 묵시에서 성전 자체(겔 40:3-43:12)와 번제단(43:23-27) 및 백성(44:1-48:35) 등의 세 가지가 척량과 관련되어 있었다. 요한이 묵시에서 본 성전 척량은 에스겔의 묵시를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이 성전과 그 제단의 척량을 말할 때,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을 즈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예루살렘 성전의 실제적 재건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요한의 생각에는, 하늘에 실제적인 성전이 있다. 하늘 성전은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심이 되는 개념이다. 요한은 하늘 성전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그리고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인식한다. 더 나아가 그 곳은 모든 신적 활동의 중심지, 곧 지상과 관련하여 모든 전략들과 결정들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적대하는 원수의 세력들은 하늘 성전에 대하여 강력한 증오심을 품는다(계 13:6 참조).

 요한의 척량 대상에는 예배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이 되었다(계 5:10; 1:6 참조).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 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 하늘에서 그분과 함께 앉히었다(엡 2:6).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하늘에서 높임을 받았으며,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그들의 기도는 ‘황금제단 위에’ 드려져 그 곳에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계 8:3-4).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이 묵시에서 경험한 하늘 성전과 제단, 또한 예배자들에 대한 척량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에스겔서를 배경으로 할 때, 이 척량은 백성과 관련된 성전의 회복과 연관이 있다. 우리는 에스겔의 묵시에서 척량과 회복의 대상에 성전과 제단과 이스라엘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았다. 케네쓰 스트랜드는 이 세 가지 요소들이 대속죄일과 관계되어 있음을 보았고, 또한 이 요소들은 레위기 16장 16-19절, 30~31절에서도 묘사되었다고 하였다.11) 이미 우리는 에스겔서를 통하여 대속죄일은 성전 척량의 때라는 것도 보았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들 두 배경 본문은 요한계시록 11장 1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 같다.

 대속죄일은 유대인의 성력(聖曆)에서 가장 엄숙한 날이었다. 그 날에 성소는 그 해에 쌓인 모든 죄들로부터 정결케 되었다. 그 날은 이스라엘의 종교력 중 일종의 최후의 ‘척량’일이었다. 케네쓰 스트랜드가 언급하였듯이, 대속죄일은 “성소에 대한 최후 심판의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왜냐하면 그 날에 분리가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곧 백성은 자신들을 괴롭게 하여야 했으며,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었다(레 23:28-29).”12)

 요한계시록에서는, 예배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며 섬기는 사람들과(11:18; 14:7; 15:4; 19:10 참조), 용과 그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13:4, 8, 12, 15; 14:9-11; 16:2; 19:20 참조) 사이에 뚜렷한 구분선이 그어진다. 요한계시록에서 두 그룹에 대한 인식은 이 구분선에 기초되어 있다. 생사를 판가름하는 척량의 역할이 특별히 사무엘하 8장 2절에 예시되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에 대한 척량은 상징적인 뜻으로, 그것은 면밀한 평가를 뜻한다. 척량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과 섬기지 않는 자들 사이를 결정하는 요인이다. 이 모든 것은 의인들이 그 상급을 받고 악인들이 그 정죄를 받기 전에 일어난다(계 11:18).

 여섯째와 일곱째 인 사이의 막간과 여섯째와 일곱째 나팔 사이의 막간을 비교하면, 요한계시록 11장 1절의 척량은 하나님의 백성을 인치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계 7:1-4). 매싱버드 포드(J. Massynberde Ford)가 말하듯이, “선택된 백성을 인치는 일이 일곱째 인에 앞서 있는 것과 꼭 같이,” “거룩한 자들을 척량하고 밖에 있는 자들을 배제하는 일은 일곱째 나팔에 앞서 일어난다.”13) 척량과 인치는 일은 나란히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둘은 인간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척량의 목적은 누가 인을 맞게 될 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 즉, 누가 하나님께 속하고 누가 그분에게 충성하는 자들인 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최후의 환난의 때에 보호함을 받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1: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하늘로부터 온 그 음성은 요한에게 바깥뜰은 이방인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에 배제하고 척량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예루살렘에서 바깥뜰은 성전 건물의 바깥 장소로서 이방인들이 예배드리도록 허용된 장소였다. 여기서 언급된 뜰을 “나라들[혹은 이방인들]에게 내주었다”는 사실은 요한이 이 뜰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바깥들은 나라들 혹은 이방인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에 척량에서 제외되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에게 적대적인 세력이다(계 11:18 참조). 바깥뜰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그리고 예배자 들과는 분명히 대조적이다. 그것은(이 세력은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로 [계 3:10; 6:10; 8:13; 11:10; 13:8, 14; 17:2] 언급되었다) 하나님과 복음에 적대적이며, 악의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핍박하며, 하늘 왕국에서 배제된 세력을 대표하는 것 같다.

 배제하는 것이 척량의 한 부분임은 주목할 만하다. 척량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배도하는 자들과 참 그리스도인들 사이를 구분한다. 에스겔의 성전 척량의 경우에서 그러했듯이, ‘마음과 육체에 할례를 받지 않은’ 어떤 외국인도 성전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겔 44:9). 요한의 묵시에서도 이방인들은 배제되었다. 그들은 신자들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만 척량된다. 이 예배자들은 성도들로서 그들의 기도가 ‘황금제단 위에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계 8:3-4), 유사한 배제가 새 예루살렘의 척량과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어 있다(계 21:15-17), 새 예루살렘은 새 땅의 성전 역할을 한다(계 21:2-3), 신실하지 못한 자들은 새 예루살렘의 상급에서 배제되어, 성전 도시(temple-city) 밖에 있다(21:27),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나라들 또는 이방인들에게 바깥뜰을 내어준다는 것은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달 동안 짓밟을 것을 의미한다. 이 비유적 표현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예언이다. 누가복음 21장 24절요한계시록 11장 2절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즉, 거룩한 성이 나라들 혹은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히는 일이다. 마흔두 달은 하나님의 백성을 일정 기간 동안 압제하도록 허용된 ‘이방인의 때’와 같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예루살렘의 짓밟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복음에 적대적인 세력 들로부터 경험해왔던 압제와 핍박의 원형이 되었다.14) 요한계시록 11장 18절은 분노한 나라들이 ‘땅을 망하게 하는 일’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적대감은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땅을 망하게 할 자들이 스스로 멸망하게 될 때가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계 19:20-21 참조).

 누가복음 21장 24절요한계시록 11장 2절은 다니엘서를 그 공통적인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 같다. 넷째 짐승의 상징적 이미지에서, 다니엘은 정복된 나라들을 짓밟을 강력한 로마 제국을 묘사하였다(단 7:7, 19, 23), 나아가 선지자는 넷째 짐승의 열 뿔 가운데서 뒤이어 일어날 작은 뿔을 묘사하였다. 하나님께 적대적인 이 세력은 한 때, 두 때, 반 때 혹은 삼 년 반 동안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고 그의 성도들을 괴롭게” 한다(단 7:25), 다니엘 8장 9-13절에 묘사된 이 원수 세력이 추가적으로 벌이는 활동들의 특징은 성소와 그 예배자들을 짓밟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1장 2절에서 거룩한 도성이 짓밟힌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거룩한 도성’은 적그리스도가 압제하고 핍박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이 압제는 “이방인들에 의해 밟히는” 예루살렘의 짓밟힘과(눅 21:24) 유사한 것으로서, 요한계시록 11 장 8절“큰 성”과는 대조적이다. 이 핍박 세력의 활동은, “땅에 거하는 자들”(계 13:8, 12, 14)을 그의 경배자들로 삼는 요한계시록 13장 1-10절의 바다 짐승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이 압제 세력은 다니엘 7장 25절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이 세력에게 주어진 시간은 마흔두 달인데(계 13:5), 역사적으로 중세(대개 538년부터 1798년 사이로 보는)에 성취되었다. 이 기간에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자]들을 훼방하”였다(계 13:6).

 요한계시록 13장 1-10절은 마흔두 달 동안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힐 거룩한 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하나는 분명하다. 즉, 요한계시록 11장의 문맥은 이 곳에서 문자적 시간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라들 혹은 이방인들에게 할당된 마흔두 달은 약 1200년 간의 특정 기간을 대표한다. 이 기간에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그리스도께 대한 그들의 충성때문에 고난과 고통을 경험할 것이다. 다니엘 7-9장, 요한계시록 11장 2-13절, 그리고 요한계시록 13장 1-10절은 서로 관련이 있으며, 각각을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두 증인 (11:3-14)
 요한계시록 11장 3-4절은 여섯째와 일곱째 나팔 사이에 있는 막간의 결론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앞서 나온 요한계시록 10장 8절-11장 2절 위에 구축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11장 3-4절요한계시록 10장 8-11절과 관련하여 추가적인 정보, 즉 하나님의 백성이 복음을 증거할 때, 적대적 세상에서 그들이 당할 경험을 제공한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권세를 주리니.
 문자적으로 ‘내가 주리라’(헬, 도소 dōso)는 두 증인이 하나님의 권세를 받았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문법 구조에 의하면 이 구절은 “내가 권세를 주리라.”이다.15)
나의 두 증인.
 헬라어 마르튀스(martus)‘증인’‘순교자’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계 1:5 어구 해설 참조), 두 증인의 정체에 대하여는 여러 제안 율법과 선지자들, 율법과 복음, 모세와 엘리야, 또는 마지막 때에 모세와 엘리야의 역할을 할 두 선지자-이 제시되어 왔다. 가장 설득력 있는 제안은 두 증인을 성경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는 견해다.

 전자에 의하면, 두 증인은 성경, 즉 구약과 신약을 대표한다. 예수님은 구약이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 5:39; 눅 24:25-27, 44 참조), 마찬가지로, 신약은 예수님의 생애, 사업, 그분의 말씀들, 그분의 희생적 죽음, 백성을 위한 부활 후의 그분의 봉사 등을 증거한다. 더욱이,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기별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소개된다(계 1:2, 9). 만일 누구든지 두 증인을 해하려 한다면, 그들은 불로써 그들의 원수를 태우고, 비가오지 않도록 하늘을 닫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계 11:5-6). 구약에서 모세를 통하여 애굽에 재앙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의 말 씀이다(출 7-11장), 예레미야 5장 14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의 입에 있는 불과 같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엘리야를 통하여 삼 년 반 동안 하늘을 닫아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않게 하였다(왕상 17:1). 요한계시록의 끝에,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는 자에 대한 경고가 있음 은 주목할 만하다(22:18-19). 이렇게 이해할 때, 증인을 죽이는 것은(계 11:7-10) 백성이 한 동안 성경을 거절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두 증인의 부활은 성경의 기별에 대한 흥미가 일깨워지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견해에 따르면, 두 증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16) 신약에서 증언은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 의무다. 예수님은 종종 당신의 제자들을 증인들이라 하셨다(요 15:27; 눅 24:48 참조),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분명히 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 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2:32; 3:15; 5:32 참조). 예수님에 의하면, 세상 끝이 이르기 전에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전파되어야 한다(마 24:14),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핍박받는 이유는 복음에 관한 증거 때문이다(2:13; 6:9; 12:11; 17:6; 20:4).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교회다(계 17:6; 20:4).

 앞에서 드러났듯이, 두 증인은 하나님의 백성, 즉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이스라엘) 교회를 암시한다는 증거가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그들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인 성경을 상징할 수 있다. 증인에 대한 이 두 해석 중 하나만이 옳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두 증인은 그들의 왕적, 제사장적 역할을 수행함에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계 1:6; 5:10 참조).17) 그들의 주 임무는 여호수아, 스룹바벨, 모세, 그리고 엘리야가 한 것처럼 배도한 세상에 예언적 증거를 하는 것이다.18)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자들에게, 엘렌 화잇이 두 증인을 이러한 이중적 의미로 이해하였다는 것은 특별히 흥미롭다. 한 경우에 그녀는 “두 증인은 신구약의 성경을 대표한다”고 하였다.19) 또 다른 경우에 그녀는 “교회는 여전히 시련의 때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그는 베옷을 입고 예언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그분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곧 그분께서 준비하시는 날에 그들은 특별하고도 영광스러운 일을 하기 위하여 그분의 도구들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20)
1260일.
 요한계시록 11장 2절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1: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이 곳에는 스가랴 4장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선지자는 묵시 중에서 일곱 등불이 있는 촛대를 보았다. 그 촛대 양쪽에 두 감람 나무가 있었고, 두 감람나무에는 감람나무들에서 돋아난 두 감람가지가 있었다. 이 두 나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라고 하였다(슥 4:14). 스가랴 4장에서, 이 ‘기름 발리운 자 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유대 총독 스룹바벨로, 그들은 성전을 회복시켰다. 스가랴가 하나의 촛대만을 본 반면, 요한은 두 증인의 왕적, 제사장적 역할을 대표하기 위하여 감람나무와 두 촛대를 들어 말한다(계 1:6; 5:10 참조).
요한계시록 11: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1260일의 마지막을 말하는 것으로, 두 증인은 이 기 간에 베옷을 입고 증거하였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
 이 짐승은 가끔 요한계시록 13장 110절‘바다에서 나오는’ 짐승과 동일시된다. 왜냐하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은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처럼, 성도들과 싸워 그들을 이기기 때문이다(계 13:7; 단 7:21 참조), 이 외에,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은 마흔두 달 동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이 기간은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이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라는 말은(계 11:7) 요한계시록 11장의 무저갱으로부터 나온 짐승이 두 증인과 싸워서 그들을 죽이는 일이 마흔두 달 또는 1260일의 기간 이후에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무저갱에서 나오는 짐승은 아마도 요한계시록에서 용으로 대표되는 사단은 아닐 것이다(계 12장), 다니엘서에서 짐승은 국가 세력을 대표하기 때문에,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은 세계를 지배하거나 그것의 한 부분을 지배하는 정치적 또는 종교적 세력의 유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두 증인을 성경으로 이해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무저갱에서 나온 그 짐승을 프랑스 혁명으로 해석하였다. 두 증인의 죽음은 1260일의 예언적 기간 직후의 프랑스 혁명 때 자행된 성경에 대한 엄청난 공격으로 해석되어 왔다. 엘렌 화잇은 각 시대의 대쟁투 15장 전체를 이 사건의 해석에 할애하였다. 공포의 프랑스 혁명 동안 반종교적, 무신론적 정서가 그 나라를 휩쓸어, 그 결과 기독교와 성경은 거절되었으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온갖 적대감을 가진 무신론주의와 세속주의의 조류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 만일 두 증인이 성경을 상징한다면, 이 역사적 해석은 적절한 것 같다. 프랑스 혁명 이후, 교회는 복음이 승승장구하면서 광범위하게 전 세계에 전파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비록 그러한 역사적 적용이 견지할 만하더라도 두 증인이 반드시 성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이해가 꼭 무가치하지는 않다.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는 악한 세력들의 공격을 결코 성경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두 책은 그 공격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전하는 하나님의 충성된 백성에게까지 확대시킨다. 악한 세력들이 전쟁을 벌이는 대상은 성도들이다(단 7:21; 계 12:17; 13:7 참조). 요한이 두 증인과 그들의 증거를 기술할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을 핍박하는 악의 세력들이다.
무저갱.
 요한계시록 9장 1절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1: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저희 시체.
 집합적 단수명사인 헬라어 토 프토마 아우톤(to ptôma autón 그들의 죽은 몸)은 8, 9절에 나온다. 9절에서 이 단수명사는 복수형으로 전환되기 전에 다시 사용되었다. 이 집합적 명사는 5절에서 입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이것은 두 증인의 집합적 성격을 암시하는데, 두 증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할 때 특별히 의미심장하다. 빌(G. K. Beale)이 관찰하는 대로, 두 증인은 “그리스도의 증거 ‘집단’으로서 증거” 하는 한편, “... 또한 그들은 온 땅에 흩어져 있는 많은 증인들이다.”21)
큰 성.
 구약에는 큰 성들과(니느웨, 두로, 그리고 바벨론을 포함하여) 관련된 말들이 반복하여 나온다. 그 성들에서 하나님께서는 반대를 받으셨고 그분의 백성은 해를 당하였다. 이 큰 성은 요한계시록 11장 2절‘거룩한 성’과 대조된다(단 9:24; 계 21:2, 10; 22:19 참조), 요한계시록에서 큰 성은 일관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지막 때의 악한 세력인 바벨론을 지칭한다. (14:8; 16:19; 17:18; 18:10, 16, 19, 21 참조), 요한계시록 14장 8절의 어구 해설을 더 참조하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전통적으로 1260년의 예언 기간의 마지막에 프랑스가 ‘큰 성’의 모든 특징을 잘 드러내었다고 믿어왔다.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곳이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도시 예루살렘은 그 배도의 때에 선지자들에 의해 자주 소돔과 동일시되었다(사 1:9-10; 3:9; 렘 23:14; 겔 16:48-58). 구약에서 소돔과 애굽은 그 사악함으로 유명하였고, 하나님의 백성이 ‘박해를 받으면서 외국인으로 살았던’ 장소였다.22) 소돔은 온갖 죄악과 모든 도덕적 퇴폐를 대표한다(창 18:20-21; 19:4-11), 한편, 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의 압제자로서 압제자의 오만과 무신론적 자만심으로 악명 높았다. 그러한 태도는 제일 먼저 출애굽 할 때 바로의 오만한 말에서 나타났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출 5:2). 선지자 에스겔은 ‘애굽의 교만’(겔 32:12)을 언급하며,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소돔과 애굽 같다고 예언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것에 따른 처벌을 받을 것이다(암 4:10-11).
요한계시록 11: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땅에 거하는 자들.
 요한계시록 6장 10절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이 선물 교환은 (고대 근동에서의 일상적인 관습으로) 유대인의 부림절을 상기시킨다. 이 때 유대인들은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함으로 그들의 구원을 경축하였다(스 9:22; 느 8:10-12 참조).23)
요한계시록 11:13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큰 지진이 나서.
 이 구절은 여섯째 인과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6장 12절에도 나온다. 이것은 11장 13절에 언급된 ‘큰 지진’이 여섯째 인의 개봉 시에 묘사된 것과 동일한 지진임을 암시한다.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여러 논쟁은 이 곳에서 참된 회개가 나타났음을 시사한다.

 첫째,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계 14:6) 말은 회개에 대한 촉구다.

 둘째, 성경 전체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눅 17:18; 요 9:24; 행 12:23; 롬 4:20; 벧전 2:12) 하나님께 대한 긍정적 태도를 의미 한다(계 15:4; 16:9; 19:7), 요한계시록 11장 13절의 내용은 요한계시록 9장 20~21절16장 9절에 나오는 내용과는 반대다.
(주해)
요한계시록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일찍이 요한에게 많은 나라에 관하여 다시 예언하라는 사명을 주었고, 뒤이어 성전과 제단과 예배자들을 척량하라고 명했던 하늘의 그 음성이 이제 공표한다. 내가 나의 두 증인 에게 사명을 주리니 그들이 1260일 동안 베옷을 입고 예언하리라. ‘내가 주리니’라는 말은 두 증인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받아 예언할 것을 의미한다. 두 증인의 예언은 요한계시록 10 장 11절과 관련되어 있다. 이 곳에서 요한은 많은 나라들에 관하여 예언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요한계시록 11장 3-14절은 요한에게 주었던 예언의 사명이 확대되어 교회가 복음의 충실한 증인이 되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암시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증인들의 숫자는 고대 이스라엘의 사법 제도에 나오는 두 증인의 법을 생각나게 한다(신 19:15; 민 35:30; 신 17:6; 히 10:28 참조). 그 법에는 유대 법정 체계에서 증인의 수가 두 사람이어야 함이 명기되어 있다. 어떤 것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두 증인은 일치되고 확증적인 증언을 해야만 되었다(마 18:16; 고후 13:1; 딤전 5:19 참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요 8:17) 이런 관습에 따라, 예수님은 당신의 증인으로서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 (막 6:7; 눅 10:1), 그리고 초기 교회는 이 관습을 계속하였다(행 13:2; 15:39-41),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의 증언은 그들이 선포하는 기별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암시한다. 세상이 예언적 증언을 거절하면 반드시 심각한 결과와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다.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 1260일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고 압제하는 기간과 동일한 기간이다(계 11:2; 12:6, 14; 13:6 참조), 요한계시록에서 마흔두 달은 악인들에게 할당된 반면, 1260일은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요한계시록 11장 2절과 관련하여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여기서는 문자적 시간이 의도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 주로 538년부터 1798년으로 계산되는 중세의 약 1200년 이상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거할 때 당할 격렬한 고난과 쓰라린 박해를 받는 특정 기간을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두 증인이 신실하게 증거하는 동안 그들이 입고 있는 베옷에 의해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그들은 구약에서 예언 자의 직무를 수행할 때, 선지자들이 입었던 통상적인 베옷을 입고 있다(사 20:2; 슥 13:4; 마 3:4 참조). 그리고 분명히 이것은 복음 기별을 전파할 때 경험한 요한계시록 10장 8-11절의 쓰라린 결과와 어떤 관계가 있다.
요한계시록 11: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요한계시록 11: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요한계시록 11: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은 요한에게 두 증인의 신원 파악에 필요한 여러 단초들을 제공한다. 첫째, 그들은 두 감람나무요 땅의 여호와 앞에 서 있는 두 촛대다. 요한은 분명히 스가랴의 묵시를 가리킨다. 스가랴는 두 감람나무가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를(즉 4:14) 대표한다고 하였다. 두 감람나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성전을 복구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스가랴 4장을 언급하면서 요한은 두 증인의 활동이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역할과 닮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한다. 두 증인이 성전 회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계 11:1-2 참조). 성령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그 봉사를 회복하는 일에 그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통하여 일하신 것과 꼭 같이(즉 4:6), 성령은 두 증인을 사용하셔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신다. 이 기별은 하늘 성소의 회복과 세상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활동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이 두 증인은 예언적 활동 기간에 쓰라린 반대와 박해를 경험한다 할지라도, 정녕 그들은 무력하게 되거나 멸망당하지 않는다.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무엇 보다도 그들의 입에서 나온 이 불은, 아하시야 왕이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거듭하여 보낸 군인들을 삼켜버린,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불러내린 불을 떠오르게 한다(왕하 1:9-14). 그것은 또 한 예레미야의 입에서 불이 되어 반역적이고 불충했던 백성을 태워버린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렘 5:14).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무하며 극심한 배도가 있었던 시기에 엘리야가 행한 예언적 활동의 인유가 또 여기 있다. 이는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예언한 혹독한 가뭄을 지적한다 (왕상 17:1). 그 땅에는 하늘이 닫히고 삼년 반 동안 비가 없었다(눅 4:25; 약 5:17 참조), 두 증인은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친다. 이것은 분명히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거역하였을 때, 모세에 의해 시작된 애굽의 재앙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거역의 결과로서 애굽 땅은 온갖 재앙으로 해를 당하였다(출 7-11장).

 더욱이 두 증인을 묘사하며 사용한 언어는 증인들의 역할과 활동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 즉 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이 보여 주었던 역할과 활동을 닮았음을 나타낸다. 둘째, 두 증인의 역할과 활동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그의 생애의 끝에 당할 일을 말한 모세와 엘리야를 닮았다(눅 9:31 참조), 선지자 말라기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엘리야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말 4:5-6). 그러나 이 두 증인은 상징적 인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모세와 엘리야가 땅으로 되돌아왔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증거 활동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 중의 두 사람, 즉 모세와 엘리야의 선지자적 역할과 활동을 모델로 삼고 있다.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뿐만 아니라 가장 위대한 두 선지자의 예언 활동에 수반되었던 그 동일한 신적 능력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증인들을 대표하는 두 상징적 인물의 증거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인가? 증거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나(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이 왕적, 제사장적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해는 매우 적절한 것 같다(계 1:6; 5:10),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선지자처럼 증거한다. 그들의 증거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어 당신의 증인들로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예수님을 상기시킨다(막 6:7; 눅 10:1), 증언하는 일의 엄숙성과 중요성은 구약의 법에 의거하였는데, 증언이 유효하기 위하여 서로 부합하고 보강하는 증거를 가진 두 증인이 요구되었다(신 19:15; 요 8:17; 히 10:28).
요한계시록 11: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요한계시록 11: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요한계시록 11: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11: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두 증인은 그들의 선지자적 증거를 위하여 정해진 기간을 부여받았다. 그들이 1260일 동안 베옷을 입고 증거를 마친 후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것이다. 무저갱에서 올라와 두 증인과 전쟁을 벌이는 이 짐승은 누구인가? 일찍이 우리는 무저갱 혹은 지옥은 타락한 천사들, 즉 마귀들의 처소를 대표한다고 보았다(눅 8:31; 벧후 2:4; 유 1:6 참조). 이 곳은 다섯째 나팔의 장면에서 악마적 메뚜기들이 나와 백성을 공격하던 장소다(계 9:1-11). 무저갱은 두 증인을 공격하는 짐승의 마귀적 기원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 13장‘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마흔두 달 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정복하는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짐승이 무저갱에서 올라와 두 증인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그들이 선지자적 증거를 마치고 난 이후다. 요한계시록 17장 8절은 무저갱에서 나온 다른 짐승을 언급하는데, 음녀가 바로 그 위에 앉아 있다. 두 증인과 전쟁을 벌이며 그들을 해하고 핍박하는 짐승은 사단 자신이 승인하고 후원하는 권세다.

 두 증인의 시체가 큰 성 길에 널려 있다. 헬라어 원어는 ‘그들의 시체’라고 단수로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두 증인이 하나의 개체임을 보여 준다. 그들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고대에 죽은 시체가 노출되고 매장되지 못하는 것은 치욕이요 최대의 비극이었다(왕상 13:22; 시 79:3; 렘 8:1-2; 14:16 참조). 세상은 두 증인을 그들이 전파한 기별과 함께 거절하였다. 이제 두 증인은 죽을 때 혹독한 모욕을 겪는다. 큰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 하기도 하고 애굽이라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증인들이 순교를 당한 큰 성은 소돔의 악과 도덕적 부패(창 18:20-2119:4-11), 그리고 애굽의 무신론적 오만과 자만이 합쳐진 곳이다(출 5:2 참조). 두 도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핍박을 받으면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곳이다.24)

 더욱이 큰 성은 저희 주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으로 알려졌다. 두 증인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주님에게 일어났던 일’이다.25) 그들을 반대한 자들은 일찍이 예수께서 대면했던 자들이다. 예루살렘이 예수님을 거절하고 그분을 죽게 했던 것처럼, 정치적 세력의 지배하의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하는 큰 성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는 두 증인을 죽였다는 것을 1260년 예언 기간이 끝나면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 기간에 자행된 성경에 대한 무신론적 공격과 종교 폐지로 본다.

 두 증인의 시체는 사흘 반 동안 방치된 채 매장되지 못하였다. 그들이 베옷을 입고 증거한 하루는 일 년에 해당된다. 이 기간은 예수께서 무덤에서 보내신 시간과 상응한다. 이 기간에 두 증인의 시체는 큰 성의 거리에 방치된 채로 있다. 반면, 백성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의 사람들은 시체를 만족한 듯이 바라보면서, 그 시체가 적절하고 예모 있게 매장되는 것을 거절한다. 요한에게 ‘백성과 족속과 나라와 방언’이라는 말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예언하라고 위탁되었던 사명을 생각나게 한다(계 10:11). 그들은 분명히 동일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 책을 먹고 맛보았던 쓴맛의 경험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계 10:8-11 참조), 하나님의 백성은 종종 그들의 증거가 거절과 멸시에 직면함으로 고통의 쓰라림을 경험한다.
땅에 거하는 자들.
 그들은 증인들의 시체를 보고 즐거워 기뻐하며 경축하고 선물을 교환한다. 요한계시록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언제나 악인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분명히 요한계시록 11장 9절‘백성과 족속들과 방언들과 나라들’이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그들은 그 두 증인의 죽음을 축하하고 있다. 이 괴롭힘은 ‘죄악과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의 양심을 괴롭’혔다는 표현 속에 나타난다.26) 하나님의 백성이 증거한 복음은 ‘언제나 악인들의 양심을 괴롭혔다.’27)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였다(왕상 18:17). 아합이 선지자 미가를 미워한 것도 그가 왕에 대하여 좋은 예언이 아닌 나쁜 예언 만을 하였기 때문이다(왕상 22:8, 18).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하셨다.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니”(막 13:13). 바울이 총독 벨릭스에게 ‘의와 절제와 심판’에 관하여 설교하였을 때, 두려움에 질린 벨릭스는 바울의 말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고 보내버렸다(행 26:25).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말씀을 듣되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고통을 가져온다.”28)
요한계시록 11: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요한계시록 11: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요한계시록 11:13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이제 경축은 끝났다. 사흘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 매 저희가 발로 일어섰다.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창세기 2장 7절을 가리킨다. 증인에게 생기를 주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두 증인에게 생기를 주는 이 장면은 에스겔의 묵시에서 보인 마른뼈들의 골짜기를 상기시킨다. 이 묵시는 바벨론의 유랑으로부터 돌아올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원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 같았다. 에스겔이 예언하였듯이, 생기가 죽은 뼈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살아서 발로 일어섰다(겔 37:1-10), 세상이 ‘그들을 괴롭힌’ 신실한 증인들의 음성을 침묵시켰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 신실한 증인들은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상징적 묘사를 통하여 언제나 옹호되었다. 데스몬드 포드(Desmond Ford) 는 이렇게 말한다. “의인들을 때려눕힐(knock down) 수는 있으나, 그들이 끝장난(knock out) 것은 아니다.”29) 역사적으로 적용하면 프랑스 혁명의 결과 중 하나는, 그 후 수많은 성서공회와 선교협회가 설립되어 성경을 알고자 하는 관심이 크게 고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두 증인은 다시 살게 되었고,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복음을 널리 전할 무대가 설치되었다. 증인들에게 생기가 돌아옴으로, 일찍이 그들의 치욕적인 죽음을 즐거워했던 그들의 원수들에게 큰 두려움을 일으킨다.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부활한 증인들을 호출한다.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앞서 이들의 원수들은 ‘백성과 족속들과 방언들과 나라들’(11:9)과 ‘땅에 거하는 자들’(11:10)로 파악되었다. 증인들의 승천은 부활 후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가신 예수님의 승천을 상기시킨다(행 1:9). 우리는 모세와 엘리야가 승천한 것을 알고 있다(왕하 2:11; 유 1:9), 그들의 선지자적 증언을 마친 이 증인들은 이제 기적적으로 구름을 타고 승천한다. 이 선지자들은 이제까지의 굴욕적인 상태에서 높임을 받음으로써 땅에 거하는 자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더한다.

 그러나 복음 전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요한계시록 14장 6절에서, 요한은 세 천사가 마지막 복음 기별을 땅에 거하는 자들과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선포하는 것을 본다. 본문은 이 세상 역사의 끝을 향해 발하는 복음의 최후 선포를 가리킨다.

 증인들이 하늘로 올리웠을 같은 시각에 큰 지진이 일어났다. 여섯째 인의 지진처럼, 이 지진은 종말의 시작과 이 세상 역사의 최후 사건들을 알린다. “지진의 상징은 재림 직전의 세계의 특성인 혼란과 격변을 묘사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막 13:8; 계 16:18을 보라).” 지진은 성 십분의 일을 파괴하고 칠천 인을 죽인다. 이 도시는 분명히 상징적으로 소돔과 애굽으로,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으로 불리는 ‘큰 성’이다. 큰 성이 붕괴됨으로써 죽임을 당한 칠천 인은 완고한 불신자들 전체를 대표한다.31) 그것은 엘리야의 봉사 기간 동안 끝까지 신실하였던 칠천 인을 생각나게 한다(왕상 19:18). 로마서 11장 4-5절에서 이 숫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총수를 뜻한다. 여기에서 큰 성 바벨론은 일부만 무너지고, 요한계시록 18장에서 완전히 멸망당한다.

 큰 성의 부분적 붕괴와 함께 지진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긍정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이 곳의 회개는 진실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한 후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느부갓네살의 고백을 상기시킨다(단 4:34-37). 큰 성이 붕괴될 때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계 14:7) 요한계시록 14장의 첫째 천사의 촉구에 반응하는 것 같다. 이것은 두 증인에 대한 옹호가(계 11:11-13) 요한계시록 14장의 첫째 천사가 전하는 영원한 복음 선포와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1장의 중심은 분명히 교회를 통한 복음 선포에 있는 것 같다. 지구 역사가 그 끝에 다가감에 따라, 복음은 한 번 더 강하게 선포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11: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요한은 다음의 진술로써 이 부분을 일단락 짓는다.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 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첫째와 둘째 화는 각각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나팔을 이미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셋째 화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 셋 째 화는 하나님의 비밀이 완성되는 때로 우리를 이끌어간다(계 10:7 참조).
11:1-14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 11장 1-14절은 여섯째와 일곱째 나팔 사이의 막간을 종결 짓는다. 제10장에서 요한은 많은 사람들에게 예언하라는 사명을 위탁받았다(계 10:8-11), 요한계시록 11장 1-14절은 요한을 통해 교회가 위탁받은 기별의 내용에 관한 부가적 정보를 제공한다. 교회는 이 기별을 마지막 때 세상에 예언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계 11:1-2), 그 기별은 복음 선포로 말미암아 그 선포자들에게 미치게 될 쓰라린 경험을 설명한다(11:3-13).

 요한계시록 11장 1-2절은 재림을 위한 성도들의 준비와 관련하여, 하늘 성소와 그 봉사의 회복이 최후의 복음 선포의 중심에 있음을 가리킨다. 성소와 제단과 그리고 예배자들의 회복은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정부와 관련되어 있다. 이 땅에 죄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분의 취급 방식이 계속적으로 공격을 받아왔다. 성소 기별의 회복은 온 우주 앞에 하나님의 성품을 옹호하고, 그분의 합당한 통치권을 회복하고, 그분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거기에는 유일한 구원의 방편으로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과 그분의 의와 관련된 복음의 회복이 포함되어 있다.

 성소 회복의 기별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그 백성의 준비도 포함되어 있다. 이 준비에는 그들의 삶의 정신적, 신체적, 그리고 영적 측면의 회복이 포함된다. 요한계시록 11장 1-2 절은 세상 역사의 마지막 무대에서 ‘예언하라’는 사명을 위탁받은 교회가 전할 영원한 복음의 선포가 하늘 성소의 회복이라는 맥락에서 전해질 것임을 언급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복음 기별을 선포할 때 그들이 당할 경험이 다음 부분에 등장할 두 증인에 대한 묘사에서 보다 잘 기술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11장 3-14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 복음의 기별을 선포할 때, 그들이 경험할 상징적 쓰라림과 고통을 묘사한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가 요한계시록의 이 단원을 중세 시대와 프랑스 혁명 때 성취된 것으로 해석해왔을지라도, 종말 시대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단원이 갖는 중요성은 시간적이고 지리적인 위치를 넘어선다. 상징적 두 증인에 대한 이 장면은, 그들이 누구이든지간에,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에 충실한 당신의 성도들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준다. 그분은 출애굽 과정에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큰 배도에서 엘리야를, 그리고 포로 후기에 예루살렘의 성전 재건에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사용하신 것같이 그들을 사용하신다.

 세상에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 하나님의 종들은 종종 괴로움과 박해를 경험한다. 그러나 ‘큰 성’에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백성은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주님에게 이미 일어났던 일들을 경험한다. 그분과 함께 하며 그분을 증거하는 것은 교회의 기본 사명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선지자적 역할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선지자적 증거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취하신 것을 온 세상에서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32) 하나님의 원수들은 침묵케 하려는 시도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들을 괴롭히고 핍박할지 모른다. 그리고 원수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언은 분명하다. 즉, 우리는 복음이 한번 더 힘있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선포될 때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최후의 선포로 말미암아 온 세상은 복음 기별의 영광으로 환하여질 것이다(계 18:1 참조).

주(註) ——————
1. Kurt Deissner, “metron,”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4:633-634 참조. 
2. Strand, “An Overlooked Old-Testament Background to Revelation 11:1,” 322-325. 
3. 상게서, 324. 
4. 상게서, 322. 
5. 상게서, 322-323. 
6. Jacques B. Doukhan, Secrets of Daniel: Wisdom and Dreams of a Jewish Prince in Exile (Hag 요한계시록 11:1-14 377 erstown, MD: Review and Herald, 2000), 108-110. 
7. LeRoy E. Froom, The Prophetic Faith of Our Fathers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48), 2:794-795. 
8. LaRondelle, How to Understand the End-Time Prophecies, 258. 
9. 성경 예언의 연일 상징에 관하여 Alberto R. Timm, “Miniature Symbolization and the Year-day Principle of Prophetic Interpretation,”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42.1(2004): 149-167 을 보라. 
10. C. Mervyn Maxwell, “Roman Catholicism and the United States”(pp. 72–77), and “Some Questions Answered-Dates: Their Historical Setting” (pp. 125–132) in Symposium on RevelationBook 2, Daniel and Revelation Committee Series 7 (Silver Spring, MD: Biblical Research Institute, 1992)을 보라, 마흔두 달/1260일 예언 기간의 기산점을 기원전 538년이라고 최근에 확인한 것으로 Alberto Timm (“A Short Historical Background to 1771 508 and 538 as related to the Establishment of Papal Supremacy,” a paper presented at the Michigan Conference Bible Prophecy Symposium, Camp Au Sable, August, 2006), Heinz Schaidinger ("History Behind the Prophecy of the 1260 Days: The Beginning of the Time Period in 538 AD,” unpuplished paper, Bogenhofen Seminary, March 2008)를 보라. 
11. Strand, “An Overlooked Old-Testament Background to Revelation 11:1,” 322–325. 
12. 상게서, 322-323. 
13. J. M. Ford, 177. 
14. Hughes, 121. 
15. Charles, 280. 
16. 그러한 견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쟁들이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273-283에 소개되어 있다. 
17. Frederick F. Bruce, "The Revelation to John,”A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Zondervan, 1969), 649; Fiorenza, Revelation, 78. 
18. Beale, 573 
19. White, The Great Controversy, 267. 
20. White, Testimonies for the Church (Mountain View, CA: Pacific Press, 1948), 4:594-595. 
21. Beale, 594. 
22. 상게서, 591. 
23.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281-282 참조. 
24. Beale, 591. 
25. Johnson, 506. 
26. Thomas, Revelation 8–22, 96. 
27. Mounce, 227.
28. Desmond Ford, 495-496. 
29. 상게서, 496. 
30.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804. 
31. Beale, 603. 
32.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