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대 사이에 계시는 예수 (1:9-20)
 일곱 교회에 보낸 기별의 서론 부분은, 밧모 섬에서 요한이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야기(1:9-20)와 그가 묵시 중에서 본 것을 기록하여 교회들에게 전달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떻게 받았는지 등에 관하여(1:11) 기술한다. 다음에서 언급하듯이, 교회에 보낸 일곱 기별의 서론 부분은 분명히 요한계시록 전체에 적용된다.

밧모의 요한 (1:9-11)
 이 부분은 요한이 그가 본 것들을 기록하여 교회들에게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과 함께 요한계시록의 묵시를 받은 환경을 묘사한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밧모.
 에게 해(海)에 있는 이 작고 황량한 돌섬(오늘날 파티노, Patino'로 불리는)은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의 해안가에서 남서쪽으로 약 50마일(80km) 지점에 있는 스포라데즈 군도(Sporades Islands)에 속해 있다. 약 16평방마일 정도 넓이의 섬으로, 전통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로마 당국이 범법자들을 보내는 고대판 알카트라즈(Alcatraz, 미국 샌프란시스코 만의 작은 섬으로, 예전에 연방 교도소가 있었다. -역자 주)와 같은 유배지, 즉 일종의 수용소였다. 그러나 이 견해는 밧모 섬이 유형지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탓에 어떤 현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떤 견해를 취하든지, 요한이 얼마간 유배되어 밧모 섬에 있었다는 한 가지는 분명한 듯 싶다. 전승에 의하면, 힘차게 그리스도를 증거한 까닭에 요한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통치 동안(서기 81-96)에 밧모로 유배되었으며, 채석장에서 강제 노역을 해야 하였다. 후에 그는 네르바(Nerva) 황제에 의해 풀려나 에베소로 되돌아갈 허락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요한계시록 1장 2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주의 날.
 ‘주의 날’(헬, 헤 퀴리아케 헤메라 hé kuriake hemèra)은 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 곳에만 나온다. 이 구절의 가능한 의미에 대해 다섯 개의 제안이 있다.

 첫째,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주일 중 첫째 날인 일요일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1) 이 견해의 옹호자들은 ‘주의 날’이 일요일과 관련하여 2세기 초부터 그리스도인의 저술에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술에서 사용된 원 헬라어는 이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이 견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로 간주되는 2세기 초의 두 편의 기독교 저술, 곧 디다케(Didache)2)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마그네시아(Magnesia) 인들에게 보낸 편지는3) 실제로 “주의 날, the Lord's day(헬, kuriake heméra 퀴리아케 헤메라)”이 아니라, “주의 것에 따르면, according to the Lord's” (kata kuriakān)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내적 증거는 주의 날이 의도된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그 구절은 오히려 ‘주의 가르침’ 혹은 ‘주의 명령들’이라는 의미다.4)

 일요일과 관련하여 ‘주의 날’이 최초로 사용된 결정적 증거는 2세기 후반의 외경인 베드로 복음서(The Gospel of Peter)5)다. 일요일과 관련하여 ‘주의 날’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서기 190년경) 교부였다.6) 거의 이러한 문헌들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이후에 나왔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서 ‘주의 날’을 일요일로 이해할 증거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반대로, 이 저자들은 요한계시록으로부터 이 구절을 취하여 주일 중 첫째 날인 일요일에 적용시켰다. 신약은 한결같게 일요일을 ‘주의 날’이라기보다 ‘주일 중 첫날’이라고 칭한다(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 19; 행 20:7; 고전 16:2).


 둘째, 몇 학자들은 ‘주의 날’을 주일 중 일요일이라기보다 연례 행사로서의 부활절 일요일이라고 주장한다.7) 부활을 기념하는 연례 행사인 그 날에 요한은 부활하신 주를 만나기 위해 성령 안에 있었다는 주장이다. 교부들의 저술에서 나온 증거는, ‘주의 날’이 부활절 일요일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특히,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부활절을 지켰다.8) 그러나 이 증거도 훨씬 후기의 연대에 속하는 것이다(서기 2세기경),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이 요한계시록의 그 구절보다 훨씬 일찍 사용되었다는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9)


 셋째, 일부 저자들은 이 구절이 황제의 날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10) 아돌프 다이스만(Adolf Deissman)은 퀴리아코스(kuriakos)라는 말이 1세기에 사용되고 있었고, 이 말이 퀴리오스(kurios, 주님)라는 칭호를 주장했던 로마 황제와 관련되었던 것임을 보여 준다.11) 비록 비문들은 애굽과 소아시아가 로마 황제에게 봉헌되었던 세바스테(Sebaste)로 알려진 날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지만,12) ‘주의 날’‘세바스테의 날’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두 구절은 완전히 다르다. 퀴리아케 헤메라(kuriak heméra)가 황제를 경축하는 황제의 날로 사용되었음을 암시하는 어떤 결정적 증거도 발견된 적이 없다. 또한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퀴리오스(kurios)로 부르는 문제와 황제 숭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요한이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황제의 날을 언급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13)


 넷째, 또 다른 견해는 ‘주의 날’이 주일 중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그러한 이해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전통적 해석을 강력히 반영한다.14) 엘렌 화잇도 이 견해를 지지했다.15)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다른 곳 어디에서도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칠일 안식일은 “나의 거룩한 날,” “주의 거룩한 날”(사 58:13)로 불렸다. 세 공관복음서는 예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인용한다(마 12:8; 막 2:27-28; 눅 6:5). 그러므로 ‘주의 날’이라는 구절은 요한이 묵시를 일요일이 아니라 오히려 주일 중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표현의 의미에 대해 씨름하고 있던 매싱버드 포 드(J. Massynberde Ford)조차도, “거의 확실히 그리스도인들은 제칠일 안식일을 여전히 지키고 있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16)


 다섯째, 상당수의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요한이 “주의 날”이라는 말을 종말적 주의 날(헬. 헤메라 투 퀴리우 heméra tou kuriou 혹은 헤메라 퀴리우 heméra kuriou)과 관련하여 사용했다고 주장한다.17) 요한은 종말적 주의 날로 이끌어가고 있는 사건들이 그의 앞에서 전개되는 것을 목격하기 위하여 묵시 가운데로 들어갔다. 종말의 때와 관련하여 ‘주의 날’이라는 말은 선 지자들에 의해 종종 70인역과(LXX 욜 2:11, 31; 암 5:18-20; 습 1:14; 말 4:5) 또한 신약의 제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행 2:20; 살전 5:2; 벧후 3:10). 그러나 요한은 구약적 표현인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이 아닌 ‘주의 날(the Lord's day)’을 사용하고 있다. 이 문제는 요한이 그가 잘 알고 있는 구약적 용어를 풀어 썼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비추어 해결된다. 요한이 소유격 명사(‘여호와의 날’, the day of the Lord) 대신 형용사(‘주의 날’, ‘the Lord's day’)를 사용했다고 해서 의미상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두 단어 사이의 강조상의 변화를 보여 준다.18) 그러므로 주의 날'(the Lord's day)이라는 표현은 그저 여러 다른 명칭 중 하나로 보면 될 것이다. 그리스도 강림의 날에 대한 명칭으로는 “주의 날”(살전 5:2; 벧후 3: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고후 1:14), “큰 날”(유 6), “그의 진노의 큰 날”(계 6:17), “하나님의 큰 날”(계 16:14) 등이 있다.19)

 이 견해를 반대하는 이유는 요한이 그가 묵시를 받은 구체적인 장소(밧모라고 불리는 섬)와 경우(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의 날’은 요한이 묵시를 본 구체적 시간을 가리킨다는 결론이 논리적이다.20) 그러나 본문은 요한이 묵시를 받은 주의 날에 그가 밧모에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밧모에 있는 동안,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요한은 책 전체를 통하여 이 점을 일관되게 말한다. 그가 언제고 “성령 안에” 있을 때(4:2; 17:3; 21:10 참조), 본문에 뒤따라 나오는 것은 늘 문자적인 시간/장소보다는 상징적인 시간/장소를 가리킨다. 만약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서, 시간이 구체적, 문자적으로 의도되었다면,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부분과 별로 일관성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요한은 언제 이상을 받았는가? 성경적으로나 성경 외적 근거로 지지받지 못하는 일요일은 주의 날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더 강한 증거는 제칠일 안식일을 주의 날로 선호한다.

 다른 편으로 요한계시록 전체의 종말적 특성은 종말적 주의 날을 선호한다. 비록 “전 기독교 시대에 걸쳐 교회의 위로와 지침을 위하여”21) 기록되었을지라도, 요한계시록은 종말적 주의 날과 그 날로 이끌어가는 사건들의 관점에서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보게 될 것이지만, 제칠일 안식일 자체가 이 종말적 사건들에서(“반드시 속히 될 일,” 1:1) 취하게 될 중심적인 역할을 고려할 때, 요한의 이 수수께끼 같은 구절에서 이중적 의미를 찾는다고 하여 그것을 비합리적 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요한은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주의 날’(안식일)에 묵시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묵시는 ‘주의 날’ (종말 때의 심판)에 관한 것으로 안식일이 중요한 초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해)
요한계시록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시자 요한은 자신을 너희 형제 나 요한이라고 소개한다. 자기 소개의 “나, 요한” 이라는 표현은 다니엘서 후반부에 종종 나타나는 “나, 다니엘”이라는 표현을 상기시킨다(단 8:15, 27; 9:2; 10:2, 7 참조),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두 책은 특별한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다니엘의 마지막 묵시(단 10-12장)와 요한의 첫 묵시(1:12-20)는, 요한계시록이 다니엘서가 끝난 곳에서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다니엘의 마지막 예언적 묵시는 신적 형상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요한계시록 1장 12-20절의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묵시와 거의 동일하다. 더욱이 다니엘서는 다니엘의 관점에서 세계의 4개 제국에 대한 역사적 개요를 제공한다. 다니엘 의 마지막 묵시(11:1-12:4)는 네 번째 제국을 넘어서는 것 같다. 바로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시작된다. 요한계시록은 요한 당대로부터 재림까지의 기독교 시대의 전 역사를 망라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다니엘서 위에 구축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두 책은 두 권으로 된 한 세트 역할을 한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기록하며 그 계시를 전달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 였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형제이며, 그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의 언어로 말한다. 요한은 그들과 함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다. 그 백성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의 경험에 동참하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달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는 사람이다. 요한이 경험한 환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전 역사를 통하여 통과해야 할 환난의 전조(前兆)가 되었다. 조지 래드(George E. Lad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였으며, 왕국이 임할 때 그들은 그것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연유로, 교회는 사단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환난을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환난에는 교회에 임할 모든 악한 일들 특별히 종말 때에 있을 고난이 포함된다. 이 환난은 전 역사에 걸쳐 교회가 당해왔던 것의 격화(激化)에 불과할 것이다.22)
요한은 독자들에게 그가 자신의 책에 기록된 묵시들과 기별들을 받았을 때, 밧모라는 섬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 간략한 진술은 요한계시록의 주요 기별의 무대를 이루고 있다. 작은 돌섬인 밧모는 1세기에 로마제국의 유배지였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충실히 증언한 연고로 그 곳에 유배되었다. 그는 바다로 둘러싸인 이 황량한 섬에서 환난을 당하였다. ‘바다’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에서 25회에 걸쳐 나온다.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그 단어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윌리엄 바클리는, 요한이 기록한 요한계시록은 “망망한 바다의 소리와 광경들”로 가득 차 있다는 스트레이언(Strahan)의 말을 되뇌인다. ‘많은 물소리’가 밧모 섬만큼 더 음악적인 곳은 없다. 태양의 일출과 일몰을 밧모 섬만큼 더 장엄하게 ‘불이 섞인 유리바다’로 만들어 주는 곳은 없다. 그러나 이별의 바다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염원이 밧모 섬만큼 더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곳 또한 없다.”23) 요한에게 바다는 이별과 고통의 상징이다. 그가 핍박을 받으며 충실히 전한 증거가 거절당하는 것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복음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당할 경험을 상징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한 마지막 묵시에서, 무엇보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는 계시자 요한의 관찰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땅에서 그에게 그토록 고통을 안겨주었던 “바다”는 더 이상 없다. 이는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이다(계 21:4).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위에 묘사된 밧모 섬의 경험 가운데서,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종말적 주의 날의 영역으로 이끌려가서 재림과 종말의 때까지를 이어주는 역 사상 “반드시 속히 될”(1:1) 사건들을 보았다. 그러나 요한은 ‘주의 날’을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하였을 수도 있다고 보인다. 요한은 종말적 주의 날이라는 관점에서 사건들을 보도록 성령에 의해 이상 속으로 들어갔으며, 사실상 제칠일 안식일에 그 이상을 보았음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요한이 이 두 날을 연결시킨 것은 구원의 날의 표시(신 5:15; 겔 20:10-12)로서의 성경상 안식일의 종말적 의미(사 58:13-14; 66:23)와 부합되며, 또한 안식일이 마지막때의 시나리오 속에서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사건들의 묘사와 부합된다. 이것은 역시 요한이 두 개의 성경적 개념을 하나로 묶는 ‘주의 날’이라는 표현을 왜 만들어 내었는지를 설명한다.

 “성령에 감동된” 요한의 경험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은(고후 12:2-4) 바울의 경험과 유사하였을 것이다. 요한은 전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향을 미칠 사건들과 세력들이 나타나는 것을 이제 막 보게 될 것이며, 그것들은 종말의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 세력들은 심지어 요한 당대에도 역사(役事)하기 시작하였다. 윌리엄 밀리건은, “선견자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제 곧 있을 그 장엄하고 두려운 그 큰 날과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 앞에 끊임없이 서 있”다고 언급한다.24) 그러나 밧모 섬에 있던 요한 자신의 상황과 그의 기별을 받고 있는 교회들의 상황(계 2-3장 참조)은 주의 날의 미래적 현실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요한이 묵시 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이끌려가 전 기독교 시대를 통하여 일어날 사건들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종말의 때가 가까웠음을 경험하였다. 바로 그 이유로 그는 주의 날이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재림의 가까움은 요한이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전 달한 기별에 긴박성을 더하였다(계 1:3; 22:7, 12, 20 참조). 그는 그의 기별을 받고 있는 교회들과 더불어 종말적 ‘주의 날’을 현실로 경험하였다.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계시록 1: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묵시 중에, 요한은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는다. 이 구절은 구약의 신적 현현(顯現), 곧 하나님의 오심을 지칭하는 것이다. 나팔소리 같은 음성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였다(출 19:16), 신약에서, 나팔소리는 구름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선포한다(마 24:31; 고전 15:52; 살전 4:16), 다시 말하면,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시내 산에서 들린 그 동일한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이 이제 요한에게 하나님의 기별을 기록하여 교회들에게 보내어 읽혀지고 들리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요한계시록의 기별들은 십계명 자체만큼이나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기별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나팔소리 같은 음성은 요한에게 그가 보는 묵시를 두루마리에 기록하여 로마의 아시아 속주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그리고 라오디게아 등의 교회에 보내라고 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있는 도시의 이름을 아신다. 그분은 교회들을 개별적으로 친근하게 아시며, 또한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아신다(각 편지에서 “내가 아노니”라는 말이 반복됨을 주목하라 - 2:2, 9, 13, 19; 3:1, 8, 15). 예수께서 요한을 통하여 그들에게 보내는 기별들은 그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 기별의 목적은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신자들을 돕고 다가오는 위기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의 묵시 (1:12-20)
 이 부분은 요한계시록의 첫 묵시를 기술한다. 나팔소리 같은 음성을 들은 후에, 요한은 부활 하시어, 영화롭게 되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분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제시되었다.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1: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일곱 금 촛대.
 촛대(헬, 뤼크니아 luchnia, ‘등대’, ‘촛대’)는 지상 성소의 일곱 가지로 된 정금 등대(출 25:31-37) 또는 스가랴 4장 2절의 순금 등대를 따라 만들어졌다. 요한계시록 1장 12, 13절은 요한이 일곱 개의 독립된 금 등대와 그것들 사이를 거니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한다. 후에 요한은 그 촛대들은 일곱 기별이 전달된 일곱 교회를 대표한다고 설명하였다(1:20), 유대 전승에서, 촛대는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을 상징하였다.25)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빛을 가진 증인들로 임명되었다(사 42:6-7; 49:6; 60:1-3). 신약에서 이 역할은 교회로 옮겨졌다. 마태복음 5장 14-16절에 따르면, 교회는 세상에 빛을 비추는 등과 같다(빌 2:15 참조). 등은 비추기 위하여 “등[촛대]” 위에 놓여야 한다(막 4:21; 눅 8:16). 요한계시록 11장 4절에서 하나님의 두 증인은 그들의 예언적 역할에서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다(슥 4:2-6, 14 참조), 앞의 참고절에서, 등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교회의 본질적 역할을 나타내고 있음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인자 같은 이.
 이 칭호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주권과 나라를 주신다는 다니엘 7장 13-14절에서 왔다. ‘인자’라는 칭호는 신약의 메시야와 관련이 있다. 마가복음 13장 26절에서, 예수님은 다니엘 7장 13절의 구절을 자신에게 적용하신다. ‘인자’라는 말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애용하신 칭호였는데, 그분은 자신과 관련하여 그 칭호를 자주 사용하셨다(예를 들면, 마 24:30, 37, 39, 44; 26:46; 눅 19:10), 요한계시록 1장에서 인자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다니엘 10장 5-12절의 신적 형상에 대한 묘사와 거의 동일하다(단 10:5-12계 1:12-18 참조).


다니엘 10:5-12 요한계시록 1:12-18
어떤 사람 인자 같은 이
세마포를 입고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정금 띠를 띠었고 금띠를 띠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발은 빛난 주석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힘이 빠졌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한 손이 다니엘을 만짐 오른손을 내게 얹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발에 끌리는 옷.
 이 옷을 묘사하는 헬라어는 포데레스(podérès)로서, 문자적으로 ‘발까지 닿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동일한 단어가 70인역에서 제사장의 옷에 사용되었다(출 28:4, 31; 29:5; 39:22; 레 16:4).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대제사장이 가슴에는 장식띠(girdle)를 두르고 포데레스(발까지 닿는 긴 옷)를 입었다고 하였다.26)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포데레스를 입고 등대 사이를 거니는 모습의 묘사는 요한계시록 1장 9-20절의 성전 상황을 뜻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주로 제사장의 역할로 등장한다. 그러나 ‘긴 옷’을 오직 제사장의 의복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하는데,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도 가슴에 장식 띠를 두르고 긴 옷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사 22:21 참조).27) 요한계시록 1장의 그리스도의 묘사는 다니엘서 10장 5-12절에서 빌려온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거기서 다니엘이 본 긴 옷을 입고 금장식 띠를 두른 신적 존재는(10:5) 분명 제사장의 역할이 아니었다. 게다가 예루살렘에서 신실한 자에게 표하는 에스겔의 이상의 심판자로 나오는 하늘 존재는 포데레스(70인 역, 겔 9:2-3, 11)를 입고 있었다. 이것은 요한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왕 같은 제사장복을 입고 제사장의 역할 뿐만 아니라 위 엄으로 왕의 역할을 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이해된다.
요한계시록 1: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리스도의 머리와 머리털이 “흰 양 털 같고 눈 같”다는 표현은 다니엘서 7장 9절 상단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 대한 묘사,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에서 왔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동일한 특성들을 지니고 계심을 보여 준다.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 묘사는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기별과(2:18), 당신의 원수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오시는 정복자 그리스도의 승리의 도래(到來)에 대한 묵시에도 나온다(19:12). 스가랴의 묵시에서, 촛대 위에 있는 일곱 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즉 4:10)을 상징하였다. 후에 요한은, 인봉된 책을 떼기에 합당한 어린양의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5:6)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필시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그분의 능력과 권리를 암시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다니엘 10장 6절에서 끌어온 이 구절은 “마광한 구리같이 빛”났다는 에스겔 1장 7절에 등장하는 네 생물의 발을 연상시킨다. 그리스도의 발에 대한 이 묘사는 “거의 확실히 그 초상(肖像)의 장엄함과 권능을 더하기 위함인 것” 같다.28)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이 묘사는 분명히 에스겔 43장 2절에서 끌어왔다. 그 곳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많은 물소리’로 묘사하였다.
요한계시록 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그 오른편에 일곱 별이 있고.
 다니엘 12장 3절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별들과 연관되었다.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제사장들과 사자(使者)들은 천사들로 언급되었는데(말 2:7; 3:1), 동일한 개념이 신약에도 나온다(마 11:10 참조). 이 곳의 문맥은 천사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대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29) 이스본 베크위드(Isbon T. Beckwith)가 말하듯이, “그들[일곱별]은 실제적으로 교회들과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교회들을 대표한다. 그들은 교회의 상태에 대한 책임을 진다.”30)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종종 요한계시록에서 반복된다(2:12, 16; 19:15, 21), 이 모습은 이사야 49장 2절에서 끌어온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의 입을 날선 검같이 만드신다. 시편 149편 6절에서 좌우에 날선 검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는데 사용되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고 하였다. 바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엡 6:17),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원수들과 싸우기 위하여 나가실 때,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한계시록 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두려워하는 것을 멈추라!
 문법상 현재명령법은 이미 진행 중인 행동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은 두려워하는 것을 멈추라는 말을 들었다.
요한계시록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사망과 음부의 열쇠.
 헬라어 본문의 ‘사망’‘음부(하데스 hades)’라는 단어에는 각각 정관사 ‘the’ 가 있다. 여기서 ‘사망’은 하데스와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이곳의 헬라어 하데스는 사망의 권세를 가리킨다. 데이비드 아우니에 의하면, 헬레니즘 시대의 헬라어에서 “하데스는 사람이나 장소를 지칭할 수 있는데,”31) 장소라하면 지하 세계와 죽은 자들의 왕국(히, 스올 she'ol)을 말한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데스는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인 반면(6:8; 20:14), 마귀에게 있는 사망의 권세도 가리킨다. 위르겐 롤로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데스 신에 대한 헬라인들의 묘사에서 분명하듯이, 하데스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다스린다. 그 권세의 부속물로서 마귀는 열쇠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마귀적 쌍둥이, 즉 사망과 음부를 이기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로부터 죽은 자들을 지키고 있었던 장소의 열쇠를 빼앗았다(고전 15:26; 행 2:27, 31 참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 승리에 참여하며,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요한계시록 20장 14절에 따르면, 둘째 사망 은 사망과 음부의 끝이다.

 아우니는 요한계시록 1장 18절의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사망과 음부” 의 열쇠를 가졌으며 “처음과 나중”이신는 헬라의 헤카테(Hekate) 여신에 관한 묘사와 매우 닮았다고 한다. 그 여신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소아시아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헤카데 여신은 우주적 주권을 부여받았으며, 하늘과 땅과 하데스의 근원이며 통치자요 대리자로서 그녀에 의해 이 하늘과 땅과 음부가 종말을 고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 여신은 우주의 여주인이요 ‘열쇠 보유자’(헬, 클레이두코스 kleidouchos)로 일컬어졌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그 여신이 하늘과 음부의 문 열쇠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늘과 땅 사이를 번갈아 여행할 수 있었으며,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땅에 보고하고, 땅에서 일어난 일을 하늘에 보고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녀는 천사들을 자신의 기별의 중개자로 이용하였다. 그 여신에에 관하여 자주 다음과 같은 선언이 이루어졌다. “당신은 시작과 끝(아르케 카이 텔로 스 arché kai telos)입니다. 당신만이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당신으로부터 왔으며, 당신 안에서 모든 것들이 기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분이시여, 그것들을 끝 내소서.”33) 요한계시록 1장 13-18절은 그리스도를 “다른 모든 자연적 또는 초자연적 권세 뿐만 아니라 헤카테의 권세를 빼앗은”34) 분으로 묘사하면서, 널리 수용된 독자들의 개념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려 한 것같이 보인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
 ‘즉’이란 단어는 헬라어 카이(kai) 에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본문에서 보충 설명을 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절이 단순히 요한이 방금 묵시에서 보았던 것들(1:12-16)과 아직도 미래에 속한 것들로서 그가 이후에 보아야 할 것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5) 그러나 “이제 있는 일”은 분명히 일곱 교회에 보낸 일곱 기별을 가리킨다(2-3장), 4장 1절에서 요한은 그가 “이 일 후에 일어날 일들”2-3장에 기록된 일 후에 보게 될 것들에 대해 들었다. 4장 1절“이 일 후에 일어날 일들”요한계시록 1 장 19절 하단의 “이 일 후에 일어날 일”과 동일한 어법으로, 4-22장을 가리킨다고 암시한다.36)
요한계시록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요한계시록 1장 16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요한계시록 1: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요한은 몸을 돌이켜 일곱 금 촛대를 본다. 후에 그는 이 금 촛대들이 예수께서 당신의 기별을 보내시는 일곱 교회를 대표한다고 설명한다(1:20), 교회는 복음의 빛을 어두운 세상에 비춰야 한다(마 5:14-16; 빌 2:15). 만일 교회가 이 일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일곱 촛대들로 대표된 교회들은 교회를 위한 성령의 칠중(七重) 활동에 상응하는 것으로(계 1:4 참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성령의 활동의 충만함과 보편성을 시사한다. 각 교회는 성령의 완전한 지원을 받으면서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다.

 촛대 가운데서 요한은 인자 같은 이를 본다. 이 표현은 다니엘 7장 13절에서 가져왔는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 의해 인자 같은 이에게 주어졌다. ‘인자’는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즐겨 사용하신 칭호였다. 요한계시록 1장 12-18절의 예수님에 대한 묘사는 종말 때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특별한 기별을 다니엘에게 주도록 보냄을 받은 다니엘 10장 5-12절의 사자(使者)에 관한 묘사와 부합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자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어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예수님께 주신 그 어떤 것임을 보았다(계 1:1).

 구약 배경에 비추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장차 일어날 일들에 관한 특별한 기별을 교회에 주려고 하늘로부터 온 마지막 사자로 나타나신다. 다니엘서 10장에서 하나님의 사자는 그 모양이 사람과 같았다. 예수께서 “인자 같은 이”로 언급되었고(계 1:13; 14:4), 다니엘서 10장의 사람 같은 모양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은 아시아 속주에 살고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람처럼 사셨고 고난을 받으셨다. 그분은 교회들에게는 인간의 문제와 고통을 이해하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친히 이 모든 것들을 경험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장 1절에 의하면,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촛대들 사이를 거니신다. 이 장면은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킨다.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1-12)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촛대 사이를 상징적으로 걸어 다니심으로 그 약속을 성취하는 분이심을 본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동행하셨던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의 당신의 백성과 동행하신다.

 이 장면은 구약 성막에서 제사장이 봉사하는 것을 상기시킨다. 제사장은 아직도 불타고 있는 등불의 심지를 돋우고 기름을 채운다. 다 쓴 심지와 기름을 제거하고 신선한 기름을 다시 채우고 불을 다시 붙인다.37) 요한계시록 1장에서 그리스도는 구약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로 교회들을 섬기신다. 그분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시고 그들을 섬기신다. 이러한 예복은 구약의 제사장들과 왕들이 입었던 것이다. 이 모습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왕적/ 제사장적 특성을 강조한다. 그는 더 이상 나사렛 사람이 아니라 “죽었다가 이제 살아”(1:18)나 셔서 높이 되신 그리스도시다. 이새의 줄기에서 메시야가 나실 것이라고 예언하며, 이사야는 메시야가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때를 삼으실 것이라고(사 11:5) 설명한다.

 영화롭게 되신 인자 같은 주께서 당신의 백성을 섬기는 완전한 제사장 자격으로 교회들 사이를 왕래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완전한 왕의 자격으로서 그의 나라인 교회를 다스리신다. 일곱 기별이 나타내듯이, 교회들은 완전하지 않다. 오히려 교회들은 연약하고 이상(理想)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임재를 보증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범사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히 4:15)셨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깨달음은 그리스도인 경험 중에서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연약함 때문이라기보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백성 사이를 거니신다. 그분은 세상 끝날 때까지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마 28:20).
요한계시록 1: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요한계시록 1: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요한계시록 1:16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요한은 이제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몇 가지 표현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머리는 양털같이 희었다. 이 표현은 다니엘 7-9장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 대한 묘사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는 하나님에 대한 다니엘서의 호칭이다. 고대 세계에서 회백색의 머리칼은 위엄 뿐만 아니라(잠 16:31) 지혜와 오랜 경험 을 상징하였다(욥 15:10; 잠 20:29), 고대 유대인의 전승에서, 하나님께서는 흑발(黑)의 젊 은이로서 전쟁에 나가신다(애 5:11), 그러나 그분이 법정에서 노인으로 앉으실 때, 그분의 머리카락은 흰 색깔이다.38) 그리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한 에스겔 43장 2절을 상기시킨다. 에스겔서에서의 상징적 표현을 끌어오며, 요한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방문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들에게 회개의 기별을 주신다고 선언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눈은 불 꽃 같다는 말을 읽는다. 그리스도의 꿰뚫어 보시는 시선으로부터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39) 그리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 이 묘사는 그리스도의 초상(肖像)에 위엄과 힘을 실어준다.40) 빛난 혹은 번쩍이는 주석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위엄을 드러낸다.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는데, 별은 사자들 혹은 교회의 지도자들이다(계 1:20),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도자들을 보살피고 계심을 암시한다. 교회들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은 것 같으나, 그리스도께서 통제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왔다. 구약에서 좌우의 날선 검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시 149:6). 요한계시록 19장은 돌아오시는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데,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그분의 입에서 날선 검이 나온다(계 19:15, 21), 요한계시록 2-3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들과 싸우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버가모 교회에게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 2:16; 2:12 참조)는 기별을 보내신다. 좌우에 날선 검이 그분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입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이 전쟁은 성격상 실제적인 싸움이 아니라 말(言)의 싸움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히 4:12).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추는 것 같았다. 일찍 이 요한은 다른 두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도하였다. 그 때 예수님은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마 17:2), 이제 반세기가 약간 넘어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다시 보되 지금은 영광과 위엄 중에서 높이 되신 그분을 본다.
요한계시록 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요한계시록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나 그분은 영 화롭게 되신 주님이시다. 양털같이 흰 그분의 머리와 많은 물소리 같은 그분의 음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연상시킨다. 그분은 능력과 위엄과 권세의 옷을 입고 계신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발은 빛난 주석 같으며, 그분의 얼굴은 해같이 빛난다. 이것들은 높이 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에 대한 은유적(metaphoric) 표현이다. 그분은 그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으로 무장하신 승리의 메시야시다. 그분의 영광에 압도된 요한이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죽은 자같이 된 것은, 그가 일찍이 변화산에서 그러했듯이(마 17:6),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있는 자의 통상적인 반응이다(수 5:14; 겔 1:28; 3:23; 43:3; 단 8:17; 10:9, 11; 마 28:9). 이것은 또한 갈릴리의 한 사건을 회상하게 한다(눅 5:1-11), 그때, 엄청나게 고기를 잡은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어렴풋이 깨닫고, 그분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가 오로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뿐이었다.

 변화산에서(마 17:7) 요한은 두려워 말라 하시면서 오른손을 대시는 예수님의 온화한 손 길을 다시 경험한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그 말을 종종 들었다(마 14:27; 28:10; 막 6:50; 요 6:20),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처음이요 나중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이요 나중”이라는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이사야가 언약의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반영한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41:4; 48:12 참조)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이 묘사를 사용하심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구약의 언약의 여호와와 동일시하신다. 이 묵시의 허두에 등장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고대 이스라엘에게 성취시키시는 “인자 같은 이”시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촛대 사이를 상징적으로 거니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들에게 당신의 임재와 봉사를 알리신다. 이 결론 부분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부활하시고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려오셨고, 신약의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심을 명백히 한다. 그분은 종말이 가까워옴에 따라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시다. 왜냐하면 “그 외에 다른 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사 43:10-13)
부활하여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께서는 다름 아닌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고대 이스라엘에 게 주신 언약의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핍박과 환난을 직면하고 있는 교회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상 기시키므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이 말은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신 헤카테를 상기시켰을 것이다. 그 여신은 대중들에게서 ‘시작이요 끝’이라는 칭함을 받았고, 하늘과 음부의 문들의 열쇠를 지닌 ‘열쇠 소유자’였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권세는 “헤카테의 권세 뿐만 아니라, 자연적 또는 초자연적 다른 권세” 즉, 바울이 진술하였듯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빌 2:10)의 권세를 능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봉사하는 중에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러나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돌보신다. 사망에 대한 그분의 승리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소유할 수 있게 하였다. 바울에 의하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고전 15:26). 요한계시록에서, 하데스는 마귀의 권세를 상징한다(6:8; 20:14 참조).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권세를 이기셨다(고전 15:26 참조).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이 승리에 동참하며, 그들은 사망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려워하기를 멈춰야 한다. 이는 “처음이요 나중”이신 분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또 한 그분이 통제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요한계시록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이어서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에게 사명을 부여하신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들을 기록하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의 것에 비추어’라는 의미다. 따라서 본문은 이렇게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과 나중이요, 산 자요, 사망을 정복하고 너희의 생명을 위협하는 마귀의 세력을 이기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네가 본 것들을 기록하라.” 요한계시록은 역사가 끝에 다가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와 당신의 백성을 위한 그분의 활동들을 드러낸다. 드러냄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십자가의 관점에서 “반드시 속히 될 일”과 그리스도는 당신의 백성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보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그분의 활동은 이것들을 기록한 이유가 되었으며, 그 목적은 다음의 사실을 당신의 백성에게 말해주기 위함이었다. “두려워하기를 멈춰라! 내가 통제하고 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

 요한은 이제 막 그가 기록하려고 하는 것들이 이제 있는 일과 이 일 후에 장차 될 일의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고 분명히 말한다. 곧 “이제 있는 일”은 요한 당대의 일곱 지역 교회들의 상황과 필요를 가리킨다. “이 일 후에 장차 될 일은 4장부터 22장에 걸쳐 기술된 묵시들을 지칭한다. 이 후반부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선악간의 대쟁투를 기술한다. 그 쟁투는 종말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그때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그리고 영원히 악의 문제를 처리하실 것이며, 그 분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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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물들”로 둘러싸인 밧모라는 불모지의 섬에서, 요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대면하였고, 보증의 말씀을 받았다. 요한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장로다(요이 1; 요삼 1 참조). 격려가 필요한 그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위로하셨다. “두려워하기를 멈춰라. 내가 관할하고 있다. 내가 마귀의 세력들을 이기었다. 그리고 사망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곧 세상 끝 날까지.”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의미하는 모든 것이다. 케네쓰 스트랜드의 말대로, “핍박을 받으며 어린양을 따르는 자들에게 영적 지식과 힘을 주기 위함이 요한계시록의 참 목적이었음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중요하다.”42) 요한계시록은, 복음에 충성함으로 겪는 ‘밧모’의 환난은 항상 밧모의 경험,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낳는다는 사실을 ‘밧모’의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과 지도자들에게 계속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종들이 “많은 물들”에 둘러싸여 낙담하거나 거절당한다는 기분이 들때마다, 그들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낄 수 있고, 그분의 보증의 말씀들을 감지할 수 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마귀의 세력들을 이기었다.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마귀의 세력들은 그들의 생명을 해하기 위해 위협하며 고통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열쇠를 가진 분은 예수님이시다.

 이미 정복된 사망과 음부는 그들의 최후의 파멸을 불 못에서 맞게 될 것이며,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계 20:14).

 예수께서는 지도자인 요한의 상황과 필요에 응하셨을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기별을 받은 개 교회의 상황과 필요에도 응하셨다. 요한계시록 1장 12-18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특성들을 열거한다. 이 모든 특성들이 일곱 교회에게 보낸 기별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음은 참으로 흥미롭다. 각 기별은 그리스도에 대한 총괄적 묘사들 중 일부를 간략히 묘사하며 시작한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1; 1:13, 16 참조).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2:8; 1:17-18 참조).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2:12; 1:16 참조).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그 눈이 불 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2:18; 1:14-15 참조).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3:1; 1:4, 16 참조),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3:7; 1:18 참조; 거룩하고 진실한 자는 6장 10절에 나온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3:14; 1:5 참조).
요한계시록 1장에서 언급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다양한 특성 중 대부분이 일곱 교회에게 보낸 기별들을 소개할 때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일곱 묘사는 교회에 대한 그분의 여러 다른 봉사의 측면들을 기술한다. 각 기별에서 사용된 그리스도의 특이한 측면은 각 교회의 특 별한 상황 및 필요와 관련 있다.43) 마찬가지로, 사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하여 각기 다른 그림을 그린다. 각 복음서는 그 복음을 받는 백성의 문제와 필요에 따라 예수님을 독특하게 묘사한다.

 예수님은 각 교회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제시하신다. 어떤 교회도 예수님의 전체 모습을 그리지 못한다. 어떤 두 교회가 예수님의 동일한 모습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앞서 성령의 7중 현현이 어떻게 그분이 활동하시는 일곱 교회의 상황에 부응하는지 살펴 보았다(계 1:4), 각 교회는 성령의 각기 다른 나타남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각 교회는 다른 상황과 요구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교회들 중에 거니면서, 각 교회에게 개인적으로 봉사하며,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의 필요에 응하신다. 성령은 교회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나타내신다. 교회들은 기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메릴 테니가 말하듯이, 요한계시록 1장에서 그리스도를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이 부분의 열쇠다. 다양한 교회들이 저울질 되고 논의될 때,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 중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보좌에 앉아 있는 무서운 군주도 아니고, 말을 타고 전쟁하러 가는 정복자도 아니시다. 그분은 그들의 잘못을 밝히고 벌하시려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덕을 칭찬하는 주님으로서 그들 중에 거니신다. 이 편지들은, 다양한 측면들이 일곱 개의 역사적 장소들을 통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각 시대의 교회에게 보내는 그분의 특별한 경고와 권면이다.”44) 영화롭게 되신 주님은 여전히 당신의 교회 중에 거니신다. 오늘날 주님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마지막 때의 교회에게 말씀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그들이 처한 상이한 삶의 정황들과 필요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분은 요한 당시에 아시아 속주의 일곱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셨던 것처럼, 이제는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신다.

 요한계시록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강력히 호소하는 바는 세상에 복음의 기별을 선포함에 있어서 주님의 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성품과 봉사를 백성에게 제시하되 그들의 현장의 필요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교회의 신성한 의무다. 가지가 일곱 개인 등대로 상징된 교회는 성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교회가 충실하게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첫째 의무는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언행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백성을 만나신다. 그러한 모습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삶의 환경에 부응하시고 개인적 필요와 관련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교회는 유일한 빛 - 곧 예수께서 그것을 통하여 비취시는 유일한 빛이다. 교회가 자신의 역할에 실패할 때 그 존재 이유를 잃게 되어, 교회의 촛대는 다른 곳으로 옮겨질 것이다(계 2:5; 마 5:16 참조).

주(註) ——————
1. 예를 들어, Swete, 13; Wilfrid J. Harrington, Understanding the Apocalypse(Washington, DC:Corpus Books, 1969), 78; Mounce, 76; Morris, 52; Ladd, 31; Fiorenza, Revelation, 50; Thomas,Revelation 1-7, 90-92; Aune, Revelation 1-5, 83–84; Beale, 203. 
2. Didache 14.1(Holmes, The Apostolic Fathers, 266-267). 
3. Ignatius of Antioch To the Magnesians 9.1(Holmes, The Apostolic Fathers, 154-155). 
4. Kenneth A. Strand, "The ‘Lord's Day’ in the Second Century,”in The Sabbath in Scripture and History(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82), 346-351를 보라. 
5. The Gospel of Peter 9.35(Schneemelcher, New Testament Apocrypha, 1:224). 
6. Clement of Alexandria Miscellanies 14(The Ante-Nicene Fathers, 2:459). 
7. 예를 들면, Massynberde Ford, Revelation, The Anchor Bible 38(New York: Doubleday, 1975), 384; Sweet, Revelation, 67; Johnson, “Revelation,” 425. 
8. "Fragments from the Lost Writings of Irenaeus,”7(The Ante-Nicene Fathers, 1:569–570). 
9. 반대 의견은 Richard Bauckham, “The Lord's Day,”in From Sabbath to Lord's Day, ed. D. A. Carson(Grand Rapids, MI: Zondervan, 1982), 230-231을 보라 또 Samuele Bacchiocchi, From Sabbath to Sunday (Rome: The Pontifical Gregorian University Press, 1977), 118-123를 보라. 
10. 예를 들어, Adolf Deissman, Light from the Ancient East(reprint of 1927; Peabody, MA: Hen dricksen, 1995) 357–361; James Maffat, "The Revelation of St. John the Divine,”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reprint of 1942; Grand Rapids, MI: Eerdmans, 1961), 5:342; Robert H. Charles, A Critical and Exegetica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St.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Edinburgh: T. & T. Clark, 1920), 1:23; Lohmeyer, 15;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43; George R. Beasley-Murray, The Book of Revelation, 2d ed., The New Century Bible Commentary(Grand Rapids, MI: Eerdmans, 1981), 65, 
11. Deissman, 357-358을 보라. 
12. 상게서, 358-361을 보라. 
13.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 736. 
14.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 735–736 ; Strand, "Another Look at ‘Lord's Day’ in the Early Church and in Rev. 1:10,”New Testament Studies 13(1966/1967): 180; Walter F. Specht, "Sunday in the New Testament,”in The Sabbath in Scripture and History(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1982), 127; Desmond Ford, Crisis! A Commentary on the Book of Revelation (Newcastle, CA: Desmond Ford Publications, 1982), 2: 250-251: Maxwell, 82–85. 
15. White, The Acts of The Apostles, 581. 
16. J. M. Ford, Revelation, 384. 
17, 예를 들어, William Milligan, The Book of Revelation, The Expositor's Bible(Cincinnati: Jennings & Graham, 1889). 13: J. A. Seiss, The Apocalypse (New York: Charles C. Cook, 1909), 1:20, 22; Philip Carrington, The Meaning of the Revelation (London: Eyre and Spottiswoode, 1935), 9–14; Walter Scott, Exposition of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London: Pickering and Inglis, 1948), | 36: Bacchiocchi, From Sabbath to Sunday, 123-131. 
18. Bullinger, The Apocalypse, 12: Werner Foerster, "kurios, et al.,”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 Kittel and G. W. Bromiley (Grand Rapids, MI: Eerdmans, 1964–1976), 1096을 보라. 
19. Bacchiocchi, 127-128.
20.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 735를 보라. 
21. White, The Acts of the Apostles, 583. 
22. Ladd, 30. 
23. Strahan in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1:51. 
24. Milligan, Lectures on the Apocalypse, 136. 
25. Roloff, 34. 
26. Josephus, The Jewish Antiquities 3.7.2-4(Whiston, The Works of Josephus, 88–89). 
27, Aune, Revelation 1-5, 93-94를 보라. 
28. Ladd, 33. 
29. Tenney, 55: “일곱 교회들의 천사들(사자들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을 더 참조하려면 Aune, Revelation 1-5, 108-112를 보라. 
30. Isbon T. Beckwith, The Apocalypse of John (Grand Rapids, MI: Baker, 1919; reprint 1967), 440. 
31. Aune, Revelation 6-16, 401-402를 참조하라.
32. Roloff, 37-38. 
33. Aune, Revelation 1-5, 104-105. 
34. 상게서, 117. 
35. Johnson, 429; 이 견해에 대한 가장 최근의 논박은 Beale, 152-169에 나온다. 
36. 이 견해는 최근에 Aune, Revelation 1-5, 105-106에서 옹호되었다. 
37. Mishanh Tamind 3:9를 보라; Alfred Edersheim, The Temple: Its Ministry and services, updated ed. (Peabody, MA: Hendrickson, 1994), 125. 
38. The Babylonian Talmud, Hagigah, 14a. 
39. Roloff, 36.
40. Ladd, 33.
41. Aune, Revelation 1-5, 117.
42. Strand, The Seven Heads, ” 205. 
43. Ezell, 35. 44. Tenney,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