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보좌에 대한 묵시 (4:1-11)
 요한계시록 4-5장은 하나의 문학적, 주제적 단위로 되어 있다. 제4장은 인봉된 두루마리 묵시의 첫 부분으로, 제5장의 장면을 위해 무대를 설치한다. 본장은 하늘의 보좌실과 그 곳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하늘의 무리를 묘사한다.

하늘 보좌에 대한 묵시 (4:1-11)
(어구(語句) 해설)
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하늘에 열린 문.
 헬라어 구약 성경(70인역)에서 쉬라(thura, 문)는 200회 이상 나오는데, 상당수는 성소/성전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1) 완료분사인 동사 ‘열린’이라는 단어는 요한이 묵시에서 문을 보았을 때, 이미 열려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문은 요한이 그것을 통해 보좌실의 내부를 보았던 문으로, 필시 하늘 성전의 문이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4-5장 장면의 배경인 보좌실이 하늘 성전의 성소인가, 지성소인가를 놓고 역사주의적 주석가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지상 성전의 성소 기구들과 보좌(지상 성소의 지성소에 서 있는 언약궤로 상징되는, 삼상 4:4 참조; 시 99:1)가 함께 있는 것은 성소의 두 칸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지지하는 강한 증거다. 이것은 어느 한 칸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두 칸을 나누는 휘장이 걷혀서, 이를테면,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의 보좌실로 합친 셈이다. 지상 성전에서 성전 전체가 다 포함되는 때는 성전 봉헌식(출 40장; 왕상 7-8 장)과 대속죄일(레 16장)의 오직 두 경우였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부활 후에 그리스도가 제사장과 왕의 봉사를 위해 취임하고, 하늘 성소의 시작을 그리는 요한계시록 4-5장의 장면에 부합된다.
이후에 마땅히 될 일.
 ‘일[이 일들]’은 분명히 “이제 있는 일”(계 1:19)을 언급한다. 즉, 일곱 교회에게 보낸 기별들이다(계 1:19의 어구 해설 참조).
요한계시록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보좌.
 의심의 여지없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의 주권적 위엄과 통치적 권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비유적 표현은 고대의 보좌에서 가져왔다. 통치자가 보좌에 앉았을 때, 그는 왕권을 소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하늘의 보좌에 좌정하여 계시며 (왕상 22:19; 시 47:8; 사 6:1; 겔 1:26; 단 7:9), 하늘 존재들의 무리에 옹위되어 계시고 (왕상 22:19; 사 6:1-3; 겔 1:4-24; 단 7:9-10), 압도하는 위엄과 영광으로 통치하시는 분으로 (시 93:1-2; 97:1-9; 99:1-5) 묘사된다. 언약궤는 세상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로 간주된다(삼상 4:4 참조). 하나님의 보좌는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하늘의 항목들 중 하나로(요한계시록 스물두 장 중 열여섯 장에서 언급된다), 요한계시록의 시작과(1:4) 마지막에(22:3) 나온다. 때때로 보좌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보좌로부터 한 음성’‘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심’이라는 뜻일 수 있다(16:17; 19:5 참조). 또는 ‘보좌 앞에서’‘하나님 앞에서’를 의미할 수 있다(7:9; 14:3). 새 예루살렘의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계 22:3; 계 22:1 참조)는 사단의 권세들이 완전히 굴복당한 것과 당신의 구원받은 백성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를 암시한다(계 21:3; 겔 43:7 참조).
요한계시록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이 세 보석의 정체는 매우 불확실하다. 플라톤(Plato)은 벽옥이나 홍보석, 녹옥 등이 대표적인 보석이라고 하였다.2) 이 세 보석은 두로 왕이 치장했던 보석들 중에 포함되어 있다(겔 28:13). 또한 그 보석 위에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던 구약의 대제 사장의 흉배에서 발견된다(출 28:17-20). 또한 그 세 보석은 새 예루살렘의 여러 기초석 중에서 발견되며(계 21:19), 그 위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21:14). 매싱버드 포드(J.. Massynberde Ford)가 관찰하듯이, 홍보석(NASB에서는 루비)과 벽옥은 대제사장의 흉배에 있는 보석들의 첫째와 마지막 보석으로,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장자 루우벤과 막내 베냐민을 대표한다. 녹보석(NASB에서는 터키석, turquoise)은 목록의 네 번째 보석으로 유다를 대표하는데,3) 이는 특별히 “유다 지파의 사자”(5:5)라는 칭호에 비추어 볼때 의미가 있다.
요한계시록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이십사 장로들.
 4-5장 이외에도 이십사 장로는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다(7:11, 13; 11:16; 14:3; 19:4),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장로들의 신분에 관하여 결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체는 모호하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하여 그들은 흰옷을 입고 그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하나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보좌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4:4; 11:16).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을 드린다(4:10, 11; 5:8-10, 14; 11:16-18; 19:4), 그들은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가져온다(5:8). 두 경우에, 요한이 묵시들 중 깨닫지 못한 것을 한 장로가 설명해준다(5:5; 7:13-14). 그들은 분명히 어떤 종류의 하늘 존재다. 그들의 정체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 제기되었다.4)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견해는, 그들 이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기 때문에 이십사 장로들은 천사들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제시한다.5)

 그러나 증거는 이십사 장로는 천사가 아니라 구속받아 영광스럽게 된 사람들임을 강력히 지지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천사들은 성경이나 유대 문헌에서 결코 장로들로 칭하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보좌를 공유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다. 둘째, 이 십사 장로들은 흰옷을 입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흰옷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과 일관되게 연관되어 있다(3:4-5, 18; 6:11; 7:9, 13-14), 천사들은 요한계시록에서 결코 흰옷을 입고 있다고 묘사되지 않는다. 셋째, 장로들은 승리의 황금 면류관을 쓰고 있다. 이 면류관은 헬라어로 왕관(헬, diadéma 디아데마)이 아니라 승리의 면류관인 스테파노스다(계 2:10의 어구 해설 참조), 스테파노스는 영생을 대표하는 것으로 승리한 신실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이다(2:10; 3:11 참조), 바울은 주의 오시는 날에 이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을 믿었다(딤후 4:8). 이십사 장로들이 승리의 면류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은 통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를 얻은 구속받은 자들임을 암시한다. 성경에서 천사들은 결코 스테파노스 면류관을 쓰지 않는다. 이 모든 묘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한정되며, 이십사 장로가 하늘의 존재들6)이거나 구약의 의로운자들로 구성된 하늘 장로회라는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한다.

 장로들과 관련하여 ‘이십사’라는 수는 두 세트의 12로 구성되어 있다. ‘12’는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숫자다.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따라 명명되었으며, 열 두 기초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 이십사 장로들은 분명히 12×12×1000에 기초한 수인 144,000인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계 7:4의 어구 해설 참조), 이 외에 구약의 성전에서는 24개의 제사장 반열이 돌아가면서 봉사하였는데(대상 24:4-19), 그들은 하나님의 성소의 일을 다스리는 자들로 불렸다(대상 24:5). 이십사 장로들은 예배하는 일과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즉 제사장의 일을 끊임없이 수행하였다(계 5:8).

 이 모든 사항을 고려할 때, 이십사 장로들은 영화롭게 된 성도들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아마도 그들은 분명, 구약과 신약 교회의 구속받은 신실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상징적 그룹인 것 같다. 즉, 그들은 교회 전체를 대표한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들에 대한 묘사는 구속받은 자들의 양상과 잘 들어맞는다. 곧 흰옷, 승리의 면류관(스테파노이), 그리고 보좌에 좌정함 등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곁에 앉아 있다는 것은(4:4) 요한계시록 3장 21절의 이기는 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상기시킨다. 동시에 그들이 하늘 예배에 계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사장들과 왕들로서 그들의 이중 역할을 암시한다(5:8-10 참조). 이 장로들은 언제 하늘에 올라갔는가? 구약의 보좌실 기록에 장로들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요한이 그들을 보았을 때에, 그들은 전에는 보좌실에 없었던 새로운 무리였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어간에 그 곳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마태복음 27장 51-53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본문은 후에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후 승천하셨을 때,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았다고 말한다(엡 4:8). 이 부활한 성도들은 하늘에서 구속받은 인간을 대표하기 위하여 추수의 첫 열매로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올라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8)
요한계시록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요한계시록 1장 4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요한계시록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네 생물.
 네 생물은 요한계시록에서 여러번 언급되었다. 그들은 언제나 보좌와 근접한 곳에서 발견된다(4:6; 5:6; 14:3). 그들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4:8-9; 5:8-9, 14; 7:11-12; 19:4). 필시 이 비유적 표현은 에스겔의 묵시에서 끌어왔다. 그 곳에서 선지자는 각각 네 얼굴, 즉 사람, 사자, 소, 그리고 독수리의 얼굴을 가진 네 생물을 보았다(겔 1:6-10; 10:14). 그들은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다(겔 10:12), 에스겔은 그들이 그룹 천사(cherubim)라고 분명히 밝힌다(10:20-22). 또한 요한계시록 4장의 네 생물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환호하는 스랍천사에 관한 이사야의 묵시(사 6:2-3)를 상기시킨다. 요한계시록 4장에스겔 1장, 그리고 10장에서 네 생물이 보좌 가까이에 있다고 하는 것은 언약궤와 연관되어 있는 그룹천사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은 얼굴을 서로 마주하고 있었으며, 날개는 속죄소 위로 향하여 있었다(출 25:18-21; 왕상 6:23-28), 성경에서 하나님은 종종 그룹들 사이의 보좌에 좌정해 계신 분으로 그려진다(왕하 19:15; 시 80:1; 99:1; 사 37:16). 이 모든 요소들은 요한계시록의 네 생물이 하나님의 높임을 받는 천사들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보좌의 수호자들임을 분명히 가리킨다. 그들은 끊임 없는 예배와 찬양에 있어 하늘 천군들을 주도하고 있다. 헨리 스위트(Henry B. Swete)의 제의대로, 그들의 모습은 그 성격에 있어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지혜롭고, 그리고 가장 신속한 모든 것을 암시하는 것이리라.9) 여하간에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땅에 쏟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6:1, 3, 5, 7; 15:7).
요한계시록 4: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전능하신 이.
 요한계시록 1장 8절의 어구 해설을 참조하라.
(주해)
 일곱 교회는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그들의 영적 상태를 평가받았고, 그 상태를 어떻게 교정하고 개선할지에 관하여 권고 받았다. 이제 장면이 땅에서 하늘로, 요한의 때부터 미래로 바뀐다. 요한은 이제 “요한계시록의 핵심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기술하기 시작한다.10)

 일곱 기별은 서간체로 쓰여졌으며, 신약의 기자들이 편지를 쓸 때에 사용한 것과 유사한 직설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2-3장에 사용된 상징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곱 기별이 아시아 지역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다루기 때문에 그러한 직설적인 언어는 적절하다. 그러나 4장부터 요한계시록의 이상들은 늘 쉽게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상징적 언어로 묘사되었다. 미래에 놓여 있는 때와 사물을 묘사함에 있어서 요한은 특이한 상징적 언어로 특징 지워지는 유대 묵시문학의 형식을 따랐다.
요한계시록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요한은 독자들에게 자신이 새로운 묵시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그 묵시에서 그는 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다. 그가 하늘 보좌실의 내부를 주시하고 있는 문은 거의 확실히 성전 문을 통하여서다. 그는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다시 듣는다. 그 음성은 일찍이 그 가 들었던 나팔소리 같은 음성(1:10 참조)으로, 그 음성이 이제 요한을 부른다.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요한계시록 1장 19절에서,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이 요한에게 본 것을 기록하라고 했을 때에, 그가 볼 이상 중의 사건들은 그의 관점에서 보는 “현재의 일들”이며, 또한 후에 있을 일들이었다. 이제, 동일한 음성이 ‘이 일들 후에’ 일어날 일들을 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4장 1절1장 19절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 일들은 2장3장에 기술된 일곱 교회의 상황을 가리킨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요한은 이제 교회와 세상과 관련하여 그의 관점으로부터 바야흐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보려고 한다.

 요한은 그가 묵시를 받고 있는 동안 성령 안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일찍이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묵시에 대하여 그가 서론에서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표현이다(계 1:10). 그렇게 언급하므로 요한은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벧후 1:21) 성령의 역사의 결과임을 분명히 한다.
요한계시록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요한계시록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요한은 묵시 중에서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하여 하늘 성전의 보좌실로 들려간다. 제일 먼저 그의 주의를 끄는 것은 보좌다. ‘보좌’요한계시록 4장의 중심 단어로, 4장에서 14회 나오며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다. 보좌는 하늘 보좌실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위엄의 상징으로 서 있다. 4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과 활동들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기원된다. 그것들은 “보좌 위에”(2절), “보좌 주변에” (3, 4, 6절; 참조 5:11), “보좌로부터”(5절), “보좌 앞에” (5-6, 10절), 또는 “보좌 중앙에” (6, 5:6) 등으로 언급된다. 보좌가 4장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4-5장에 기술된 장소는 “하늘 보좌실”로 칭해진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4장은 하늘 보좌 자체를 기술하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보좌의 장엄한 주변을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사야(6:1-3)와 에스겔(1:4-28)의 보좌에 관한 묵시를 생각나게 한다. 보좌 주변에는 무지개가 있고(계 4:3), 그 앞에는 일곱 등과(5절),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다(6절). 보좌 주변에는 그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앉아 있는 이십사 보좌가 있고(4절),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양하는 네 생물이 있다(6-8절).

 다음으로 요한은 보좌에 좌정해 계신 분을 본다. 보좌에 앉은 분에 관한 묘사는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드러낸다(4:2-3), 교회와 세상의 미래에 관하여 요한에게 나타낼 것이기 때문에, 관할하는 분이 누구며, 미래를 붙들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를 우선 요한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였다. 보좌는 통치권을 상징한다.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람은 왕국을 통치할 권세와 왕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구약의 예언적 이상 속의 하나님에 관한 일반적인 묘사처럼 요한이 하나님을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기술하려고 애쓰지 않는 점은 흥미롭다. 비록 요한이 본 장에서 하나님을 두 번이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4:8) “우리 주 하나님”으로 (4:11) 소개하고 있을지라도, 묵시의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보좌에 좌정해 계신 분”으로 언급한다(계 4:3, 9, 10; 5:1, 7, 13).

 요한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 영광은 특징적 형태를 띤다. 사람의 단어는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표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을 때 모세는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는(출 33:20) 대답을 들었다. 비록 모세가 “대면하여”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모세에게는 보여 주지 않으셨다. 요한도 유사한 형편에 있었다. 대신, 요한은 하나님의 장엄한 광휘를 대표적인 보석인 빛난 벽옥홍보석녹옥의 눈부신 광채를 이용하여 그렸다.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에스겔의 묵시를 생각나게 한다(1:26-28), 보석들의 눈부신 빛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상징적 언어로 묘사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시 104:2)고 계신 분으로 묘사하며, 바울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으로 말한다(딤전 6:16). 하나님의 언약의 표인 보좌 주위의 무지개는(겔 1:28 참조)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또한 그 약속을 신실히 지키신다는 것을 확고히 보증해준다(창 9:12-17).

 요한계시록 4장의 보좌실에 대한 이 모든 묘사들은 구약의 위대한 보좌에 대한 묵시들과 평행을 이룬다. 선지자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왕상 22:19)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이사야는 위엄과 영광 중에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사 6:1-3), 다니엘은 보좌 위에 좌정해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단 7:9-10) 그러나 요한계시록 4장의 주요 배경은 에스겔 1장의 보좌에 관한 묵시인 것 같다(4-10, 13-14, 18, 26~28절), 두 이상의 유사성은 분명하다.

요한계시록 4장 에스겔 1장
하나님 이 앉으신 보좌 (2-5절) 하나님 이 앉으신 보좌 (26-28절)
보좌 주위의 무지개 (3절) 보좌 주위의 무지개 (26절)
일곱 불 등대 (4절) 일곱 횃불 (13절)
번개와 천둥 (5절) 번개와 폭풍 (4, 13절)
네 생물 (6-8절)
-여섯 날개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얼굴
-안팎으로 눈이 가득함 (8절)
유리바다처럼 펼쳐짐 (6절)
네 생물 (5-10절)
네 날개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 얼굴
안팎으로 눈이 가득함 (18절)
유리바다처럼 펼쳐짐 (22-26절)

 세밀한 연구는 헬라어로 요한계시록 4장에 사용된 3분의 1의 단어들이 에스겔에 나타나 있다고 밝힌다. 요한이 묘사한 요한계시록 4장의 보좌 장면은 구약의 모든 위대한 보좌 묵시의 양상을 통합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4장의 묵시 바로 서두에서, 요한의 주의를 끈 것이 하나님보다도 오히려 보좌였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분이 하늘 무리들의 찬송과 경배 의 대상이시라 할지라도(계 4:8-11), 단순히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거의 동일한 구절이 요한계시록 20장 11절에 나오는데, 그 곳에서 보좌는 최후의 심판 장소다. 이 현상은, 후에 유대인의 문학에서도 그랬듯이, 요한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시 가운데서 요한은, 그가 요한계시록의 다른 곳에서 그러하듯이, 네 번이나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선언한다(계 4:8, 11; 5:9-10),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표현하기가 불가능했기에, 아니면 하나님의 모습을 사람의 어떤 모습으로 자세히 표현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논란들은 요한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사람의 모양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anthropomorphic)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약화된다. 예를 들면, 인봉된 두루마리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편”(계 5:1)에 있다. 죄인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면전에 설 수 없다(계 6:16; 20:11), 이 외에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계 19:4; 7:10; 12:5 참조)을 종종 언급한다. 이 모든 예들은 요한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신인동형동성적 언어를 기꺼이 사용했음을 암시한다.

 분명히 이 곳의 언어 양식은 보좌에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그 장면의 중심은 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묵시의 전후 문맥에 잘 맞는다. 왜냐하면 묵시에서 보좌는 분명히 요한계시록 4장의 핵심 대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요한계시록 4-5장의 장면은 3장 21절의 결론적 진술 위에 구축되어 있는 듯하다. 3장 21절에 서, 그리스도께서는 이기는 자에게, 그가 친히 이기시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으시는 것같이, 당신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보좌가 중심인 4장의 장면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하는 일을 묘사한 5장의 서곡이다. 이기는 자가 받을 상급인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을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는 미래의 재림 때까지 유보되며, 7장에서 묘사된다.

 4장5장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초점이 되는 것이 왜 중요한지는 요한이 로마제국의 황제에 의해 발단된 핍박하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사단의 위(位)”(계 2:13; 13:2 참조) 및 “짐승의 보좌”(16:10; 13:2 참조)와 정반대편에 서 있다. 남대극의 언급처럼, 구약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재난과 좌절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최후의 안식처로 간주되었다(시 11:1-4; 렘 17:12-13; 애 5:19 참조). 임박한 심판의 때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호소의 기틀로서 그리고 회복이라는 미래의 소망의 기대로서” 언급하였다. 하나님의 보좌는 고난당하고 핍박을 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은 자들이 기도를 드리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하여 나올 수 있었던 장소였다.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보좌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신뢰의 요동할 수 없는 기초였다”(시 9:4-5; 욥 23:3 참조).11)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이 구약적 중요성을 상술하면서,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는 이 우주의 통제 본부라는 명확한 기별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고자 애쓴다.
요한계시록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요한계시록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요한계시록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요한계시록 4: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요한계시록 4: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보좌의 주변에서 요한은 이십사 보좌와 그 위에 앉은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쓴 이십사 장로를 본다. 이십사 장로들은 아마도 영광스럽게 된 성도들, 즉 신구약의 구원 받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적으로 대표할 것이다. 그들은 구약의 보좌에 관한 이상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요한이 그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전에는 하늘 보좌실에 없었던 새로운 무리였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 어간에 그 곳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구속받은 인류를 하늘에서 대표하기 위하여 추수의 첫 열매로 예수와 함께 하늘로 승천하였다.

 요한계시록 4-5장에서 이십사 장로는 구속받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다른 세계의 대표자들 및 만물과 함께 예수님을 하늘로 다시 모셔들여 아버지 우편 보좌에 앉는 큰 행사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5장에서 예수께서 즉위하기 전, 4장에서 장로들이 앉아 있는 장면을 요한이 본 이유는, 그들이 행사를 준비하는 중에 그 곳으로 안내되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예수님이 보좌실에 나타나서 아버지 우편의 하늘 보좌에 좌정하시고, 예수님은 하늘 성전의 보좌실에 모인 천군 천사와 만물의 대표자로부터 경배와 환호를 받으셨다.

 또한 각기 여섯 날개가 있고 앞뒤에 눈이 가득한 네 생물이 있다. 그것은 아마 이동의 신속성과 위대한 지성과 분별력을 상징할 것이다. 에스겔의 묵시에 나오는 그룹 천사들처럼(10:20-22), 그들은 각각 사자, 소, 사람, 그리고 독수리의 모양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네 생물은 아마도 하늘 천군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며 찬양할 때 그들을 지도하는 높은 계급의 천사들일 것이다(사 6:2-3; 겔 1:6-10; 10:14 참조),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이 지적하듯이, 그들은 “사자 같은 힘”(시 103:20 참조), “황소 같이 봉사하는 능력”(히 1:14 참조) “사람 같은 지성”(눅 15:10 참조) 그리고 “독수리 같은 신속성”(단 9:21 참조) 등 성경에서 천사에게 돌리는 특성들을 가졌다고 묘사된다.12)

 어떤 학자들은, 요한계시록 4장은 당시 독자들의 마음속에 당대의 로마황제의 법정과 종교 의식들의 어떤 장면을 쉽사리 떠올리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로마황제가 재판할 때, 그의 동료와 보좌관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묘사된 것처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높은 계급의 천사 무리와 구속받은 인간 대표자들에게 둘러싸여 계신다고 묘사된다.”13) 요한계시록 4장에서 하늘의 무리들은 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일을 위해 모여 있다. 그 특별한 일은 아마도 하늘 보좌에 좌정하실 그리스도의 큰 즉위식일 것이다. 인류의 대표자들로서, 그들은 온 우주 사람들과 하나되어 새로이 등극하신 우주의 왕께 올리는 환호에 동참한다.

 요한은 하늘 보좌실의 장면을 기술하며 몇 가지 세부 사항을 추가한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5절) 이 소묘는 현장의 영광을 강조한다. 구약에서 이 현상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언제나 수반된다(시 17:18; 겔 1:13), 특별히 요한이 더 염두에 두었으리라 생각되는 것은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졌을 당시의 산에 관한 묘사다. “제삼일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라(출 19:16). 보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 켠 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설명되는데(5절), 이는 성령의 완전한 역사와 활동을 가리킨다(슥 4:2-6 참조), 두 번째 요한의 주의를 사로잡은 현상으로 수정같이 맑은 유리바다 같은 것이 보좌 앞에 펼쳐졌다(6절). “그것의 수정같은 표면은 보좌로부터 나오는 찬란하고 다양한 색깔의 빛을 반사하면서 보좌 앞으로 쭉 뻗어나간다. 유리바다는 보좌 주변에서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바닥을 드러내며, 선견자에게 하나님의 초월성과 위엄에 대한 고도의 형언할 수 없 는 감각을 창출한다.”14) (계 15:2 참조)

 하늘 보좌실의 장면에 대한 묘사는 네 생물들의 그치지 않는 찬양과 함께 그 결론과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 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계 4:8) 이것은 우리에게 이사야의 묵시에 나오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는 스랍천사들의 노래를 떠 올리게 한다(사 6:3).
요한계시록 4: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요한계시록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리는 네 생물의 환호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십사 장로는 엎드려 그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내려놓고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경배를 드린다.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인간의 대표자로서의 이십사 장로의 노래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참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의 위대한 업적 - 즉, 창조의 업적(창조의 초점이 4장에 있다)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의 업적(구속의 초점은 5장에 있다)을 기리고 경축하는 것임을 단적으로 보인다. 둘째로, 종말의 드라마는 창조와 구속을 다 포함하는 것임을 보인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동일한 하나님께는 세상을 회복시키는 능력과 힘이 있으며, 그분은 잃어버린바 되어 고통당하는 인류를 구원하신다.

 게다가 본문은 고대의 여러 관습들을 반영한다. 그들의 황금 면류관을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드리는 이십사 장로의 행위는 로마 시대부터 내려온 궁정 의식을 반영한다. 이 때 왕들은 그 들의 굴복과 충성을 표시하면서 그들의 왕관을 막강한 황제 앞에 드리곤 하였다.15) 쉬슬러 피오렌자(E. Schuissler Fiorenza)에 의하면, ‘합당하오니’라는 갈채는 “로마 황제의 승리의 입성을 맞는 인사였다.”16) ‘우리 주 하나님’이라는 문구는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던 시기의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의 공식 칭호였다.17)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핍박과 죽음을 당한 이유는 황제를 주(lord)와 신(god)으로 인정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늘 궁정에서 구속받은 인간의 대표자인 이십사 장로는 하나님이야말로 온 우주의 주와 하나님으로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고 선언한다.
4:1-11 뒤돌아보기
 요한계시록 4장의 장면은 의심의 여지없이 5장에 기술된 장면을 위한 무대다. 우리는 요한이 보석들의 찬란한 빛과 여러 색깔의 무지개, 번개, 음성, 우레, 그리고 불타는 일곱 등불에 의해 묘사된 하늘 보좌실의 장엄한 광휘를 목도하고 있음을 본다. 또한 그 표면이 수정같은 유리바다는 보좌 앞으로 곧게 뻗어 있으며, 보좌로부터 나오는 번쩍이는 여러 색깔의 빛들을 반사하고 있다. 갑자기 모든 주의가 천군들의 예배와 찬양을 이끄는 높은 계급의 네 천사와 구속받은 인간의 대표자인 이십사 장로에게 옹위되어 있는 영광스러운 보좌에 모아진다. 그들은 이제 막 아버지의 우편에 즉위하시려는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기대 속에서 천군들과 함께 보좌실에 모여 있다.

 5장에서 어린양이 보좌로 나아와 하나님의 우편에서 인봉된 두루마리를 취하실 때, 갑자기 장엄한 예배 의식이 잠시 잠잠해진다. 곧 이어 온 하늘의 무리가 새로이 등극한 왕 앞에 엎드릴 때, 환희의 송가가 터져 나와 장엄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그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영광과 존귀의 환호를 돌린다(계 5:14). 이 웅장한 사건과 기쁨의 경축은 다음 장의 주제다.

주(註) ——————
1. Paulien, "The Seven Seals,”207. 
2. Plato, Phaedo 110e(The Loeb Classical Library, 1:378-379).
3. J. M. Ford, Revelation, 71.
4. 다양한 견해의 목록을 보려면, Aune, Revelation 1-5, 287-292을 참조하라. 197
5. Ladd, 75 참조. 
6. Bornkamm, “Presbus, et al.,”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6:668-669 참조; 최근에 Alfred Pala는 이십사 장로들은 타락하지 않은 세계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우주 통치자들의 회의, 즉 욥기 1-2장의 회의와 꼭 같은 회의라 하였다(“The Council of Cosmic Rulers,”Perspective Digest 3.2. [1998], 18-25).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회의를 하고 계신 것을 보여 주거나 장로들이 사법적 직임을 수행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는 곳은 요한계시록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쓰고 있는 스테파노스 면류관은 장로들이 전 우주에 대하여 그들의 통치력을 행사하는 통치자들이 아님을 암시한다. 
7. 이 견해에 대한 의견들에 대하여는, André Feuillet, Johannine Studies(Staten Island, NY: Alba House, 1964), 194-214을 보라. 
8. 유라이어 스미스는 이런 개념을 제안한 최초의 해석자들 중 하나다(The Prophecies of Daniel and the Revelation, revised ed. (Nashville, TN: Southern Publishing Association, 1944), 408-409). 
9. Swete, 71. 
10. Thomas, Revelation 1-7, 333. 
11. Daegeuk Nam, “The ‘Throne of God’ Motif in the Hebrew Bible”(Th.D. dissertation, Andrews University, 1989), 464-465. 
12. William Hendriksen, More than Conquerors(Grand Rapids: Baker, 1967), 87; Mounce, 138. 
13. Fiorenza, Revelation, 59. 
14. Mounce, 136. 
15. Aune, Revelation 1-5, 308-309 참조. 
16. Fiorenza, Revelation, 59-60. 
17. Aune, Revelation 1-5, 309-31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