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묵시 중에서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하여 하늘 성전의 보좌실로 들려간다. 제일 먼저 그의 주의를 끄는 것은
보좌다.
‘보좌’는
요한계시록 4장의 중심 단어로,
4장에서 14회 나오며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다. 보좌는 하늘 보좌실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위엄의 상징으로 서 있다.
4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과 활동들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기원된다. 그것들은
“보좌 위에”(
2절),
“보좌 주변에” (
3, 4, 6절; 참조
5:11),
“보좌로부터”(
5절),
“보좌 앞에” (
5-6, 10절), 또는
“보좌 중앙에” (
6, 5:6) 등으로 언급된다. 보좌가
4장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4-5장에 기술된 장소는
“하늘 보좌실”로 칭해진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4장은 하늘 보좌 자체를 기술하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보좌의 장엄한 주변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사야(
6:1-3)와 에스겔(
1:4-28)의 보좌에 관한 묵시를 생각나게 한다. 보좌 주변에는 무지개가 있고(
계 4:3), 그 앞에는 일곱 등과(
5절),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다(
6절). 보좌 주변에는 그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앉아 있는 이십사 보좌가 있고(
4절),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양하는 네 생물이 있다(
6-8절).
다음으로 요한은 보좌에
좌정해 계신 분을 본다. 보좌에 앉은 분에 관한 묘사는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드러낸다(
4:2-3), 교회와 세상의 미래에 관하여 요한에게 나타낼 것이기 때문에, 관할하는 분이 누구며, 미래를 붙들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를 우선 요한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였다. 보좌는 통치권을 상징한다.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람은 왕국을 통치할 권세와 왕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구약의 예언적 이상 속의 하나님에 관한 일반적인 묘사처럼 요한이 하나님을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기술하려고 애쓰지 않는 점은 흥미롭다. 비록 요한이 본 장에서 하나님을 두 번이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4:8)
“우리 주 하나님”으로 (
4:11) 소개하고 있을지라도, 묵시의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보좌에 좌정해 계신 분”으로 언급한다(
계 4:3, 9, 10; 5:1, 7, 13).
요한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 영광은 특징적 형태를 띤다. 사람의 단어는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표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을 때 모세는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는(
출 33:20) 대답을 들었다. 비록 모세가
“대면하여”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모세에게는 보여 주지 않으셨다. 요한도 유사한 형편에 있었다. 대신, 요한은 하나님의 장엄한 광휘를 대표적인 보석인 빛난
벽옥과
홍보석과
녹옥의 눈부신 광채를 이용하여 그렸다.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에스겔의 묵시를 생각나게 한다(
1:26-28), 보석들의 눈부신 빛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적 언어로 묘사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
시 104:2)고 계신 분으로 묘사하며, 바울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으로 말한다(
딤전 6:16). 하나님의 언약의 표인
보좌 주위의 무지개는(
겔 1:28 참조)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또한 그 약속을 신실히 지키신다는 것을 확고히 보증해준다(
창 9:12-17).
요한계시록 4장의 보좌실에 대한 이 모든 묘사들은 구약의 위대한 보좌에 대한 묵시들과 평행을 이룬다. 선지자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
왕상 22:19)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사야는 위엄과 영광 중에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사 6:1-3), 다니엘은 보좌 위에 좌정해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단 7:9-10) 그러나
요한계시록 4장의 주요 배경은
에스겔 1장의 보좌에 관한 묵시인 것 같다(
4-10, 13-14, 18, 26~28절), 두 이상의 유사성은 분명하다.
세밀한 연구는 헬라어로
요한계시록 4장에 사용된 3분의 1의 단어들이 에스겔에 나타나 있다고 밝힌다. 요한이 묘사한
요한계시록 4장의 보좌 장면은 구약의 모든 위대한 보좌 묵시의 양상을 통합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4장의 묵시 바로 서두에서, 요한의 주의를 끈 것이 하나님보다도 오히려 보좌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분이 하늘 무리들의 찬송과 경배 의 대상이시라 할지라도(
계 4:8-11), 단순히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거의 동일한 구절이
요한계시록 20장 11절에 나오는데, 그 곳에서 보좌는 최후의 심판 장소다. 이 현상은, 후에 유대인의 문학에서도 그랬듯이, 요한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시 가운데서 요한은, 그가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그러하듯이, 네 번이나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선언한다(
계 4:8, 11; 5:9-10),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표현하기가 불가능했기에, 아니면 하나님의 모습을 사람의 어떤 모습으로 자세히 표현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논란들은 요한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사람의 모양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anthropomorphic)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약화된다. 예를 들면, 인봉된 두루마리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편”(
계 5:1)에 있다. 죄인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면전에 설 수 없다(
계 6:16; 20:11), 이 외에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계 19:4; 7:10; 12:5 참조)을 종종 언급한다. 이 모든 예들은 요한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신인동형동성적 언어를 기꺼이 사용했음을 암시한다.
분명히 이 곳의 언어 양식은 보좌에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그 장면의 중심은 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묵시의 전후 문맥에 잘 맞는다. 왜냐하면 묵시에서 보좌는 분명히
요한계시록 4장의 핵심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요한계시록 4-5장의 장면은
3장 21절의 결론적 진술 위에 구축되어 있는 듯하다.
3장 21절에 서, 그리스도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그가 친히 이기시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으시는 것같이, 당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보좌가 중심인
4장의 장면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하는 일을 묘사한
5장의 서곡이다. 이기는 자가 받을 상급인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을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는 미래의 재림 때까지 유보되며,
7장에서 묘사된다.
4장과
5장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초점이 되는 것이 왜 중요한지는 요한이 로마제국의 황제에 의해 발단된 핍박하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사단의 위(位)”(
계 2:13; 13:2 참조) 및
“짐승의 보좌”(
16:10; 13:2 참조)와 정반대편에 서 있다. 남대극의 언급처럼, 구약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재난과 좌절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최후의 안식처로 간주되었다(
시 11:1-4; 렘 17:12-13; 애 5:19 참조). 임박한 심판의 때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호소의 기틀로서 그리고 회복이라는 미래의 소망의 기대로서” 언급하였다. 하나님의 보좌는 고난당하고 핍박을 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은 자들이 기도를 드리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하여 나올 수 있었던 장소였다.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신뢰의 요동할 수 없는 기초였다”(
시 9:4-5; 욥 23:3 참조).
11)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이 구약적 중요성을 상술하면서,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는 이 우주의 통제 본부라는 명확한 기별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고자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