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4-5장에서 요한계시록의 두 번째 큰 단원이 시작된다.
“이제 있는 일들”, 즉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
1:9-3:22)에 관한 묵시를 주시(注視)한 요한은 이제
“이 일 후에 일어날 것들”(
4:1; 1:19 참조)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4장 1절-22장 5절의 묵시는 요한과 일곱 교회 시대 이후에 일어날 사건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일곱 인의 상징적 개봉과 일곱 나팔을 불 때 수반될 교회와 세계의 역사를 파노라마식으로 조사하기에 앞서,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신분 묘사’(fidentification-description) 전략과 조화되게 먼저 인을 떼는 작업에 요구되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자격을 묘사한다(이 문학적 전략에 대하여는
“서론”을 참조하라).
1장 9절-3장 22절에서, 예수님은 지상의 교회들 사이를 거니시는 분으로 소개된 반면 (
1:12; 3:1 참조),
4장에서의 장면은 하늘로 바뀐다. 찬란히 빛나는 하늘 보좌실에 특별한 일을 위하여 모인 하늘의 존재들은 영광스러운 보좌를 둘러 있으며, 그들의 모든 주의는 그 보좌에 맞춰진다. 장엄한 예배가 잠시 중단된다. 그리고 모든 시선이 하나님의 오른 편에 들린 일곱 인으로 인봉된 두루마리에 모아진다. 요한은 온 우주의 그 어느 누구도 그 대단한 두루마리를 개봉하기에
“합당치” 않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어린양/사자 같은 한 형상, 곧
“마치 죽임을 당했던 것같이”보이는
“다윗의 뿌리”가 그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한 자로 발견된다. 그분이 하나님의 우편에서 그 두루마리를 취하실 때, 일련의 찬양의 송가가 온 우주에 울려 퍼진다.
4-5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일곱 인으로 인봉된 두루마리는 요한계시록의 두 번째 큰 단원인 4-11장의 핵심부인 듯하다. 이 큰 단원 전체가 그 신비스러운 두루마리 주변에 배열되어 맴도는 것 같다. 이 점은 곧
5장이 일곱 인으로 봉함된 두루마리, 즉 온 우주의 어느 누구도 그 인을 떼거나 열수 없는 두루마리를 소개하는 반면,
10장은 개봉된 두루마리를 가진 힘센 천사가 그것을 요한에게 건네주는 장면을 묘사한다는 사실에서 자명하다. 계시자 요한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교회들에게 전달해야 하였다.
5장과
10장 사이에는 일곱 인을 개봉하는 상징적 장면과 인봉된 두루마리를 개봉하기 위한 예비적 사건과 조건을 묘사하는 일곱 나팔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4-5장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핵심적 부분으로 등장한다. 이 두 장은 다음에 나오는 장들의 무대가 된다.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장들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4-5장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독자는 일단, 그 장면에 등장하는 인봉된 두루마리의 의미와 중요성과 더불어
요한계시록 4-5장이 묘사하는 장면의 윤곽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나는 인봉된 두루마리가 어떻게 4-11장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나머지 장들의 구조적 배열의 윤곽을 결정하는지를 펼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즉위 요한계시록 4-5장은 우주의 역사상 특별하고도 결정적인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떠한 사건이 여기에 소개되는가, 또한 그 사건 속에서 인봉된 두루마리의 목적과 역할은 무엇인가 같은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은 합당할 것이다. 강력한 증거는 이 두장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 아버지 우편의 하늘보좌에서 높이 되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게 한다.
도약판 구절: 요한계시록 3:21 요한계시록 3장 21절은, 이 단원이 즉위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첫 논거를 제공한다. 분명히 이 구절은 도약판 기능을 하며, 이것은 일곱 교회에 보낸 기별들을 결론지으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사건을 소개한다(
“서론” 참조). 만일 우리가 도약판 구절의 형식을 따른다면,
요한계시록 4~5장의 전 장면을 이해하는 단서를 일곱 교회에 보낸 기별들을 요약하는 진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1) 이 진술은
요한계시록 4-7장을 소개하는 본문으로서 그 도입 역할을 한다.
1)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3장 21절은
4~5장에 나오는 장면의 도약판 구절이며, 그것은 전체 장면을 해석하기 위한 최선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3장 21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기는 자에게(현재 계속되는 경험으로서), 그가 이기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으신 것과(과거의 사건으로서) 꼭 같이, 그분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시겠다는 미래의 상급을 약속하신다. 존 폴린이 언급하듯이, 아버지의 보좌(
4장), 그리스도의 승리(
5:5),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보좌에 좌정하신 그리스도 등이
요한계시록 4~5장의 중심 주제다(
5:6-14).
“요한계시록 7장에 이르기까지는 구속받은 자들이 하늘 궁정의 예배와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 분명 허락되지 않았다(7:9-12), 요한계시록 3장 21절에서, 성도들의 상급이 그리스도의 상급과 관계가 있듯이, 비록 연대적으로는 떨어져 있을지라도, 요한계시록 5장과 7장 9절 이하의 두 보좌 장면도 관계가 있다.”2)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4-5장은
요한계시록 3장 21절의 후반부를 설명하는 반면,
요한계시록 7장 9-17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게 될 승리자들과 관련하여
3장 21절의 전 반부를 기술한다. 폴린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두 보좌 장면 사이에 6장이 놓여있다. 그러므로 6장의 인(印)들은 3장 21절의 단언(斷言)(이기는 자에게)과 상응한다. 인들이 망라하는 기간은 어린양의 승리의 때로부터 인침을 받은 자들이 상급을 받을 때까지다.”3) 그러므로
6장의 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을 때까지의 연속적인 기간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하는 과정 속에 있다.
즉위식 즉위식이라는 견해를 견지하는 두 번째 논증에 의하면,
요한계시록 4-5장의 문맥과 언어는 장차 등장할 다윗가(家)의 이상적인 왕에 대하여 예언한 구약의 구절들과 유사하다. 주석적 분석이 보여 주듯이, 모든 중요한 용어와 절(
‘보좌’를 포함하여,
‘우편에 있는’,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가지’,
‘합당한’)들은
요한계시록 5장의 장면을 기술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적절하게 선택되었다. 그 모든 용어에는 존귀하고 영예로운 직임과 통치권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는 것 같다.
4) 구약의 여러 예언서에서 이 용어들은 장차 다윗의 보좌에 앉게 될 다윗 계보의 이상적인 왕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다. 이 용어들은
요한계시록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높이 되심, 곧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 우주의 보좌에 앉게 되는 것과 관련하여 구약의 약속 성취로서 사용되었다.
요한계시록 5장의 장면은 구약의 대관식(coronation)과 즉위식(enthronement,
왕하 11:12-19; 대하 23:11-20 참조)의 양식(樣式)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구약의 즉위식에는 성전에서 거행된 대관식과 뒤이어 왕궁에서 거행된 즉위식의 두 단계가 있었다. 즉위식은 새 왕에게 왕의 기장(emblem)을 수여하는 의식과(
왕하 11:12) 뒤이어 대관식의 필수 요소인 관유식(灌油式)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삼하 2:4; 5:3; 왕상 1:34, 39; 왕하 23:30 참조),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의미하였다. 기름부음 받은 왕은 성령에 사로잡혔다 (
삼상 10:10; 16:13 참조). 이리하여 통치자인 왕은 여호와의 메시야가 되었다(
삼상 24:7, 11; 26:9, 11, 16, 23; 삼하 1:14-16; 19:22; 애 4:20 참조), (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히브리어
‘메시야’의 번역이다).
운집한 군중들, 곧 나라의 고관들과 백성이 새 통치자를 즐겁게 환호하며 대관식은 막을 내렸다(
왕상 1:34, 39; 왕하 11:12, 14), 즉위한 새 왕을 환호함으로 백성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 권위에 복종하였다. 성소에서 대관식이 끝나면 운집한 군중들은 성소를 떠나 왕궁으로 갔고(
왕하 11:20), 그 곳에서 새 왕은 환호하는 군중들에 옹위되어 보좌에 올랐다(
왕상 1:46; 왕하 11:19 참조).
요한계시록 5장을 구약의 대관식 관련 사건들과 비교할 때, 여러 세부적인 평행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요한계시록 5장에서 고대 즉위식을 구성했던 두 부분들(첫째 성소에서, 둘 째 왕궁에서)이 하나의 동일한 사건 속에서 합쳐진다. 본장의 끝에서 보겠지만, 이것은 요한계시에서 성전과 왕궁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라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둘째, 두 루마리
‘증거’로 왕을 서임(敍任)하는 일은 어린양이 두루마리를 취하는 것과 평행을 이룬다(
계 5:7).
마지막으로, 특별히
요한계시록 5장에서 등극의 환희가 특출하다. 이 곳에서 새로이 등극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은 합당하시도다!”라는 왕에게 합당한 환호를 받으신다.
요한계시록 4-5장을 세밀하게 분석하면, 대관식 사건은 의도되어 있음이 확실히 드러난다.
4장에서, 한 통치자의 등극을 위한 무대가 설치된다. (휘황찬란한 보석과 무지개와 천둥과 번개가 수반된)하늘 보좌실에서, 모든 주의는 네 생물(높은 지위의 천사들)과 이십사 장로(후에 보게 되겠지만 구속받은 사람들)에게 옹위되어 있는 눈부신 보좌에 집중된다.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드리는 그칠 줄 모르는 환호는 그 장엄한 순간에 기대되는 분위기를 드러낸다.
요한계시록 4장에는 성전/궁의 내부가 전방에 나타나 있는 반면,
5장에서는 그것이 배경 속으로 이동해간다. 한 다른 사건이 우선(于先)한다. 어린양이 인봉된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장면에 모든 주위가 집중되며,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께 열광적인 찬송이 드려지고, 경배가 뒤따른다. 하늘 존재들을 환희하게 하고 그들의 환호를 자아내게 하는 것은 인봉된 두루마리를 펼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취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특히 중요하다.
4장과
5장 사이에서 몇 개의 흥미로운 평행구를 이끌어낼 수 있다. 먼저,
4장의
‘한 분’께서 보좌에 좌정하시는 일은
5장의 어린양 - 그리스도께서 인봉된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것과 같다. 둘째,
4장에서 하나님은 당신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공포된다(
4:11),
5장에서 그리스도는 당신께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인봉된 두루마리를 취하여 그 인들을 떼시기에 합당하다고 공포된다(
5:9). 그런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두루마리를 취하심으로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신다(
5:12). 이것은 바로 통치권을 취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이 의도했던 가장 자연스런 본문 이해와 조화되는 것 같다.
하늘 성전/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접근하여 사단이 자기 것으로 주장하려 했던 모든 권세와 주권의 이양(修讓)에 관한 상징으로서 인봉된 두루마리를 하나님 우편의 보좌 로부터 취했을 바로 그 순간이 이렇게 나타났다. 이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우편에 있는 우주의 보좌에 좌정하셨고, 왕에게만 속하는 숭앙과 갈채의 환호를 받으셨다.
요한계시록 4~5장의 기간 언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권세를 취하셨는가? 신약의 여러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우편의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사건은 그분의 희생적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 후(
행 2:32-36; 13:33-34; 롬 8:34; 엡 1:20-22; 히 1:3; 10:12; 12:2; 벧전 3:21-22), 즉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증거한다(
계 5:6은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 곧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언급한다;
행 2:32-36 참조), 비즐리 - 머레이는,
“요한이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이제 막 목도할 것이라는
4장 1절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승리하셨고, 하나님의 보좌에 등극하셨고, 그분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언급한다.
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미 아버지와 함께 보좌에 앉으셨음에도(
계 3:21 참조),
요한계시록 5장에서 그분은 실제적으로 보좌에 좌정하시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비록 둘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와 보좌가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에서 독립되고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보임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의 보좌가 그리스도의 대권 보좌가 되고 그분의 통치 왕좌가 되는 일은 왜 종말적 왕국이 세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계 22:1, 3; 7:17 참조)
요한계시록 5장은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 또는 시작된(inaugurated) 종말론과 완성된(consummated) 종말론이라는 신약의 전반적인 개념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요한계시록 5장은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그분의 봉사를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분은
이미 우주의 왕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마 28:18; 계 2:27 참조)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바울에 의하면,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때까지 불가 불 왕 노릇하”셔야 한다(
고전 15:25). 그리스도의 이러한 통치는 요한계시록 6-11장의 주제다. 그러나 모든 반역은 아직 진압되지
않았다. 그것은 미래의 심판에 속한다(
고전 15:24-28 참조).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좌정하시는 일을 종말 때까지 유보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등극이 종말의 시작을 명시할지라도, 완성된 종말의 개념은
요한계시록 5장이 아닌 요한계시록의 끝에 가서야 나온다.
요한계시록 4~5장과 심판 장면 널리 알려진 어떤 견해는,
요한계시록 4-5장이 심판의 장면을 묘사한다고 제시한다. 이 견해의 지지자들은
요한계시록 4~5장이 특별히
다니엘 7장 9-14절에 기초되었다고 믿는다. 즉, 하나 이상의 보좌(
단 7:9; 계 4:4 참조), 빛나는 보좌 위에 좌정하신 하나님(
단 7:9; 계 4:2-3 참조), 셀 수 없이 많은 하늘 존재(
단 7:10; 계 5:11 참조), 책(들)에 대한 언급(
단 7:10; 계 5:1 참조), 통치권을 받는 인자(
단 7:13-14; 계 5:6-9 참조), 그리고 성도들(
단 7:14; 계 5:9 참조) 등, 어떤 것들은 다니엘서와 평행을 이루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분명한 평행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그 어떤 것도
요한계시록 4-5장을 심판 장면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선,
요한계시록 4-5장에는 어떤 심판의 언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심판의 언어가 종종 사용되고 있는 반면(예를 들면,
계 6:10; 11:18; 14:7; 16:5; 17:1; 18:10, 20; 19:2; 20:4, 12-13),
요한계시록 4-5장에서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피한다. 요한계시록의 전반부 중
6장 10절에 유일하게 심판의 언어가 나타나는데, 이는
요한계시록 4-5장의 관점에서 볼 때, 심판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제단 아래의 순교자들은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며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우편에, 합당한’,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가지’ 등과 같은 주요 단어들의 용례는 심판이 아니라 왕권을 암시한다. 영광과 존귀, 권세, 복과 능력에 대한 환호(
계 4:11; 5:13 참조) 등은 심판의 장면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좌 위에서 통치하거나 보좌에 막 좌정하려는 왕 같은 존귀한 사람에게 직접 발하는 것이다. 저 기쁨에 찬 승경의 외침은 성경이나(
단 7:9-14; 계 20:11-15 참조) 혹은 유대인의 묵시문학의 심판 장면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들은 솔직히 심판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성경과 유대인의 묵시문학 양편에 등장하는 심판 장면에는
‘책들’이 펼쳐져 있다.
요한계시록 5장에는 오직 하나의 책인 인봉된 두루마리가 있는데, 그 두루마리의 개봉에 대 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하늘 존재들로부터 환희와 승경과 최고의 갈채와 경배가 터져 나오게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책을 개봉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책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계 5:7-14). 심판의
‘책들’을 개봉하는 일은 최후의 심판이 명료한 심판 언어로 묘사되어 있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을 위해 유보되었다(
계 20:11-15).
그러나 심판 행위가 즉위식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닐 듯하다. 고대의 즉위식에는 심판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왕은 통치자와 심판자로 간주되었다(
왕상 3:16-28; 7:7; 잠 31:9 참조). 그러므로 구약의 즉위식에는 새로 등극한 왕이 불충하고 반역적이었던 자들을 심판하며 왕의 충성스런 지지자들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할 때, 일반적으로 심판 행위가 뒤따랐다(
왕상 2장; 16:11;
왕하 9:14-10:27; 11:1, 13-16).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한 싹”(
사 11: 1-5)은 의로 심판할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지혜와 명철을 부여받는다. 이것은 새 왕위에 오른 솔로몬이 백성을 바르게 심판할 수 있도록 명철을 달라고 했던 그의 기도와 견줄 수 있다(
왕상 3:8-11 참조).
시편 2편과
110편에 의하면,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른 왕은 반역한 자들을 심판함으로써 통치권을 행사한다(
시 2:7-11; 계 19:15-16 참조).
그리스도의 등극이라는 사건 자체에 의해, 충성된 자들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이 되며,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할 권세를 부여받는다(
5:9-10; 7:9-17 참조). 그러나 즉 위식 후에 새로 등극하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일들(일곱 인의 개봉에서 묘사된 일들)은 지상에서 차례로 일어날
‘예비 심판’으로, 전쟁, 살육, 기근, 역병 등이다.
6장에서 보듯이, 전쟁, 기근, 역병 그리고 사나운 짐승들의 개념은 오경에 나오는 저주 언약들(
레 26:21-26 참조)과 바벨론 포로에 의한 저주 언약들의 집행(
렘 14:12-13; 21:6-9; 24:10; 29:17-18; 겔 6:11-12; 33:27-29)을 상기시킨다. 이 개념들은 언약의
‘화(禍)’를 지칭하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의해 언약에 대한 배도와 불충을 벌하신다(
렘 15:2-3; 겔 5:12-17; 14:12-23; 합 3:12-16).
6)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5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대관식은 심판의 시작을 알리는 표시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5장이 심판의 장면은 아닐지라도, 그 후속 심판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등극하실 때(이 보좌는 심판의 보좌이기도 하다[
계 20:11-15; 단 7:9-10 참조]), 그분은 왕의 직분과 심판의 직분을 취하신다(
요 12:31-32 참조). 그분의 합당하심(worthiness)과
“일곱 뿔과 하나님의 일곱 영인 일곱 눈”(
계 5:6)은 그분의 통치와 심판의 능력과 권리를 상징한다. 그분이 하늘의 보좌에 나아가 인봉된 두루마리 를 취하셨을 때, 인간의 운명은 그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요한계시록 4-5장이 1844년의 조사심판 장면을 묘사한다는 널리 알려진 견해와 관련하여 약간의 주석이 필요하다.
7) 첫째, 앞의 논거들은
요한계시록 4~5장이 심판 장면이라는 견해도 지지하지 않는다.
둘째, 만일
요한계시록 4-5장이 1844년의 조사심판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일곱 인, 일곱 나팔, 그리고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의 사역을 포함하여
요한계시록 5장 다음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1844년 이후에 일어나야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6-11장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그것은 그러한 사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더욱이 본 주석의 서론에서 소개된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배열은 요한계시록 전반부의 구조가 종말 시기보다 오히려 기독교 시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명백한 증거에 의하면,
요한계시록 4-5장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에 등극하신 사건(
단 7:13-14; 빌 2:6-11 참조), 즉 오순절(
행 2:32-36)에 일어났던 사건을 묘사한다는 견해가 가장 만족할 만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 5장 이후의 사건들은 1세기에서 재림때까지의 기독교 시대의 전 역사를 망라하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5장의 인봉된 두루마리 만일
요한계시록 4~5장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에 위치한 우주의 보좌에 좌정하신 장면을 묘사한다면(증거는 그러한 견해를 강력히 지지한다), 대관식에서 묘사된 인봉된 두루마리의 역할과 의미는 무엇인가? 적절한 답을 얻기 위하여,
요한계시록 5장의 전 장면에 대한 적절한 구약의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언약 책과 즉위식 두루마리와 보좌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구약의 주제는
신명기 17장 18-20절에서 발견된다. 본문은, 새로 즉위한 이스라엘 왕의 첫째 의무는 자신을 위하여 두루마리에 율법을 베끼는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
‘율법’, 즉 하나님의 언약의 책은 분명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신명기였다. 그 내용은 모세에 의해 두루마리에 기록되었으며, 레위인들의 관리 하에 성소에 보관 되었다(
신 31:9, 24, 26). 새로 등극한 왕은 등극시에 자신을 위해 신명기 원본을 베낀 책을 한 권 만들어야 하였다. 왕은 그의 일생을 통해 그 두루마리를 보관하여 읽고, 계속적으로 연구하며, 그 모든 훈계를 부지런히 순종해야 하였다.
언약의 책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그 왕들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 왕이 보좌에 올랐을 때, 그는 언약 책 하나를 받았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사울)의 대관식에서 사무엘이 어떻게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었는지에 관하여 읽는다(
삼상 10:25).
열왕기하 11장 12절에 의하면, 유다 왕 요아스는 그의 등극시
‘여호와의 집’에 왕을 위해 준비된 특별 장소로 인도되었고, 그 곳에서 그는 왕권의 상징인
‘왕관과 율법서’(testimony)를 받았다. 왕관과 율법서는 왕권의 상징으로서 통치권을 의미했다.
구약에서, 증거(율법서)는 언제나 율법과 하나님의 훈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출 31:18; 32:15; 시 19:7; 119:13-16, 35-36, 143-144). 증거는 분명히 신명기에 대한 주석적 율법이거나(참조
4:45; 6:17, 20),
신명기 17장 18절의
“이 율법서”였다. 어린 왕자 요아스의 머리에 면류관이 씌워지고 언약 책 하나가 그의 손에 들려진 후 왕으로 선언된 장면은 특히 흥미롭다. 또한
열왕기하 23장에서, 우리는 어린 왕 요아스가 신명기의 두루마리를 취하여 그것으로부터 배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보좌에 앉음으로써 새 왕은 통치를 시작할 것이었다(
왕상 16:11; 왕하 13:13). 언약의 두루마리를 소유하고 그것을 열고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짐으로써, 그는 그가 직면할지도 모를 위기에 대처하고 치리할 권한을 발휘하였다. 다른 한 편으로, 두루마리는 왕이 행사한 권력에 대한 책임이 위대하신 왕 하나님께 있음을 언제나 기억나게 하였다. 그가 점유한 왕의 보좌는 사실상
‘하나님의 보좌’였다(
대상 29:23). 더 분명히 표현한다면,
“여호와의 나라 위[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대상 28:5).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과 공동 통치자였으며,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영광을 얻었다(
시 110:1; 참조
80:17).
이스라엘 왕은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언약의 중보자가 되어야 했다. 언약의 두루마리를 소유함으로써, 어떠한 경우에 왕은 백성에게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어줄 책임이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그의 의무는 특별한 대리자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그 내용을 훈육해야 하였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우리는 신실한 왕 여호사밧 아래서 성취된 대개혁에 대하여 듣는다. 그는 왕자들과 레위 인들로 팀을 이루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성읍으로 순행하며 인민을 가르쳤”다(
대하 17:7-9).
구약 전반에 걸쳐, 언약의 책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록 앞서 나온 요아스 왕의 대관식은(
왕하 11:12) 이스라엘 왕들이
신명기 17장 18절의 규례들을 따 랐음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유일한 구절이라 할지라도, 간접적인 어떤 구절들은 신실한 왕들의 삶이 언약의 책의 교훈들에 의해 다스려졌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각 보좌의 승계(承繼)는 위대하신 왕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가 갱신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순간이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 자를 삼으신” 다윗에게 이르렀다. (
삼상 13:14).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나라가 영구할 것이라는 약속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하셨다(
삼하 7:1-17).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위[보좌]에 둘지라.”(
시 132:11) 이 약속이 성취되기 위하여, 다윗과 그의 후손들은 언약의 책에 규정된 대로 언약을 따라 살아야 했다.
“네 자손이 내 언약과 저희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저희 후손도 영원히 네 위[보좌]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시 132:12) 다윗은 그의 유언에서 솔로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 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 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 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왕상 2:3-4; 대상 22:13 참조)
언약 책의 봉인(封印) 그 후의 이스라엘 왕권의 역사는 이스라엘 왕들 중 몇 왕만이 언약의 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훈계를 따랐음을 보여 준다. 역사서들은 왕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 즉 언약 책의 말씀을 순종하는 왕이 매우 드물었음을 명백히 드러낸다. 이스라엘 왕국의 몰락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결과라고 묘사되었다(
왕하 17:7-23). 유다의 상황은 더 이상 가망성이 없어 보였다.
포로 전 시기에 살았던 선지자들의 기별은 본질적으로 유다와 그 왕들의 언약 파기에 대한 고발이었다. 이 기간은 큰 종교적 배도의 기간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배도는 아하스 같은 왕들 이 다윗의 언약대로 확실히 살지 못한데서 시작된 것 같다(
대하 28:1-27; 이사야 7-12장 참조), 므낫세와 그의 후계자 아몬의 통치 기간 동안, 언약 책은 완전히 잊혀졌다. 요시아의 개혁(
왕하 23장)은 유다 왕들의 진로를 바꾸지 못하였다. 대다수의 백성이 마음에 어떤 변화를 경험하였을까 하고 의아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레미야는 유배 직전에
“다윗의 보좌”에 앉은 불충한 왕에게 심판의 경고를 발하였다(
렘 13:13; 22:2; 29:16; 36:30), 임박한 심판은 피할 수 없 었다. 그러므로 바벨론 유수는 다윗 왕권과 다윗 왕조의 종결을 의미하였다.
하나님의 계시가 봉함될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선언이 바벨론 포로 전과 포로된 당시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특별히 의미심장하다. 첫 선언은 이사야서에 나오는데, 처음부터 이사야서는 유다 백성과 그 왕들의 큰 배도를 알린다.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사 8:16) 여기서 보듯이, 봉함과 싸맴 그리고 증거와 율법은 평행을 이룬다. 증거는
‘율법의 책’, 즉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신 31:26) 두었던 신명기를 가리킨다. 이스라엘 왕은 등극시 이 율법 책을 받았다(
왕하 11:12), 백성이 묵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묵시들은 이제 봉인되어야 하였다. 후에 이사야서는 인봉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읽을 수 없었던
“인봉된 책의 말씀들”을 그의 묵시들과 비교할 때 이 인봉된 언약의 책을 언급한다(
사 29:11),
‘인봉된 책’은 분명히
이사야 8장 16절에서 인봉하라는 명령과 함께 언급되었던
‘증거’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언급된 이 상징적 언어는 끈으로 묶여 인봉된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지칭한다. 본 구절의 문맥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계시가 상징적으로
‘봉해졌음’을 암시한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
사 29:9-14)
이 구절은
‘봉인(封印)’이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함과 관련이 있음을 나타낸다. 이사야서에서
‘봉인’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계시를 이스라엘 백성이 신봉할 준비를 하지 않고, 또 신봉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으로 생긴 명백한 결과였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봉해질 수 있다는 것은 포로 기간 동안 기록된 다니엘서에 분명히 나와 있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단 12:9; 8:26; 12:4 참조) 이 곳의 봉함이란 하나님의 계시가 감춰지는 것, 즉 어떤 기간 동안 예언이나 심판, 구원에 대한 그분의 계획 등이 감춰짐을 암시한다.
유대 문헌들은, 위에서 언급한 구약의 성경절을 근거로 하여 요한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언약에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기에 언약의 책이 인봉되었다고 믿는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공한다. 그러한 사상은 먼저 쿰란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발견된다. 해석(페셰르, pesher)이 포함된
이사야 29장 10-11절의 한 흥미로운 단편은, 쿰란 사람들은 인봉했다는 것을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계시를 철회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사 29:10-11 [왜냐하면]
1주께서 너희 [위에] 무기력의 [호흡]을 쏟으시며 [너희의 눈들-선지자들-]에게 눈가리개를 하실 것이며,
2그가 너희의 머리들-선견자들을 가리실 것이다. 너희에게 [어떤 묵시]는
3 [봉함]된 [책]의 [본문과 같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주며 [그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읽어주십시오],
4[그리고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할 수 없노라. 왜냐하면] 그것이 인봉되어 있기 때문이다.
8)
“인봉된 책인 율법[토라!”이라는 개념은 다마스쿠스 종규(宗規,
The Damascus Rule)에서도 언급되었다.
그리고 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신 17:17). 그러나 다윗은 (언약의) 법궤 속에 있었던 인봉된 율법책 을 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엘르아살과 여호수아, 그리고 아스다롯을 섬긴 장로들의 죽은 때로부터 이스라엘에서 개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춰졌고 사독이 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9)
이 특이한 구절은 쿰란 공동체가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연고로
신명기 17장 14-20절의 왕권 내규(內規)와 관련된 토라의
‘책’이 인봉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음을 나타낸다. 이 곳의 본문에 의하면, 그 책은 여호수아 때로부터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인 사독이 제사장직에 오를때 까지의 기간(즉,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기간) 동안 법궤 안에
‘인봉되었다.’10) 분명히 상징적으로 취급되어야 할
‘인봉’은 전적으로 국가 지도자들의 죄와 불충에 기인하였다. 다윗 왕권의 등장과 함께 두루마리는 필시
‘개봉’되었을 것이다.
유대 랍비들은 히브리 왕들의 불충과 그들이 언약책의 교훈을 따르려 하지 않으므로 그것 이
‘인봉’을 유발시켰다고 믿었다. 그러한 사상은 이미 탈굼(Targums)에 나타났는데 이사야 당시, 백성이 율법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선지자는 이런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선지자야, 증거를 간수하라. 그들 중에서 증거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은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을 봉함하고 숨기라.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11) 셰키나(Shekinah)가 떠나갈 것이며, 그들은 유랑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회당에서
‘인봉’ 은 진행되었다.
12) 이 동일한 자료에 비춰 볼 때, 여호와의 종
‘메시야’의 임무는
“토라에 대한 무지만큼이나 눈이 먼 이스라엘 집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13) 또한 랍비들은 율법을 인봉하는 일이 아하스 왕의 통치 기간에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아하스 왕은
“제사를 그치게 하였고, 그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사 8:16)는 말씀대로 토라를 인봉하였다. 아하스 왕 이후의 왕들, 곧 므낫세, 아몬 및 여호야김 등은 똑같이 율법을 거절하는 죄를 지었고, 그리하여 율법을 인봉하는 일을 도운 셈이었다.
14) 랍비들은 언약의 책을 상징적으로
‘보관하시고’ 정해진 기간 동안 그 내용을 감추신 하나님의 행위를 이스라엘 왕권의 소멸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볼 때, 바벨론 유랑과 군주 정치의 몰락은 다윗 계보를 잇는 왕권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언약의 책은 다윗 왕권의 몰락으로
‘봉함’되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봉함’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계시를 백성이 신봉할 준비를 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음으로 온 분명한 결과였다. 언약의 책이 봉함된 것은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 위해 접근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좌에 앉을 다윗 계보의 왕이 이스라엘에 더 이상 없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비록 후에 유대 백성에게 다시 여러 왕이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합법적인 다윗의 후계자들이 아니었다. 다윗 계보의 이상적인 이스라엘 왕에 관한 구약의 약속은 미래의 종말적 시기를 위해 유보되었다.
다윗 가(家)의 진정한 왕 그리스도 유랑 후, 곧 이스라엘 백성이 더 이상 다윗 계보의 왕이 없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그 공동체의 권위 있는 해석자는 왕이 아니라 제사장이었다. 이 스라엘의 모든 희망은 장차 다윗 계보에서 등장할 왕에게 점차적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왕은 이스라엘의 이상적이고 진정한 왕의 역할을 할 것이었다.
특히, 유다 왕들의 배도 기간과 유랑하기 이전의 기간에 선지자들이 다윗 계보의 이상적인 왕, 곧 장차 다윗의 보좌에 앉아 백성을 충실히 지도할 메시야의 도래를 가리켰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권이 종지부를 찍는 것이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을 폐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인바(
렘 33:17; 23:5 참조),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당신의 언약의 약속에 대해 여전히 신실하셨기 때문이다(
렘 33:20-21), 바벨론 유랑 기간 동안, 에스겔은 메시야가 오실 때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이 실현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리라(
겔 37:24; 34:23-25 참조).
유랑 이후에 나온 유대인 자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다윗의 후손, 곧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도래를 얼마나 열렬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이 상적인 왕으로서 그분은 다윗의 보좌에서 통치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으로 백성을 교훈하실 것이다.
15) 요한이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은 다윗 계보의 왕권의 종국에 대한 이러한 구약적 배경과 유대백성 중에서 구약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대하고 있던 분위기 가운데서 이뤄졌다. 예수님은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계 5:5)였으며, 그 분만이 통치권의 징표로 인봉된 두루마리를 취하시기에
‘합당’ 하였다.
예상할 수 있듯이, 다윗의 계보를 이은 이상적인 왕과 관련된 구약의 약속은 신약의 메시야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
행 2:29-36; 13:22-38; 히 1:2-1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나님 우편에 있는 하늘 보좌에 등극하셨을 때, 구약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행 2:33-36; 5:31; 롬 8:34; 엡 1:20; 골 3:1; 히 1:3, 13; 8:1; 10:12; 12:2; 벧전 3:22), 그러므로 다윗에게 한 나단의 약속(
삼하 7:12-16)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분은 다윗의 후손(
눅 1:27; 롬 1:3; 딤후 2:8) 또는
“다윗의 자손”(
마 9:27; 21:9; 막 10:47-48; 눅 18:38-39)이시다. 누가복음에서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그녀가 잉태할 아들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2-33; 행 13:22-23)고 하였다. 오순절 설교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다윗 보좌의 합법적인 후손으로 드러내었다(
행 2:29-36),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보좌의 영속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히 8: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성취되었다(
고후 1:20 참조).
이스라엘의 왕과 또한 율법의 두루마리와 관련된
신명기 17장 18-20절의 완전한 실현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드러낸 왕권의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윗 계보의 메시야 왕으로서, 그 분은 복음서에서 위대한 율법 선생으로 소개되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왕적 역할을 강조한 반면(
마 1:1; 2:2; 25:31, 34; 27:11, 42), 산상 설교에서 그분은 율법의 해설자시다(
5-7장).
누가복음에 의하면, 침례 직후에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그분은 나사렛 회당에서 그분의 공적 봉사를 시작하셨다. 그분은 백성 앞에 서서 두루마리 성경을 손에 들고
이사야 61장 1절을 낭독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 그 성경절을 낭독하신 후, 예수께서는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결론지으며(
4:21), 청중의 찬사와 동시에 경악을 불러일으키셨다.
인봉된 두루마리는 통치권의 상징 요한계시록 5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대관(戴冠) 의식에서 언약 책인 신명기가 어떤 역할을 하였으며, 이스라엘 왕의 대관식이 구약에서 어떻게 취급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요한계시록 4, 5장이 하늘 보좌실에서의 즉위식을 묘사하고 있음을 말한 바 있다. 그 곳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우편에 있는 우주의 보좌 위에 공동 치리자로 좌정하시고 높임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인봉된 두루마리는 구약에서 왕의 등극시 중요한 역할을 한 언약의 책과 같은 동일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진다. 이제 요한은 우리들에게 인봉된 두루마리가 다윗 계보의 이상적인 왕, 곧 종말적
‘아들’(
계 1:13; 2:18; 14:14:
단 7:13-14 참조)에게로 넘겨졌음을 말한다. 그분은 왕권의 징표로서 두루마리를 취하며, 그분의 아버지의 보좌에 공동 치리자로(
계 3:21) 좌정하기에 합당한 분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므로 인봉된 두루마리를 그리스도의 손에 상징적으로 넘겨주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최고의 통치자로 인정되는 공식적인 의식 행위로”16) 또한 그분이 우주의 통치자로 그리고 세상의 주로 취임하시는 표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은 명백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즉, 왜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두루마리를 꼭 받으셔야만 하는가? 우리는 요한이, 이러한 구약의 주제를 분명히 잘 알고 있었으며,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기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던 당대의 독자들을 위하여 일차적으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한은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과 그분의 사업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독자들이 조금도 의구심 가운데 있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마 28:18)가 그리스도에게 넘겨졌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주장을 폈다. 이와 같이, 그는 다윗 계보의 이스라엘 왕들의 등극과 관련된 구약의 관습을 따라 권세가 그리스도에게로 이양되고 있음을 묘사하였다.
초기 봉사를 시작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침례 받으실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침례는 그분의 기름부음 예식이었다), 이스라엘 왕들에게 언약의 의무를 생각나게 한
‘두루마리’도 그분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례를 받으심으로, 그분은 온 이스라엘이 대답해야 했던 대답을 하셨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마 3:15) 아버지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
마 3:17)라고 선언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참 아들되심을 실현한
‘아들’이 있었다.
이것은 왜 그리스도께서 다윗 언약의 이스라엘 왕권을 따라 묘사되는지를 설명한다. 다윗 계보의 왕들은 불순종한 아들들이요 언약에 충성되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실패한 곳에서 다윗의 이상적인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성공하셨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5장에서 두루마리를 취하기에
‘합당한’ 유일한 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이라는 상징적 모습으로 무대에 나타나실 때, 그분은 구약의 왕들과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이 응해야 했던 것과 같이 응하신다. 다윗의 보좌는 더 이상 비어 있거나 무력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수행하시는 승리의 그리스도에게로 넘어갔다. 언약의 두루마리는 더 이상 그 내용이 숨겨진 채 인봉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두루마리를 취하시고 소유하심으로 약속된 왕국의 도래가 소개되었고, 그 순간 이후부터 그리고 예수님의 바로 면전에서, 하나님의 왕국은 그 자체를 드러내었고 계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인봉된 두루마리의 의미 새로 즉위한 왕에게 언약의 책인 신명기 두루마리를 전달하는 것은(
신 17:18-20; 왕하 11:12) 구약의 핵심 주제인 듯싶은데, 이는
요한계시록 5장을 위한 더할 나위없는 배경을 제공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보좌에 좌정하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두루마리는 그분의 권세와 통치권을 의미한다.
인봉된 두루마리는 당신의 백성에게 왕국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이다. 그분의 희생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왕국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께 두루마리가 넘겨진 것은(
계 5:9-10),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에서 통치할 권세와 능력 뿐만 아니라, 주권을 부여받았음을 시사한다(
계 5:12; 빌 2:9-11; 벧전 3:22 참조). 또한 그리스도께서 두루마리를 받으신 것은 죄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세상의 통치가 그분에게로 합당하게 이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마지막 때의 통치자로 앉히셨고,
“역사 속에서 성취하기 원하는 그분의 계획을” 두루마리와 함께 그에게 넘기셨다.
17) 후에 논의되겠지만, 인봉된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신약에서 이 말은 온 우주를 구속(眞)하여 통합하고 당신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킨다.
이렇게 이해할 때, 인봉된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의 두루마리, 즉 인류를 위한 그분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계시인 것 같다. 이것은
“우주적 쟁투에 대한 기록”18)으로서, 인간과 우주 전체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의 실체와 개략을 상징한다. 그것은 재림시에 공개 될 구원과 심판들을 포함한다. 이것은 엘렌 화잇이 인봉된 두루마리에 대하여 말했던 바로 그 의미다. 인봉된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 등록부로, 국가와 교회에 대한 예언적 역사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권세, 그분의 명령, 그분의 율법, 영원하신 분의 전반적인 상징적 권면, 그리고 국가들의 모든 통치 세력의 역사 등이 들어 있었다. 지상 역사의 시작으로부터 그 끝 날까지의 모든 나라와 방언과 백성의 영향력이 상징적 언어속에 포함된 것이다.
19) 요한계시록 5장의 인봉된 두루마리의 내용 인봉된 두루마리가 요한계시록 자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먼저,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아포칼립시스(apokalupis)라 불렸는데, 문자적으로
‘덮개를 벗 긴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분명
‘앞서 감춰졌던 것을 공개’하는 것이다.
20) 그러므로 이 용어는 요한계시록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불충과 불신실로 인해 정해진 때까지 인봉되었거나 숨겨졌던 하나님 기별을 공개한다는 의미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요한은 독자들에게 예언된 시간이 이르렀고, 인봉되었던 하나님의 계시가 다윗의 참된 후손의
‘합당함’ 때문에 이제 막 공개되려 하고 있음을 정확히 말하고 싶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 요한에게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22:10)는 지시가 내렸다.
둘째,
요한계시록 5장의 두루마리와 요한계시록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요한계시록 1장과
4-5장 사이에서 현저한 평행을 이룸으로써 더욱 지지되고 있다.
요한계시록 5장은 그리스도를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
계 4:8; 11:17 참조) 이신 하나님의 우편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이 칭호는 구약의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이다.
1장에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자요 전능한 자” (
계 1:8; 1:4)로 꼭 같이 소개된 하나님에 의해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진다. 두 절에서
“일곱 영”은 그분의 보좌 앞에 있다(
계 1:4; 4:5; 5:6).
그러나 두 구절 사이에 있는 약간의 차이점들은 특히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요한계시록 5장이 우주의 어느 누구도 열거나 들여다 볼 수 없는 인봉된 책을 묘사하는 반면(
5:1-3),
요한계시록 1장은 그 내용이 공개된 한 책을 가리킨다(
1:1-3; 22:10 참조), 둘째,
요한계시록 5장에서 그리스도의 손에 들려 있는 두루마리는 그분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반면,
1장에서는 계시가 그리스도께 넘겨져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상징으로 된 그 계시를 한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전달하셨다. 요한은
“그 본 것들을 ‘예언의 책[biblion]’의 형태로 교회에 전달하였다(22:7, 10, 18, 19).”21) 구약의 왕들이 등극시에 언약의 두루마리를 받아 특별히 선택된 도구들을 통하여 백성을 훈계해야 했던 것처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나타내는 요한계시록은 특별히 선택된 도구들을 통하여 교회들을 훈계할 목적으로 주어졌다. 결국, 요한계시록 전반의 전달 대상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들에게 보낸 것이다.
인봉된 두루마리와 요한계시록이 연결된 증거가 있을지라도, 두루마리의 내용은 성경의 마지막 책 내용보다 더 광범위한 것 같다. 요한계시록 자체는 허두에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연결 사슬을 통하여 교회에게 전달되었음을 알려준다. 즉, 하늘 아버지께서 계시를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는 그것을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요한은 그것을 두루마리의 형태로 교회에 보냈다(
1:11; 22:7, 10). 이것은 새로 등극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에서 인봉된 두 루마리를 취하시는
요한계시록 5장의 장면과 놀랍도록 상응한다. 이스라엘 왕들이 언약의 책을 공개한 것은 즉위 이후였다. 이것은 왜
요한계시록 5장의 장면이 인봉된 두루마리의 공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즉위식의 한 부분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사건에 전체의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10장에 이르면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띤다. 거기서 우리는 한 힘센 천사가
“펴 놓인 작은 책”(
계 10:2)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 작은 책(헬, biblaridion 비블라리 디온)은
요한계시록 5장의 정상적인 크기의 두루마리와 비교하여 작은 크기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다. 이 작은 책이 펴 놓여 있는 양상을 헬라어의 완료수동분사로 표현하였다. 완료시제는 작은 두루마리의 내용이 이전의 어떤 시점에서 펼쳐졌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수동태는 히브리어의 신적(神的) 수동형(divine passive) 역할을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 책을 펼치셨음을 의미한다.
‘작은 두루마리’라는 표현을 쓰고 그것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주된 이유는 이 작은 두루마리와
5장의 더 크며 말려 있는 인봉된 두루마리를 비교하기 위함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10장 7절에 의하면, 인봉된 두루마리는 언제나 종말적 의미로 사용되는 신약 용어인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22) 그것은 온 우주를 화해시키고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모든 목적을 가리킨다. 그것은 완전히 공고(童固)하게 된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선회하면서 “그 곳에 거주할 백성과 배제될 사람들의 신원을 밝힌다(
계 11:15-18 참조).
23)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지만, 그 비밀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알려졌다(
롬 16:25-26; 고전 2:6-10; 엡 3:1-20; 딤전 3:16). 이 비밀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공개되었으나, 그 왕국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닫혀 있다(
마 13:11). 그러나 그 비밀의 일부분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공개된 것 같다. 왜냐하면 천사가 요한에게 그것을 인봉하고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은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0:4), 나머지 부분은 재림시에 공개될 것이다. 왜냐하면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계 10:7).
이 모든 것들은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전달된
10장의 작은 두루마리가
5장의 인봉된 두 루마리로 대표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들과 그분의 구속 행위들에 대한 계시의 일부분만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할 것이다.
24) 이 작은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의한 그분의 중요한 섭리와 기별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요한에게 상징적 표상으로서 알려졌고, 요한은 기별들을 교회에 전달하였다(
계 10:8-11 참조).
25) ‘하나님의 비밀’이 가진 독특한 측면은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질 때에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 때에 하나님의 비밀의 완전한 계시인 운명의 봉인된 책이 마지막으로 열릴 것이다(
계 20:11-15).
요한계시록 4:1-22:5의 배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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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장 |
아버지께서 인봉된 두루마리를 그리스도에게 주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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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장 |
인봉된 두루마리를 열기 위한 예비 단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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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장 |
인봉된 두루마리의 내용 중 일부를 공개하는 작은 두루마리를 그리스도께서 힘센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주시고 요한을 통해 교회들에게 주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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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2:5 |
작은 두루마리의 내용들에 대한 계시 (20:11-15에서 인봉된 두루마리가 최종적으로 공개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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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제시된 모든 것에 비추어, 요한계시록은 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비밀이 부분적으로 공개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요한을 통해
10장의 작은 두루마리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된 그 비밀의 내용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인 후(
계 11:19),
요한계시록 12장 1절-22장 5절에 분명히 기술되어 있다. 언약의 책이 보관된 곳은 바로 언약궤였다(
신 31:9, 24-26 참조).
“하나님의 비밀”이 완전히 알려지는 인봉된 두루마리는
“역사를 그 예정된 결론에 이르게 할”26) 미래의 종말적 심판 때에 최후로 공개될 것이다.
“반드시 속히 될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인봉된 두루마리의 내용은 요한계시록 12-22장에서 공개된다(
요한계시록 10장의 뒤돌아보기"와
“개관:요한계시록 12:1-22:5”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