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대 초에 이르러 성경 연구에 대한 마틴 루터의 대강조는 전천년설의 부활을 가져 왔다. 유명한 개혁교회 신학자인 요한 알스테드(Johann Alsted:1588~1638)는 독일에서 다시금 전천년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영향력 있는 신학자인 조셉 미드(Joseph Mede: 1586~1638)가 알스테드와는 상관없이 수년에 걸친 각고의 성경 연구 끝에 무천년설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조심스럽게 도달했다.14 (509.5)
 부분적으로는 미드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영국에서는 1600년 대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쓴 많은 논자들은 재림이 미래의 천년기가 시작할 즈음에 발생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509.6)
 영국에서 전천년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이와함께 년/일 원칙에 대한 종교 개혁적 확신과, 로마 교회의 역사를 통해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확신도 계속되었다.15 뿐만 아니라 1600년 대에 영국은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봉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 밖에도 영국은 네째 계명의 도덕적 구속력에 대한 뚜렷한 확신을 경험했다.16 이미 1570년 대에는 많는 사람들이, “영국은 안식일 준수의 수준을 높힐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안식일 준수는 천년기의 새예루살렘을 실현하는데 필수적인 요건이라는 신념은,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다.17 (509.7)
 후천년설(後千年說: Postmillennialism). 그러나 전천년설이 부흥한지 한 세기 남짓하여 후천년설이 대유행을 이루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무천년설의 대표적인 주창자라고 한다면 후천년설의 대표적인 주창자는 다니엘 휘트비(Daniel Whitby:1638~1726)이다.18 영국 성공회의 성직자였던 휘트비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미 앞서 다른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논의되던 주장들을 하나로 묶어 조직화하고 널리 보급시켰다. (509.8)
 후천년설(後千年說:Postmillennialism)의 후(post)는, 글자 그대로 “다음에” 또는 “후에”라는 뜻이다. 휘트비는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재림이 천년기 이후에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휘트비의 생각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서로 같았다. 그는 또 천년기 끝의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리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도 이용하였다. (509.9)
 이것은 종교 개혁의 입장과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것이다. (510.1)
 그러나 휘트비는 또 이번에는 전천년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하여 천년기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미래의 사건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반대하던 가르침이다. 휘트비는 첫째 부활이 유대인들의 개종으로 성취된다고 주장했다. 유대인들의 개종은 그들에게 있어서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개종 후에 이방인들의 개종을 위해 지원할 것이며 이로써 그들은 그리스도가 인간들을 다스리는 천년기 통치의 길을 여는 한 힘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510.2)
 영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휘트비의 주장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천성적으로 세계가 더 좋은 세상으로 바뀐다는 사상을 좋아했다. 그들은 점차 유대인들과 그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개종에 관심을 증대시키기 시작했다. (510.3)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영국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대조적으로 1700년 대에는 전천년주 의적 경향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과 더불어 새 미국의 열정이 고조되면서 하나님이 미국을 온 세계의 새 시대를 여는 역군으로 사용하려 하신다는 확신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1800년을 전후하여 미국은 전천년주의에서 후천년주의를 전향하게 되었다. (510.4)
 그 때에 1,260일이 프랑스 대혁명으로 끝남으로써 년/일 원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증대되었다. 년/일 원칙이 다시 연구되기 시작하자 차례로 영국과 미국, 그리고 그 밖의 몇 나라에서 일부 후천년주의자들과 다수의 전천년주의자들은 천년기가 2,300년/일의 끝에 즉, 1,800년 대의 중반에 시작되리라는 희망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510.5)
 그리스도가 1,800년 대 중반에 오시리라는 희망이 널리 전파되면서 대 재림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미국에서 후천년주의의 거센 물결에 부딪치면서도 용감히 전천년설을 주창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침례교회 평신도였던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와 수많은 그의 동료들이었다. 영국에서 1820년 대에 활약한 주요 전천년주의자로서는 부유한 은행가이며 또 국회 의원이었던 헨리 드루몬드(Henry Drummond)와 윌리엄 커닝햄(William Cunninghame), 조지 페이버(George Faber)가 있었고 잠깐 동안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도 활약했다. (510.6)
 그러나 앞으로 계속 나아가기 전에, 무천년설, 전천년설, 후천년설 모두가 오늘날 공존하고 있으며 비록 천년기란 낱말이 들어가 있으나 실제로는 그 뜻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자. 지금이 바로 천년기라고 믿는 무천년주의자들은, 천년기의 생활 양식은 바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그런 생활 양식이라고 말한다. 후천년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천년기의 생활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생활과 유사할 것이지만 경제적 번영과 지속적인 세계 평화에 있어서는 지금보다 상당히 진전된 생활일 것이라고 한다. 단지 전천년주의자들만이 그리스도가 눈에 보이도록 재림하심으로써 천년기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진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510.7)
 재림 신앙과 전천년설. 조금 전에 취급하던 문제를 다시 돌아가 보자. 앞에서 말한 바와같이 후천년주의자들이 영국과 미국의 개신교도들 사이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1820~1840년 대), 대 재림 운동이 발생하였다. 즉, 이 때(특히 1830년 대와 1840년 대)에 윌리엄 밀러와 그의 동료들은 미국의 가장 뛰어난 전천년주의의 주창자로 등장하였다. (510.8)
 거의 같은 시대(1830년 대와 1840년 대)에 영국의 제도(諸島)에서는 존 넬손 다아비(John Nelson Darby:1800~1882)가 전천년주의의 가장 탁월한 옹호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510.9)
 다아비는 당시 성공회의 젊은 목사로서 아일랜드에서 목회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더블린(Dublin)에서 개최된 파워코트 예언 대회(Powercourt Prophetic Conferences)에 참석했다. 이 대회는 앞서 헨리 드루몬드가 남부 잉글랜드에서 개최했던 앨버리 파크 예언 대회(Albury Park Prophetic Conferences)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후에 다아비는 잉글랜드의 남쪽 해안 지대인 플리머드(Plymouth)에 잠시 정착했다. (511.1)
 다아비는 전천년주의자로 일관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과 다니엘 휘트비의 주장 처럼 그 나름의 독특한 천년설을 주장했다. (511.2)
 우리는 이미, 347페이지에서 마누엘 데 라쿤자(Manuel de Lacunza)가 예수회 회원(Jesuit) 이었다고 언급했다. 또 칠레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라쿤자의 저술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관심을 새로이 고조시키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것도 언급했다. 라쿤자는 예수회 회원으로서 그의 예수회 선임자인 프란시스코 리베라(Francisco Ribera)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예언 개념을 갖고 있었다. 리베라는 이른바 “미래주의”(Futurism)란 학설을 다시 부흥시킨 사람이다. 리베라와 그의 뛰어난 제자 카르디날 로베르토 벨라르미네(Cardinal Roberto Bellarmine)는, 다니엘의 “작은 뿔”과 데살로니가후서의 “가증한 물건”과 요한계시록의 “짐승”이 로마 교회에 있는 가장 사악한 사람들에 대한 상징이라는 종교 개혁의 교리를 의식적으로 반대했다. 대신에 리베라와 벨라르미네는 주장하기를, 이 상징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인간 적그리스도에 의해 미래의 3년 반 기간에 실현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미래주의의 상표는 “특별히 개신교의 역사 이해를 반격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회 학자들에 의해 고안된 것”이라고 당시 영국의 한 저술가는 말했다. 19 (511.3)
 에드워드 어빙(Edward Irving)은 라쿤자의 저서 「영광과 위엄 중에 강림하시는 메시아」(The Coming of Missiah in Glory and Majesty)를 스페인 어에서 영어로 번역했다. 이 과정에서 에드워드는 부지중에 재림의 소망과 함께 리베라와 벨라르미네의 반(反)개신교적 예언 해석을 전파하였다. (511.4)
 다아비는 라쿤자를 통해 리베라의 “미래주의”를 채택했다. 다아비는 휘트비의 후천년 설과 의견을 같이하여, 유대인들의 개종과 더불어 천년기가 시작되며 유대인들의 협조로 일시에 수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다아비의 새로운 주장의 창시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어쨌든 다아비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 단계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가르쳤다. 첫째는 환난 전(前)에 교회가 “비밀히 휴거(携擧)”하는 단계이고, 둘째는 첫째 단계로부터 7년 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눈에 보이도록 재림하셔서 개종한 유대인들과 수많은 이방인 개종자들을 구출하신다는 것이다. (511.5)
 다아비는 끊임없이 여러 나라로 여행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파하였다. 그는 수차례에 걸쳐 미국을 방문했다. 1882년, 그가 사망할 때에는 미국에서만도 그의 학설을 전파하는 일백 개에 가까운 소규모 연구 집단들이 산재해 있었고 다른 나라들에도 많은 추종 집단들이 있었다. (511.6)